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가 아니었다 (2)
* * *
휴우…….
회사 밖으로 나와서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두근. 두근.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민 사장과 고성을 오가며 대화했었고, 나답지 않게 흥분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동안 고민은 해봤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기로 했던 말……. 퇴사.
진일상사. 이 작은 회사.
그리고 내가 속한 촬영 1팀.
변 팀장과 홍지아.
호구라는 걸 알면서도 다녔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서운했다.
나는 가족처럼 생각했는데, 회사는 아니었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가슴속에 한 가닥 미련이 남는다.
이 회사를 왜 다니냐고,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내겐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하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래, 어쩔 수 없다.
내가 굳이 원하지 않아도 나를 찾아오는 수많은 기회.
내가 지금 하는 일을 그대로 하면서 몇 배를 더 벌 수 있다.
천만 원이 넘는 손을 갖고 있으면서, 십만 원도 안 되는 일에만 쓰는 것은…… 내 손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타협이 안 되는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까똑!
[강 대리, 어디야?]
변 팀장이었다.
[잠깐 밖에 나와 있습니다.]
[알고 있어. 어디냐고.]
난 잠시 생각하다가 까똑을 보냈다.
[팀장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얼굴 뵙고 도저히 말씀 못 드릴 것 같아서…… 먼저 까똑으로.]
[장난해? 어디냐니까, 왜 자꾸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사직서 수리됐어? 나 아직 자네 팀장이야.]
난 가만히 그의 까똑 내용을 바라봤다.
[촬영 1팀 강태평 대리. 자네 팀장이 말하잖아. 어디냐고?]
지금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난 메시지를 보냈다.
[CS25시 앞에 있습니다.]
[지금 갈게. 기다려.]
* * *
멀리서 변 팀장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벌린 일이 있어서인지, 그를 만나는 게 좀 껄끄럽게 느껴진다.
“여기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혹시나 해서 연락해봤는데. 역시구만.”
“팀장님…… 죄송합니다.”
“레쯔비는?”
“여깄습니다.”
난 변 팀장과 회사 길 건너의 CS25시 앞에서 레쯔비를 종종 즐겼었다.
하루에 못 해도 두 번 정도는 여기서 티타임을 갖는 것 같다.
“흡~, 휴우~.”
변 팀장에게는 담배 타임이기도 하다.
왜 이렇게 미안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난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변 팀장은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어이쿠, 벌써 다 피웠네. 한 대 더 피워야겠다.”
그는 두 번째 담배를 물면서 말했다.
“강 대리.”
“네.”
난 변 팀장을 바라봤다.
“이렇게 될 거 예상했어. 그날이 언제가 될지…… 그게 좀 가늠이 안 됐었는데. 요즘 자네가 점점 외부에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니까. 곧 이 시기가 올 것 같긴 했었지.”
“…….”
“자네가 회사를 떠나기 싫어하는 거 같아서, 내가 아주 약간 기대는 했었거든? 저 민 사장이 융통성을 발휘하기를 바라면서.”
변 팀장은 피식 웃고는 담배를 빨았다.
“근데 뭐…… 민 사장. 역시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왜 말리지 않으셨습니까?”
변 팀장은 내가 민 사장을 만나러 갈 때 말리지 않았었다. 아니, 도리어 민 사장에게 직접 얘기하고 결정하라고 했었다.
이렇게 될 거 예상했다면서. 왜 말리지 않았던 걸까.
“말려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
“내가 말려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계속 회사를 다니게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는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이 상황을 잠시 봉합하는 건 가능했겠지. 하지만 머지않아 자네에게 이런 시기는 다시 찾아올 거야. 그때는 더 확신이 들고 머리가 깨어 있을 거고. 억지로 자네를 말렸던 날 원망하겠지.”
“…….”
“그러면 강 대리와 나 사이도 안 좋아질 거고. 그때는 다른 궁리는 안 하고 뒤도 보지 않고 무조건 회사를 떠나게 되겠지.”
그는 머릿속에 모든 상황이 다 그려진 듯 술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궁리?
변 팀장은 세 번째 담배를 꺼내며 웃었다.
“자네, 뾰족한 송곳은 아무리 가려도 튀어나오게 마련이지. 강 대리는 너무 대단하거든. 지금도 대단하지만 앞으로 보여줄 게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해.”
난 가만히 변 팀장을 바라보았고, 그는 내 어깨를 두들겼다.
“이건 애초에 막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역시 우리 팀장님…… 속이 깊구나.
그와 대화를 나눌수록 고마웠고, 그러니 더 아쉽게 느껴졌다.
회사를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 실감 날수록.
가슴 한쪽이 뻥 뚫린 기분이 들었다.
난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는데.
이 정도 깊은 사이의 사람과 멀어지게 된다는 게 견디기 어렵다.
“전 팀장님과 함께 일하고 싶어요.”
“그래~, 알아.”
그는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특히, 자네라면…… 아마 더 그럴 거야. 잘 알아.”
“근데…… 팀장님, 아까 하신 말씀 중에요.”
“응.”
“‘다른 궁리’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아…….”
변 팀장은 속이 깊고, 너구리 같은 사람이다.
웃으며 모든 걸 양보하는 듯, 욕심 없는 듯 회사 생활을 하지만.
성과도 못 내는 팀에서 20년을 넘게 버텨 온 사람.
보통 사람이 아니다. 난 그가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다.
분명 무슨 생각이 있어서, 흘리듯 말했을 것이다.
“퇴사 말고 다른 방법이 있다는 뜻입니까?”
“흠…….”
“말씀해 보십시오. 궁금합니다.”
변 팀장은 빙그레 웃다가, 눈을 들어 올리는데.
섬뜩.
너무나 차갑고, 날카로운 눈매에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봐왔던 변 팀장의 선한 눈매가 아니었다.
“자네는 지금 회사를 나가도 충분히 잘될 수 있을 거야.”
“…….”
“하지만 너무 경험이 없어서…… 개인사업을 하는 건 아직은 좀 어렵지 않을까 해. 얼마 전 대출 생각도 못 하고 헤매던 걸 떠올려 보면.”
“풉.”
이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종이학 2,500마리가 함께 떠올라서, 속이 살짝 울렁거렸다.
“지금 자네 마음대로 회사를 주무를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온 거거든?”
“…….”
“자네가 민 사장 상투를 잡고 있다고. 격투기로 치면 지금 백마운트 포지션에 목조르기까지 들어간 상황이란 말이야.”
확신이 들었다.
변 팀장…… 뭔가 계획이 있구나.
“KO 시켜버리면 되는데, 다 이긴 게임을 손 풀고 경기장 밖으로 나가긴 아깝잖아. 빨리 광야에서 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자넨 아직 젊잖아?”
“싫어해요.”
“뭘?”
“광야 싫어합니다. 안정적인 게 좋아요.”
“하하. 나랑 같구먼~.”
난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정중하게 변 팀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유비가 제갈량에게 그랬던 것처럼.
난 그에게 진심으로 지혜를 구하고 싶었다.
변 팀장은 이 모든 상황을 꿰뚫고 있다.
심지어 나와 민 사장 심리까지도 헤아리고 있는 것 같다.
“변 팀장님.”
“…….”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흠…….”
변 팀장의 눈이 다시 한번 번뜩였다.
그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약간 무섭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건 내가 자네라고 가정했을 때 하는 얘기야.”
“네.”
“받아들일지 여부는 자네가 결정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변 팀장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난 놀라움에 입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가 꺼낸 이야기는 너무나 획기적이었고, 내가 아는 민 사장이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설득력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걸 도대체 언제부터 계획한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과연 오늘 하루 만에 떠올린 것일까?
그러기엔 너무 계획이 촘촘한데.
그가 말한 대로만 된다면, 나로서는 대만족이다.
눈이 번쩍 뜨이는 제안이었다.
“어때?”
“놀랍습니다. 언제 이런 생각을 다 하셨어요?”
“자네니까 이런 계획이 가능한 거야. 생각에만 머무르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
“한 가지만 명심해.”
변 팀장은 검지를 펼치고 말했다.
“절대로 흔들려선 안 돼. 자네가 민 사장에게 퇴사하겠다고 말했던 그 결기. 그거로 가야 하는 거야.”
“…….”
“민 사장이 구워삶아도, 협박해도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알겠습니다.”
“명심해. 제안을 얘기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퇴사한다. 간단하지?”
“네, 팀장님.”
그의 혜안에 절로 고개가 숙어졌다.
“그럼 지금 당장…….”
난 민 사장과 담판을 지으러 갈 생각에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니야. 민 사장에게 연락 오면 가.”
“네?”
“내가 연락하게끔 만들 테니까. 그때 움직여. 더 애달게 해야 돼. 중요한 일은 심리전에서부터 잡고 가야 하는 거야.”
“…….”
그저 놀랍다.
이 사람이 진짜 아침부터 시장조사 한다고 뺑끼 부리며 늦게 출근하던 변 팀장 맞나?
“그럼 나 먼저 들어갈게. 바람 충분히 쐬고 있다가, 민 사장 연락 오면 들어가.”
“알겠습니다.”
“오래 안 걸릴 거야.”
변 팀장은 원래의 푸근한 미소로 돌아와, 손을 흔들며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 * *
변 팀장의 말대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30분 뒤.
띠리링.
[민경원 사장]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휴우~.
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전화벨이 7번 울릴 때쯤 받았다.
변 팀장이 전화 바로 받지 말라고 얘기해 줬었다.
[강태평입니다.]
[어~. 강 대리, 나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죄송합니다. 사직서는 곧 제출하겠…….]
민 사장은 황급히 내 말을 끊었다.
[에헤이~, 왜 그래~. 우리 잠깐 얘기 좀 해. 아까 감정이 좀 격했었어. 사과할게. 응?]
[…….]
[내 방으로 좀 와줄래? 아니다. 우리 카페에서 차 한잔할까?]
[하실 말씀이 더 있으십니까? 저는 드릴 말씀이 없는데요.]
[강 대리~, 이러지 마~.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잠깐 얘기 좀 해. ]
[미안해하실 것 없습니다. 진일상사는 사장님의 회사니까요.]
[아잉~, 강 대리이~.]
민 사장은 콧소리를 내어가며, 계속 날 붙잡았다.
이 정도면 된 것 같다.
아무래도 사업적인 얘기를 해야 하니, 밀폐된 공간이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짧게 얘기할 거니까. 제가 사장실로 가겠습니다.]
[자꾸 정 없게 얘기할 거야? 우리 가족이잖아.]
씨바……. 순간 욕 나올 뻔했다.
필요할 때만 가족이래.
그런 가족이 어디에 있냐?
[지금 가겠습니다.]
뚜벅. 뚜벅.
강태평이 들어오자, 사무실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영업 1, 2팀…… 그리고 촬영 1팀의 변 팀장과 홍지아까지.
모두 강태평에게 시선을 두지 않으려는 듯, 애써 컴퓨터에만 집중했다.
강태평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똑. 똑.
[들어오세용~.]
강태평의 노크임을 예상했던 것일까.
민 사장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냥했다.
덜컹.
강태평은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잠시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서 직원들에게 말했다.
“엿듣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사장실 문 앞으로 모여들었던 것을 생각하고 말한 것이다.
직원들은 뜨끔한 표정으로 아무 대꾸도 없었다.
“강 대리~, 왔어?”
“네.”
“거기 앉아.”
“뭘 앉습니까. 오래 할 얘기 없는데.”
강태평의 이런 모습에 민 사장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유~, 왜 그래. 잠깐이라도, 어서 앉아~.”
그리고 아까는 없었던, 카모마일 차를 민 사장이 직접 내왔다.
“강 대리~, 아까 서운했지.”
“…….”
“미안해. 내가 당황해서 그랬어.”
민 사장은 넉넉한 표정을 지으며, 선심 쓴다는 듯 말했다.
“결론부터 얘기할게. 개인 촬영한다는 것 말이야. 그거 해. 전혀 관여 안 할 테니까. 강 대리 하고 싶은대로 해.”
“…….”
“됐지? 퇴사 얘기는 없었던 거로 하자.”
“아니요.”
강태평은 피식 웃고는 말했다.
“그건 회사 나가서 할 생각입니다.”
민 사장의 얼굴은 흙빛이 되어버렸다.
“가……, 강 대리. 왜, 왜 그래.”
강태평은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회사원이 회사 일만 해야죠.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
민 사장이 했던 말을 그대로 해버리는 강태평.
민 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존버는 아름답다
* * *
“아유~, 왜 그래, 진짜~. 하하.”
민 사장은 억지로 웃음소리를 내었다.
웃기는 하지만, 내 눈치를 보며 표정은 굳어 있다.
“왜요? 사장님이 하셨던 말씀인데?”
“알았어~. 알았어~.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민 사장은 자세를 고쳐잡고는 말했다.
“사전에 회사 신고하고 개인 촬영 할 수도 있는 거지. 내가 강 대리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그랬던 거야.”
“욕심이요?”
“그래~. 강 대리 같은 인재를 우리 회사에서 독점하고 싶은 마음에…….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어.”
“…….”
“욕심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떠나서는 안 되잖아. 그치?”
이 말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약간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어차피 목적이 있어서 만난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확실히 해둬야겠다고 생각에, 난 더 몰아세웠다.
“왜 마음에 없는 말 하세요. 나중 가서 딴소리하는 건 더 싫습니다.”
“아니야. 아니야.”
민 사장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나중 가서 딴소리 안 해. 강 대리를 보는 시각이 좀 달라졌거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
“하지만 난 절대로 강 대리를 보내기 싫고 말이야.”
민 사장은 내 손을 꼭 잡고서 말했다.
“강 대리, 이제 마음 풀어. 아까 내가 미안했어.”
천하의 민 사장이 내게 이렇게까지 하는 게……, 참.
진일상사는 직원 수가 적은 탓도 있지만, 완벽한 중앙 집권 체제이며 거기서 민 사장은 독재 군주였다.
진일상사에서 민경원 사장이 곧 법이었다.
“흠…….”
그런 그가 이렇게까지 나오는 걸 보니, 태도가 확실히 바뀐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사장님.”
“응?”
“방금 사장님 하신 말씀이 맞아요. 전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에요.”
“…….”
“사장님이 저 때문에 그걸 깨달았다고 하시지만, 저 또한 사장님 덕분에 깨달았거든요.”
“하아……. 젠장.”
민 사장은 고개를 숙이고 후회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가 운을 띄우자, 민 사장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기대가 가득 찬 눈길로 날 바라봤다.
“저도 정든 회사 떠나고 싶진 않거든요.”
민 사장의 표정은 눈 만난 강아지 같았다.
내 다음 말을 기다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좀 황당하게 들리실 수도 있지만,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신다면…….”
“말해! 뭐든 말해!”
민 사장에게는 보이지 않게 고개를 살짝 돌리고.
변 팀장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민 사장이 받아들이면 이 회사에 좀 더 있는 거고.
못 받아들이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자회사를 설립해 주셨으면 합니다.”
“자회사?”
* * *
민 사장은 강태평 말의 저의를 파악하려는 듯 눈알을 심하게 굴렸다.
그러다가 되물었다.
“뭐…… 뭔 소리야? 우리 회사 직원 수 몰라?”
“1인 기업도 있는데요, 뭐.”
민 사장은 혼란스러웠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왜 갑자기 ‘자회사’ 얘기를 하는지.
‘그래, 당황하지 말고. 일단 들어나 보자.’
“강 대리, 왜 자회사를 설립하자는 건데?”
“민 사장님이 절 잡으시는 이유죠.”
“뭐?”
“그냥 회사원으로 살기에 제 능력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민 사장은 말문이 막혔다.
‘하……. 젠장. 뭔 소리야. 그럼 그냥 나가겠다는 거잖아? 근데 왜 자회사냐고?’
“하지만 전 이 회사에 다니는 게 좋거든요. 동료들과 함께 회사 생활 하는 게요.”
이 말에 민 사장은 화색이 돌며 과격하게 호응했다.
“그래에! 회사를 어찌 돈으로만 다니나? 내가 원하는 일 하고, 동료들과의 우정, 성취, 보람. 이런 게 다 회사 생활 하는 이유지.”
“맞습니다. 그래서 자회사를 설립시켜달라고 제안 드리는 겁니다.”
강태평과 대화를 나눌수록, 그의 의도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독립된 사업체를 운영하고 싶지만, 진일상사의 직원으로 남고 싶다……. 이건가?”
“네, 그겁니다.”
“허허. 참나.”
민 사장은 점점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눈빛도 차분해졌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게 뭐지?”
“저를 얻으시겠죠.”
“…….”
‘그러니까,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나가겠다는 거군.’
민 사장은 강태평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눈빛에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결심하고 찾아온 것이다.
대화하면서도 망설이지 않는 걸 보니, 계획도 있어 보였다.
민 사장은 자세를 고쳐잡고 앉았다.
“그래, 구체적으로 얘기를 좀 해보지? 어쨌든 난 자네를 잡고 싶으니까.”
강태평은 살며시 웃었다.
‘그래, 이제 준비가 됐구나.’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단합니다. 독립된 사업체를 허가해 주시고, 저희 촬영 1팀 전 인원을 배치시켜 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인건비, 임대비 등의 모든 비용을 저희가 감당하겠습니다. 진일상사의 손을 빌리지 않겠습니다.”
민 사장은 이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잠깐…… 이 말은.’
“회계를 따로 가져가겠다는 건가?”
“네, 맞습니다.”
“아니, 그럼 수입은…….”
“순이익의 20%를 진일상사로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겨우?!”
이 말에 민 사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강태평을 잡고 싶은 마음이야 강하지만, 자선사업을 할 수는 없다.
현재 회사매출의 반 이상을 ‘촬영 1팀’이 감당하고 있다.
수익의 20%를 주겠다는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비중만 보지 마시고, 앞뒤 사정을 자세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매출의 20%가 아닌 순이익의 20%입니다.”
“…….”
“그리고 인건비 등의 모든 비용을 자체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진일상사에서 비용 투자 없이 수익만 가져가는 거죠. 로열티처럼요.”
매출이 아닌 순이익 기준이며, 비용 발생 없이 순이익만 받는다.
계산을 자세히 해봐야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주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하아……. 고민되네.’
민 사장은 선뜻 뭐라고 대답은 못 하고 계속 고민했다.
그때, 고민을 사라지게 하는 강태평의 한마디가 있었다.
“근데, 제 입으로 이런 말씀 드리긴 뭐하지만…… 어차피 저 없어지면 다 사라지는 수익 아닙니까?”
“음?!”
“고민할 필요가 없을 거 같은데.”
목줄이 이미 강태평의 손에 잡혀 있다.
촬영 1팀의 수익을 통째로 날리고 싶지 않다면, 고민할 사안이 아니었다.
“쳇. 이게 무슨 제안이야? 답은 정해져 있는데.”
민 사장은 툴툴거리며 말했고, 강태평은 빙그레 미소지었다.
“제안이죠. 싫으면 안 하시면 되는 거니까.”
“아! 됐어! 지금 놀리나?”
민 사장은 이제 결정을 한 듯했다.
“그냥 자회사 설립만 하면 되는 거야? 그 외에 요청사항 있나?”
“세 가지 있습니다.”
민 사장은 질린다는 듯 강태평을 흘겨보았다.
* * *
“말해~. 다 말해~. 맘대로 해.”
“하하.”
나는 웃으며 말했다.
“경리 업무를 볼 수 있는 직원 한 명만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경리 업무?”
“네, 살림을 볼 사람이 필요하니까요.”
“흠. 그거야, 뭐. 내 입장에서는 땡큐지. 사람 줄이는 거니까. 그다음은?”
“근무 시간 외의 제 개인 촬영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어쩔 수 없거나, 조건이 아주 좋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개인 촬영은 안 할 생각입니다.”
“그건 대화 시작할 때 얘기했잖아. 알아서 해. 단, 회사 업무에 문제 생기면 안 돼.”
이렇게 말하면서도 민 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맞나? 어차피 내 인사 명령받을 직원도 아닌데.”
“하하. 자회사도 어쨌건 사장님 회사죠.”
민 사장은 피식 웃고는 물었다.
“마지막은 뭐야?”
“자회사의 대표 이사는…….”
난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걸 얘기했다.
“뭐어? 자네가 하는 게 아니고?”
“네, 전 대표 이사를 할 역량이 못 됩니다. 아직 어리기도 하고요.”
민 사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러면 자네 의도와 달라질 수 있을 텐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려고 자회사 설립하자는 거 아닌가?”
“맞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꼭 대표 이사가 되어야 합니다.”
“…….”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주시지만, 잘못된 걸 하려고 할 때는 막아주시거든요.”
민 사장은 내가 그를 이렇게 찬양하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사장님은 이분의 가치를 잘 모르고 계십니다. 정말 훌륭하시고, 한편으로는…….”
난 이 계획을 얘기해주었던 그의 차가운 눈빛을 기억했다.
“무섭고 강하신 분이거든요.”
“변성준이가 그렇다고?”
난 환하게 웃었다.
“그동안 환경에 맞게 처신해 오셨을 뿐입니다. 앞으로 보게 되실 거예요.”
“…….”
“변 팀장님이 어떤 분이신지.”
* * *
다음 날 아침.
9시 정각에 민경원 사장은 팀장 회의를 소집했다.
변 팀장은 출근 전이다.
기다리다가 사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변 팀장은 왜 안 와?”
“아침에 시장 조사 갔다가 온다고…….”
“이 시간에 문 연 곳이 있어?”
“남대문 시장 들린다고 합니다.”
“빨리 오시라고 해! 사장님 기다리셔.”
15분 뒤에 변 팀장은 넥타이도 제대로 못 맨 채 나타났다.
“헉. 헉. 아니 왜 갑자기 아침 회의를 잡고 난리야.”
변 팀장은 책상 위에 가방을 던져놓고, 바로 사장실로 뛰어가려 했다.
“팀장님, 잠시만요.”
“응?”
난 그를 세우고, 단정해 보이도록 옷매무새를 만져주었다.
“강 대리? 왜 그래? 우리 아내도 안 하는 행동을…….”
“오늘 아주 중요한 회의가 될 것 같아서요.”
변 팀장과 눈이 마주쳤을 때, 난 씩 웃었고.
변 팀장도 눈치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얘기가 잘된 모양이구나?”
“네.”
“어이쿠~, 앞으로 강 대리를 상사로 모시게 되겠구먼.”
“…….”
“상관없으니까, 나 꼭 데려가야 해?”
“하하.”
변 팀장은 사장실을 향해 걸어가다가, 뭔가 생각난 듯 뒤돌아 말했다.
“아, 맞다. 딴 건 다 괜찮은데…… 나한테 반말만 하지 말아줘.”
“하하. 어서 들어가세요~.”
“정말이야. 심각해. 이건 꼭 지켜줘야 해.”
난 변 팀장의 등을 떠밀었고, 그제야 변 팀장은 사장실로 들어갔다.
회의는 꽤 오래 걸렸다.
1시간 뒤.
영업 1, 2팀장부터 똥 씹은 표정으로 사장실을 나왔고.
입이 나와서는 투덜대고 있었다.
―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 최근 실적만 봐? 그동안 쌓아온 건 무시하는 거야?
― 형님은 어떻게 동생을 젖히고…….
영업1 팀장 진일상사 에이스 김민석.
영업2 팀장 민경원 사장의 친동생 민경수.
이 두 사람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변 팀장을 사람 취급도 안 했었다.
영업 3팀이 촬영 1팀으로 바뀌었을 때 조롱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둘은 팀장이고.
변성준 팀장은 대표 이사, 즉 사장이다.
저벅. 저벅.
사장실에서 변 팀장이 걸어 나오는데.
풉!
변 팀장의 얼굴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
영문을 모르는 홍지아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강 대리님, 무슨 일 있어요?”
“하하. 글쎄다.”
“변 팀장님…… 사장실에서 걸어 나오는데, 뭔가 느낌이 달라 보이는데요?”
“그래?”
“네, 갑자기 뭐 용포라도 뒤집어쓰신 거 같은데? 묘하네.”
그렇다. 이상하게도 변 팀장의 몸에서 아우라가 번지는 것 같았다.
난 그저 내 일처럼 기분이 좋을 뿐이었다.
변 팀장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우리 팀을 향해 걸어오다가.
“음?!”
나와 눈이 마주쳤다.
변 팀장은 눈을 부릅떴고, 동시에 입에서 육두문자가 터져 나왔다.
“야이, 너, 강 대리! 이게 무슨 짓이야?!”
“하하하!”
변 팀장은 날 향해 달려왔고.
난 혀를 삐죽이 내밀고 도망쳤다.
새로운 시작
* * *
결국 도망다니다가 변 팀장에게 잡혔고.
그는 내 목에 헤드록을 걸며, 흥분하여 소리쳤다.
“난 강 대리 도와준다고 조언을 해줬더니, 왜 날 힘들게 하는 거야?! 응?”
난 변 팀장의 반응을 처음엔 재밌게 받아들였는데.
그의 불만은 진심이었다.
내 목을 조른 헤드록의 강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커컥. 티, 팀장님 목 좀…….”
“놔달라고? 안 놔~. 아니, 못 놔!”
“케켁.”
“조금만 더 버티면 정년인데…… 정년까지 버티는 내 꿈을 한순간에 짓밟아 버렸어!”
“아오~, 팀장님.”
난 결국 힘으로 그의 팔을 풀고, 벗어났다.
“어이쿠, 목이야. 장난이 심하시잖아요~.”
“장난 아닌데? 일로 와~.”
이번엔 그에게 허리를 붙잡혔다.
“내가! 어? 내가 왜 사장을 해야 하는 건데? 내 가족 챙기고,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에~!”
“아유, 팀장니임~!”
이번엔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벗어났다.
“강 대리! 자기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정말 왜 그러세요! 영전하시는 거잖아요.”
“영전은 얼어 죽을! 내가 원치 않는다고!”
그때 홍지아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소리예요? 우리 팀장님이 사장돼요? 그럼 민 사장님은 나가리?”
하여간 어린 친구가 단어 선택이 참…….
“홍지아 씨는 잠깐 입 좀 다물어. 내가 강 대리 다리 몽둥이 부러뜨린 다음에 설명해 줄게.”
변 팀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내게로 달려들려 했다.
진심으로 빡친 게 느껴졌기에, 난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팀장님! 제가 다 할게요!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제가 다 할 거니까! 진정 좀 해요!”
“하긴 뭘 다해? 일은 벌여놓고 책임은 나보고 지라고 하려는 거지? 사장이 원래 그런 자리니까?”
“책임도 제가 져요~. 조직은 설정하기 나름이죠! 팀장님이 사장이잖아요.”
“…….”
이 말에 변 팀장은 좀 잠잠해졌다.
“사장님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되는 거죠. 제가 다 하고, 책임도 질 거니까…….”
어차피 지금의 촬영 1팀도 내가 대부분의 일을 하고 있다.
이 팀 그대로 가면 되는 건데.
씩. 씩.
변 팀장은 거친 숨소리를 내며, 그대로 서 있다가.
휴우―.
한숨을 크게 쉬고는 말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강 대리가 내 계획을 다 망쳤어.”
“…….”
“근데 어쩌겠냐. 이미 벌어진 일. 하지만, 이거 하나만 약속해.”
“말씀하세요.”
“어디 가면 안 돼. 적어도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은 절대로 어디 가면 안 돼.”
“알겠어요. 약속할게요.”
“…….”
변 팀장은 이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런 약속 함부로 해도 돼? 좀 아깝지 않아? 자네 혼자서라면 훨씬 많이 벌 텐데? 내가 사장 언제까지 할 줄 알고?”
난 그 말에 웃으며 대꾸했다.
“괜찮아요. 돈이 전부는 아니니까요. 그리고…… 로또 1등도 출근한다던데요, 뭐. 이 정도야…….”
“뭐어? 그런 사람이 있어?”
“하하. 네.”
* * *
일주일 뒤.
창업식을 했다.
참석 인원은 나를 포함 총 5명.
기존의 촬영 1팀 외에 새로 온 경리 직원과 민경원 사장만 참석했다.
창업식이라고 해서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플래카드 하나 걸고 단체 사진 하나 찍었다.
영업 1, 2팀장도 초청은 했지만, 바쁜 일이 있다며 오지 않았다.
“회장님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변성준 사장의 인사에 민 사장은 오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회장님?”
“네. 자회사를 두셨으니 회장님이시죠. 저와 직책이 같으면 되겠습니까?”
“10명인 회사에서 회장은 무슨. 누가 들으면 비웃겠다. 그냥 사장이라고 불러.”
“아……. 네. 그게 편하시다면야.”
민 사장은 우리 사무실을 돌아보았다.
예전 ‘촬영 1팀’ 자리 그대로였다.
다만 우리가 있는 자리 전체를 천장까지 세션으로 구분해서, 완전히 독립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팀 자리가 구석에 있었으므로, 자리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들지는 않았다.
“잘되길 바라네. 그렇다고 너무 과하게 잘되지는 말고.”
민 사장은 솔직하다.
자회사가 너무 잘 되는 것도 어찌 보면 민 사장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
“네.”
“사명이 ‘제로백’이라고 했지?”
“아……. 정확하게 말하면 ‘제로백 컴퍼니’입니다.’
“그래. 제로백 컴퍼니……. 그럼 수고하게.”
“네.”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는 민 사장을 향해, 변 사장은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민 사장이 나간 뒤, 변 사장이 말했다.
“자, 다들 회의실로 모여.”
“…….”
조그만 공간 안에 간이 책상이 하나 있다.
그곳이 회의실이다.
변 사장은 직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고는 말했다.
“제로백 컴퍼니. 우린 0에서 시작하여 100까지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릴 것이다. 몸이 가볍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해. 강 대리도 있고.”
“…….”
“그렇다고 무리하진 마. 천천히 가도 100까지는 가는 거니까.”
서두른다는 말에 변 팀장이 사장 되고 태도가 달라졌나 하고 놀랐었다.
하지만…… 역시 변 사장다웠다.
“속도 조절은 내가 할 테니, 그냥 맡은 일 최선을 다하고, 잘못되면 알아서 책임지면 돼.”
“…….”
“우리 회사는 일인 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일하는 거야. 잘 되는 만큼 성과도 많이 챙겨 줄 테니까, 책임도 꼭 지도록 해.”
변 사장은 책임지라는 말을 강조했다.
“나 애가 둘이야.”
굳이 저런 말까지는 할 필요 없을 텐데.
나와 홍지아는 변 사장 스타일 아니까, 그러려니 하지만…….
새로운 경리 직원이 좀 신경 쓰였다.
“아, 맞다. 서로 얼굴은 알지?”
“…….”
변 사장은 경리 직원을 보며 말했다.
“최경리 씨, 소개 좀 하지? 이래서 좀 빨리 오라고 했잖아. 어색하잖아.”
“발령 날짜가 오늘이라서, 오늘 왔을 뿐입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어서 소개해.”
최경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얀 피부에 은테 안경을 썼는데.
차갑고 단정해 보이는 인상이다.
10명밖에 안 되는 회사. 당연히 얼굴은 알고 있었다.
이름과 직무가 매칭되는 특징 때문에 기억에 남기도 했고.
하지만, 워낙 조용해서 말을 나눠본 적은 거의 없었다.
“인사드립니다. 제로백 컴퍼니에서 경리 업무를 맡게 된 최경리라고 합니다.”
“…….”
그리고 자리에 앉았다.
이게 끝?
변 사장은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마디 했다.
“최경리 씨, 이게 끝이야? 뭐, 하고 싶은 말 없어?”
그녀는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말했다.
“공용 업무를 위해 쓴 비용은 반드시 영수증 첨부하여 정산 요청해 주세요. 영수증 없이는 인정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정산일은 매월 5일과 21일 두 차례입니다. 정산일 5일 전에는 주셔야 정산일에 입금될 것입니다.”
뭐야? 신개념인가?
하고 싶은 말이 일 얘기야?
근데, 변 사장은 그녀를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 차라리 내가 소개를 하는 게 낫지.”
변 사장은 피식 웃고는 물었다.
“최경리 씨, 올해 몇 살이지?”
“25입니다.”
“그래.”
변 사장은 나와 홍지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들었지? 최경리 씨는 올해 25세야. 홍지아 씨와 동갑이겠네. 우리 회사에서 일한 지는 햇수로 6년 차야. 학교 졸업하자마자 일 시작했거든.”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취업했다는 뜻이겠지.
변 사장은 말을 이어갔다.
“나랑은 예전에 1년 정도 함께 일한 경험이 있어. 일 처리 하나는 똑 부러져. 책임감도 강하고. 난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을 좋아하거든.”
“…….”
“좀 FM이고 매사에 진지한 편이라서…… 일하기가 아주 아주 좋을 거야.”
아주를 두 번 강조했다.
이 말은 조심하라는 의미로 들렸다.
“좋지만은 않으실 겁니다.”
생각하고 해준 말 같은데, 최경리가 그 말에 반기를 들었다.
아무런 표정 없이.
“자, 오늘 의미 있는 날인데. 회식해야지?”
“네!”
변 사장은 시계를 보더니 말했다.
“지금 2시니까. 4시에 출발하자. 늦지 않게 출발할 수 있도록 스케줄 관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나와 홍지아는 신나서 소리쳤고.
최경리는 핸드폰 알람을 맞추고 있었다.
* * *
띠리링~.
어디선가 알람 소리가 들렸다.
정확히 오후 4시.
“출발할 시간입니다.”
아직 못다 한 업무 때문에 약간 밍기적대고 있었는데.
옆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최경리가 굳은 얼굴로 내 컴퓨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리님, 출발할 시간이요.”
“어? 어. 알았어……. 지금 덮을게.”
회식 장소는 변 사장이 최경리에게 일임을 했었고.
우리는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봉규비어’
“…….”
뭔 회식을 이런 데서…….
“경리 씨~, 농담이지? 여긴 2차로 오는 곳이잖아.”
변 사장의 말에 최경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첫해는 예산을 최대한 아끼자고 하셨고, 가볍게 맥주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정하라고 하셔서, 이곳으로 왔습니다.”
“아니…… 그래도 정도가 있지.”
“이미 예약에 주문까지 다 해놨습니다. 들어가서 드시기만 하면 됩니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봉규비어로 들어갔다.
감자튀김에 소맥으로 마셨다.
소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빨리 안 취하면, 술값 많이 나온다고……. 예산 아껴야 한다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최경리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난 귓속말로 변 사장에게 물었다.
“사장님이 픽한 거 아니시죠?”
“맞는데? 내가 최경리 보내 달라고 했어.”
“아…… 정말요? 아무래도 평범해 보이질 않는데.”
너무 갑갑하다. 한 팀으로 일할 수 있을까?
“같이 일해 봤다니까. 우리 팀 궁합에 딱 맞는 사람이라고.”
“정말요?”
“그렇다니까. 날 믿어.”
변 사장은 피식 웃고는 맥주를 들이켰고, 그 사이에 최경리가 돌아왔다.
“이상하게 귀가 간지럽네요.”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자! 모두 잔 들어!”
술이 몇 순배 돌고 나니, 다들 긴장도 풀리고 분위기도 좋아졌다.
만날 보던 사람인데도, 새로운 길을 함께 개척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홍지아와 변 사장도 평소와 약간 다르게 보였었는데.
술 취하고 보니, 변함없는 내 동료가 맞다.
“제로백 컴퍼니를 위하여!”
“위하여!”
진일상사의 자회사.
직원 4명으로 이뤄진 ‘제로백 컴퍼니’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늘 편하게 마시고, 내일부터 제로백으로 달리는 거야. 알겠지?!”
“네!”
“하하.”
변 사장도 예전과 약간 달랐다.
분위기를 이끄는 데 좀 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전엔 술 마실만큼 마시고, 알아서 가라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직원들 단합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최경리의 대화를 최대한 이끌어내려고, 계속 질문을 던졌다.
최경리는 아무리 취해도 모든 대답에 단답형으로 일관했다.
“최경리는 남자 친구 있어?”
“없습니다.”
“한창 연애할 나이인데~, 외롭겠다.”
“혼자가 좋습니다.”
“경리 일 복잡하지 않아? 어쩌다가 그 직무를 시작했어?”
“시키니까 했죠.”
어쨌든 단답형이라도 대꾸는 해주니까.
최경리에 대한 것도 조금씩 알아갔다.
[뉴스 속보입니다.]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어갈 때쯤.
맞은편 벽 위에 걸린 TV에서 속보가 흘러나왔다.
[제4기 신도시 부지가 결정되었다는 국토부 발표 내용입니다. 경기도 균형 발전을 위해, 소외되어 왔던 경기 북부에 전철망을 확충하여…….]
변 사장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누군지 좋겠네. 아주 돈벼락 맞겠구만. 저기 땅값 싼 거로 알고 있는데.”
“하하. 그러게요.”
[4기 신도시에는 행정 기구 이전을 통해 적극적인 인구 분산 노력을…….]
이상하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데.
[특히 이곳, 4기 신도시 부지 중심 지역으로 관공서까지 들어설 예정입니다.]
그리고 자료화면이 나오는데.
파란 지붕에 빨간색 벽돌.
많이 본듯한 야대지.
[사업은 속도를 낼 전망이며. 시행일은…….]
그리고 자료화면에 스치듯 지나간 명판.
“풉!”
나도 모르게 입에 머금고 있던 맥주를 뿜었다.
‘아셀라 보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