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금손으로 살아가기-39화 (39/156)

배씨 일가 (2)

* * *

“괜찮아요? 갑자기 안색이…….”

왜 하필 학이야.

‘학’……. 2,500마리의 학들이 떠오른다.

단양 수도원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학 접었던 추억.

아오. 울렁거려.

“저 물 한 잔만 마실 수 있을까요?”

“아, 네.”

배병규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을 떠왔다.

쭉―.

아…… 역시.

“한 잔 더 마실게요.”

“네, 잠시만요.”

배병규는 다시 물을 따르러 가려 했다.

“아, 아니에요. 제가 따라 마실게요.”

역시 정수기 물은 내 손으로 따라 마셔야 제맛이지.

줄줄줄.

쭉―.

캬~, 이 달짝지근하고 건강해지는 맛.

“어우~,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 것 같네.”

“무슨 정수기 물을 약 먹는 것처럼 드시네요.”

흡~, 휴우―.

난 피하지 않고, ‘푸른 하늘의 학’을 주시하였다.

아무리 학 트라우마가 있더라도.

이 정도도 마주하지 못하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는가.

“눈에 힘 좀 푸세요.”

“전 원래 촬영하기 전에 이럽니다.”

배병규는 잠시 날 가만히 보다가, 헛기침하고 말했다.

“흠! 어쨌든 촬영 시작하시죠. 지금 바로 가능하십니까?”

“네.”

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어떤 조명을 원하세요? 이곳은 좀 어두운데.”

“상관없습니다. 이 보석의 매력이 잘 드러나고, 고객들이 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표현되면 됩니다.”

“아…… 그래요?”

난 유리관 안에 든 ‘푸른 하늘의 학’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유심히 보았다.

어두운 실내에 노란 조명.

유리관 안을 통과하는 조명이 굴절되면서, 학을 약간 굴곡지게 표현하고 있었다.

내가 보기엔 다른 건 필요 없었다.

딱 한 가지만 하면 될 듯.

“음……. 배병규 씨? 이렇게 불러도 될까요? 아니면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상관없습니다. 그냥 배병규 씨라고 불러주세요.”

“아, 네. 지금 저 학이요. 유리관 밖으로 꺼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그거면 됩니까?”

“네, 지금 조명은 좋습니다. 조명이 유리관을 통과하면서 미세하게 굴곡지게 하고 있거든요. 학의 본질이 흐트러지고 있단 말입니다.”

“…….”

“매력이란 건 꾸미지 않고, 순수하게 보여줄 때, 심장을 강타할 수 있거든요.”

“…….”

“지금 학이 말하고 있어요. 내 진짜 모습을 봐달라고.”

“투명 유리라서 다 보이는데, 이건 진짜 모습이 아닌 건가요?”

“아니에요.”

“아…… 네.”

이렇게 내가 일에 집중할 때.

머릿속에서 필터링 되지 않은 말들이 나간다.

정도가 심할 때는 도인 같으며, 너무 감성에 이입된 말들을 쏟아낸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집중이 풀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쯤에는 정신이 드는데, 그쯤엔 내가 한 말들이 생각나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한다.

“학 빨리 꺼내주세요. 찍게.”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던 배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 * *

검은색 탁자를 들여와, 조명의 3/4 정도만 받는 위치에 학을 두었다.

강태평은 학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으이구. 춥겠네. 부끄럽겠어.”

그는 작품 집중 모드로 돌입한 것이다.

옆에 배병규가 있지만, 강태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학과 대화를 시도했다.

배병규는 이런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왜 저러지? 미친놈인가? 아니면 너무 예술가라서 그런가?’

“유리관 안에서 얼마나 답답했겠니.”

촬영 준비를 하면서 자꾸 말도 안 되는 말을 중얼거리는 강태평이 이상했지만.

일단 두고 보자는 마음으로 참았다.

“준비 끝났습니다. 바로 촬영 시작할게요.”

“이번에도 원 샷 원 킬입니까?”

배병규는 칠순 잔치 때를 생각하고는 물었다.

“음……. 원 샷 원 킬은 맞는데, 그 수준으로 여러 장을 드릴 겁니다.”

“오…….”

“보수도 많이 주시는데, 그 정도는 해야죠.”

찰칵!

찰칵!

차알칵!

찰칵! 찰칵!

강태평은 학 주위를 맴돌며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카메라도 돌리고, 몸도 돌리고, 손목도 돌리면서.

칠순 잔치 때와는 달리 오늘 강태평의 촬영 모습은 아주 화려했다.

약 10분 정도?

촬영은 곧 끝이 났다.

“자~, 다음 거는요?”

강태평은 카메라를 주머니에 쏙 집어넣으며 물었다.

“다음 거?”

“네.”

“없습니다. 이게 다입니다.”

강태평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촬영 끝?”

“그건 강태평 씨가 정하셔야죠. 태평 씨가 끝났다고 하면 끝난 것이죠.”

“이제 겨우 10분 됐는데…….”

“하하. 그러게요.”

“보통 촬영 기사들도 이렇게 빨리하나요?”

배병규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다른 분들은 못해도 1시간은 걸리시죠.”

“이런 거 하나 찍는데요?”

“네, 여러 콘셉트를 잡으시고, 콘셉트마다 사진을 백 장 넘게 찍으시니까.”

“…….”

“그런 식으로 하면서 괜찮은 사진을 건져 내는 거죠.”

강태평의 촬영은 콘셉트 하나.

게다가 사진도 10장 내외밖에 찍지 않았다.

하지만 보통 사진가들이 찍는 것과 달랐다.

200미터 사거리 사격하듯이 신중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찍었다.

강태평은 곰곰이 생각했다.

‘찍는 시늉이라도 할까?’

그리고 카메라와 학을 바라봤다.

아무리 좋은 사이도 너무 많은 사랑이 오가면 아픔이 오는 법.

‘카메라와 학은 이미 충분히 사랑을 나눴어.’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지만…… 촬영은 끝났습니다.”

“네, 그럼 제가 좀 봐도 될까요?”

“지금 알려주신 메일 주소로 보내드릴게요.”

강태평은 바로 LCD 화면의 발송 버튼을 클릭했다.

“왔나요?”

“네……. 잠시만요. 카탈로그로 나갈 거라서 출력물 상태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네.”

그는 스마트폰으로 조작 버튼을 눌렀고, 정수기 옆에 있는 복합기에서 바로 사진이 출력되어 나왔다.

“응? 이상하다?”

“왜요?”

“사진에 흰 줄이 가 있어서요.”

배병규는 난감한 듯 입맛을 다셨다.

“사진 문제인가요?”

“아니요. 핸드폰으로 봤을 때는 이런 흰 줄 없었거든요. 프린터기 문제인 것 같은데.”

강태평은 물끄러미 프린터기를 본 후,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프린터기라…….’

“어쩌죠? 죄송하지만…… 지금 바로 피드백 드릴 수가 없겠는데요.”

배병규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저 여기 다시 오라고요?”

“아니요……. 만약 사진이 이상한 경우에만요.”

“핸드폰으로 보고 판단 못 해요?”

배병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다르더라고요. 핸드폰으로는 괜찮아 보였는데, 출력하니까 이상해 보이는 경우가 있어서…….”

강태평은 입맛을 다셨다.

‘쿨한 척하더니, 까다롭게 구네. 하긴…… 수수료 금액이 크니깐. 이 정도는…….’

강태평은 프린터기에 손을 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되지만, 그러지 않으려 했다.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기 때문에. 본인 물건도 아니고.

하지만 이곳을 다시 오는 게 더 귀찮다고 판단했다.

“제가 프린터기 좀 볼 테니까, 출력 버튼 다시 눌러봐요.”

“네? 프린터기 보실 줄 아세요?”

“회사 생활 막내 벗어난 지 얼마 안 됐어요. 이런 건 뭐 전담이었죠.”

그렇지 않다. 똥손 시절 강태평은 자신의 손의 능력을 잘 알기에, 신입 사원임에도 전자 기기는 절대로 건들지 않았었다.

어떠한 압박이 있어도.

“흠. 네, 그러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미안해요.”

강태평은 프린터기 뚜껑을 열었다가 닫은 후에 뒷부분을 몇 번 어루만졌다.

그리고 지그시 프린터기에 손을 댄 상태로 말했다.

“지금 출력해 보세요.”

“네.”

그리고 사진이 나오는 동안 계속 손을 얹고 있었다.

위이잉―.

철컥. 철컥.

사진은 아까의 두 배속으로 출력되어 나왔다.

“헐. 뭐야? 왜 이렇게 빨라졌어?”

처, 처, 처, 철컥.

순식간에 출력은 끝이 났다.

마지막 출력본이 나오자, 강태평은 살며시 손을 떼었다.

“사진 어때요?”

“우와…….”

배병규는 출력본을 본 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미 스마트폰으로 사진 파일을 봤을 때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출력본으로 다시 확인을 해보니, 완벽 그 자체였다.

그리고 어찌나 깔끔하게 출력되었는지, 그대로 카탈로그 원본으로 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프린터

Before: 출력본에 흰색 줄이 가 있었다.

After: 출력 속도 2배속으로 증가. 사진 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학.

“다시 찍어야 합니까?”

“아니요. 됐습니다. 충분합니다.”

피식.

강태평은 살짝 미소짓고는 카메라를 안 주머니에 넣었다.

“그럼 수수료는?”

“네. 약속드린 1,500만 원 오늘 중으로 송금 드리겠습니다.”

휴우―. 강태평은 한숨을 쉬었다.

‘겨우 10분 촬영하고, 1,500만 원이라니. 이게 받아도 되는 돈인가 싶네. 좀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하고.’

강태평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이 돈 받고, 정말 이 정도면 될까요? 오늘 여러 개 촬영할 거로 예상하고 왔거든요. 더 요청하셔도 되는데.”

배병규는 고개를 저었다.

“10분이건 1시간이건. 저희가 원하는 퀄리티만 얻으면 됩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저희가 드리는 수수료 이상의 가치를 발휘할 거고요. 충분히 계산하고, 적정가를 드리는 거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언제 또 오면 되겠습니까.”

강태평은 안심이 되자, 바로 이 말이 절로 나왔다.

내일이라도 또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배병규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대꾸했다.

“하하. 글쎄요. 당분간은 스페셜 에디션이 없네요. 저 또한 강태평 씨 작품에 만족하니까요. 일이 생기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꼭 연락 주셔야 해요. 꼭이요.”

아차. 뱉고 나서 후회했다.

‘아……. 마지막 ‘꼭이요’는 하지 말걸.’

하지만 가슴속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다.

“그럼 가시죠.”

* * *

배병규를 따라서 복도를 지나가는데, 한쪽에서 쇠 가는 소리가 들렸다.

럭셔리한 이곳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소음.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 귀금속 세공하는 거예요.”

“귀금속 세공?”

“네, 원석은 가공하지 않으면 그냥 돌덩이일 뿐이에요.”

“…….”

“원석을 가공해서 보석을 만드는 거죠. 원석의 퀄리티 못지않게 세공 기술은 중요합니다.”

아……. 아까 처음 비즈니스 소개할 때 배병규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완성품을 수입해서 팔거나, 원석을 세공하여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고.

이게 ‘배씨일가’의 두 번째 비즈니스구나.

“세공……. 손으로 하는 거죠?”

“하하. 그럼 발로 하겠어요?”

“네…….”

손으로 하는 거라니……. 너무 궁금한데.

“저…… 실례가 안 된다면 구경 한번 해도 됩니까?”

“뭘요? 세공을요?”

“네.”

배병규는 잠시 생각하더니.

“뭐, 그럽시다. 원래는 안 되는데…… 어차피 뭐, 비밀서약서도 작성하셨고, 오늘 만족스러운 결과물도 주셨으니깐.”

“감사합니다.”

그는 오른쪽으로 걷는 방향을 틀어서, 좁은 복도 끝을 향해 걸어갔다.

깊숙이 걸어갈수록 두드리고, 쇠 갈리는 소리가 점차 더 크게 들렸다.

띠리링―.

이번에도 비번을 누른 후 홍채 인식을 하자.

덜컹.

은색 철문이 열렸다.

후욱―.

“읍!”

문이 열림과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훅 다가왔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봤던 풍경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는데.

어두운 공간 안에 빨간 불길이 여기저기 보였고, 두들기고 갈리는 엄청난 소음이 가득했다.

얼굴에 두꺼운 보호장비를 착용한 사람들이 여러 명 보였고, 이 안의 규모도 작지 않아 보였다.

“이야……. 대단하네요. 볼수록 대단해.”

이곳 지하로 내려온 후, 놀라움의 연속이다.

“배씨일가의 수십 년간 노하우가 축적된 곳이에요. 좋은 보석을 볼 줄 아는 시각과 원석을 다듬을 줄 아는 기술력. 이게 진짜 경쟁력이죠.”

“…….”

배병규는 걸어가면서 설명해 주었다.

“저건 망치로 두들겨서 각을 잡아주는 건데, ‘벼림질’이라고 하고요. 각을 잡고 난 후 열을 줘서 ‘열풀림’을 합니다. 이렇게 무르게 한 후 ‘압연기’를 통해 길게 뽑아내고…….”

그가 설명하는 작업방식과 귀금속 공예 장비들.

내 손이 움찔움찔했다.

오늘 처음 봤지만……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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