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이상하다 (2)
* * *
“리모컨이요?”
제이엠 직원은 잘 못 들었나 싶어서 되물었다.
“오래된 제품이라 사양이 안 좋은 거라서…… 리모컨이랑 아무런 상관없을 텐데요?”
난 지그시 그를 바라봤다.
“일단 한번 줘보세요.”
난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고, 직원은 김성수 부장의 눈치를 한번 살핀 후 리모컨을 건네었다.
“여기요.”
난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려본 후.
화면 밝기 버튼을 올렸다.
픽!
― 엇! 뭐야?!
― 밝아졌잖아?
회의장은 순식간에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나 역시 내 손이 닿으면 뭔가 달라질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깜짝깜짝 놀라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별짓 다 해도 흐릿하기만 하던 프로젝터가 리모컨 한 방에…….
도대체 이 손으로 안 되는 게 뭐지?
“이봐? 뭐야?”
김성수 부장은 제이엠 직원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리모컨으로 조정하면 되는 걸 몰랐던 거야?”
“아, 아니. 저, 그게.”
제이엠 직원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가 리모컨은 놔두고 본체만 살폈던 건 사실이었다.
“바쁜 사람들 앞에 두고 코미디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아……, 죄송합니다.”
제이엠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했다.
‘이상하네. 이 프로젝터가 이 정도 밝기에 이렇게 선명할 수가 없는데.’
“빨리 자리에 앉아!”
“네.”
제이엠 직원은 자리에 앉았고, 홍지아가 발표 준비를 하려 했다.
팟!
엇? 갑자기 화면이 또 흐릿해져 버렸다.
― 뭐야? 또 왜 이래?
― 에이, 진짜.
이상하다 싶어서 주변을 살폈는데.
내가 리모컨을 놓고 있었다.
“이봐! 빨리 다시 살펴봐! 리모컨 어딨어?!”
난 재빨리 리모컨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실수로 버튼이 다시 눌러졌었나 보네요.”
난 대충 얼버무렸고,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리모컨을 잡고 있는 내 손을 보았다.
‘손에 닿고 있어야 하는 건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손에서 떨어지는 순간, 물건에 깃든 능력은 사라지는 것이다.
# 빔 프로젝터
Before: 켜본 적 없다. 만져본 적도 없다. 비싼 건 안 만졌었다.
After: 리모컨만 만져도, 15년 전 제품이 최신상 화질로 업그레이드.
* * *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홍지아는 앞으로 나갔고, 내가 노트북을 맡았다.
그녀는 한사코 나보고 발표를 해달라고 했었지만, 난 사양했다.
어쨌건 이 제안서 관련하여 처음부터 관여한 홍지아가 더 이해도가 높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장기간 병가 후 오늘이 복귀한 날이다. 아직 업무감이 돌아오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냅백 모자부터 가격 제안서 안내드립니다. 저희는 10수 트윌 원단을 활용하여…….”
“오호…….”
화면 가득 보이는 스냅백 모자.
하얀색 배경 위에 고운 자태로 놓여 있는 모습이, 꽤 근사해 보였다.
화면을 본 제이엠 직원들은 흥미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음은 기본 볼캡 모자입니다.”
발표가 진행되어 슬라이드가 바뀌어 갈수록.
제이엠 직원들의 동공은 커져 갔고.
진일상사의 사장과 변 팀장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용이 너무 조잡한가?
노트북을 맡고 있는 나는 홍지아의 발표를 따라서 슬라이드를 넘기면서 다른 사람들 표정을 살폈다.
발표를 잘 이해해서 고개를 끄덕이는 태도가 아니었다.
뭔가에 놀란 듯. 입을 살짝 벌리고 눈만 멀뚱멀뚱 화면을 주시하고 있는데.
이게 잘 진행되고 있는 건지 판가름이 되지 않았다.
제이엠인터내셔날.
상품 기획 팀장, 김성수 부장.
그는 입사 초기 시절에 어려운 오더를 해결해준 인연 덕분에.
진일상사 사장의 끈질긴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안서를 발표할 기회를 주기로 했었고, 만약 기대하는 가격과 차이가 많이 나면 오더 진행을 안 한다고 했었다.
솔직히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었지만, 기회를 주는 것 자체는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었다.
“와……. 이게 뭐야, 진짜.”
그가 생각했던 대로 진일상사의 모자 소싱은 가격도 내용도 별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는 발표가 이어 갈수록 헷갈려서, 옆에 앉아 있는 다른 직원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이 대리, 지금 제안하는 거 내용 별로인 거 맞지?”
“네, 기존에 거래하던 다른 협력사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김성수 부장은 직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저…… 팀장님, 근데요.”
“어. 얘기해 봐.”
“화면에 나오는 모자들이…… 우리 회사 모자가 아닌 것 같습니다.”
“뭐?”
“굉장히 고급지고 사양이 업그레이드되어 보여서, 마치 셔넬, 르비통 등의 명품 회사의 모자 같습니다.”
“그게 말이…….”
김성수 부장은 이 대리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화면을 보았다.
“아…….”
얘기를 듣고 곰곰이 보니.
뭔가 이상하다고 여겨졌던 부분.
내용은 개떡 같은데, 발표에서 시선을 못 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발표 화면 속의 5만 원 정도의 제이엠인터내셔날의 모자는 수십만 원의 명품 모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진일상사의 사장을 보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이런 식으로 사람을 홀리는 거야?’
그런데 아무리 봐도.
진일상사 사장의 표정을 봤을 때, 의도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입 벌리고 침 흘리며 발표를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The End. 감사합니다.’
마지막 슬라이드 화면으로 바뀌었고, 홍지아는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이상 진일상사 모자 제안서 발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짝짝짝.
일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변 팀장과 제이엠 직원이었다.
“우와~, 홍지아 씨~, 수고했어!”
나 또한 빙그레 웃으며 홍지아를 향해 엄지를 내보였다.
“호호.”
홍지아는 자리에 앉았고, 김성수 부장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발표 잘 봤습니다. 진일상사에 젊은 인재들이 있으시네요.”
그는 홍지아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그녀는 얼굴이 붉어져서는 고개를 살짝 숙여서 답례했다.
“작성해 주신 제안서는 저희가 잘 검토해서, 빠른 시일 내에 답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장은 대놓고 물었다.
“긍정적인 답변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으하하.”
“글쎄요. 내부 회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뭐라고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리자면.”
김성수 부장은 살며시 미소 지었다.
“확실한 장점은 있으신 듯해서, 뭐든지 거래 연결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든지요?”
사장은 김성수의 대답에 좋아하면서도, 살짝 고개를 갸우뚱했다.
김성수 부장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더니.
“아, 한 가지 문의드릴 게 있는데.”
“네, 말씀하세요.”
“제안서는 저희에게 제출하시는 거니까, 저희 마음대로 써도 되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을 하는데, 뭔가 뼈가 있었다.
숨은 의도가 있는 질문.
‘왜 지금 그런 걸 묻지?’
사장은 김성수 부장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오더 성사가 되면, 다 원하시는 대로 쓰시는 거죠. 하하.”
그는 에둘러 답변하며 ‘오더 성사가 되면’이라는 조건을 걸었다.
사장도 바보는 아니었다. 김성수 부장이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훗. 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김성수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만간 연락 드리죠. 오늘 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 부장님.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이 대표로 인사했고, 김성수 부장은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 * *
“부장놈의 시키가, 사장한테 건방지게.”
중국집에 시티백을 반납 후, 사장 차를 기다렸다가 탔다.
“손님 먼저 배웅을 해야지. 꼬꼬마 시절에는 별것도 아니던 게 말이야.”
진일상사의 사장.
나이 51세. 민경원.
아무리 중소기업의 사장이라도 대기업 부장을 만나면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게 된다.
작은 회사이긴 하지만, 그는 오랫동안 회사 운영을 해왔고, 비즈니스 생태계를 잘 알기에 기꺼이 순응한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기에 이런 식으로라도 푼다.
“자식이 어디서 개수작이야? 제안서만 싹 발라서 쓰려고? 내가 너보다 한 수위야, 인마~.”
우리는 민 사장의 이런 푸념을 묵묵히 들으며 갔다.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기에.
휴우―.
어느 정도 풀렸는지,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홍지아.”
“네, 사장님.”
“오늘 발표 잘했어. 제법이던데?”
“감사합니다.”
“제안서도 자기가 만든 거야?”
홍지아는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강태평 주임님이 만드신 거예요.”
홍지아는 망설임 없이 내게 공을 돌렸다.
난 그녀의 말을 받아쳤다.
“무슨 소리야. 같이 만든 거지.”
“에이~, 강 주임님이 다 만드신 거죠. 전 그냥 있는 자료표로 정리한 거밖에 없는데.”
민경원 사장은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진짜? 강 주임이 했다고?”
“아니, 뭐……. 모자 샘플 사진 찍고 보정 작업한 것 말고는 없습니다.”
민 사장은 눈이 동그래졌다.
“아까 보고서에 있던 사진을 직접 찍어서 만든 거야?”
“네? 아, 네. 그럼요. 그걸 누가 찍어요?”
민 사장의 눈빛이 빛났다.
빠른 속도로 눈알이 이리저리 굴러가는데, 왠지 불안하다.
“흠……. 강 주임한테 그런 재주가 있었어?”
재주?
그래. 재주라고 불릴 만하지.
나 또한 내게 그런 재주가 있는지 좀 전에 알았으니.
홍지아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강 주임님, 그것만 잘하시는 게 아닌데.”
* * *
회사에 도착하니, 거의 퇴근 시간에 가까웠다.
“1시간만 있으면 퇴근이네~”
변 팀장은 시계를 보며 씩 웃었다.
“시장 조사 가시려고요?”
내 말에 변 팀장은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오늘 어때?”
“네?”
“회식 말이야. 아무 때나 괜찮다며?”
그리고 변 팀장은 홍지아를 바라보았다.
“전~ 콜이죠~. 좋아요.”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훗. 네, 저도 좋습니다.”
“좋았어! 회식도 업무의 연장인 거 알지?”
이 회사는 참…… 업무의 연장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지금 출발하자. 공식적으로는 외부 미팅 후에 회식하는 거야. 으하하.”
변 팀장은 호기롭게 웃으며 재킷을 들었고, 나와 홍지아도 나갈 채비를 하였다.
띠링!
“응?”
변 팀장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어? 어?”
뭔가 중요한 메시지가 왔는지,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읽어가더니.
“잠깐 스톱.”
변 팀장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제이엠인터내셔날에서 오더하겠다는데?”
“…….”
“에이~, 설마요.”
실제로 그곳과 진행을 하게 될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팀원 모두가 아마 그렇게 생각 했을 것이다.
“진짜야. 김성수 부장한테 메시지 왔어.”
“대박!”
홍지아는 입을 가리고 소리쳤다.
이상한데……. 우리는 모자 원가가…… 별로 경쟁력이 없을 텐데.
할 데가 없어서 그런가?
“근데 말이야……, 제품 오더가 성사된 게 아니야.”
뭔 소리지?
나와 홍지아는 더 묻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제안서에 있는…… 사진만 팔 수 있냐는데?”
“네에?!”
덜컹!
그때 사장실 문이 열렸고, 민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업 3팀! 잠깐 들어와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