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효과 (2)
* * *
난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분명 날 콕 찝어 말했다.
민 사장이 저런 다정한 모습이라니.
“홍지아 씨?”
“…….”
뭔가에 정신 팔려 있는지 대꾸가 없었다.
“제가 주임님은 블루칩이라고 했잖아요.”
“…….”
“사장님이 완전 눈도장 찍으신 거 같은데요?”
이제 10시가 다 되어가는데.
변 팀장은 아직도 올 기미가 안 보이지 않았다.
오늘 유독 시장 조사를 길게 하네.
며칠간 일 좀 열심히 했다, 그건가.
“강태평 주임~.”
짧은 스포츠 머리를 하고, 진일상사에서 유일하게 귀태가 보이는 한 남자가 날 향해 다가왔다.
“엇, 팀장님, 안녕하십니까.”
“하하. 드디어 보는구만?”
영업 2팀장, 민경수.
“네, 팀장님. 본의 아니게 인사가 늦었습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이 인사했다.
“뭘~, 내가 출장 중이라 자리 비워서 그런 건데, 뭐. 강 주임 어제는 하루 종일 사무실에 없더라고? 빨리 만나고 싶었는데.”
“아, 네. 어제 저희 팀 외근이었어요.”
근데…… 빨리 만나고 싶었다고?
“나랑 차 한잔할 텐가? 지금 바쁘면 오후에라도.”
“네?”
이상한데. 이렇게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미심쩍게 바라보자, 민 팀장은 웃으며 말했다.
“살아 돌아온 얘기 좀 들어보고 싶어서 그래~. 오랜만에 봤는데, 직장 동료끼리 차 한잔 못 하나?”
“아……, 네.”
이전엔 그는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었다.
민경수 팀장.
그는 진일상사 민경원 사장의 친동생이다.
작은 중소기업이다 보니, 알게 모르게 회사 내에 민 사장 가족들이 포진해 있는데.
그중에 명확하게 눈에 드러나며, 실력 행사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오전에 사장님께 중요 보고를 드릴 게 있어서요. 그럼 오후에 어떠십니까?”
“보고?”
민 팀장은 우리 팀 자리를 흘겨보고는.
“변 팀장님은 어디 가셨어?”
“모르겠습니다. 잠깐 자리 비우셨습니다.”
피식.
그는 말 안 해도 안 다는 듯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장님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어. 그럼 점심 먹고 잠깐 봐.”
“네, 알겠습니다.”
그는 뒤돌아 갔다.
민 팀장은 절대로 의도 없는 호의를 내비치지 않는다.
근데…… 뭐, 차 한잔하는 게 별거 아닌 거긴 하지.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구는 건가 싶은 생각 들 때쯤.
“아이고~, 차가 엄청 막히네~.”
10시가 넘은 시각.
변 팀장은 환하게 웃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요즘 패딩 맨투맨이 뜨는 거 같더라~. 매장에 많이 깔렸더만.”
“…….”
묻지도 않은 얘기를 하며.
시장 조사를 하고 온 티를 일부러 많이 냈다.
어느 타이밍에 말을 잘라야 하나 할 때쯤.
“팀장님.”
“응? 홍지아 씨, 왜?”
홍지아는 참을성이 없었다.
변 팀장이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바로 말을 잘랐다.
“사장님이 아침에 찾으셨어요. 제이엠인터내셔날 계약 건 얘기 들으신 거 같던데.”
“응~, 그래?”
변 팀장은 별로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팀장님께서 말씀하셨나 봐요? 어제 오후 늦게 계약된 건인데 벌써 알고 계신다는 게.”
그는 피식 웃더니.
“제이엠과 우리를 처음 연결시켰던 사람이 사장님 아니냐. 제이엠과 관련되는 모든 일은 사장님 귀에 들어간다고 생각해야 해.”
“…….”
“그 정도는 예상 가능하잖아?”
오……. 안 어울리게 예리한데?
“자기들도 제이엠과 상대할 때는 특히나 더 조심하라고. 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판이라는 게 무시 못 해.”
“아, 네.”
“그럼 들어가자.”
변 팀장은 바로 사장실로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금 오셨는데, 뭐 준비 안 하셔도 돼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준비는 무슨. 이미 다 알고 계실 텐데.”
나와 홍지아는 헐레벌떡 변 팀장의 뒤를 따라갔다.
덜컹.
변 팀장은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예전과 다르게 자신감이 있었다.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 * *
“어~, 변 팀장 왔나.”
민 사장 또한 목소리 톤이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항상 쓰레기 보듯, 짜증 난다는 듯, 짓이기듯 변 팀장을 대했었는데.
지금은 완전 달랐다.
“네~, 좋은 아침입니다.”
변 팀장 또한 항상 죄지은 사람처럼 민 사장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었는데.
지금은 얼굴에 자신감이 넘쳤다.
“촬영 1팀이 한 건 했다던데?”
“하하. 벌써 들으셨습니까?”
“그럼~, 들었지! 하하.”
민 사장은 목 젖이 보일 정도로 큰 소리로 웃었다.
“이야~, 어떻게 팀 구성 하자마자, 이런 성과를 올렸어?”
“에이~, 사장님께서 이미 반쯤 성사시켜 놓으신 거 마무리만 했을 뿐인데요~. 별거 아닙니다~. 하하.”
변 팀장은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겸양을 떨며 말했다.
민 사장은 손사래를 치며 대꾸했다.
“이 사람아. 난 끽해야 제안서에 있는 사진 몇 장 팔고 끝내는 줄 알았지. 어떻게 천만 원이 넘는 거래를 성사시켰어어~. 아오~, 이뻐!”
“…….”
“변 팀장이 이 갈았나 봐? 나 진짜 깜짝 놀랐어?! 새 팀을 짜자마자, 하루 만에 이런 성과를 낸다? 창사 이래 처음일세! 이 멋진 사람아~”
이건 좀…….
태도가 달라져도 정도가 있지. 민망하지도 않나?
민 사장이 아무리 돈독에 오른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의 칭찬이 과해질수록 도리어 거부감이 들었다.
“자네들은 회사의 영웅일세. 새로운 길을 개척한 진일 히어로.”
“…….”
하지만 변 팀장은 사장의 성향을 잘 알아서인지, 태연하게 응대했다.
“사장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래. 기대하겠네.”
민 사장은 홍지아를 바라봤다.
“홍지아 씨, 입사한 지 이제 1년 됐나?”
“1년 넘었습니다.”
“그래, 아직 2년은 안 된 거지?”
“2년 거의 다 되어 갑니다. 2년 된 것과 진배없습니다.”
홍지아는 민 사장의 의도를 알고, 적극적으로 대꾸했다.
승진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 지금 처럼만 열심히 하면…….”
“전 언제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민 사장은 더 대꾸하지 않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강 주임.”
“네, 사장님.”
“내가 자네 활약은 익히 들었어.”
“운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자네 이제 연차가 되기도 했고. 오늘부터 대리 해라.”
“네?”
이 회사는 승진을 잘 안 시켜 준다.
제때에 대리를 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성과달성을 통한 승진 말고, 딱 한 가지 다른 루트가 있는데.
그건 사장 지시의 특진.
“변 팀장, 대리시켜도 되겠지?”
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고.
그런 날 향해 변 팀장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강 대리! 자네 아직 성과로는 부족해. 앞으로가 기대돼서 승진시키는 거니까. 열심히 해 줘야 해.”
“아……, 네, 네. 알겠습니다.”
난 당황하여 얼버무리듯 대답하고 말았다.
“오케이! 오늘 발령 낸다. 나가 봐~.”
“감사합니다!”
* * *
“강 대리~, 축하해~.”
변 팀장은 내 어깨를 두들기며 활짝 웃었고.
“대리님, 축하해요.”
홍지아도 뭔가 좀 아쉬운 표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고맙습니다. 덕분입니다.”
“덕분은 무슨. 자기가 잘해서 그런 거지. 정말 최근 일은 나도 깜짝 놀랄 정도니까. 사람이 분위기도 많이 달라지고.”
그리고 변 팀장은 내 옆구리를 콕 찌르며 은근슬쩍 말했다.
“어디 안 갈 거지?”
“네?”
“에이~, 알면서.”
“…….”
“앞으로도 잘해 줄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우리 팀에서 쭉 같이 있자~.”
아…….
그 얘기를 들으며 생각났다.
진일상사는 승진 시 순환 근무 기회를 준다.
어차피 3개 팀밖에 안 되고, 하는 일도 비슷하기에 승진자에게 다른 팀에서 일해 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물론 본인의 선택이며, 팀에 그대로 남아도 상관없다.
“설마…… 다른 팀 간다고 하진 않겠죠.”
옆에서 홍지아도 눈을 흘기며 중얼거렸다.
“에이~, 무슨 소리야. 벌써 밥 시간이네. 식사하러 가시죠~.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오~, 강 대리!”
“어머! 좋아~. 가요!”
난 활짝 웃으며 말했다.
“중국집 어떠십니까?”
“좋지~.”
“하하. 오늘 탕수육 하나 들어갑니다~.”
“얏호!”
홍지아가 제일 좋아했다.
점심 식사에 커피까지 쏘고.
이 정도 했으니, 승진 턱 내라고 하진 않겠지.
“하하. 아~, 오늘 출혈 심했네.”
사무실로 들어오며 난 최대한 생색을 냈다.
“강 대리~, 잘 먹었어~.”
“저도요~, 대리님~.”
“하하. 네.”
변 팀장은 달력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승진했는데, 저녁을 한번 먹어야지?”
“날짜만 알려주세요. 메뉴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당~.”
“오~.”
“소고기 어떠세요?”
하아…….
홍지아, 너 승진할 때 두고보자.
너도 얼마 안 남았어.
“하하, 난 좋지. 강 대리는 어때?”
“저, 저도. 뭐, 좋죠~. 하. 하.”
띠링. 메시지.
[강 대리, 큐브 빌딩 1층 커피숍으로 와.]
영업 2팀장 민경수였다.
오늘 점심 식사 후에 만나기로 했었다.
근데…… 내가 대리된 걸 어떻게 알았지? 벌써 소문이 났나?
하긴 작은 회사니까.
* * *
“강 대리~.”
민경수 팀장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아침에 봤는데, 뭘 또 인사를 해.”
그는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들겼다.
“승진 축하해.”
“감사합니다. 근데 언제 아셨어요?”
“자자. 우선 주문부터 하지. 뭐 마실래?”
난 살짝 눈치를 봤다.
“내가 살 거야. 가격 생각 말고, 마시고 싶은 거 먹어.”
“아이스 라벤더 카페 브레베 마시겠습니다.”
민 팀장은 메뉴판을 한참 살피다가.
“여기에 그런 음료도 있었어?”
“있더라고요.”
“취향 아주 고급지네.”
“감사합니다.”
마셔본 적 없다.
이런 기회를 통해 한번 마셔보고 싶었다.
민 팀장은 직원을 향해 말했다.
“이 친구는 방금 말씀드린 거 주시고요. 저는…….”
그는 슬쩍 한번 나를 보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숏 사이즈로 주세요.”
“…….”
잠시 후, 난 음료를 픽업해 왔다.
“편하게 마셔. 편하게.”
화려하고 커다란 내 커피와 달리, 너무나 소박하고 조그만 민 팀장의 아이스 아메리카노 숏 사이즈.
이럴 거면 먼저 시킬 것이지.
“커피 화려하게 생겼네. 편하게 마셔, 편하게…….”
“네……, 잘 마시겠습니다.”
우리는 음료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고.
생각보다 민 팀장이 나에 대해 많이 아는 것 같아서 놀라웠다.
“그때 속초 절벽에 오후 4시쯤 떨어졌잖아. 그리고 이틀 뒤 새벽 4시에 발견됐으니. 그건 정말 기적이라니까.”
“…….”
“어디 다치지 않은 것도 그렇지만, 그 시간을 기절한 상태로 버텼다는 것도. 거기다가 마지막에 사람을 살린 것까지.”
“감사합니다. 저도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난 그날 일을 듣는 게 영 불편하다. 듣고 싶지도 않고, 관련해서 물어보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3자에게는 신기한 일일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끔찍한 일이다. 많은 희생자도 있었고.
“그러니까, 생존확률이…….”
“제가 대리 승진한 건 어떻게 아셨어요?”
그 얘기를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난 말을 자르고 물었다.
“응?”
민 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아아~.”
후루룩.
그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고는 씩 웃었다.
“난 어제 알았는데?”
“네?”
나도 승진 소식을 오늘 들었는데, 어제 얘기를 들었다니.
더군다나 아직 정식 발표는 하지도 않았는데.
“어제 형님이 저녁 먹다가 얘기해 주시더라고. 강 대리 내일 승진시킬 생각인데, 예의주시하라고.”
형님……. 형님이라면.
“민경원 사장님께서 말이야.”
그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께서는 항상 다음을 준비하려면 쓸 만한 인재를 옆에 두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거든.”
그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날 내려다보았다.
마치 선택받은 걸 감사하라는 듯.
“순환 근무 신청해서 영업 2팀으로 와. 받아 줄게.”
승리해야 하는 이유
* * *
짧은 스포츠 머리.
반들거리는 피부.
자신감 넘치는 얼굴.
“왜? 놀랐어?”
“…….”
민경수 영업 2팀장.
그는 진일상사 민경원 사장의 친동생이다.
진일상사에 있는 사장의 가족 중에 가장 가까운 사람.
이 회사의 이인자이며, 민경원 사장의 뒤를 이을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민경원 사장이라면 80세 넘어도 사장 자리를 유지할 것 같은데…….
“아, 네, 좀 놀랐습니다.”
“그래,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지. 난 말 돌려서 하는 거 싫어해서.”
“네…….”
“이제 나랑 한배를 탈 사람이니까, 좀 더 얘기해 줄까?”
“네? 아, 아니, 저.”
민 팀장에게 내 대답은 필요치 않아 보였다.
“요즘 영업 1팀장이 야망을 보이더라고. 최근 반짝 성과 좀 올렸다고 말이야. 아, 난 자기네 팀장님은 좋아해. 분수를 알고 회사 생활 하시잖아.”
“…….”
“형님은 1팀장과 나를 경쟁시키고, 스스로를 입증하라고 날 압박하고 있거든.”
“아……, 네.”
“그래서 지금 능력 없는 팀원들은 교체하고, 팀 구성을 다시 하려고 계획하고 있어.”
왜 우리나라 리더들은 문제가 생기면, 자신으로부터 찾으려 하질 않을까.
설령 팀원들이 문제가 있더라도, 그게 리더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해보면 안 될까.
예전엔 방관자처럼 회사 생활을 했다가, 이제 가까이서 들여다보려 하니 부조리가 참 많아 보였다.
“1팀장은 욕심이 과해. 자기가 잘나 봐야, 혈통을 어쩔 수는 없거든. 어디 로열 패밀리한테…….”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짝 살핀 후 말했다.
“훔. 이제 같은 팀 될 거니까 자기한테는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총직원 수 10명인 회사.
이런 조그만 회사에서 로열 패밀리…… 뭐, 그게 대수라고.
“내가 정권을 잡으면, 자네를 반드시 중용할 테니까. 앞으로 힘 좀 써줘.”
이 조그만 회사에서도 정치질은 펼쳐진다.
조그만 회사가 가족 같다고?
글쎄…… 다른 곳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건 좀 ‘가좆’ 같다고 생각했다.
“저…… 팀장님.”
“응?”
신나게 떠들고 있는 그의 말을 잘랐다.
“전 팀을 이동할 생각이 없습니다.”
“……. 뭐어?!”
민 팀장의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다, 다시 말해봐. 왜에?”
“저는 촬영 1팀에 있고 싶습니다. 제가 촬영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요. 우리 회사에서 촬영팀은 현재 우리 촬영 1팀밖에 없으니까요.”
“…….”
‘난 당신 같은 리더 밑에 있고 싶지 않고, 이 조그만 회사에서 정치질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회사 생활은 해야 하니까.
“제안해 주신 건 영광이고, 너무나 감사하지만 영업 2팀은 저에게 과분한 자리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민 팀장의 표정을 보니,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 한 듯했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 버려서, 민망할 정도였다.
난 분위기를 풀기 위해, 그가 궁금해했던 얘기를 꺼내려 했다.
“아까 생존 확률 말씀하셨죠? 저 병원에 있을 때 기자가 했던 얘기 들려드릴까요.”
“아니야. 됐어.”
민 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내가 한 얘기는 못 들은 거로 해줘. 1팀장 얘기도.”
“아……, 네.”
“그럼 먼저 일어날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 * *
― 오~, 강 대리다.
― 승진 축하해요~.
― 대단하네. 복귀하자마자.
민 팀장과 티타임을 마치고 들어오니, 사무실 분위기는 완전 달라져 있었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이지만, 다들 일어나서 축하해주고.
일부 사람은 내게 다가와 악수를 건네며 덕담을 해주었다.
“강 대리, 정말 축하해.”
“감사합니다.”
영업 2팀 선배의 축하 말에 난 활짝 웃었다.
― 강 대리님네 팀장님은 진짜 좋겠다.
― 이번에 제이엠이랑 2천만 원 오더 체결했다며.
― 강 대리가 맹활약했다던데.
― 그러니까 단방에 특진했겠지.
난 연신 감사 인사를 하며 겨우 내 자리로 들어왔다.
우리 회사는 규모가 작다 보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크게 느껴진다.
“하하, 강 대리!”
자리로 돌아오자, 변 팀장이 웃으며 반겼다.
“어디 갔었어? 대리 됐다고, 벌써부터 시장 조사 다니는 거야?”
사무실을 나갈 때는 2시였는데, 벌써 3시를 좀 지나고 있었다.
“아닙니다. 잠시 미팅이 있었습니다.”
영업 2팀장을 만났다는 얘기를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변 팀장은 더 묻지 않았다.
“그래. 그래. 일이 있었겠지.”
그러면서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촬영 1팀이 위치한 곳은 가장 끝 코너 쪽이다.
어두운 곳. 햇볕이 들지 않는 곳.
안 그래도 성과 때문에 안 좋은데.
구석진 공간의 어두움이 촬영 1팀의 분위기를 더 암울하게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구석진 공간이 아늑하게 느껴졌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지면서, 변 팀장과 홍지아의 표정도 달라졌다.
― 도대체 특진이 얼마 만이야.
― 민경수 팀장 이후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팀에 특진자가 있다는 것.
그건 그 팀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다.
“강 대리님.”
“응?”
홍지아가 공손한 태도로 날 불렀다.
“어, 얘기해.”
“이 보고서 점검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녀는 어제 제이엠과 미팅했던 보고서를 들고 있었다.
“그래, 이리 줘. 근데 왜 안 어울리게 다나까야?”
“…….”
항상 발랄하게 반말 비슷하게 존대하던 애가.
갑자기 극 존칭어를 쓰니, 어색했다.
“저보다 두 계급 위시니까요.”
“뭐어?”
홍지아는 본인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진짜? 겨우 그 이유야?
하여간 보면 볼수록 홍지아는 특이한 구석이 있다.
홍지아가 작성한 보고서를 살펴보았는데, 군더더기 없고 나쁘지 않았다.
난 보고서를 덮어 두고 변 팀장과 홍지아를 바라보았다.
변 팀장은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고.
홍지아는 눈을 부릅뜨고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참……, 이게 큰 거였네.”
그깟 2천만 원 매출이 뭐라고.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다니.
내가 잘하니까, 내가 속한 곳이 달라진다.
‘그래, 이 금손이라면…….’
가진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자.
앞으로 나는 이기는 싸움만을 할 것이다.
내 운명은 이제 완전 달라졌다.
“변 팀장님!”
난 큰 소리로 변 팀장을 불렀다.
“응?”
“올해 열심히 해서, 우리 팀이 매출 1등 한번 해보죠!”
“오~.”
바닥도 보통 바닥이 아니기에.
영업 1, 2팀과의 차이는 지금 너무나 크다.
“올해 반년밖에 안 남았는데? 근데 좋지~. 하지만 1등이 아니어도 괜찮아~.”
“하하. 전 1등을 해야겠습니다.”
홍지아는 두 손을 모으고 들뜬 얼굴로 날 바라봤다.
“전 온몸 바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강 대리님.”
기대 가득한 얼굴의 두 사람.
기분 좋다. 이들을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세상에 나가겠다.
* * *
“캬~, 기가 막힌다.”
제이엠인터내셔날에서는 원본 사진 중 선택해서 알려주었고.
난 해당 사진들을 포토샵으로 보정하였다.
변 팀장은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원판만 봐도 장난 아닌데, 보정을 하고 보니 어마어마 하구만.”
“하하. 그래요?”
“그래~, 이야~, 강 대리! 진짜 장난 아닌데?”
그는 내 어깨를 두들기며 웃었다.
“어째 포토샵까지 이렇게 잘 다뤄? 완전 금손이야! 금손! 하하!”
찔끔.
그의 ‘금손’이라는 말에 난 살짝 놀랐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쓰일 수 있는 단어지만.
사실 난 진짜 금손이니까.
“하하. 뭘요~. 부끄럽네요.”
난 보정한 사진을 저장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저번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그동안 왜 그렇게 회사 생활 한 거였어?”
“네?”
“이 정도로 재능이 많았으면, 5년간 회사 생활…… 씹어 먹고도 남았을 텐데.”
“…….”
“이건 일부러 숨겨 왔다고밖에 볼 수 없거든. 왜 그런 거야?”
홍지아도 궁금했는지 일하다 말고 물끄러미 날 바라봤다.
“음…… 그냥 회사 생활의 의미를 찾지 못했었습니다.”
“응?”
“봉급 생활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요. 팀장님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젠 그렇게 생각 안 하니까요.”
“지금은 어떤데?”
“회사 생활 의미를 찾았죠.”
“무슨 의미?”
“그건…… 두고 보시면 압니다. 하하.”
승리의 기쁨을 알게 되었다는 것.
내가 잘되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행복해한다는 것.
이걸 맨정신에 말하기는 어려웠다.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저 이제 가보겠습니다.”
보정 사진 전달 건으로 제이엠인터내셔날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래. 그래. 수고하고 조심히 다녀와.”
홍지아도 가방을 챙겼다.
“어? 홍지아 씨도 가려고?”
“그럼 촬영 기사 가는데, 보조 기사가 안 따라가요?”
“지금 촬영하러 가는 거 아닌데…….”
그녀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소지품을 챙겼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늦으면 거기서 바로 퇴근해~.”
“네!”
제이엠인터내셔날 사옥.
휘황찬란한 로비에서 우리는 이정권 대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참……, 뭔 회사 로비가 호텔 같냐. 여기서 자도 되겠다. 우리 집보다 더 좋네.”
“대리님, 그런 건 마음속으로 얘기하세요. 주변에서 들어요.”
“들으면 어때.”
난 힐끔 홍지아를 바라봤다.
“뭐 하러 따라왔어?”
“대리님한테는 보조기사가 필요하다니까요.”
“치. 일하기 싫어서 따라왔구만.”
“아니거든요?”
“전철로 와서 심심했지? 회사 복귀할 때는 시티백으로 갈까?”
“아우~, 싫어요!”
“하하.”
손사래 치는 홍지아를 보며 웃었다.
그때.
“오래 기다리셨죠?”
이정권 대리가 나타났다.
“죄송합니다. 미팅이 늦게 끝나서.”
미리 약속을 잡고 와도, 대기업 바이어를 기다리는 건 아주 일상적인 일이다.
30분 정도 기다렸으니, 이 정도는 얼마 안 기다린 것이다.
1시간 넘게 기다렸다가 만나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일도 다반사니.
“올라가시죠.”
그는 방문자용 패찰을 내게 주었다.
“네?”
그는 직원들만 통과하는 게이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사무실에서 같이 좀 봤으면 해서요.”
우리 진일상사에는 보안 시스템 따위는 없다.
그냥 돌리는 열쇠로 책상 서랍 잠그는 것 정도.
홍지아도 설레는지 얼굴이 상기되었다.
“아, 근데 방문자 패찰이 하나밖에 없는데.”
이정권 대리는 홍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이면 되니까, 홍지아 씨는 여기서 기다리실래요?”
“…….”
홍지아는 얼굴이 붉어졌다.
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이 대리님.”
“네.”
“홍지아 씨, 같이 가야 합니다.”
“네?”
“한 팀이거든요. 같이 있어야 일이 됩니다.”
“…….”
“일하러 여기까지 왔는데, 로비에서 혼자 뭐 하겠습니까. 같이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이정권 대리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데스크로 가서 뭔가를 말하고는 방문자용 패찰을 하나 더 들고 왔다.
“홍지아 씨, 받으세요. 사전에 방문 인원수를 얘기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안 되거든요. 전 당연히 강태평 주임님 혼자 오는 줄 알았죠.”
난 그를 따라 들어가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앞으로는 방문 인원수를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별말이 없으면 두 명으로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네.”
띡!
마지막으로 홍지아가 개찰구를 들어왔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어……, 이 대리님, 한 가지 잘못 알고 계신 게 있는데.”
“네?”
이정권은 홍지아를 돌아보았다.
“이제 강태평 주임이 아닙니다.”
“…….”
“강태평 대리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