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척만 노린다 (2)
* * *
의미?!
이게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야.
MS 다니면서 의미를 찾아?
난 황당해서 앤더슨 오를 바라보고 있는데, 변 사장이 물었다.
“좀 풀어서 설명해 주시죠. 뭐 때문에 의미를 찾으신 건지.”
“An existential cirisis.”
앤더슨은 갑자기 영어로 말했다.
발음이 아주 그냥…….
그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한국말로 다시 말했다.
“한국어로 현타라고 하죠. 하하. 일하다가 현타가 온 겁니다.”
“…….”
앤더슨은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고는 말을 이어갔다.
“만족스러운 삶이었죠. 누구나 가고 싶어 하는 회사. 세계 최고의 회사 중 하나에 몸담고 있고. 그에 걸맞은 처우를 받고요. 삶은 여유롭고 모두 좋았습니다.”
“…….”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앤더슨은 검지를 뻗어서 허공에 뱅뱅 돌렸다.
“돌고 돈다. 항상 돌고 돈다.”
“…….”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처럼요.”
그는 말할 때, 표정과 몸짓도 사용했다.
덕분에 나와 변 사장은 그의 얘기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내일이 예상되고, 일주일 뒤가 예상되고, 1년 뒤가 예상되더군요. 내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을지.”
“…….”
“그리고 옆 사람을 보았는데?! 하하!”
앤더슨은 큰소리로 웃고는 말했다.
“그 사람의 미래도 예상되는 겁니다! 단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말이죠.”
“…….”
“무섭더군요. 인생 두 번 사는 거 아니잖아요. 이미 그려진 미래를 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
변 사장은 중얼거렸다.
“진짜 현타 제대로 왔네.”
“예스! 오브 콜스! 댓츠 롸잇! 그겁니다.”
앤더슨은 큰 소리로 변 사장을 향해 말했고.
갑작스러운 영어 세 방에 변 사장은 얼떨떨해졌다.
“현타가 오지게 온 겁니다. 어쩔 수 없죠. 이미 찾아온 걸 어쩔 수가 없죠.”
군대에서 한국어 공부를 많이 했나? 비속어도 꽤 아네?
“그래서 결정한 겁니다. 예상되지 않는 다른 나로 살아보기로.”
“그 시작이 군 입대였던 건가요?”
“맞습니다.”
변 사장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했다.
“왜 전역했어요? 군대는 지금까지와는 완전 다른 삶이었을 텐데? 그냥 말뚝 박지?”
앤더슨은 외국인 특유의 어깨 올리는 제스처를 취하며, 쿨하게 대답했다.
“오래 있을 곳은 아니더군요.”
변 사장은 내게 속삭였다.
“정상인인 것 같긴 하다.”
* * *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니, 변 사장도 앤더슨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 회사에 입사하신 이유가…….”
“네, 미래가 안 보여서 그렇습니다.”
“…….”
욕이야 칭찬이야.
보통 입사하려는 사람들은 안정적인 걸 추구하지 않나?
볼수록 희한한 사람이다.
“입사했는데, 회사가 사라지면 어쩌시려고요?”
“다른 일자리 찾으면 되죠.”
그는 또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전 자신 있습니다. 제가 선택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
“절대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자존감이 뿜어 나온다.
확실히 대단한 사람인 건 알겠다.
몇 마디 안 해봤지만, 꽤 멋진 사람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적어도 진일상사 통틀어서도 앤더슨과 비슷해 보이는 사람은 없다.
스펙이나 이력도 그렇지만.
삶을 대하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가 아주 보기 좋았다.
앤더슨은 갑자기 날 바라봤다.
“미스터,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네? 저요? 강태평이라고 합니다.”
“보니까, 당신은 나와 비슷한 부류인 것 같은데.”
“…….”
“선수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거든요.”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앤더슨 잠자코 날 바라보는데, 그 눈빛에서 느껴졌다.
‘난 네가 누군지 알아.’
“당신과 함께 일하면 재밌을 것 같군요.”
“…….”
잠자코 이 모습을 지켜보던 변 사장은 헛기침했다.
“흠! 혹시 강 대리가 무슨 일 하는지 알고 온 건 아니죠?”
변 사장은 잔뜩 경계한 채 물었고.
앤더슨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 리가 없죠. 두 분 오늘 처음 뵙는데.”
“그렇군요.”
앤더슨과의 면접이 길어지고 있었다. 어느덧 1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변 사장은 시계를 보고는 물었다.
“이만 마쳐야겠군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습니까.”
앤더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Hey, man~. What are you so worried about? Just pick one for now. Come on!”
갑작스러운 영어에 변 사장은 많이 당황했고, 얼굴이 새하얘졌다.
앤더슨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인사했다.
“하하. 그럼 좋은 소식 기대 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쾅!
문도 아주 시원하게 닫는다.
부서지는 줄 알았다.
“…….”
그가 나간 뒤 우리는 잠시 넋 놓고 앉아 있었고.
변 사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와……. 기 빨린다. 저 아저씨 장난 아니네.”
앤더슨이 나가고 나니, 기운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 근데 마지막에 영어로 뭐라고 한 거야? 강 대리 알아들었어?”
“네. 그 정도는.”
“흠! 나도 영어 못하는 건 아닌데, 워낙 빨리 말해서.”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장난치지 말고 어서 얘기해줘.”
난 앤더슨의 어깨를 으쓱하는 제스처를 흉내 내며 말했다.
“뭘 그렇게 걱정해요? 일단 한번 뽑아봐요~. 이렇게 말했어요.”
“아…….”
오늘 면접 3명을 보기로 했었고, 이제 한 명 끝났을 뿐이다.
이제 두 명 더 봐야 한다.
“일단…… 마저 면접 보자.”
“네.”
이후 두 명의 지원자를 만나는데.
별로 흥미가 가질 않았다.
면접 시간 동안 그들의 하는 말들이 귀에 잘 꽂히지 않았다.
첫 타자, 앤더슨이 너무 센 맛이어서 그런 걸까.
직무 적합도를 떠나서 관심이 잘 가질 않았다.
훤칠한 구릿빛 미남의 앤더슨만 떠올랐다.
객관성을 유지하려 했지만, 인상이 너무 깊어서 자꾸 비교하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
변 사장의 표정을 보니, 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인 듯 보였다.
아니, 더 노골적이었다.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
“감사합니다. 면접 마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마지막 지원자가 회의실을 나갔고, 이로써 면접은 끝났다.
“휴우~. 강 대리, 고생했어.”
“사장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서류를 정리하다가 변 사장이 물었다.
“어떻게…… 오늘 저녁에 시간 되나?”
“네?”
“술 한잔하면서 얘기 좀 나누는 게 어때?”
“…….”
“한 달 내내 식당일에만 집중해서 그런가…… 회의실 안에서 오래 있었더니 갑갑해서 말이야. 오늘 결정 해버리자고.”
“술 마시면서 회의하는 건 좀…….”
변 사장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맥주만 간단히 해~. 어차피 생각한 사람 있을 거 아니야. 안 그래?”
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가시죠.”
* * *
“캬~, 시원하다!”
변 사장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오후 5시.
아직 밖은 대낮이었다.
“캬~.”
나도 쭉 들이켰다.
사람을 평가하고, 선발한다는 거.
이번에 처음 해봤는데, 이렇게 피곤한 일인지 몰랐다.
맥주가 그냥 쭉쭉 넘어갔다.
“강 대리는 어느 지원자가 괜찮았어?”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들 비슷비슷해서.”
“응?”
이 말에 변 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다들 비슷하다고?”
“아, 가장 튀는 사람 있죠. 근데 그 사람은 번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앤더슨 말인가?”
“…….”
변 사장도 그 남자가 가장 신경 쓰였는지, 내가 누굴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근데, 번외라는 건 무슨 뜻이야? 후보자로 생각 안 한다는 건가?”
“네.”
“왜?”
“유목민 같아 보여서요.”
내 말에 변 사장은 살며시 웃었다.
“그게 싫어?”
“네, 대놓고 말하잖아요. 현타 왔다고 MS를 나온 사람인데, 그 정도면 더 볼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것 말고는? 더 안 되는 이유 있어?”
음……. 없는 것 같다.
사실, 그런 사람이 우리와 함께 일해준다면 완전 땡큐지만.
그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잘 안 든다. 우리 팀에 확실히 녹아들 수 있는 사람인지.
뉴욕 출신, 컬럼비아 유니버시티 나온 MS 출신의 앤더슨님께서 나의 주방 보조로 열심히 일해 주실지.
막상 온다고 해도 부담될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그런 사람한테 전복 내장 벗기라는 지시를 한다는 말인가.
“사장님, 그리고 홍지아 씨가 하는 일이 복잡한 일이 아니잖아요. 단순한 일인데……. 굳이 유목민을 뽑아서 리스크 감수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흠……. 글쎄. 난 홍지아 씨의 업무가 간단하다고 보지 않는데. 원가 절감해야 한다고 자기가 의견 줬는데, 아직 아무것도 된 게 없잖아.”
“…….”
“홍지아 씨가 일을 단순하게 했을 뿐이지. 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보거든? 언제까지 우리 회사를 강 대리 혼자 짊어질 수도 없는 거고.”
변 사장은 맥주를 두 잔째 들이켰다.
“그리고 우리가 이 정도로 성공할지 몰랐잖아. 여기서 더 규모가 확장될 수도 있고. 나도 억지로 덩치를 키울 생각은 없지만, 지가 크겠다는 데 막아서야 쓰겠나?”
사업도 생명력이 있다는 걸 런치 오브 제로백을 통해서 느끼고 있다.
성장하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성장판을 틀어막아서는 안 된다는 의견.
“그리고 강 대리, 자기가 한 가지 잘못 생각한 게 있는데.”
변 사장은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는 게르(몽골족의 이동식 집)잖아.
“…….”
“게르에 유목민을 받아야지. 농경민을 받으면 오히려 오래 못 버텨~.”
우리 회사가 게르라고?
“풉!”
변 사장의 비유가 재밌어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어쭈! 웃었어! 자기도 동의한 거지? 우리가 언제까지 음식점만 할 리가 없잖아.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지?”
하긴……. 영업 뛰다가 하루아침에 촬영 팀 되고, 어느 날부터 음식점하고 있으니.
“그 말씀은 부정 못 하겠네요.”
“그래~. 자기가 뭘 부담스러워 하는지 알아.”
변 사장은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나 한번 믿고 가보자. 앤더슨이 나쁜 놈 같아 보이진 않아. 자진해서 군대도 갔다 왔잖아.”
“…….”
변 사장은 내게 잔을 들었고, 나도 잔을 들어 부딪혔다.
“좋습니다. 사장님이 가자면 가야죠.”
“하하. 그래! 컨펌해줘서 고마워.”
본인이 말하고도 이상했는지, 변 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컨펌? 하하.”
그리곤 피식 웃고는 술잔을 털어 넣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홍지아는 어제가 마지막 퇴근 일이었다.
변 사장이 홍지아를 위해 회식 자리를 마련하려 했지만, 홍지아가 원치 않는다고 하여 그냥 보내주었다.
난 이런 상황에 마음이 좀 불편했지만.
이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며, 변 사장은 덤덤히 받아들였다.
오늘 오전 촬영을 끝내고 도착해 보니, 앤더슨이 출근해 있었다.
“강태평 대리님! 안녕하세요!”
“아~, 오셨어요?”
우린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잘 오셨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하하.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앤더슨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는데, 마치 영화배우가 주방으로 된 촬영장에 온 것 같았다.
한마디로 주방과 참 안 어울려 보였다.
“음……. 앞으로 제가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그냥 앤더슨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편하게.”
“아, 그래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선배시고 사수신데. 하하.”
앤더슨은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차게 소리쳤다.
“강 대리님! 주방 보조로서 열심히 보좌하겠습니다. 무엇이든 편하게 시켜주십시오.”
“하하. 시키긴요. 같이 일하는 거죠.”
“아!”
앤더슨은 두 손을 모으고 간청하는 포즈를 취하며 말했다.
“제가 비위가 약해서 징그러운 건 잘 못 다루거든. 내장 비우는 것만…… 좀 배려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야, 재료 손질이 주 업무인데.
주방 보조가 그걸 못 한다고?
“나머진 다 할 수 있습니다.”
난 잠시 생각했다.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장 비우는 건 절대 못 한다고요?”
“네, 속이 울렁거립니다.”
“흠…….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죠.”
난 변 사장을 불렀다.
“사장님!”
멀찍이서 업무준비를 하던 변 사장이 대답했다.
“어, 왜? 얘기해!
“주방 보조 최경리 씨로 좀 바꿔주세요. 앤더슨 씨는 재료 손질을 못 한다고 합니다!”
“…….”
앤더슨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미 한 팀이다
* * *
“자, 잠깐만요.”
앤더슨은 당황한 듯, 내게 다가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에요? 갑자기?!”
“뭐가요?”
“왜 사장님께 말하냐고요.”
“…….”
무슨 뜻이지?
난 그가 하는 말의 속뜻이 이해가 잘 안 되었다.
“재료 손질 못 하신다면서요. 그래서 담당을 바꾸려고 한 건데요?”
“아니, 근데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 제가 문제 있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문제 있다면서요?”
앤더슨은 황당한 얼굴로 되물었다.
“내장 제거 못 한다는 거? 그게 문제에요?”
“문제죠. 주방 보조가 그걸 못 하면 어떡해요?”
난 앤더슨이 잘 이해가 안 되었다.
못 한다고 해서 바꿔주려고 했더니.
왜 따져 묻는 거지?
“아니……. 그래도. 함께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왜 사장님께 말씀하셔서는……. 제가 오늘 첫날인데.”
“…….”
“안 좋게 보이잖아요.”
사장에게 말한 게 문제였나 보군.
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첫날이고,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들 테니.
하지만 우리 조직을 아직 잘 몰라서 하는 얘기다.
겨우 4명의 직원이 주방, 서빙, 청소 등 모든 걸 해결해야 하는데.
디테일한 감정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아직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우리는 단순합니다. 못 하는 건 안 하고요. 잘하는 걸 합니다.”
“…….”
“못 하는 걸 잘하길 바라지도 않아요. 그럴 여유도 시간도 없거든요.”
앤더슨은 묵묵히 내 말을 듣다가 물었다.
“장점에 집중한다……. 뭐, 이런 뜻인가요?”
“네, 맞아요. 내장 손질을 못 한다면 주방 보조로 있을 수 없습니다.”
“…….”
“그래서 최경리 씨와 포지션을 바꾸려 한 거고요.”
“…… 못 한다고 해서 강 대리님이 대신해 준다거나 가르쳐 줄 여유는 없다는 거네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네, 대신해줄 여유는 절대적으로 없고요. 한번은 가르쳐 드릴 수 있죠.”
앤더슨은 도마 위에 꿈틀대고 있는 해삼을 보았다.
살짝 턱을 떨면서 고개를 젓더니.
“한 번만 가르쳐 주십시오. 군인 정신으로 헤쳐 나가보겠습니다.”
“굳이 안 그러셔도 됩니다. 홀 서빙하셔도 돼요.”
“아니요. 제가 여기 오면서 목표한 게 있습니다.”
“…….”
“요리에 관심이 있습니다. 강 대리님 옆에서 배워보고 싶거든요. 매번 맛이 바뀌는 신비한 맛을요.”
“여기 와 보셨나 봐요?”
먹어보지 않고는 알 수가 없는 맛이다.
“네, 여러 번 와봤습니다. 사실…… 여기 셰프님, 강 대리님께 탄복한 것이 입사 지원을 결심하는 데 결정적 원인이 됐습니다.”
이 얘기는 면접 때 못 들었었다.
물어보지도 않았었고.
“아, 네. 근데, 이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닌데…….”
그때, 멀찍이서 변 사장은 날 향해 소리쳤고.
“강 대리! 최경리 씨 보내?!”
최경리는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난 앤더슨을 한번 보고는 대답했다.
“아닙니다. 안 보내셔도 될 것 같습니다.”
* * *
치이익―.
통해삼 스테이크와 수비드 안심구이를 함께 만들고 있다.
앤더슨은 이를 악물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 굽고 있는 해삼의 내장 제거를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었지만.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떨면서도…… 결국은 스스로 마무리를 했었다.
“앤더슨 씨, 청주 한 스푼, 해삼 위로 뿌려주세요.”
“네? 지금 굽고 있는데 청주를 뿌린다고요?”
난 수비드 안심구이를 신경 쓰느라, 통해삼 스테이크는 앤더슨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네, 그냥 하시면 됩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청주 넣으면 안 되는데요.”
약간 뒤에 있던 변 사장이 소리쳤다.
“앤더슨! 그냥 강 대리가 시키는 대로 해! 주방에선 강 대리 말이 곧 법이야!”
“아, 알겠습니다!”
12시부터 손님은 들이닥쳤고, 홀, 주방 모두 정신이 없었다.
“앤더슨 씨, 수비드 안심구이 나가야 돼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샥스핀탕을 조리하다가, 트레이를 보았는데.
수비드 안심구이 대신, 오미자 소르베가 올려져 있었다.
“앤더슨 씨! 뭐예요?!”
“네?!”
“왜 오미자 소르베가 올라가 있어요?! 수비드 안심구이라고 했잖아요!”
“아닌데요. 방금 오미자 소르베라고 말씀하셨는데요.”
“…….”
앤더슨은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말이냐는 듯 멀뚱히 날 바라봤다.
“알았으니까, 빨리 안심구이 챙겨요!”
“네!”
정신없는 주방에서 앤더슨은 더 정신을 더 못 차리는 듯했다.
좁은 공간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데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튿날에도 유사한 상황은 반복되었다.
“앤더슨 씨! 건전복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앤더슨이 가져온 건 해삼이었다.
“아니, 왜 해삼을 가져왔어요? 해삼은 있는데.”
“해삼 달라고 하셨잖아요.”
거기다가 문제는 또 우긴다는 거였다. 본인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착각하는 건지, 아니면 인정을 안 하려는 건지 모르겠다.
“건전복 빨리 가져다주세요.”
바쁜 와중에 두 번을 말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고.
아무래도 대화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인정을 해야 방안을 찾을 게 아닌가. 급기야 난 변 사장에게 부탁했다.
“강 대리님, 샥스핀 가져 왔습니다.”
“저 방금 디저트 준비하라고 했는데.”
“아닌데요? 분명 샥스핀 가져오라고 하셨는데요.”
“…….”
또…….
난 황당함에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변 사장이 얼굴을 쓱 내밀고는.
“앤더슨.”
“네.”
“나도 들었어.”
“…….”
“분명히 강 대리가 샥스핀 가져오라고 했어.”
이 말에 앤더슨은 얼굴이 붉어졌다.
“우리 둘이 잘못 들었다는 거야?”
앤더슨은 붉어진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수차례 반복된 모습이었기에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변 사장은 유심히 앤더슨을 지켜보다가 물었다.
“자기 혹시 말귀 잘 못 알아들어?”
“…….”
“한국말이 서툴러서 그러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다.
발음만 좀 어눌할 뿐, 그냥 한국인처럼 말한다.
앤더슨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분명히 듣는 대로 움직이는데, 한국말은 마음이 급해지면 저도 모르게…….”
그는 이실직고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얘기를 군 복무 중에도 듣긴 했습니다. 제가 나이가 있어서 앞에서 심하게 말은 안 하지만…… 흉보는 소리가 뒤로 다 들리더군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어갔다.
“훈련 중에 게릴라 침투 상황을 화생방 상황으로 잘못 전달해서, 긴 시간 동안 중대 전체가 내내 방독면 쓰고 있던 적이……. 근데, 이 정도도 약과였습니다.”
“아오,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변 사장은 인상을 쓰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우기는 거야?”
“…….”
주방은 바빴지만, 지금은 이게 더 중요했다.
“앤더슨, 이러면 같이 일하기 힘들어. 못 알아들을 수는 있지만, 우기는 거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돼.”
어째 너무 사람이 완벽해 보여서, 뭔가 불안했었다.
“…….”
변 사장은 날 따로 불렀다.
“강 대리, 함께 일할 수 있겠어?”
“출근했는데, 같이 일해야죠. 어떻게 합니까.”
“…….”
“이것 또한 우리가 선택한 것이잖아요. 방법을 찾아야죠.”
변 사장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변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 그럼 수고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알겠습니다.”
변 사장은 원래 위치로 돌아갔고, 난 앤더슨에게 다가갔다.
“앤더슨 씨.”
“네, 대리님.”
“지금처럼 계속 일할 건데요. 앞으로는 절대로 우기면 안 돼요. 그럼 저랑 더 함께 일 못 합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와 간단한 규칙 하나만 정해요.”
앤더슨을 날 바라봤다.
“제가 요청하는 걸 큰소리로 따라 외쳐주세요. 그다음에 행동하는 거로.”
“오…….”
앤더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요.”
“아무리 바쁘고 정신없어도, 이건 꼭 지켜야 해요. 간단하잖아요.”
“네!”
이렇게 난 앤더슨과 합을 맞춰갔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매끄러운 건 아니었다.
“아뮤즈 부쉬 세팅해 주세요!”
“샥스핀탕 오케이!”
“아니요! 아뮤즈 부쉬!”
“아, 네! 아뮤즈 부쉬 오케이!”
두 번 말해야 할 때가 종종 있었고, 번거롭기는 했지만.
어쨌든 이제 한 팀이다.
그리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장점이 많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솔직히 홍지아가 아쉽다.
* * *
진일상사 사장실.
민경원 사장은 회계보고서를 심각한 표정으로 읽고 있었고.
옆에는 그의 동생인 민경수 영업 2팀장이 앉아 있었다.
“형님, 축하드립니다. 자회사 설립을 기가 막히게 하셔서. 하하. 이슈도 되고~, 수익도 크고~.”
민 사장은 그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월 수익 비중에서 로열티가 40%을 차지하니……. 하하. 제로백 컴퍼니로 분리해 놔서 인건비 절약도 됐고요. 비용이 줄어드니 지난달보다 수익도 훨씬 많이 올랐습니다.”
“…….”
“정말 탁월한 선택이셨습니다. 제가 형님 보면서 많이 배웁니다.”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에?”
민경수 팀장은 예상치 못한 민 사장의 반응에 입을 다물었다.
“제로백 컴퍼니가 이슈가 되어 봐야 우리 진일상사 이름은 코빼기도 안 나오고.”
“…….”
“로열티로 제로백 컴퍼니의 수익 20%를 받고 있는데, 그게 6,500만 원이면 도대체 지난달에 얼마를 벌었다는 소리냐고.”
“…….”
“대충 계산이 나오지 않냐? 진일상사보다 제로백 컴퍼니 매출이 더 높은 거잖아!”
쾅!
민 사장은 앞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내 돈 다 떼간 것 같아서, 속 쓰려 죽겠는데……. 뭐어? 축하?!”
“네?! 아니, 그게……. 이미 커져 있던 걸 떼간 것도 아니고…… 자회사 설립 이후에 성장한 건데, 그걸 왜.”
희번득.
민 사장은 민경수 팀장을 무섭게 노려봤다.
“흡.”
민경수 팀장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더 열 받는다고. 변성준, 이 자식을 그냥…….”
“변성준 사장이요?”
“그래! 이 자식이 순진한 척하면서 일 안 했던 거잖아. 실실 웃으면서 회사 생활하고 만날 시장 조사한다면서 농땡이 부리던 인간이 말이야.”
“알고 계셨어요?”
“그럼 모르는 줄 알았냐? 사장이 안 보고 있는 줄 알지? 월급까지 주는데 일 제대로 안 하고 있는지 점검도 안 하겠냐?”
“…….”
“내가 알면서도 회사 설립할 때 기여한 부분이 있어서, 안 자르고 곁에 두었더니…… 뒤통수를 쳐?!”
민경수 팀장은 그의 말이 의아했다.
민 사장이 어떤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자회사 사장으로 발령받고 열심히 일해서 성과 낸 건데. 그게 뒤통수친 건가?’
아무리 친형이지만 이건 억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앞에선 수긍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좀 많이 달라지긴 했어요. 변성준 사장의 예전 모습을 생각하면…….”
“이건 달리진 게 아니라고! 숨긴 거라니까!”
“…….”
“이 자식이 날 기만한 거야!”
“…….”
“진일상사 직원들이 제로백 컴퍼니로 발령받고 싶어 한다는 소리 들으면, 아주 속이 뒤집힌다니까.”
그리고 그는 민경수 팀장을 바라봤다.
“설마, 너도 변 사장 밑으로 들어가고 싶은 건 아니지?!”
민경수 팀장은 뜨끔했다.
요즘 제로백 컴퍼니의 성과급 소문이 들리면서.
민경수 팀장도 그런 생각을 전혀 안 해봤던 건 아니었다.
‘귀신인데?!’
“에이~, 형님! 그럴 리가요. 전 형님 옆에서 보좌해야죠.”
“아우~, 속 쓰려!”
민 사장은 급기야 회계보고서를 쓰레기통에 구겨 넣었다.
지켜보는 시선들
* * *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 안다더니.
런치 오브 제로백의 주방에는 어울리지 않는 무색한 속담이었다.
홍지아의 빈자리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그녀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하지만 든 자리는 확실히 느껴졌다.
“아뮤즈 부쉬 트레이!”
“아뮤즈 부쉬 트레이 오케이!”
수비드 안심구이를 하는데, 버터가 부족했다.
“버터 좀 가져다주세요.”
“버러 오케이!”
미국식 굴리는 발음으로 힘차게 말하는 앤더슨 오.
지금도 간혹 말귀를 잘 못 알아듣기는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 첫날과 같은 실수는 확실히 줄었다.
덜컹.
그때 급하게 주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변 사장님!”
최경리였다.
“응? 왜?”
변 사장은 주방 한쪽에서 장부 정리를 하다가 최경리를 돌아봤다.
“민경수 팀장님 오셨는데요.”
“민경수?”
영업 2팀장 말하는 건가? 그 사람이 갑자기 여기 왜 온 거지?
변 사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어딨는데? 식사하러 온 거야?”
“아니요. 그냥 구경하러 왔답니다.”
“구경? 식당에 밥 먹으러 와야지, 구경은 무슨……. 하여간 그 형에 그 동생 아니랄까 봐…….”
변 사장은 피식 웃고는 물었다.
“왜? 나 보고 싶대?”
“네.”
“알았어. 지금 어디 있는데?”
“정원에 있습니다.”
사랑산성 정원.
정문 밖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이 보였고, 정원 안에서 민경수 팀장은 휘적휘적 걷고 있었다.
“민 팀장~.”
“형님~.”
민경수 팀장은 변 사장을 형님이라 불렀고, 그 말에 변 사장의 표정이 살짝 안 좋아졌다.
“아이고~, 머네요. 형님 신사업 한다고 해서, 많이 바쁘지만 일부러 와 본 건데.”
“사업 시작한 지 두 달 지나서?”
신사업 시작한 지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는 생색이냐는 물음이었다.
“아유~, 미안해요. 바빠서 그랬어요~. 바빠서~. 그래도 와본 게 어디에요?”
“그래, 무지하게 고맙다.”
변 사장은 민 사장을 가자미 눈으로 바라봤다.
“왔으면 식사해야지. 여기서 뭐 해?”
“줄도 너무 길고 해서요. 어차피 형님 얼굴 보러 온 거니까.”
변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그렇네. 먹을 자리도 없겠네. 구경 좀 시켜줘?”
“구경은요, 무슨~. 바쁘신데. 근데 손님이 진짜 많긴 하네요. 매출 잘 나오겠다.”
“왜? 탐나냐?”
변 사장이 갑자기 훅 들어갔고.
민경수는 그의 말에 뜨끔했다.
“타, 탐나다니요. 갑자기 무슨 말을.”
“민 사장이 그러던? 자네, 여기 대표 시켜줄 테니, 간 좀 보고 오라고?”
민경수 팀장은 적잖이 당황했다.
‘뭐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왜 이렇게 공격적이야? 내가 알던 변성준이 맞나?’
변 사장은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동안 연락도 없던 사람이……. 사업 시작할 때도 코빼기도 안 비쳤으면서 갑자기 찾아와서는 안부 묻는 게.”
“…….”
“뻔하잖아? 그것도 회계 보고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말이야.”
민경수는 깜짝 놀랐다.
상황을 꿰뚫고 있는 안목과 공격적인 언변.
이건 분명 본인이 알고 있던 변 사장이 아니었다.
‘정말…… 사장님 말씀대로 기만했던 건가?’
“…….”
민경수는 그저 놀라서 변 사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뭘 그렇게 봐? 내 말이 틀려?!”
“하하. 형님도 참~.”
민경수는 말 그대로 허를 찔렀다.
이것저것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할 말을 잃어버렸고.
그저 웃을 뿐이었다.
“이 사람아~, 당황한 거 티 난다. 좀 자연스럽게 웃어 봐. 응?!”
민경수는 억지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하아, 젠장. 안 되겠다. 그냥 빨리 가자.’
“이리 와~. 구경시켜 줄게. 근데 참고로 2층은 안 된다~. 집 주인들 자는 공간이라서.”
기세에 눌린 민경수는 변 사장의 말에 대꾸도 하기 어려웠다.
“아니에요. 형님, 저 이만 가볼게요. 바쁘신데.”
민경수는 황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고.
덥석.
그때 변 사장은 민경수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민 팀장아.”
“네……. 네?!”
가려던 민경수는 놀라서 변 사장을 돌아봤다.
“앞으로 사업장 와서는 호칭 제대로 해라. 상황 봐가면서 형님이라고 하는 거지. 알겠어?!”
꿀꺽.
‘분명해. 기만했던 거야. 내가 알던 변성준이 아니야.’
민경수는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 네 사장님.”
“그래, 담에 한가할 때 와.”
민경수는 꾸벅 인사하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섣불리 접근할 곳이 아니야…….’
돌아가면서, 민경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 * *
덜컹.
변 사장이 주방으로 들어왔고.
궁금했던 나는 곧바로 물었다.
“사장님, 민 팀장님 왜 오신 거예요? 식사하러 온 것도 아니라면서요.”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냥~ 지나가는 길에 들렸대. 잠깐 얘기나 좀 했어.”
“그래요?”
이상하네. 민경수 팀장이 그렇게 사려 깊은 사람이 아닌데.
“오신 김에 우리 얼굴이나 좀 보고 가시지. 새로 온 앤더슨 씨도 있고.”
“그러게~. 바쁜 일이 있나 봐~.”
변 사장은 손뼉을 치고는 말했다.
“자~, 이제 영업시간 얼마 안 남았다. 집중하고, 오늘도 마무리 잘해야지?!”
“네!”
오후 3시. 영업이 끝나고 주방 마무리가 다 되어갈 무렵.
난 오후 촬영이 있어서, 먼저 나서려 했다.
[저기요~.]
복도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변 사장이 말했다.
“혹시 안 나간 손님 있나?”
최경리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제가 30분 전에 모든 룸 체크 했는데, 손님은 없었습니다.”
어차피 난 나가려던 참이었고, 다른 직원들은 뒷정리 중이었기 때문에 복도로 나섰다.
“제가 한번 보고 오겠습니다.”
저벅. 저벅.
낮이지만, 어두운 복도.
생각지 못한 여자 목소리가 들리니, 약간 으스스했다.
“누구 계십니까?”
내가 소리 지르며 다가가자, 한 귀퉁이에서 미모의 여성이 나타났다.
“호호. 안녕하세요.”
음?!
누군가 싶어서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봤는데.
사랑산성 주인인 설수민이었다.
“아~. 사장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호호. 네, 강태평 대리님 맞죠?”
그녀는 날 향해 인사하며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하하. 맞아요. 기억하시는군요. 근데 한밤중에 웬일이세요?”
오후 3시면 이들에게는 아직 한창 잘 시간이다.
“아함~.”
그녀는 가볍게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얘기할 게 있어서, 제가 몇 번을 알람 맞춰놨는데 드디어 오늘 깼네요.”
“하하. 그래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데요?”
설수민은 주방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사장님도 계시죠?”
“네~, 주방에서 마무리 정리 중이세요.”
“아~, 네. 다름이 아니라.”
설수민은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클레임 제기하려고요.”
클레임?!
주방 안.
설수민은 변 사장 앞에서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호피 무늬 실크 가운을 입고, 머리는 뒤로 동여매었는데.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미인은 뭘 해도 그냥 이쁜 거구나.
조그마한 그녀의 입술이 오물조물 움직였다.
“사장님께서 우리 쉼은 보장해 주신다고 했는데, 수면에 방해되지 않도록 해주신다고…….”
“아, 네.”
“말씀 안 드려도 아시죠? 그동안 한창 잘되고 있는 것 같아서, 좀 참고 있었거든요~.”
매일 100미터 이상 고객들이 줄을 서고, 방송국 차도 수시로 드나든다.
초반에 워낙 이슈가 클 때는 드론 여러 대가 사랑산성 위로 뜬 적도 있었다.
안 그래도 너무 시끄럽지는 않을까 우리도 조마조마하긴 했었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이렇게 잘될 줄은 몰랐어요.”
“호호. 너무 잘돼서 죄송해요?”
“…….”
변 사장은 그녀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초반에 저희 레스토랑이 이슈가 되어서 좀 소란스러웠는데, 요즘 잠잠해 지고 있거든요. 앞으로 더 신경 쓰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장사가 잘돼도 우리는 세입자다.
겨우 입지를 다져놨는데, 장소 주인이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곤란해진다.
변 사장을 따라서 우리는 모두 다소곳이 설수민 앞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하지만 클레임 제기하는 것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저녁에도 레스토랑 맞냐고 찾아와서 곤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요~.”
“그래요?”
“네, 손님들이랑 탬버린 치며 흔들고 있는데, 갑자기 애들 손님이 들이닥쳐서…… 난감했던 걸 생각하면…….”
“아…….”
아무리 영업시간을 알려줘도, 워낙 손님이 많이 찾아오다 보니 헷갈릴 수 있다.
변 사장은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그 부분은 생각 못 했네요. 영업 시간에 대해 손님들에게 확실하게 다시 알리도록 할게요. 앞으로 동일한 문제 없도록 하겠습니다.”
“글쎄요. 그게 과연 말처럼 쉬울까요? 그리고 이 상태로 가다가는…….”
설수민은 우리를 바라보고는 조용히 말했다.
“사랑산성은 묻힐 것 같은데. 업종 특성상 은밀한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매스컴을 통해서 너무 양지로 나오니까…… 기존에 오던 고객들도 좀 꺼리세요.”
그녀는 화내지 않고, 조곤조곤 말하는데.
다 납득이 되는 부분이라서…… 할 말이 없었다.
잠자코 듣던 변 사장은 앞으로 주의하겠다는 말로는 정리가 안 될 거라고 판단했다.
아무래도 설수민이 바라는 점이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그는 조심히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혹시 바라는 게 있으신가요?”
임대료 더 올리려고 이러나.
변 사장이 먼저 물어보니, 설수민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있어요.”
* * *
그날 오후.
난 촬영을 하면서 설수민이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자~, 턱 당기시고요.”
찰칵!
오늘은 웨딩 촬영을 왔다.
갈수록 촬영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
“드레스 살짝 올리시고~. 하나~, 둘~.”
찰칵!
설수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고려해 볼 만한 생각이 아닐까?
하지만 우리 레스토랑이 잘되는 건 내 손맛의 영향이 큰데…….
일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고.
난 밤까지 일하고 싶지는 않다.
찰칵!
변 사장은 그녀의 제안을 어떻게 생각할까?
우리가 고민해서 답을 주기로 했지만, 사실 집주인이 하겠다는데…….
무조건 반대만 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어느덧 촬영 시간은 끝났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네~, 촬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 긴급 미팅을 하기로 했다.
촬영을 마치자마자, 난 바로 제로백 컴퍼니 사무실로 향했다.
제로백 컴퍼니 사무실.
변 사장과 최경리, 앤더슨은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강 대리, 왔어?”
“오셨습니까.”
내가 자리에 앉자, 변 사장은 바로 회의를 시작했다.
“다들 생각 좀 해봤나?”
“…….”
“약간은 예상했던 일이긴 하잖아. 우리 사업이 큰 이슈가 되었고……. 사실 시끄럽기도 했어.”
“맞습니다.”
최경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루아침에 업종을 바꾸겠다고……. 단란주점에서 갑자기……. 안 어울리지 않습니까?”
최경리의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히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선택지가 없다.
선택지가 있다면 사랑 산성을 나가는 것인데…….
“여기서 장사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
“프랜차이즈 준다고 생각하고, 고민 좀 해봐.”
“같은 장소에서 프랜차이즈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최경리가 틱틱거리며 대답했고.
“자꾸 부정적인 얘기만 할래? 그러니까 생각을 해보자고.”
변 사장은 또한 전혀 예상 못 했던 상황에 예민해졌다.
설수민.
그녀의 한마디는 제로백 컴퍼니를 혼란에 빠뜨렸다.
‘사랑산성이…… 런치 오브 제로백 저녁 장사를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