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보여 주면 돼 (1)
* * *
“대리님이요?”
이정권 대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했고, 홍지아는 득의양양하게 웃었다.
“네.”
“아니, 엊그제까지만 해도……, 아~.”
그는 활짝 웃으며 날 돌아봤다.
“그새에 승진하신 거예요?”
“아……, 뭐, 그렇게 됐습니다.”
“이야~,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그럼 저랑 직급이 같네요?”
“…….”
대기업 대리.
우리 팀장……, 아니, 사장님도 고개를 숙인다.
아무리 대리여도 바이어다.
직급명만 같을 뿐, 나와는 완전 다른 사람.
띵동!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이정권 대리가 안을 가리켰다.
“자, 어서 타시죠.”
“아닙니다. 대리님 먼저.”
“에헤이. 어서 타세요.”
그가 등을 떠민 이후에 겨우 탔다.
엘리베이터가 안에는 우리밖에 없었고, 이정권 대리는 조용히 물었다.
“강 대리님 일 시작하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이제 5년 됐습니다.”
“아~, 저랑 비슷하시네.”
그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보통 중소기업이 좀 빠르지 않아요? 이번에 승진하신 거면 약간 늦은 거 같은데.”
“우리 회사 승진 기준이 좀 빡셉니다.”
홍지아가 말을 덧붙였다.
“우리 회사 대리님 중에서 강 대리님이 제일 젊어요.”
“아…….”
피식.
이정권 대리는 더 말하지 않고,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띵동!
“자, 따라오시죠.”
저벅. 저벅.
우리 회사와는 완전히 다른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에 홍지아는 탄성을 자아냈다.
“우와……, 멋지다.”
마치 산골 소녀가 서울 상경한 것처럼 너무 두리번거려서, 난 살짝 눈치를 주었다.
“홍지아 씨.”
그녀는 입을 삐죽이고는 목소리를 좀 낮췄다.
“이쪽입니다.”
이정권 대리가 패찰을 갖다 대자, 사무실 출입구로 보이는 유리문이 열렸다.
드르륵―.
“우와~.”
유리문 안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이번엔 나 또한 탄성이 나왔다.
굉장히 넓은 공간에 수많은 칸막이.
하지만 칸막이 간격은 널찍하다.
이 넓은 공간이 사람들로 꽉 차 있었고, 다들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깔끔한 세미정장 차림에 뭔가 귀태가 흐르는 사람들.
엄청난 규모와 깔끔한 모습.
그리고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여유까지.
그냥 딴 세상 같았다.
“대단하네요.”
홍지아도 마찬가지였는지, 그저 대단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10명짜리 가내 수공업 같은 회사에만 출근하다가, 이렇게 대규모로 일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다.
“하핫. 뭘 그렇게 멍하니 있으세요? 자, 저기 7번 회의실로 들어가 계시면 됩니다.”
“네…….”
회의실은 또 도대체 몇 개인가.
우리 회사는 한 개의 회의실을 서로 잡기 위해, 세 팀이서 매일 눈치싸움을 벌이는데.
회의실은 충분하다 못 해 비어 있는 곳도 보였고, 심지어는 회의실에서 혼자 앉아 업무를 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홍지아 씨, 어서 들어가자.”
“대리님……, 여기 너무 멋져요.”
“빛 좋은 개살구야. 우리 회사가 최고야.”
맘속으로는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후배 앞에서 다른 회사를 찬양할 수는 없었다.
“우리 회사가 여기보다 나아 보이는 게 하나도 없는데요?”
“왜…… 있잖아.”
“뭐가요?”
뭐냐고?
글쎄…… 우리 회사가 제이엠보다 나은 게 뭘까.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홍지아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 족 같잖아.”
“가족?”
홍지아는 수긍할 수 없다는 듯 얼굴을 갸우뚱했고.
난 그녀를 회의실 쪽을 향해 밀면서 걸어갔다.
“자자, 어서 들어가자.”
* * *
“아, 이 아저씨 또 기다리게 하네.”
홍지아는 시계를 보며 투덜거렸다.
“좀 기다리면 어때.”
째각. 째각.
홍지아는 지루해 보였지만.
최종 납품을 앞두고, 난 초조했다.
이정권 대리가 사람은 좋은데, 일에 있어서는 깐깐하고 요구 사항 많기로 업계에서 유명하다.
처음으로 촬영 컷을 납품하는 거라, 이 회사 취향에 맞을지, 계약을 다시 생각해 보자는 건 아닐지.
별생각이 다 들었다.
덜컹.
10여 분 정도 기다렸을 때쯤.
이정권 대리가 들어왔다.
“오늘 자꾸 기다리게 하네요.”
“아닙니다.”
이정권 대리가 자리에 앉은 후, 난 바로 노트북을 열었다.
“셀렉하신 사진 보정 컷 보여드리겠습니다.”
“아, 네. 메일로 보내셨나요?”
“아직이요. 지금 컨펌 받은 후에 보내 드리려 합니다. 혹시 더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까 봐요.”
“아, 네. 알겠습니다.”
위이잉―.
내 노트북은 격렬한 소리를 내며 부팅을 시작했고, 곧이어 화면이 켜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이정권 대리가 물었다.
“이거 2012년 형이고…… 하드디스크도 HDD일 텐데. 이렇게 부팅이 빠르지 않을 텐데.”
왜 이렇게 잘 알지?
의아한 마음에 쳐다보니 이정권 대리는 쑥스럽게 웃었다.
“저 학생 때 썼던 노트북이거든요. 너무 성능이 거지 같아서 기억에 오래 남네요.”
“아……, 네.”
내가 포토샵을 클릭하자, 프로그램도 바로 작동했다.
“포토샵이 이렇게 빨리 열릴 리가 없는데. 참 신기하네. 그 노트북이 맞는 거 같은데.”
알고 있다.
속초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내 노트북은 부팅하는 데 빨라야 20분은 넘게 걸리고.
사용 중에 다운되는 것도 일상이었다.
하지만, 금손이 된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
이정권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고, 어떻게 대답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홍지아가 옆에서 갑자기 거들었다.
“그때~ 사무실에서 리폼하셨잖아요. 제가 옆에서 봤는데, 노트북 잘 다루시더라고요.”
난 살짝 놀라서 홍지아를 바라봤고, 그녀는 날 향해 찡긋 윙크를 보냈다.
“아~, 강 대리님이 손재주가 좋으시구나.”
그제야 이정권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에 집중했다.
“2012년형을……. 알뜰하시네. 그냥 하나 사고 말지.”
클릭.
팟!
로고가 보이는 새하얀 양말.
음영 하나 보이지 않는 고급진 가방.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줄 것 같은 손목 아대.
사진을 하나씩 넘길 때마다, 이정권 대리의 동공은 커지고 있었다.
“오…….”
난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 뭐 좀 더 손보고 싶으신 곳 있으시면…….”
꿀꺽.
난 그의 입술만 바라봤다.
“아니요.”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완벽합니다. 대만족입니다.”
“네?”
“뭐 더 손볼 거 없겠는데요. 이대로 보내시면 되겠어요.”
“…….”
뭐야?
이렇게 쉽게?
“하하. 참나. 그때 스터디 룸……. 아니지. 스튜디오에서는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았나 싶어서 오늘 좀 꼼꼼하게 보려 했는데.”
이정권 대리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냥 기가 막히네요. 제 생각에는 프리랜서로 일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하하.”
“가, 감사합니다.”
해냈구나.
이대로만 가면 되겠어.
앞으로 돈 길만 걸으면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
이정권 대리는 날 향해 환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연간 계약했잖아요. 수시로 촬영할 수 있는 거죠?”
“네?”
“좀 갑작스럽긴 하지만…… 오신 김에 몇 가지만 촬영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난 씩 웃으며~ 힘차게 대답했다.
“네! 물론입니다!”
* * *
이정권 대리를 따라 사무실 깊숙이 들어갔다.
긴 복도 끝에 넓은 통유리 벽면으로 된 별도의 공간이 나왔다.
그 안쪽에는 중년의 여 직원 1명과 젊은 여 직원 2명이 있었다.
“차장님, 안녕하세요.”
이정권 대리는 중년의 여성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어, 이 대리님. 웬일이에요?”
목소리가 까랑까랑하고, 얼굴에 피곤이 찌들어 있다.
뭐랄까……. 까칠하고 메말라 보이는…… 마른 장작 같았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키즈 신발 몇 개 촬영 못 한 거 있잖아요.”
“있죠. 촬영 날 이 대리가 깜빡하고 안 가지고 간 거.”
“하핫.”
까칠한 그녀의 대답에도 이 대리는 연신 웃으며 굽실거렸다.
“오늘 마침 촬영 기사님이 방문해 주셔서요. 모시고 왔습니다.”
“흠…….”
마른 장작은 날 위아래로 훑었다.
“되게 젊으시네?”
세상을 어떻게 사셨길래, 눈빛이 저렇게 전투적이지.
이 대리는 내게 그녀를 소개했다.
“강 대리님, 인사 나누세요. 저희 신발디자인팀 전미연 차장님이세요.”
“안녕하십니까. 진일상사 촬영 1팀 강태평 대리라고 합니다.”
“네, 안녕하세요.”
전미연 차장은 고개만 까닥하고는 이정권 대리에게 물었다.
“이번에 연간 계약했다는 그 촬영팀이에요?”
“네, 맞습니다.”
“흠……, 난 지난번 업체가 잘 맞았었는데.”
“…….”
이정권 대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신 내가 대답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어머. 패기 쩐다~.”
전미연 차장은 피식 웃더니.
“태도는 좋네요. 경험이 많으신가 봐요.”
이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내 주변을 기웃거리더니.
“촬영 장비는 가져오신 거예요?”
“아, 맞다.”
이정권 대리도 생각났다는 듯 내게 물었다.
“카메라 가져오셨어요?”
“물론이죠.”
난 옆 가방에서 얇고 컴팩트한 디지털 카메라를 꺼내었다.
“무사가 검을 안 들고 다녀서야 되겠습니까. 하핫.”
“어머.”
이번엔 홍지아가 놀라서 날 바라봤다.
난 민망해서 그 눈빛을 피했다.
방금…… 나도 모르게 영업 멘트가 나왔다.
어느새 변 팀장의 영향을…….
“호호. 근데 검이 좀 무뎌 보이네요. 무라도 썰겠어요?”
“…….”
“하하. 전 차장님.”
난 카메라를 케이스에서 꺼내어, 손가락 사이에 끼고 포즈를 잡았다.
수차례 검증을 거쳤었고.
이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말이 필요 없다. 그냥 보여주면 된다.
“고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습니다.”
“와아~.”
이정권 대리는 내게 엄지를 치켜세웠고, 전 차장은 못 미더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찰칵! 찰칵!
“오케이~ 홍지아 씨! 이번엔 신발을 던져볼래?”
“창가 쪽으로요?”
“어디든 상관없어!”
휙―.
찰칵! 찰칵!
나와 홍지아는 촬영에 집중했고.
신발은 다섯 켤레밖에 되지 않아서, 10여 분 만에 촬영은 끝났다.
찰칵! 찰칵!
“오케이~, 컷!”
휴우―.
난 카메라를 내려놓고, 손목을 풀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제대로 보여 줘야 한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좀 더 심혈을 기울여서 촬영했다.
“끝난 거예요?”
“네, 차장님. 보시죠.”
LCD 화면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고.
전미연 차장은 점점 입이 벌어졌다.
“대애박.”
다른 여 직원들도 촬영된 사진을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 사진 퀄리티 뭐야?
― 이거 우리가 제작한 신발 맞아?
전미연 차장은 할 말을 잃은 듯.
그저 눈만 끔뻑거렸다.
“뭐……, 좀 더 찍어드릴까요?”
그녀는 손톱을 뜯더니.
“아~, 너무 아쉽네.”
“네?”
“메인 상품이 있는데, 아직 준비가 안 돼서…….”
그녀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 노란 신발이 하나 있었다.
“색종이 콘셉트여서, 종이학을 데코로 해서 찍어야 하거든요. 접는 데 시간이 걸려서……. 그게 아직 준비가 안 됐어요.”
그러고 보니 내가 왔을 때부터 두 여 직원이 웅크리고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는데.
그게 종이학 접는 거였구나.
“몇 개나 더 접어야 하는데요?”
“음……, 아직 20개 정도는 더.”
20개?
난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홍지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날 향해 싫다는 듯 살며시 도리질했다.
“저희가 접는 거 도와 드릴게요. 온 김에 마저 촬영하고 가죠, 뭐.”
“정말요? 말씀은 고마운데, 이거 접기 힘든데……. 가르쳐 드릴 시간도 없고.”
마른 장작 전미연 차장은 촬영된 사진을 본 후 태도가 확 달라져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 접을 줄 알아요. 한 장 줘보실래요?”
전미연 차장이 건넨 색종이를 받았다.
흠…….
휴우―, 난 상상했다.
해 질 녘. 붉은 노을이 타오르는 산등성이 위로 노란색 학이 날아간다.
구름 속에서 금손이 나와 학에 닿자.
날개부터 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종이학…….
내 손에 닿는 순간. 그는 황금 종이학이 되었다.
잠시 후.
“저……, 이렇게 하면 되나요?”
“꺅!”
여 직원들은 내가 건넨 종이학을 보고 까무러칠 듯 놀랬다.
― 뭐, 뭐야. 움직이는 줄 알았잖아.
― 아니……, 어떻게 이럴 수 있죠?
― 종이학 맞아?
내가 만든 종이학을 본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정권 대리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돈 주고라도 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