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77화 (77/156)

진심은 보이는 법 (2)

* * *

“드세요.”

사모님은 과일을 내왔다.

사과, 포도, 참외 등…… 한가득이었다.

“드시라고 사 온 건데, 이렇게 많이 내주시면…….”

“괜찮아요. 우리도 같이 먹을 건데요~.”

사모님은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제가 강 대리님을 드디어 뵙는군요~. 호호. 이이가 얼마나 얘기를 많이 하던지……. 그래서인가? 처음 뵙는데도 낯설지가 않은데요?”

“하하. 그렇습니까? 혹시 흉은 안 보시던가요?”

“호호.”

내 말에 사모님은 웃었다.

“호호. 아니요~. 회사 일 자체를 집에서 얘기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강 대리님만 유독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바로 기억하는 거죠.”

“…….”

“강 대리님이 그렇게 재주가 좋으시다고, 옆에서 보고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라며……. 어찌나 신나 하던지.”

“하하.”

“갈수록 얼굴도 잘생겨진다고……. 호호. 여러모로 참 신기한 분이라는 말을 많이 했었어요.”

변 사장은 사모님께 핀잔을 주었다.

“에이, 참. 뭘 그런 얘기를 해.”

사모님은 말이 많았다.

나와 관련된 얘기를 시작으로, 별의별 얘기를 다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얼마나 구두쇠인지 몇 년간 옷 한 벌 사준 적이 없다니까요?”

“…….”

“월급 수준이야 알지만, 회사에서는 성과급 같은 건 안 주나 봐요?”

“네?”

“회사가 어려운데 그런 게 어딨냐며 말도 말라는데, 정말 그래요?”

헛……. 감췄나?

제로백 컴퍼니를 시작하고, 매월 성과급을 1,000만 원은 넘게 받고 있을 텐데?

월급을 세 번은 받았다.

근데, 사모님이 성과급을 모르고 있다고?

난 변 사장을 바라보았고, 그는 눈빛으로 말했다.

‘모른 척해 줘. 제발.’

사모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면서도, 눈빛이 쎄했다. 하이에나 같았다.

“…….”

이걸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사실대로 말하면 변 사장이 그동안 숨겨온 게 되니까.

아마 계획이 있겠지.

“여보, 왜 자꾸 눈썹을 찡긋거려? 강 대리님 그만 좀 쳐다봐.”

사모님은 변 사장이 눈빛을 쏘는 걸 눈치챘다.

“아~, 사과 맛있네요. 하하.”

화제를 전환해보려 했는데.

“강 대리님, 묻는 말에 답해주세요.”

사모님은 넘어갈 생각이 아니었다.

어느새 두 딸도 나와 있었다.

엄마 질문에 대한 대답을 딸들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이 긴장감 뭐지.’

“저…… 저는.”

“…….”

“모르는 일입니다.”

내 대답에 사모님은 황당한 듯 바라보다가.

“뭔…… 대답을…… 이따위로.”

“…….”

거짓말을 하고 싶진 않고,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묵비권을 행사할 수밖에.

“모르긴 뭘 몰라요. 이거 아무래도…….”

“흠! 강 대리!”

그때 변 사장이 벌떡 일어났다.

“우리 담배 피우러 가자. 집 안은 금연이라서.”

“아, 네.”

* * *

빌라 주변 공터.

“푸하하.”

변 사장은 웃으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대답 참……. 무슨 수사 당해? 아니, 그냥 성과급 안 받는다고 뻥 치면 돼지.”

“하하.”

“하여간, 강 대리 참~ 쓸데없이 정직해.”

“그러게 말입니다. 쉽게 잘 안 바뀌네요.”

이 말에 변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바꿀 필요 있나? 그게 강 대리 캐릭터고 매력인걸.”

변 사장은 날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왜 숨기시는 거예요? 성과급 많이 받으셨잖아요?”

“그게…… 사람이 형편이 갑자기 좋아지면 해이해지거든?”

“…….”

“근데 우리 첫째 딸이 지금 고3이란 말이야. 내년에 대학을 들어갈 텐데……. 돈을 좀 모아놔야 해.”

난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애 엄마가 돈을 흥청망청 쓰겠냐만은……. 그건 모르는 거니까. 그냥 흔들리지 말라고 얘기를 안 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오해하시잖아요.”

난 가만히 변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가족 구성원 전체를 위해 하는 행동이지만.

내막을 모르면 오해하게 되고, 의심하게 된다.

제로백 컴퍼니 직원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딸 대학 갈 때쯤에는 다 풀릴 오해니까.”

“…….”

“리더가 어떻게 박수받을 일만 하겠나?”

변 사장은 내가 하는 말이 가족을 향한 말만이 아닌 걸 눈치챈 듯싶었다.

“이해해 주면 고맙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 오해는 풀면 되는 것이고.”

그는 씁쓸히 웃으며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강 대리, 오해 푼 거지?”

“…….”

“알고 계셨습니까?”

“자네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 내가 그런 눈치는 기가 막히거든.”

오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약간 의구심을 가졌던 건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 굳이 여러 말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어.”

“…….”

“내가 자네라도 오해할 만했을 거 같아.”

‘이용’과 ‘의지’ 사이.

그는 날 이용한 게 아니라, 의지한 거였다.

그렇게 알고 있었고, 굳게 믿었었지만.

주변에서 이구동성으로 같은 얘기를 해대니,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쨌든 늦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왔고, 그로 인해 변 사장과의 사이는 더 굳건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뭘 어떻게 해. 다시 젖은 낙엽 모드로 돌입해야지. 아무리 불어도 떨어지지 않도록 말이야.”

“…….”

“난 아직 회사 다녀야 해. 별다른 재주도 없고…….”

“창업해볼 생각은 없으시고요? 사장님이라면 충분히 잘하실 것 같은데.”

변 사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일단 가족들이 절대 반대할 거고,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럴 의지도 에너지도 없어.”

그는 쓸쓸히 날 바라봤다.

“단 3개월이었지만, 즐거웠어. 뛰는 가슴으로 일해본 게 얼마 만인지……. 다 자네 덕분이라고 생각해.”

“…….”

이번 일을 통해 변 사장과 사이가 굳건해진 것도 있지만.

그 말고 또 다른 게 있다.

“혹시…… 이직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뭐어? 내 나이가 몇인지 알아? 하하. 오십이 넘었어~. 이 늙은 차장을 누가 받아주겠나?”

“제가요.”

.

.

.

.

“뭐어?!”

“제가 받아드릴게요.”

“…….”

광활한 광야로 기꺼이 나가보려 한다.

순탄하고 잘 나가던 제로백 컴퍼니가 단 한 사람의 영향으로 혼란에 빠지는 걸 보며 다짐했다.

나와 내 조직의 생사여탈권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자네…… 설마.”

변 사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날 바라봤다.

“네, 제 사업을 일으키려 합니다.”

“…….”

“변 사장님이 꼭 필요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가 좀 뭐하지만.”

난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 밑으로 와주십시오. 하하.”

“와~, 자네.”

변 사장은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

“정말 나로 괜찮겠나? 이 단물 다 빠진 늙은 회사원을…….”

“아니요.”

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제게는 핵심 인재입니다. 꼭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책임지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앞으로는 제가 다 책임질 테니까. 저와 함께 일해 주십시오.”

진심이었다. 난 변 사장만 함께 해준다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흑……. 아, 자꾸 날 울리네.”

변 사장은 눈시울을 훔쳤다.

“오해하지 마. 갱년기 와서 그래. 요즘 눈물이 많아졌어.”

한참 눈가를 훔치던 변 사장은 고개를 들고 환하게 웃었다.

눈가의 물기 어린 주름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기꺼이 가지. 불러줘서 고맙네.”

그는 날 꼭 안으며 말했다.

“강 사장님, 앞으로 잘 모실게.”

* * *

내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제 변 사장과 여러 얘기를 나누었고, 어느 정도 갈피를 잡았다.

‘자네가 사장이니, 자네의 뜻에 따를게. 하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알리고 기회는 줘야 할 것 같아. 그리고 이 사람들…… 필요하잖아.’

첫 번째 우선순위는 제로백 컴퍼니의 외식 사업을 이어서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경험 있는 현재 직원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업 경험이 없는 31살 어린 사장에게 운명을 맡겨야 하는데, 직원들이 내 제안을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만약 동료들이 진일상사에 남겠다고 한다면, 외식 사업은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다들 모였죠?”

점심 영업을 마치고, 우리는 양재역 부근의 스터디 카페에서 만났다.

최경리, 앤더슨 오, 김지안.

세 사람은 잠자코 날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 말 많은 최경리도 오늘따라 조용했고, 어제 내게 한 소리 들었던 앤더슨과 김지안은 의기소침해 보였다.

“표정이 너무 굳어 있네.”

그래도 모두 대꾸가 없고, 조용했다.

“내가 세 사람을 이렇게 따로 보자고 한 이유는…….”

휴우―.

막상 얘기하려니 긴장되네.

만약 함께하지 않는다고 해도, 서운하게 생각하진 말아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 진일상사에서 나가려고 해.”

“…….”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 헐…….

― Oh, my god.

― 입사한 지 겨우 한 달 지났는데…….

모두 한마디씩 하며 어이없어했다.

원래 사장은 다른 팀의 팀원으로 발령 나고, 사장 예정자는 퇴사하겠다는 상황.

이 사람들 입장에서는 어이없을 만했다.

“강 대리님, 어디 가시려고요?”

최경리는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였다.

“응? 아, 다른 회사 가는 건 아니고.”

“칫. 재주가 많으니, 아무 걱정 없다 이거죠?”

“아, 그게…….”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혼자만 쏙 빠져요? 변 사장님도 안 계신데?”

최경리는 돌아와 있었다. 흥분한 그녀는 내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얘기하고 있잖아.”

“됐어요! 미안하다는 소리는 뭐 하려 해요? 어차피 갈 거면서.”

“제발 좀…….”

“나쁜 사람들……. 내가 두 사람을 믿고 팀 이동까지 해서 왔는데…….”

최경리는 금세 눈시울이 붉어졌다.

“홍지아 씨가 똑똑했어. 나도 그때 갔어야 했는데.”

급기야 최경리는 가방을 챙겨 들었다.

“최경리 씨, 왜 이렇게 급해. 나 겨우 한마디 했어.”

“됐고요. 강태평 씨.”

뭐어? 이제 아주 막 나가네?

내가 황당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지만, 최경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따박따박 말했다.

“왜요? 이렇게 부르면 안 됩니까? 어차피 우리 회사 사람도 아닌데?”

“나 아직 사직서 안 냈어…….”

순간 고민됐다.

최경리한테는 제안하지 말까. 갑자기 피곤해진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죄송하지만, 저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최경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각. 또각.

진짜로 밖을 향해 걸어갔고.

난 다급한 마음에 소리쳤다.

“같이 가자!”

.

.

.

.

최경리가 멈췄고.

앤더슨과 김지안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같이 가자고! 나 사업할 거야.”

젠장, 좀 차근히 말하고 싶었는데.

“세 사람에게 제안하려고, 만나자고 한 거야.”

“…….”

“알다시피 난 회사를 운영해 본 경험도 없고, 불안 요소도 많아.”

최경리는 뒤 돌은 모습 그대로 멈춰서 있었다.

“그리고 당분간은 지금처럼 성과급 못 줄 거야. 아니, 성과급 자체가 없을지도 몰라.”

“…….”

“생고생만 하다가 회사가 사라질지도 모르고, 그때 가서 새로운 일자리 찾으려면 더 어려울 수도 있어.”

설득해야 하는데, 왜 자꾸 부정적인 얘기만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지 모르겠다.

이들이 필요하지만, 걱정되는 마음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회사를 운영하는 동안은 월급 절대 밀리지 않을게.”

“…….”

“그리고 내가 정말 잘할 테니까, 변 사장님처럼 잘할 테니까.”

휴우―.

조그만 룸 안에.

내 목소리가 가득 울렸다.

“나랑 같이 가자.”

뿌린 대로 거둔다

* * *

또각. 또각.

최경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사업을 하신다고요?”

“맞아.”

“어떤 사업을 하시려고요?”

“…….”

난 이 말에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런 사업을 할 테니, 들어올 테면 들어오라는 게 순서가 맞긴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해서 받는 형태는 원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하게 될 거야. 지금처럼.”

“돈 되는 건 다 하는 거요? 호호.”

“뭐, 그렇지.”

앤더슨과 김지안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설수민 사장님은요?”

김지안이 물었다.

“강 대리님이 나가고 나면, 제로백 컴퍼니 존재 자체가 흔들릴 텐데……. 그럼 설 사장님 사업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

역시, 김지안은 설수민을 가장 먼저 염려했다.

흠…….

아무래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 설득한 뒤에, 설 사장님을 만날 생각이야.”

“그 뜻은…….”

“제로백 컴퍼니는 우리 거니까. 난 그렇게 생각해.”

“…….”

“나 이 외식 사업을 유지할 생각이야. 물론 세 사람이 함께해 준다면.”

그제야 김지안이 고개를 끄덕였고.

잠자코 있던 앤더슨의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전 함께하겠습니다.”

“…….”

“괜찮을 것 같네요, 강 대리님 계획.”

“계획? 저 아직 말한 게 없는데.”

이 말에 앤더슨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글쎄요. 전 짐작이 되는데요.”

역시, 비즈니스를 해본 사람답게 눈치가 빠른 건가?

앞선 몇 마디를 듣고, 짧은 시간에 계산해 본 것 같다.

근데, 앤더슨처럼 똑똑한 사람이 계산해 보고 한 대답이라면…… 오히려 고맙다. 시작하려는 일에 더 확신이 든다.

“고마워요, 앤더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김지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함께할게요.”

“…….”

“어차피 이 일을 시작한 것도 대리님 덕분이었고, 다른 곳에서 제 이력을 숨기며 일하고 싶지도 않고요.”

난 그녀의 승낙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대리님과 함께하고 싶어요. 다만, 우리 설 사장님 잘 부탁드릴게요. 사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셨고, 지금 잘 되고 있는데…….”

“그래, 걱정하지 마. 나 또한 설 사장님 도움이 필요하기도 해. 열심히 할 거야.”

앤더슨 오, 김지안.

두 사람은 의사 표시를 했다.

아직 최경리만 가만히 있었다.

아무래도…… 고지식한 친구라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려나.

“……. 최경리?”

너무 조용해서 난 살며시 불러봤다.

“…….”

그래도 대꾸가 없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자긴 어떻게 할 거야?”

“지금 고민 중이잖아요.”

“…….”

“어떻게 해야…… 민 사장 이 인간 뒤통수를 제대로 치고 나올 수 있을지.”

음?!

“순순히 나가버리는 건 아니죠. 변 사장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그 말은…… 자기도 함께한다는 거야?”

최경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당연하죠. 그럼 왜 다시 와서 앉았겠어요.”

난 이들 중 최경리가 가장 필요했다.

그녀가 함께해준다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자, 최경리는 눈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뭐예요? 절 그렇게 의리 없는 사람으로 본 건가요?”

“아니야~. 함께해 줄 줄 알았어.”

“치. 맞는 거 같은데.”

이로써 한 단계는 끝났다.

“아, 맞다. 내가 중요한 얘기 하나 안 했네.”

세 사람은 모두 날 바라봤다.

“변 사장님도 함께 하실 거야.”

“진짜요?! 어머. 대박……. 그분이 회사를 나오신다고요?”

변 사장은 잘 아는 최경리는 기겁을 하며 놀라워했다.

“하하. 그치? 나도 놀랐어.”

“어머……. 그 나이에 어쩌시려고…… 이런 모험을.”

최경리는 말은 이러면서도, 반가운 미소를 한껏 짓고 있었다.

앤더슨과 김지안도 변 사장 합류 소식에 싱글벙글 웃었다.

“자, 그럼 이제 모두 가까이 앉아봐.”

혹시 밖에서 누가 들을까 봐, 숨죽이고 말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냐면 말이야.”

* * *

그날 밤 11시.

디너 오브 제로백이 끝날 시간.

난 사랑산성을 다시 찾았다.

내일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상대방이 다른 궁리를 할 수 없도록, 속전속결로 해야 한다.

“어머.”

복도에서 마주친 설수민.

그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진짜 강 대리님이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저희 이제 룸 영업 안 하는데요~.”

“하하.”

단란주점은 이 시간이 핫하다.

하지만 사랑산성은 이제 단란주점이 아니다. 설수민의 농담을 난 받아쳤다.

“왕년의 스킬 시전해 보이실 생각 없으십니까아~. 하하.”

“호호. 강 대리님은 농담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하나도 재미없고 거북해요~.”

쓰읍…….

설수민은 웃으며 말했지만, 상당히 민망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고요. 어쩐 일이세요?”

“아, 네. 중요한 비즈니스 얘기를 할 게 있어서요.”

“그래요. 오실 줄 알았어요. 이런 야심한 시각에 오실 줄은 몰랐지만.”

“…….”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들어가실까요?”

설수민은 룸을 가리키며 말했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 아닌가.

룸 안.

설수민과 마주 보고 앉았다.

고요한 사랑산성.

직원들은 다들 퇴근한 시각이고, 건물 전체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콩닥. 콩닥.

중요한 얘기 하러 왔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린다.

설수민의 향기와 심장 소리.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마 옆에 와서 앉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죠?”

마치 도우미처럼 하는 말에, 난 웃으며 말했다.

“에이~, 장난 그만치세요. 설 사장님도 은근 짓궂으시네.”

“호호.”

하지만 덕분에 어색한 분위기는 좀 사라졌다.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영업 끝나는 시간에 맞춰 온다는 게…….”

“뭐, 많이 급한 일이신가 봐요?”

“네. 시각을 다투는 일이라.”

설수민의 눈빛이 빛났다.

“들어보죠.”

난 바로 말해버렸다.

“민 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어머…….”

설수민과 사랑산성 직원들은 민 사장이 제안을 내가 받아들이긴 원한다고 했었다.

제로백 컴퍼니 사장이 되는 것.

“다만, 민 사장 아래로 가는 건 아니고요.”

“…….”

“독립하려고 합니다.”

“어머…….”

“독립된 사장이요.”

이 말에 설수민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심하게 동공이 흔들렸다.

빠르게 샘을 해보는 것 같았다.

“이렇게 나오실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는데.”

“하하. 저도 그래요. 제가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설수민은 입술을 깨물었다.

검지로 탁자를 두드리다가…….

“그럼 저희는요?”

“…….”

“강 대리님이 제로백 컴퍼니에서 나오면 저희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다른 사업 하시면서 레시피만 알려주진 않으실 거 아니에요?”

당연히 그 부분이 가장 걱정될 것이다. 사업 변경하여 개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전 지금의 외식업을 계속 유지하려 합니다.”

“네? 방금 진일상사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어차피 진일상사가 이 외식업에 관여하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다.”

“…….”

“제로백 컴퍼니라는 사명을 버리고, 메뉴만 바꾸면 됩니다. 현재 직원들도 모두 함께하기로 했어요. 변 사장님도요.”

“아…….”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환히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근데 변 사장님도라고요?”

“네.”

“흠…….”

설수민은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난 그녀를 찾아온 본론을 꺼내었다.

“근데, 설 사장님이 협조해 주셔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 얘기를 하려고 지금 찾아온 거고요.”

“…….”

“제로백 컴퍼니와의 임대 계약은 해지하시고, 저희와 임대 계약해 주십시오.”

예상했었는지, 설수민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게 안 되면, 저희는 외식업 못 합니다. 상황도 여건도 안 됩니다.”

이건 사실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설수민의 협조가 결정적이다.

“저희가 외식업을 못 한다면, 설 사장님도 영향을 받으시겠죠. 요리 레시피를 더 이상 알려드릴 수가 없을 테니까요.”

난 넌지시 한마디 던졌다.

무조건적인 협조가 아니라, 상생하기 위한 제안이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호호.”

설수민은 큰 소리로 웃었다.

“이 상황에서 절 협박하시네요?”

“협박이라기보다는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상황 설명을 드린 거죠.”

설수민은 살며시 웃었다.

“강 대리님, 사업 잘하시겠어요.”

“감사합니다.”

“흠…….”

설수민은 잠시 말이 없었다.

고민하는 듯 보였고, 난 잠자코 기다렸다.

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매우 초조했다.

“지금 결정해야 하나요?”

“네, 그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럴 때 시간을 많이 주면 안 된다.

막 금손이 되어, 성장 사진 영업 기술 배우러 ‘아이좋아 스튜디오’ 견학 갔을 때 배운 철학이다.

“좋아요.”

설수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피할 수 없는 협의 같은데……. 해야죠. 다만, 조건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조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했었다.

“임대료 올려주세요.”

“얼마나요?”

“음……, 100 올려주세요.”

현재 임대료가 월 200만 원이다.

여기 100을 올리는 건…… 너무한 거 같은데.

“너무 센 거 아닙니까? 임대료 갑자기 많이 올리시면, 정부 관심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처럼 조그만 곳 신경이나 쓰겠어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어떻게 하실래요?”

받아들일 거냐, 말 것이냐인데.

“안 할랍니다.”

“알았어요. 50만 원만 올려주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설수민은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은근히 고단수시라니까.”

“그럼 얘기 다 끝난 거죠?”

얘기가 잘 끝난 것 같다. 안심되었다.

“하나 더 있어요.”

“…….”

“반드시 사장은 강 대리님이어야 해요.”

“…….”

“변성준 씨가 사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변성준 씨?

“네, 제가 사장이 될 생각입니다. 그렇게 하기로 얘기도 했고요.”

“알겠어요.”

설수민은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드려요, 강 사장님.”

* * *

진일상사 사장실.

“루루~, 우후후~.”

민경원 사장은 콧노래를 부르며 출근했다.

[부재중 전화 7통. 강태평]

“하하. 아주 그냥 애가 타나 보구만.’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지, 부재중 통화를 보고 낄낄대며 웃었다.

“변성준이는 오늘 출근했나?”

유리 틈새로 살짝 영업 2팀을 살폈다. 변성준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늘도 안 나왔나? 하긴…… 충격이 크겠지.”

콧노래를 부르며 재킷을 걸었고.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안 나와도 땡큐다.”

민경원 사장은 자리에 앉은 뒤.

책상 한쪽에 놓인 봉투를 발견했다.

‘사직서’

“응? 변성준인가?”

민 사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사직서 봉투를 열었다.

[본인 강태평은 사직하고자 하오니…….]

“뭐어?!”

봉투를 든 민 사장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런 미친!”

민 사장은 사직서를 다 읽어보지도 않고, 구겨서 던져 버렸다.

“누가! 누구 맘대로 사직을 해?!”

띠링!

그때, 메시지 알림음이 울렸다.

[제로백 컴퍼니, 사랑산성 임대계약 해지 통보…….]

설수민에게 온 메시지였다.

“마…… 말도 안 돼.”

민 사장은 온몸을 떨며, 사무실을 이리저리 서성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두르르.

강태평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이런! 씨바! 왜 전화 안 받아!”

두르르.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부재중 메시지만 반복될 뿐이었다.

“전화 받아! 새끼야!”

위이잉―.

진동음에 강태평은 핸드폰을 집어 들어 확인했다.

[민경원 사장]

강태평은 발신자 표시를 보고는 다시 덮어버렸다.

“그냥 수신제한으로 걸어버릴까.”

뚝.

부재중 전화 40통.

익숙하지만 새로운

* * *

“설 사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아니요. 뭘요.”

진일상사에 퇴사 통보를 마친 날, 설수민을 사랑산성에서 마주쳤다.

전 직원이 다함께 제로백 컴퍼니 마지막을 정리 중이었다.

“임대 계약 기간을 3개월로 설정해 놨기에 다행이죠. 운 좋게 타이밍이 딱 맞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공유 주방 특성상 그랬던 거긴 한데.”

공유 주방은 계약 기간을 자유롭게 설정이 가능하다.

설비, 장소까지 다 있는 상태에서 장소만 빌려 쓰는 것이며, 임대인과 임차인의 사정상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는 특성 때문이다.

당시에 3개월 단위 갱신으로 계약 기간을 설정했었다.

“그래도 씁쓸하기도 합니다. 지난 3개월이 참 꿈같네요.”

“호호. 강 대리님. 아, 아니지. 강 사장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하죠.”

복도 벽에 붙어 있는 ‘제로백’ 사명을 보았다.

어차피 ‘디너’도 ‘제로백’이라는 명칭으로 영업을 하기 때문에, 여러 곳에서 사명이 보였다.

그래서일까. 간단하게 생각했는데, 정리하는 데 은근히 손이 많이 갔다.

“강 사장님~, 언제까지 놀고 있을 거야?”

간판을 뜯어내고 있는 변성준의 목소리였다.

그는 나와 같은 날에 사직서를 제출하였으며, 그 날 바로 사랑산성으로 출근하였다.

“아~, 네, 갑니다~.”

난 목장갑을 끼면서 말했다.

“설 사장님, 이따가 오후에 저희랑 미팅 좀 하시죠.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아요.”

제로백 컴퍼니가 사라졌기 때문에, 디너 오브 제로백도 오늘부터 휴업에 들어갔다.

새로운 사업자를 만들고, 설수민 사장과의 신규 계약 체결. 신메뉴도 개발해야 한다.

진일상사와 관련된 어떤 것도 남아서는 안 된다. 민경원 사장이 어떤 태클을 걸지 모른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철저해야 한다.

“휴업을 얼마나 해야 할까요?”

“주말 포함해서 일주일 정도 보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오픈해야죠.”

“일주일이요…….”

설수민 사장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디너 오브 제로백은 딸린 식구도 많기 때문에, 일주일 휴업의 영향은 적지 않을 것이다.

“최대한 빨리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자, 설수민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긴요. 덕분에 벌어놓은 돈 꽤 있어요. 일주일 정도야, 뭐……. 호호. 그저…… 잘 계획 세우셔서 앞으로 사업 잘되게만 해주세요.”

“네, 그래야죠.”

반드시 잘되어야 한다. 적어도 외식 사업만큼은 무조건 잘되어야 한다.

동료들과 설수민 사장 때문이기도 하지만, 회사를 나온 자존심을 생각해서라도.

회사 바뀌어서 영업 안 된다는 평은 절대로 듣고 싶지 않다.

“강 사장님~!”

이제 최경리의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진짜 가봐야겠네요. 이따 미팅 때 뵙겠습니다.”

“호호. 네에~.”

* * *

아침부터 시작한 정리는 오후 3시경 끝마쳤다.

제로백 컴퍼니의 흔적만 없애는 되는 것이기에 오래 걸리진 않았다.

진작에 끝났는데, 혹시 빼먹은 게 없는지 꼼꼼히 점검하느라 시간이 좀 걸린 것이다.

“내가 봤을 때는 다 된 거 같은데.”

“…….”

내 말에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난 확인차 최경리에게 물었다.

“최경리 씨, 정리 다 된 거 확실하지?”

“네, 흔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봤을 때는요.”

“그 말인 즉슨…….”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아닐 수도 있겠죠.”

“…….”

그녀는 확신할 수 없는 말은 절대로 확정지어 말하지 않는다.

“그래, 좀 쉬었다가 1시간 뒤에 미팅할 거니까.”

“…….”

“4번 룸으로 모여.”

4번 룸은 사랑산성에서 가장 큰 룸이다.

“알겠습니다.”

오후 4시.

4번 룸으로 들어가니, 설수민 사장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헬로~, 사장님.”

앤더슨은 환하게 웃으며 설수민을 반겼다. 그리고는 바로 그녀의 옆에 자리에 앉았다.

“다들 오랜만에 뵙네요.”

설수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명씩 인사를 나눴다.

다만, 변성준을 대할 때만 약간 어색함이 느껴졌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설 사장님 보는 건 오랜만이겠네요.”

“오픈 날 뵌 이후 처음입니다~. 이런 기회에 실컷 봐야 하는데, 눈이 부셔서……. 으하하.”

앤더슨은 설수민을 참 좋아했다.

아니……. 남자치고 설수민을 안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바로 옆에서 앤더슨이 추근덕대도, 설수민은 개의치 않고 그저 웃었다.

이런 일은 다반사라는 듯.

“몇 가지 중요한 공지? 혹은 논의 드릴 사항이 있어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

“설수민 사장님은 특별 초대했고요. 하하. 우리가 논의할 사항이 다 설 사장님과 관련 있는 것들이라서요.”

“어머, 그래요? 내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호호.”

설수민은 웃으며 내 말을 받았고, 직원들은 빙그레 웃었다.

새로운 시작이라 불안함도 있지만, 설레임이 더 큰 듯 하다.

“저…… 우선 회사명 말인데요.”

“…….”

“다 아시겠지만, 제로백 컴퍼니라는 사명을 더 이상 쓸 수 없거든요.”

난 생각해 둔 이름이 있지만, 더 좋은 이름이 있을지 모르니 들어보고 싶었다.

“새로운 사명을 지어야 하는데, 좋은 의견 있으신 분 있나요?”

“…….”

예상은 했지만……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제로백 컴퍼니라는 사명도 변성준이 지어서 통보한 거였다.

“변 사장님, 혹시 좋은 의견 없으십니까? 제로백 컴퍼니도 사장님께서 지으신 이름이었는데.”

“글쎄……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그냥 자기가 지어. 그리고…….”

변성준은 정색하고 내게 말했다.

“나한테 사장이라고 하지 마. 이제 자기가 사장이고, 난 아무것도 아닌데, 왜 자꾸 사장이라고 하는 거야?”

그렇다고 갑자기 변성준 씨라고 하기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럼 변 선생님이라고 할까요?”

“장난해?”

100% 장난은 아니었는데.

“혹시 직급 정리된 건 없어?”

“아직이요.”

“흠……. 그럼 직급 정리될 때까지는 가급적이면 나 부르지 마. 서로 어색하니까.”

“…….”

“호칭을 생략하고 말하던가. 눈빛 혹은 어깨를 톡톡 건드려서 지칭할 수 있잖아. 굳이 부르지 않아도.”

“그런 방법이 있네요.”

그때 최경리가 한마디 했다.

“그런 얘기는 단둘이 있을 때 하시면 안 될까요?”

“흠!”

난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자자, 어쨌든……. 그럼 없는 거죠?”

그때, 앤더슨이 살며시 손들고 말했다.

“원투백 컴퍼니는 어떻습니까?”

짝퉁 같은 이름은 싫다.

다들 나와 생각이 비슷한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 그럼 없는 거로 알고…….”

앤더슨은 눈치껏 살며시 손을 내렸다.

“설 사장님?”

“응?! 네?”

내 부름이 갑작스러웠는지, 설수민은 깜짝 놀랐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네.”

“사랑산성이라는 이름…… 지금도 살아 있습니까?”

“네?”

설수민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고, 난 다시 설명했다.

“예전엔 사랑산성 단란주점이었잖아요. 네박사 지도에 검색하면 나왔었는데, 요즘엔 안 나오길래요.”

설수민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당연히 폐업 신고했죠. 지금은 ‘디너 오브 제로백’이죠.”

“아……. 지금도 종종 쓰시는 것 같길래.”

“호호. 편의상 쓰는 거죠~. 너무 익숙하니까. 그냥 이 건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하면서요. 엇? 강 대리님도 자주 쓰시는 것 같던데?”

“하하. 그렇네요.”

나도 이곳을 지칭할 때면 자연스럽게 ‘사랑산성’이라고 표현을 쓰게 된다.

“사명 얘기하다가 갑자기 웬 사랑 타령이야.”

최경리는 항상 다 들리게 중얼거린다.

“사랑산성…… 저희가 써도 될까요?”

.

.

.

.

.

“네?!”

설수민…… 그리고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은 황당해했다.

“가, 강 사장. 농담하는 거지?”

변성준도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물었고.

“나 그런 이름 가진 회사에서 일하는 거 부담스러운데…….”

최경리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전 이 이름이 참 마음에 들거든요.”

처음 이 장소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다.

“일단 희소성이요. 보편적인 단어로 이루어진 이름인데도, 전국에 ‘사랑산성’이라는 곳이 한 군데도 없어요.”

“진짜?”

변성준의 물음에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검색해 보세요. 진짜예요.”

최경리는 툴툴댔다.

“그건 너무 구려서가 아닐까. 좋은 건 사람들이 많이 하는 법인데.”

내 뜻은 확고했다.

최경리의 빈정거림에도 난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뜻도 좋죠. 사랑은 남녀 간의 사랑만을 뜻하는 게 아니죠. 인류애, 부모 자식, 동료 간 등등…….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도 있고……. 그런 사랑을 지키는 곳, 쌓아가는 곳.”

최경리가 한마디 했다.

“저 불교입니다. 종교적인 얘기는 불편합니다.”

“……. 어쨌든 전 이게 좋습니다.”

난 다시 한번 말했다.

다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설 사장님, 사랑산성…… 써도 되나요?”

“호호. 그거야 강 사장님 마음이죠. 폐업 신고까지 했는데. 근데…… 써주시면 전 고마울 것 같긴 해요.”

“…….”

“그러면 디너 오브 사랑산성이 되는 거잖아요. 호호. 제가 지었던 원래 이곳의 이름으로.”

설수민은 마음에 들어 했다.

“사랑산성……. 사랑산성…….”

변성준도 몇 번 되뇌어보더니.

“영어로는 러브 포트리스가 되는 건가? 자꾸 들으니 나쁘지 않네. 고객들에게 인지는 확실히 되겠어. 한번 들으면 안 잊어먹을 듯. 하하.”

잠자코 있던 김지안. 그녀는 설수민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는 다소곳해진다.

살며시 손을 들고는 말했다.

“저도 좋습니다.”

난 앤더슨을 돌아봤다.

“앤더슨은?”

“I like it~. love fortress.”

분위기가 호의적으로 변하고 있었고.

난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최경리를 보았다.

그녀의 입 모양은 분명 ‘씨바’였다.

“자, 그럼, 사랑산성, 사업 개시합니다.”

내 말에 최경리를 제외한 모두는 미소를 지었다.

“내일 오전에 바로 사업자등록 신청할 거고요. 관공서 업무는 변…….”

‘변 사장님’이라고 말하려다가 멈추고, 난 변성준을 바라보았다.

“저와 함께 가주시죠. 아무래도 경험이 있으시니까.”

“넵, 알겠습니다! 강 사장님.”

변성준은 웃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다음으로 급한 건 신메뉴 개발입니다. 우선 저희 때문에 설 사장님이 손해가 크시면 안 되니까. 빨리 영업 재개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내 말에 직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최경리, 앤더슨. 두 사람이 신메뉴 개발을 맡아줘. 메뉴만 정해서 알려주면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사장님, 저는요?”

김지안이 손을 들고 말했다.

“자기는 일단 대기. 지금은 선배들 일하는 거 잘 관찰하고 있어. 곧 중요한 일 하게 될 테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직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신메뉴 개발은 3일 안에 끝냅니다. 4일 뒤 우리는 워크숍을 갈 겁니다.”

“…….”

“한 가지 예고를 하자면…… 사랑산성은 외식업만 하지 않을 겁니다.”

이제 내 회사다.

내 손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자유롭게 움직여도 되는 것이다.

“다양한 일을 하게 될 거예요. 여러분의 역할이 중요하니까…… 다들 정신 바짝 차리세요.”

옆에서 변성준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일상사 사장실.

뚜뚜.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

“건방진……. 이젠 통화음도 없이 바로 넘어가네.”

민경원 사장은 핸드폰에 가득한 ‘강태평 발신’ 표시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덜컹.

김민석이 사장실로 들어왔다.

“뭐 좀 알아봤어?”

“네, 오늘 새로운 사명으로 사업자등록 냈다고 합니다.”

“하아……. 젠장.”

민경원 사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사명이 뭔데?”

“사랑산성이라고 합니다.”

“뭐어? 사랑?!”

민경원 사장은 책상 위에 놓인 서류철을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지랄들을 하고 있네!”

그는 이상하게 약 오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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