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치 오브 제로백 (1)
* * *
[런치 오브 제로백: 지금 이 순간]
사랑산성 명판 옆에 세워져 있는 팻말.
‘진일백반으로 해야지……. 뭐? 제로백? 건방지게.’
민경원 사장은 들어가는 입구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변성준 사장이 와달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고, 어쨌든 자회사니까 와보긴 했는데.
이름부터가 심사를 꼬이게 했다.
[지금 이 순간.]
런치 오브 제로백 옆에 쓰인 문장.
이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뭘 어쩌자고? 민 사장의 초이스. 이런 거로 하는 게 훨씬 직관적이고 좋지.’
그는 여전히 제로백 컴퍼니가 독립된 회사라고 보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촬영 1팀이었고, 팀명만 바뀐 거라고 생각한다.
“허허. 여기가 맞습니까?”
민경원 사장 옆에 있던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며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네, 이곳에 점심 식사하러 오게 될 줄은 몰랐네요.”
“네?”
남자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아~, 여기가 원래는 단란한 곳이거든요. 너무 비싸서 저도 자주 오지는 못했는데.”
남자는 ‘사랑산성’ 옆에 있는 여자 실루엣 마크를 보고 짐작했다.
“아~, 단란한 곳.”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하하. 공유 주방을 단란주점에서 할 생각을 하다니. 아이디어 독특하네요.”
둘은 정원으로 들어서며 찬찬히 살피었다.
“왔던 사람이나 알지. 누가 이곳을 단란주점이라고 생각하겠어요? 장소 섭외 진짜 잘했네요. 가정집 같기도 하고, 한옥식당 같기도 하고요.”
“하하. 별말씀을요. 바쁘신데 오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초대해주셔서 제가 감사하죠.”
민 사장은 남자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벨을 눌렀다.
그리고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점심 먹으러 왔습니다~.”
덜컹!
“어서 오십시오, 손님.”
최경리가 문을 열었다.
검은색 정장 차림인데, 셔츠까지도 모두 검은색이었다.
온통 검은색이 그런지, 왼쪽 가슴 위 금색 명찰이 유독 튀어 보였다.
‘매니저 최경리’.
“네가 매니저야?”
“어머.”
최경리는 민경원 사장 옆에 있는 남자를 보고 살짝 놀랐다.
“뭘 놀라? 이분 알아?”
이 말에 최경리는 대꾸하지 않았다.
표정 관리를 하고, 현재의 역할에 충실했다.
“손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뚜벅. 뚜벅.
두 남자는 최경리의 뒤를 따라서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2번 방입니다.”
덜컹.
사랑산성의 룸.
지금은 런치 오브 제로백의 룸 형태 식사 공간이다.
룸의 벽면은 진회색이었고.
가운데 벽은 벽과 유사한 색깔이 커다란 천으로 가려져 있었는데.
천 위에는 커다란 난이 그려져 있었다.
“노래방 기계를 천으로 가렸나 보군.”
민 사장은 사랑산성을 와봤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한쪽 벽면은 커다란 창이었는데.
창밖으로 사랑산성의 정원이 보였다. 아무것도 없는 낮은 잔디와 소나무 두 그루.
밖으로터 밝은 채광이 룸 안을 환하게 비추었다.
민 사장은 창밖으로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쪽 벽면이 창이었구나.’
보통 이곳에 올 때는 밤이었고, 항상 창가 쪽은 검은색 커튼이 쳐져 있었다.
조명마저 어두웠기 때문에 한쪽 벽면이 통유리 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최경리, 자꾸 나 모른 척할 거야?”
그래도 왔으면 반갑게 인사라도 할 줄 알았는데.
최경리는 마치 처음 보는 손님 대하듯 했다.
“…….”
민 사장 옆에 있던 남자가 말했다.
“아시는 분이세요?”
“네, 우리 회사 직원입니다.”
“아……. 난 또 새로 개업하면서 채용된 분인 줄 알았네요. 하하.”
남자는 재밌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흠!”
민경원 사장은 민망함에 헛기침했다.
“메뉴판 좀 줄래?”
“아무리 손님이시지만…… 말이 짧으시네요.”
표정 변화 없이 말하는 최경리의 모습에 민 사장은 질려버렸다.
“야! 나랑 상황극 하냐? 적당히 좀 해! 적당히!”
최경리는 선 채로 가만히 민 사장을 내려다보다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손님이니까 내가 참아야지.”
“야! 다 들려! 누가 손님 앞에서 그렇게 말하냐?”
최경리는 스스로 최면을 건 듯, 민 사장의 말에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본인 갈 길을 갔다.
“메뉴판 여기 있습니다.”
둘레에 금테가 둘린, 검은색 메뉴판.
민 사장이 열어보니, 안에는 딱 한 페이지만 있었다.
# 런치 오브 제로백 코스 (32만 원)
아뮤즈 부쉬
건전복과 통해삼 스테이크
수비드 한우 안심구이
오미자 소르베
샥스핀탕
디저트
고급 식당이라서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민 사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사장이기는 하지만, 10명의 자그마한 회사의 사장일 뿐이었다.
‘32만 원?!’
변 사장에게 10만 원 이상의 고가의 코스 요리라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32만 원은 너무 세잖아?!’
민 사장은 옆에 있는 남자의 눈치를 살짝 보고는 말했다.
“다른 메뉴는 없어?”
“이거 하납니다.”
“이거…… 하나라고?!”
민 사장은 등에 살짝 식은땀이 났다.
오늘 외식 사업 개시한다고, 쏘겠다며 손님까지 데리고 온 것인데.
두 사람 합하면 64만 원…….
“왜요? 나가시려고요?”
최경리는 민 사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뭐어?!”
‘이게 진짜 나 엿 먹이나.’
옆에 있는 남자가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도 메뉴판에 적힌 가격을 본 것이다.
“나가시는 문은 왼쪽입니다.”
“하하.”
민 사장은 어색한 목소리로 크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직원이 농담을 잘합니다.”
남자는 민 사장이 메뉴판을 보고 당황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초대받아서 오긴 했으나, 이 상황이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음식 가격 수준이 놀라웠고.
직원이 사장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응대하는 것.
사장은 자기 사업장에 와서 메뉴 보고 당황해하는 모습.
전체적으로 어이없고 놀라웠다.
“이걸로 2인분 줘…….”
민 사장의 마지막 말이 살짝 떨렸다.
‘64만 원이면…… 태블릿 PC 가격인데……. 씨바.’
괜히 왔다는 생각에 민 사장은 속이 쓰려서 미칠 것 같았다.
“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최경리는 메뉴판을 덮기 전에 검지로 한 곳을 가리켰다.
“혹시나 해서 말씀인데…… 이것도 보신 것 맞죠?”
최경리의 검지가 가리킨 곳은 메뉴판 하단에 있는 조그마한 글씨였다.
‘VAT 별도.’
욱! 순간 민 사장은 혈압이 확 올랐다.
‘야이, 양아치 새끼들아!’
순간 터져 나오려는 걸, 옆의 남자 때문에 겨우 참았다.
“휴우~, 알았으니까. 맛없기만 해봐!”
* * *
최경리가 주방으로 왔다.
“코스 2인분 준비해 주세요.”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시니컬한 목소리로 말했고.
홍지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고.
난 변 사장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변 사장은 큰소리로 외쳤다.
“자자. 첫 주문이다! 이제 시작이라고~. 실수하지 말고 잘해 보자!”
“네!”
변 사장은 최경리를 보았다.
“손님 응대는 잘한 거지?”
“잘못할 게 뭐가 있습니까. 메뉴는 하나밖에 없고, 손님이 많은 것도 아닌데.”
“하여간…… 초 치는 건.”
“아!”
최경리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민 사장님이랑 같이 오신 분이 우리 회사 사람이 아니던데요?”
“그래? 외부인을 데려오셨어?”
이 말에 변 사장은 활짝 웃었다.
“너무 땡큐인데? 외부인이면 맛을 선보이고 홍보할 기회잖아? 근데 누군데?”
“제이엠인터내셔날 김성수 부장님이요.”
“아~, 뭐?!”
“…….”
김성수 부장?
전혀 생각지 못한…….
나 또한 음식 준비를 하다가 멈추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근데 자기가 김성수 부장을 어떻게 알아?”
최경리가 그를 안다는 것도 의외이긴 했다.
“계약서 점검하다가, 제이엠 촬영 연간 계약서에서 그분 신분증 스캔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걸로 얼굴 기억이 나?”
“문서 기억력은 자신 있습니다.”
“흠……. 김성수, 김성수 부장이라…….”
변 사장은 그의 이름을 읊조리며 동공을 굴렸다.
좀 놀랍기는 하지만, 이게 뭐 그리 중대한 사항은 아닌 듯한데.
“강 대리!”
“네, 사장님.”
“음식 신경 써서 잘해야겠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이야…….”
변 사장은 갑자기 내게 이해 못 할 말을 했다.
“절대 주방 밖으로 나가지 마. 김성수 부장 갈 때까지는.”
10여 분 뒤. 2번 룸.
똑똑.
최경리가 은빛 함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두 명이면 64만 원……. 아니지. 부가세 포함 70만 4천 원.’
민 사장의 머릿속은 점심 가격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자꾸 낚였다는 생각에 억울한 기분.
최경리가 뭘 하는지 시선에 들어오지 않았다.
“와~, 그건 뭔가요? 이쁘네요?”
김성수 부장은 최경리가 들고 온 은빛 함을 보고 물었다.
“아뮤즈 부쉬입니다.”
“아뮤즈 부쉬? 그게 뭐예요? 음식 이름?”
최경리는 로봇처럼 대꾸했다.
“메인 식사 전에 가장 먼저 제공되는 음식으로, 한두 입으로 맛볼 수 있게끔 작게 만들어집니다. 아뮤즈 부쉬라는 말은 프랑스어로 ‘입(bouche)을 즐겁게 하는(amuse) 음식’이라는 뜻이라고 하더라고요.”
민 사장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방금 핸드폰 검색해서 읽은 거 아니지?”
“검색해서 외웠습니다. 지금 안 봤는데요.”
최경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젠장. 그냥 애피타이저라고 하면 되지, 아뮤즈 부셔는 얼어 죽을…….”
민 사장은 영 기분이 좋지 않다. 머릿속에 70만 4천 원이 꽂혀 있기 때문에.
“아뮤즈 부쉬입니다. 부셔가 아니고요. 그리고 애피타이저와는 개념이 좀 다릅니다.”
“휴우~.”
민 사장은 울컥했지만, 옆에 있는 김성수 부장 때문에 또 참았다.
최경리는 은빛 함을 두 사람 앞에 놓았다.
“제가 열어 드릴까요?”
“그러시죠.”
김성수 부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딸깍.
함 뚜껑을 열자.
“…….”
두 남자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야?”
은빛 함 안에는 조그만 새가 사뿐히 앉아 있는데.
날갯짓하기 바로 직전 모습이었다.
“화이트 슈를 굳혀서 만든 ‘에콜 블러셔’입니다.”
“에콜 블러셔?”
“하얀 학의 프랑스어입니다. 셰프께서 모든 시작은 학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시면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면 사랑하겠다. 뭐, 그런 요리 철학을 담은 겁니다.”
엄지 반 토막 만한 새.
70만 4천 원 코스 요리의 시작.
이걸 요리라고 내놓은 거였다.
“하아……. 진짜, 참으려 했는데, 결국 욕 나오게 하네.”
민 사장은 폭발하고 말았다.
“변 사장 나오라고 해! 빨리!”
“…….”
“비밀 유지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어휴, 진짜. 나한테 한번 팔고 장사 끝낼 셈이야?! 어?!”
“민 사장님, 참으세요.”
옆에 앉은 김성수 부장이 말렸다.
하지만 꾹 참고 있던 게 폭발한 민 사장은 거침없었다.
“야! 뭐 해?! 사장 나오라고 하라니까!”
“제가 뭐 실수를 했나요?”
최경리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뭐?”
“아니면 음식이 잘못됐나요?”
“야!”
민 사장은 속 터진다는 듯 가슴을 두들기고 있었다.
“손님.”
최경리가 침착할수록.
민 사장은 눈알이 뒤집힐 것 같았다.
“음식을 시키고, 먹지도 않았으면서 이렇게 경우 없게 행동하는 건…… 갑질인데요?”
“…….”
“모든 방은 CCTV로 촬영 중입니다. 더 소란 피우시면 신고합니다.”
“이야아~!”
주방에서 음식 준비하던 직원들.
[이야아~.]
이상한 괴성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홍지아 씨.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글쎄요. 건물 밖에서 난 거겠죠.”
“흠……. 그래.”
부들부들 떨고 있는 민 사장.
차분한 표정의 최경리.
그저 황당해서 바라만 보고 있는 김성수 부장.
‘콩가루 회사야, 뭐야.’
민 사장은 괴성은 한번 질렀지만, 더 어쩌지 못했다.
CCTV라는 건 사람을 쫄게 만든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다음 코스 준비하겠습니다.”
덜컹.
최경리가 나간 뒤.
김성수 부장은 민 사장을 달래주었다.
“사장님, 오늘 식대는 더치페이로 할 테니, 이왕 온 거 맛있게 드시고 가시죠.”
“돈이 아까워서 이러는 게 아닙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
이 말에 민 사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김성수 부장은 ‘에콜 블러셔’를 집어 들었다.
“하하. 이 이쁜 걸 아까워서 어떻게 먹죠?”
“…….”
그는 하얀 학을 눈앞에서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입안으로 쏙 밀어 넣었다.
오물오물.
“흡!”
외마디 비명과 함께 김성수 부장은 얼어버렸고.
제로백 컴퍼니가 하는 짓이 못 미더운 민 사장은 놀라서 말했다.
“왜 그래요? 이상하면 뱉어요!”
“아, 아니. 그게 아니에요.”
심각한 얼굴의 김성수 부장.
하지만 점점 씹어갈수록 표정이 환해지고 있었다.
“우와…….”
그는 경이롭다는 표정으로 민 사장을 바라보았다.
“진짜 대박인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