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 *
내 이름은 강태평. 31세.
이름은 태평이지만, 난 정말 태평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우에엥―.
“내 장난감!”
9살 때, 난 친구와 같이 장난감 가지고 놀았는데…….
“생일 선물로 받은 거라고! 어쩔 거야!”
“뭐야~. 네가 만져봐도 된다며.”
“…….”
하필, 왜 내가 만질 때 망가질까.
“몰라! 물어내!!”
“나 잠깐 만지기만 했어~ 아무것도 안 했어~.”
“으앙~.”
손만 대면 망가지거나,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다치게 하거나.
처음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우연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불운을 달고 다니는 나의 똥손.
어쩌다 좋은 감정이 생기려는 사람을 만나도.
“오빠, 왜 좀 전까지 멀쩡하던 게 꼭 오빠가 만지면 이래?”
“그러게. 우연의 일치가 기가 막히네? 하하.”
“도대체 몇 번째야. 분위기 다 깨지게.”
“…….”
꼭 중요한 타이밍에 외투를 벗겨주려 하면 왜 지퍼가 작동을 안 하는지.
살아가면 갈수록 날 위축시키는 상황뿐이었다.
내가 열심히 사는 건 누군가에게 폐 끼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는 가야 했다
고장나지 않을 책만 붙들고, 묵묵히 공부만 열심히 했다.
좋은 대학을 들어가서 있는 듯 없는 학교 생활하다가 졸업을 했고.
최대한 작은 회사, 사람 자주 만나지 않은 직업을 택했다.
난 그렇게 언제나 혼자였다.
노력하면 더 안 좋아질 뿐이다.
그냥 그렇게…… 살았다.
* * *
출근길.
“아……. 또야.”
툭. 버스 손잡이가 끊어졌다.
갑자기 버스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하지만, 괜한 짓이었다.
어차피 잡으나 마나였으니까.
난 끊어진 손잡이와 함께 버스 바닥에 널브러졌다.
― 어머, 뭐야.
― 괴력의 사나이인가.
― 저 손잡이가 끊어지기도 하는구나.
괴력?
절대 아니다.
내 인생에 끊어진 버스 손잡이만 몇 개째인지 기억도 안 난다.
“이봐요. 안 다쳤어요?”
버스 기사가 다가와 물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아이가 튀어나오는 바람에.”
“아, 네.”
“어허, 근데 이거, 참.”
버스 기사는 난감해했다.
‘이거 손잡이를 물어달라고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무슨 생각인지 안다.
그나마 내가 이놈의 똥손 때문에 얻은 건, 눈칫밥.
아무리 위축되어 살아도, 이럴 땐 방어적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험한 세상 살아갈 수가 없다.
난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털며 일어나 선수를 쳤다.
“치료비는 됐고요, 택시비나 좀 주세요.”
“네?”
버스 기사는 허를 찔린 듯, 말문이 막혔다.
“운행 중에 넘어져서 몸이 좀 안 좋은데, 택시비도 못 주십니까? 집에는 좀 앉아서 가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근데 그게.”
버스 기사는 끊어진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설 점검 좀 잘하시고요. 이렇게 약해서야, 원!”
손잡이를 받아든 버스 기사가 더듬거렸다.
“어, 어, 그럴 리가 없는데.”
― 그러게 손잡이가 저렇게 쉽게 끊어질 리가 없지.
― 맞아. 좀 거칠게 운전하긴 했어.
버스 안 여론이 바뀌고 있었고, 그래도 버스 기사가 머뭇거리길래, 난 뒷목을 잡으려 했다.
“자, 잠깐! 여기요.”
난 버스 기사가 준 5만 원을 가만히 보다가.
버스에 빈자리가 보였다.
‘그래, 이 정도면 됐어. 물어달라는 말은 안 하겠지.’
치료비를 노리고 한 행동이 아니었다.
난 받은 돈을 돌려주며 말했다.
“저기 뒤에 자리 생겼네요. 앉아서 갈 테니까, 이거 다시 받으세요.”
“아, 네.”
“착한 승객 만난 거, 운 좋은 줄 아세요. 안전운행 하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버스 기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인가.’
회사 도착.
하지만 출근한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고속버스터미널로 향해야 했다.
평소와 다르게 일찍 출근한 팀장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사장님 외조모상이요?”
“그래~, 태평 씨가 총각이고 하니까, 우리 팀 대표로 다녀와.”
“아니, 그게 총각이랑 무슨 상관…….”
팀장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오늘 딸 생일이라서. 대신 내가 자기 것까지 오늘 업무 마무리는 확실히 할게.”
마침, 팀원 중 한 사람인 홍지아는 오늘 연차였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지.
휴우―.
한숨이 절로 나왔다.
갑자기 상갓집을 가야 한다니. 그것도 외조모상을. 속초까지나.
나도 다른 이유를 대서 거절하려고 했는데.
― 어머~, 잘됐다. 나도 조의금 부탁 좀 할게.
― 강 주임님, 부탁 좀 할게요. 전 결혼 준비 때문에.
‘대표로’라는 한마디는 이 작은 회사 사무실에 순식간에 퍼졌고, 결국 난 팀 대표가 아니라 회사 대표 조문객이 되었다.
10명밖에 안 되는 회사.
간다고 뻥 치고 안 가기엔 너무 티가 날 것 같았다.
결국, 속초행 버스.
한참을 지나 고속도로를 벗어났다.
점점 짙푸른 녹음이 많이 보이고, 차도 점점 적어졌다.
쿵짝쿵짝.
‘너를 두고 간다~. 황진이 너를 두고~.’
아…….
‘간다. 간다. 간다.’
트로트 메들리를 들은 지 한 시간째.
지겹다 못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고 있을때쯤.
우르릉~! 쾅! 쾅!
갑자기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끼이익~!
어? 어?
.
.
.
.
버스는 절벽 밖으로 날았다.
이 손이 네 손이냐
* * *
번쩍!
눈을 떴다.
주변은 깜깜했고, 산속인 것 같았다.
나 괜찮은 건가?
분명히 절벽 밖으로 날았는데.
근데 이상한 게 몸을 더듬는데, 왜 만지는 느낌이 안 들지?
손을 봤는데.
“으아악~!”
이런, 씨X. 손이 없다.
손목 아래에 손이 없다.
깔끔하게 손목 아래가 텅 비어 있었다.
“으아악~!”
난 너무 놀라서 괴성을 질러댔다.
손이 없다니.
이게 말이 되나?
근데 희한하게 잘린 것 같지가 않다.
뭐랄까, 그냥 분리? 혹은 잃어버린 느낌?
아프지도 않고, 느낌도 없다.
손이 있던 자리는 피도, 뼈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깔끔했다.
아!
꿈이겠구나! 맞아. 꿈이라는 게 있었지.
잘린 손목을 다시 보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리얼한데?!
꿈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휴우~. 그래, 일단 찾아보자.”
말이 안 되지만, 이건 분명히 손을 잃어버린 것이다.
난 주변을 열심히 살피었다.
얼마나 헤맸을까.
나무 수풀 뒤로, 하얀 연기가 올라오는 게 보였다.
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헉!”
물! 물이다!
헉! 헉!
심한 갈증을 느낀 난 헐레벌떡 뛰어가 물을 마시려 손을 뻗었는데.
아, 손이 없지.
난 손 대신, 물속에 얼굴을 박았다.
꿀꺽. 꿀꺽.
아~, 진짜 시원하다.
정말 꿈이 아닌 건가?
그렇게 마시고 있는데.
“흡!”
웬 할아버지가 물 위에 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거지?
조금 놀라긴 했지만, 혼비백산할 정도는 아니었다. 손도 없어진 상황에서 이 정도쯤은.
“뭘 찾고 있느냐?”
응?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아셨어요?”
“뭘 찾고 있느냐고 물었다.”
“손을 찾고 있어요.”
“손?”
할아버지는 물속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손을 들고나오는데, 똥물이 좔좔 흐르고 있었다.
똥으로 빚은 손이었다.
“이것이 네 손이냐?”
이게 무슨 상황이지. 왜 물속에서 똥손을 들고나와.
혹시…… 저 할아버지가 산신령?
어릴 때 동화에서 봤던 상황 같은데.
쇠도끼 대신 똥손인가?
어쩌지.
꿀꺽.
난 침을 삼키며 망설였다.
산신령은 살며시 웃으며 말했다.
“왜? 다른 거 한번 보고 싶어?”
* * *
“다른 거요?”
산신령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속으로 그 생각 한 거 아니냐? 왜 우물쭈물거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는 거지.”
“…….”
그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어떻게? 볼 거야 말 거야? 아니면 이 손 가져갈래?”
대한민국 국민 중에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연못에서 산신령이 나타나서, 잃어버린 걸 물건을 보여주며 네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그럼…… 실례가 안 된다면 한번 봐도 되겠습니까.”
“흠. 기다려봐라.”
잠시 후. 물로 들어간 산신령은 뭔가를 들고나오는데, 번쩍거렸다.
새하얀 은빛으로 번쩍거리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손이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갖고 싶다.’
“이건 어떠냐?”
산신령은 의미심장한 미소로 물었다.
내 표정이 변하고 있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변할 수밖에.
평생을 저주받은 똥손을 들고 살았는데.
“아름답습니다.”
“이 손이 네 손이냐?”
투고까지 왔는데, 쓰리고로 갈 것이냐 여기서 스톱 할 것이냐.
“뭘 그렇게 고민하느냐? 왜 안 내켜?”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니면…… 다음 거 또 보고 싶으냐?”
이미 갈 데까지 간 인생.
쓰리고 갔다가 피박에 광박까지 쓰면 어떤가.
더 이상 애매하게 살고 싶지 않다.
“네, 있으시다면.”
“훗. 그래. 그래야지.”
잠시 후.
번쩍! 번쩍!
“히이익―.”
번쩍! 번쩍!
다시 나타난 산신령에게서 금빛이 번쩍거렸다.
분명 좀 전과 같은 사람인데, 금빛이 나는 이유는…….
그의 손에 들고 있는 찬란한 무언가 때문이다.
“맙소사. 진짜였어.”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전래동화 이야기대로였다.
찬란한 금색의 빛깔.
매끈한 손 위로 빛나는 금빛.
마치 손이 태양을 품은 것 같았다.
똥과 금은 색깔은 비슷했지만, 때깔은 완전 달랐다.
난 황홀함에 취해서 멍하니 산신령이 들고 있는 손을 바라보았다.
“이 손은?”
하지만 산신령은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손이 네 손이라고?”
난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았다.
“정말?”
“…….”
“어서 말해라.”
“저, 저는.”
평소 나의 안 좋은 습관.
눈을 피하고, 말을 더듬고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눈빛.
난 여기서 결정해야 했다.
“어서 얘기해! 원하는 걸 얘기하면 되는 거야!”
털썩.
난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모를 상황.
“어르신.”
정체를 모르기에 난 그를 이렇게 지칭했다.
“그 손 저에게 주시면 안 될까요?”
“…….”
산신령은 눈을 끔뻑거리며 날 바라봤다.
“그러니까. 이 손이 네 손이라고?”
“모릅니다.”
“모른다?”
“제 손에는 똥물도 없었고, 은빛도 없었으며, 금빛도 없었습니다. 피부 속에 어떤 색이 입혔었는지 전 모릅니다.”
“어허…….”
산신령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지금 들고 계신 손. 그 손이 제 손이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
단 한 번만이라도…….
꿈속에서라도…….
그 손 갖고 싶다.
산신령은 잠시 가만히 날 보았다.
그러다 결심이 선 듯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냐?”
“…….”
뭐지? 뭔가 알고 있는 건가?
“그래. 주마. 대신 찬란한 것을 지니면 그만큼 책임이 따른다는 걸 잊지 마라.”
“…….”
“가지고 있는 걸 활용하지 못하는 건 죄악이다. 더 이상 숨어 살면 안 된다.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산신령은 무서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리고 한 가지만 약속해라.”
“…….”
“받은 것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마라.”
“그거면 됩니까?”
“그래. 그저 사람들이 널 보고 알아차리도록…… 그렇게 살아라.”
“명심하겠습니다.”
산신령은 손에 든 금손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고는 날 향해 금손을 던졌다.
“자! 받아라!”
날아오는 찬란한 금손.
난 양팔로 받으려 했다.
금손이 내 팔에 안기는 순간.
팟!
눈앞에 보이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 * *
위이잉― 위이잉―.
두두두― 두두두―.
[생존자 발견! 생존자 발견!]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헬리콥터 소리.
깊은 밤 절벽 아래의 산속은 대낮처럼 환해져 있었다.
[어서 들것 가져와! 빨리!]
구조대원은 다급하게 소리쳤고, 곧 장비를 갖춘 구조대원들이 달려왔다.
[맙소사. 생존자가 있다니. 이건…… 기적이야, 기적.]
들것 위에 눕힌 채로 정신을 잃은 강태평.
그런데…….
[자, 잠깐만요.]
강태평을 들것에 싣고 다급하게 움직이던 구조대원은 뭔가를 보고 멈칫했다.
[왜? 위급하다고!]
[저, 저기]
은은하게 빛나고 있는 강태평의 손이.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 * *
새하얀 시트와 철제 침대.
‘여기가 어디지.’
난 눈만 끔뻑거리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멍하고, 온몸에 힘이 없었다.
“아, 맞다!”
난 번뜩 정신이 들어서, 손부터 살펴보았다.
팔에 힘이 잘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이…… 있구나.”
왈칵.
눈물이 살짝 맺혔다.
만날 똥손이라며 내 손을 저주해 왔었는데.
꿈이라고 생각했지만, 너무 진짜 같아서 정말 없어진 줄 알았다.
“내 손아, 앞으로 잘해 줄게.”
두 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안고, 연신 쓰다듬었다.
“……. 깨셨어요?”
언제 들어왔는지 하얀색 옷을 입은 여자가 이상한 시선으로 날 보고 있었다.
“누구?”
“누구긴요. 간호사지.”
“아~.”
그러고 보니 내가 환자복을 입고 있구나.
“여기가 어딥니까?”
“병원이에요.”
“그러니까, 지역이.”
“아~, 속초에요. 하긴 의식불명 상태로 오셨으니, 모르실 수도 있겠네.”
속초…….
아, 속초의 장례식장 가는 길이었지. 회사 사장의 외조모상에.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세요? 조금씩 움직여 보세요. 어디 부러지거나 큰 외상은 없거든요.”
“아, 네. 잠시만요.”
손가락, 발가락부터 하여 조금씩 관절들을 움직여 봤다.
힘이 잘 안 들어가는 것 말고는 딱히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은 거 같네요. 좀 기운이 없는 것 말고는.”
“그거야 오래 누워 있었으니까요. 한 3일 됐을걸요.”
“3, 3일…… 요?”
“호호. 네.”
난 멍한 표정이 되어 기억을 떠올려 봤다.
버스가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
꿈인지 생시인지 손 찾으러 다니다가, 산신령에게 금손 받은 것.
거기까지 밖에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적의 남자라고 불리는데, 모르시죠?”
간호사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기적?”
덜컹!
― 와! 깨어났어!
― 강태평 씨!
찰칵! 찰칵!
갑작스럽게 병실 문이 열리면서.
쉴새 없이 셔터 소리가 들렸다.
대낮인데도 플래시 때문에 눈을 뜨기 어려울 정도였다.
― 기분이 어떠십니까!
― 안전벨트를 하고 계셨나요?
― 어떻게 그 위급한 상황에 사람 살릴 생각을 하셨나요?
“들어오시면 안 돼요! 환자는 지금 막 깨어났어요! 안정이 필요합니다!”
간호사는 병실로 들이닥치는 기자들을 밀면서 소리쳤다.
― 잠깐이면 됩니다!
― 강태평 씨!
“…….”
이게 도대체 뭔 일이야.
간호사가 아무리 막아도, 기자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병실에 있는 다른 환자들이 보였다.
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영 신경 쓰인다.
“제가 밖으로 나갈게요. 모두 나가주세요.”
* * *
[강태평 씨, 기분이 어떠십니까!]
“아, 네. 얼떨떨합니다.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벌거벗겨진 손, 난 자꾸 신경이 쓰인다.
[병원에서는 건강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고 하던데요. 어떻게 절벽에서 떨어졌는데도 살아나셨습니까?]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흠! 혹시 뭐, 안전벨트는 하셨었나요?]
“물론입니다.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안전벨트가 큰 역할을 했군요.]
“근데 다른 분들도 다 하셨을걸요. 출발하기 전에 기사님이 안전벨트 했는지 확인하시던데요.”
[…….]
기자는 말문이 막혀서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역시…… 놀랍습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졌네요. 그 와중에 사람을 살리신 것도 그렇고요.]
내가 잘못 들었나?
사람을 살렸다고? 내가?
기자는 영문을 몰라하는 내 표정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찰칵! 찰칵!
[가까스로 구조되어 나가는 순간에도 다른 사람을 살릴 생각을 하셨죠. 강태평 씨 덕분에 살아난 생존자가 있습니다.]
“네? 제 덕분에요?!”
[구조대원의 말에 따르면 강태평 씨가 구급차에 타기 직전, 버스 잔해가 뭉쳐진 한곳을 가리켰고, 그곳에서 죽기 직전의 한 남성분이 발견되었습니다.]
내가 가리켰다고? 그것도 내 똥손으로?
아…… 기억이 안 나는데.
“그래서요? 그분은 사셨나요?”
[다리 하나를 잃었고,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시긴 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합니다.]
원래 멀쩡하게 살 사람인데, 나 때문에 구조되어서 다리 하나를 잃은 건 아닐까.
내 표정이 어두워지자, 기자는 말을 이어갔다.
[발견될 당시에 다리는 이미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
[당신이 살린 겁니다.]
난 그저 얼떨떨했다.
정말…… 내가…… 사람을 살렸다고?
그때 벽에 걸린 TV가 켜졌고.
화면 속에는 새까만 버스 잔해와 그 오른쪽 아래에 자막이 있었다.
[생존자. 강모씨 31세. 김모씨 52세.]
방금 말한 다른 생존자 이름은…… 안 나오는구나.
영상 속에 김모씨는 얼굴까지 붕대로 가린 채 침대에 누워 있다.
“혹시…… 다른 생존자분 성함 알 수 있습니까?”
기자는 살짝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가, 웃으며 말했다.
“뭐, 구조자께서 궁금해하시는 건데. 알려드려도 괜찮겠죠. 김정식이라고 합니다.”
김정식…….
그의 이름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TV는 곧 다른 피해자의 가족 화면으로 바뀌었다.
[아이고~, 아들아! 아들아!]
죽은 이들을 찾고 있는 피해자 가족의 얼굴.
죽지 않고 생존한 것에 대해 감사하긴 하지만.
피해자 가족을 보니, 이런 관심을 받는 게 영 불편하다고 느껴졌다.
“저 이만 쉬고 싶습니다.”
병원 관계자는 기자들을 향해 손짓했다.
“자자, 강태평 씨 환자입니다. 피곤하다고 하시니, 모두 나가주세요.”
살면서 누군가에게 이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아마도 들것에 실려 가면서 내 손가락이 무작위로 한 곳을 가리켰고.
거기서 또 운 좋게 구조대원이 내가 가리킨 곳을 수색해서 생존자를 발견해 낸 것 같은데.
심지어 난 이 일련의 과정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자, 어서요!”
병원 관계자의 재촉에 기자들은 머뭇거리며 나가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모두 빠져나간 후.
난 병실로 돌아가려는데.
“아저씨!”
10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응?”
“사진 좀 찍어주세요.”
조그만 손으로 건넨 디지털 카메라.
안 되는데? 아니, 안 될 텐데?
“저……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날 바라보는 티 없이 맑은 아이의 눈.
난 내 똥손을 한번 보고 나서.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딴 데 가서 알아보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달라졌다
* * *
“뭐라고요?”
여자 아이는 물끄러미 날 바라봤다.
말이…… 좀 이상했나?
“아~, 그러니까. 아저씨 말고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뜻이야.”
여자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탁할 사람이 없는데요?”
좀 전까지 그 많았던 사람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기자들에게 내가 다 나가 달라고 하긴 했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을 줄은.
“아저씨~, 좀 찍어주세요.”
아이는 조르듯 말했고, 뒤쪽에 한 여성분이 서 있는데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아~, 이거 참.”
난 아이의 손에 든 카메라를 보았다.
디지털카메라.
난 이것 때문에 참 놀림을 많이 당했었다.
내가 사진을 찍기만 하면 희한하게 역광이 들어서 사진이 이상하게 나오거나.
“아저씨 사진 진짜 못 찍는데.”
“괜찮아요~. 어서요~.”
운 좋아서 제대로 찍혔어도, 상대방이 기분 나빠했다.
어쩌면 이렇게 못생기게 찍었냐며.
일부러 하려고 해도 어려울 것 같다며 말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손대서 고장나지만 않아도 다행이었다.
“저기요~, 부탁 좀 드릴게요.”
내가 계속 망설여하자, 뒤에서 기다리던 여성분이 말했다.
“제가 오래 서 있기 힘들어서요. 곧 수술도 들어가야 하고.”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무렇게나 찍혀도 괜찮아요. 그냥 기록하려고 그러는 거니까요.”
“…….”
제발 누구 한 명 와주기를 기다렸는데, 아무도 없었다.
“아저씨~, 어서요.”
아이는 다시 카메라를 건네었고.
난, 결국 마지못해 받았다.
“엄마시니?”
“네.”
“그래, 엄마 옆에 가서 서 봐.”
“네~.”
아이는 엄마 옆으로 뛰어갔다.
“자~, 포즈 잡으시고.”
난 최대한 카메라에 손이 조금만 닿도록 신경 썼다.
앵글에 두 모녀의 모습이 잡혔을 때.
난 두 눈을 질끈 감고,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한 번 더요!”
아이가 외쳤지만.
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서 카메라를 건네었다.
“한 번이면 충분해. 아저씨 간다.”
사진을 확인하기 전에 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아저씨!”
뒤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아저씨 흉보면 안 된다~.”
강태평이 사라진 뒤.
엄마는 LCD 화면 속 사진을 확인 후 깜짝 놀랐다.
“어머.”
저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우와~.”
딸도 사진을 보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엄마 진짜 이쁘다!”
사진 속의 엄마는 어두운 안색 대신 얼굴 가득 환한 광채가 빛나고 있었다.
전혀 아픈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우리 딸도 진짜 이쁜데? 배우 해도 되겠어. 이렇게 사진을 잘 받았어? 호호.”
“헤헤.”
딸도 기분 좋아서 방방 뛰며 웃다가 한숨을 쉬었다.
“에휴, 아쉽다. 아저씨한테 한 장 더 찍어달라고 할걸.”
“호호. 환자복 입고 있었잖아. 엄마 수술 끝나고 아저씨 찾아보자. 또 찍어 달라게.”
“좋아!”
* * *
오늘은 퇴원하는 날.
병원에서 10일 가까이 지냈다.
혼자 생활하는 곳도 아니고 해서, 똥손이 물건에 닿지 않도록 평소보다 더 주의했지만.
아무리 조심해도 한계가 있다.
근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분명 손이 닿았는데 문제가 생기기는커녕, 말도 안 되는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서, 퇴원을 앞둔 3일 전부터 일부러 여기저기 손을 대어 봤었다.
그 결과를 수첩에 정리했다.
# 정수기
Before: 내 손으로 버튼 누르고 물 내리면 이상한 비린내가 났음.
After: 건강하고 상쾌해지는 맛.
# 스마트 폰
Before: 손만 닿으면 배터리 조루 증세를 보였었음.
After: 내 손이 무선충전기 같음. 이상하게 오래간다.
# 컴퓨터
Before: 30분도 채 안 되어 다운이 여러 번 되었음.
After: 다운 절대 안 됨. CPU 속도 미쳤음. 똥컴이 슈퍼컴 됨.
# 선풍기
Before: 잘만 돌아가던 선풍기가 손이 닿으면 털털거리다 퍼졌었음.
After: 손 닿으면 1단도 3단 세기가 됨.
# 악수
Before: 내 손을 잡음과 동시에 다크서클이 생기며 급격히 표정이 어두워짐.
After: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지며, 나에게 뭔가를 막 주고 싶어 함.
.
.
.
.
확인하면 할수록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이게 현실인지, 꿈을 꾸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건.
“아저씨!”
퇴원하는 날,
얼마 전 나에게 사진을 찍어 달라던 아이가 찾아왔고, 그 옆에는 엄마가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때보다 두 사람의 표정이 훨씬 더 밝아져 있었다.
“어……, 누구더라?”
누군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몸에 밴 방어적인 태도가 나왔다.
보통 이렇게 뒤늦게 찾아올 때는 안 좋은 경우가 많았었기에.
“저 기억 안 나요? 얼마 전에 사진 찍어주셨잖아요~.”
“아~, 그래.”
아이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흠칫!
나도 모르게 손을 빼려다가 멈추었다.
“그날 아저씨 덕분에 엄마가 수술을 잘했어요.”
“뭐, 뭐라고?”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를.
“사진 속에 생기 넘치는 모습 보고, 살고 싶은 의욕이 생겼다고요.”
“…….”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께서도 수술 결과도 중요하지만, 환자의 의지가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하시던데요.”
엄마는 내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큰 힘이 됐습니다.”
“왜, 왜 이러세요. 제가 뭘 어쨌다고.”
갑자기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혹시…… 내가 사진을 찍으면.
“꼬마야, 그때 아저씨가 찍어준 사진 한번 볼 수 있을까?”
“물론이죠. 인화까지 했어요.”
꼬마는 가방을 뒤지더니, 두 손으로 사진을 건네었다.
“여기요.”
꿀꺽.
두근. 두근.
난 눈을 질끈 감았다가, 아이가 꺼낸 사진을 살피었다.
“으아악―!”
난 사진을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주변 사람들은 내 모습에 놀랐고, 난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렸다.
“졸라…….”
덜. 덜.
“졸라 잘 찍었잖아.”
사진 속의 두 모녀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엄마는 전혀 아픈 사람처럼 안 보였고.
딸은 아역배우 같았다.
“아……, 피곤해.”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무리 검증 단계를 거쳐도, 혼란스럽다.
나 진짜…… 뭔가 된 건가?
# 카메라
Before: 찍어주면 욕먹었음.
After: 사람을 살리는 사진 기술.
* * *
한 남자가 강태평이 있던 병실로 들어왔다.
김정식.
강태평이 절벽에서 살린 사람.
그는 거의 온몸을 붕대로 감은 체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김정식은 강태평 이름이 써진 병상을 본 후 옆 환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강태평 씨 계신 곳이 맞습니까?”
“네, 맞아요.”
“어디 가셨나요?”
“아까 퇴원했는데요.”
휴우―.
김정식은 한숨을 쉬었다.
“이 은혜를 어떻게…….”
* * *
― 강태평 씨! 퇴원 축하합니다!
― 건강하게 잘 지내십시오.
“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간호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난 힘차게 병원에서 걸어 나왔다.
건강도 완전히 회복했고, 이제 다시 시작이구나.
막상 병원을 나서니, 기분이 홀가분하다.
병원은 큰길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난 택시를 잡기 위해 큰 길가로 걸어갔다.
속초의 하늘.
향긋한 바다 내음과 시원한 바람.
잠깐 걷는데도 기분이 참 좋았다.
병원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바깥 공기를 맡으니 살아 있다는 생각이 새삼 드는데.
“아~, 속초 온 김에 한 이틀 정도만 바다 좀 보다가 가면 참 좋겠는데.”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한다.
큰 길가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지만, 택시는 오지 않았다. 약간 외진 곳이어서 그런가.
“콜택시를 불러야 하나.”
핸드폰을 켜려는데.
부우웅―.
시내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는데.
‘속초터미널.’
버스 겉면 행선지에 분명히 ‘속초터미널’이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면, 이걸 타도된다는 소린데.
시내버스.
시내버스라…….
난 손을 번쩍 들었다.
끼이익―.
부우웅―.
모든 좌석이 비어 있는 텅 빈 버스.
난 중간쯤 자리에 앉았다.
“버스 손잡이. 이까짓 거.”
병원에서의 검증을 통해 난 확신을 얻었다.
이제 실생활에서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는 버스 손잡이를 바라봤다.
그래, 그냥 잡으면 되는 거야.
이제 괜찮은 거잖아?
하지만 약간 망설여지긴 했다.
버스 손잡이는 백발백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잡았을 때 끊어지지 않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자!”
난 기합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고, 버스 기사가 이상한 듯 날 바라보았다.
휴우―.
꿀꺽.
덥석!
잡았……. 잡았다!
버스 손잡이를 잡은 내 손.
덜덜 떨리고 있었다.
끊어질 수도 있기에.
넘어지는 걸 대비하기 위해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었다.
부우웅―.
버스 기사의 시선이 점점 더 강렬하게 느껴졌다.
텅 빈 버스에서 앉지 않고, 일어서서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으니.
“내릴 거예요?”
“아, 아닙니다.”
휴우― 휴우―.
난 한참을 버스 손잡이를 잡은 채 숨죽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흡!”
버스가 정차했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하게 당겨 보았다.
“와~, 엄청 튼튼하네.”
버스 기사는 인상을 쓰고 있었고.
“기사님, 혹시 버스 손잡이 재질이 서울하고 다른가요?”
“네? 뭔 소리예요?”
“…….”
“와~, 이렇게 튼튼한 거였어요?”
부우웅―.
버스는 다시 출발했고, 난 더 이상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버스 손잡이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전혀!
“하하하하하.”
미친 듯이 웃음이 나왔다.
아니, 미쳤다.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드디어 완벽한 확신을 얻었다!
“하하하하하.”
난 양손으로 버스 손잡이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아주 질겼다.
내 몸무게를 지탱할 정도로 버스 손잡이는 아주 튼튼했다.
절대 끊어지지 않았다.
“하하하하하!”
산신령을 만났던 꿈이 떠올랐다.
현실 같았던 꿈.
하늘도 내가 불쌍했는지, 정말 내 저주를 풀어주신 게 맞구나.
거기다 금손까지!
“하하하하하!”
31년간 묶여 온 족쇄가 풀린 것이다.
아무거나 잡아도 되고, 아무거나 만져도 된다.
자꾸 웃음이 나는데, 이상하게 눈물도 흐르고 있었다.
“흑……, 하하하하하.”
양손으로 버스 손잡이에 매달린 채, 몸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난 울면서 웃었다.
끼이익―.
“내려! 이 새끼야!”
“죄송합니다.”
[하하하하하.]
버스 기사는 미친 듯이 웃으며 걸어가는 강태평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왜 빈자리 놔두고 버스 손잡이에 매달려서 지랄을 떠는 거야. 원숭이도 아니고.”
하도 난리를 쳤기에 버스 기사는 강태평이 만졌던 버스 손잡이를 살폈다.
“으잉?!”
강태평이 잡았던 손잡이는 오래되어 삭아 있었다.
진작에 교체해야 했는데, 끊어지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다.
“아니, 어떻게 이런 손잡이를 잡고 매달려서…….”
툭.
버스 기사가 만지자, 손잡이는 바닥에 떨어졌다.
* * *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다음날 오랜만의 출근길.
자연스럽게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불안하게 맨손으로 서서 오지 않아도 되니 안정감 있고 좋았다.
사소한 거지만…… 나에겐 완전 신세계였다.
눈치 보지도, 조심하지도 않았다.
항상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살았었는데.
인생이 달라졌다.
이것만으로도 난 인생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덜컹.
난 힘차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더 이상 조심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위축될 필요도 없다.
“어머~. 강태평 씨 왔어요?”
“어서 와요.”
무표정의 영혼 없는 인사.
말은 상냥하지만, 표정은 굳어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좋은 아침입니다! 하하!”
내 올라간 목소리 톤에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우리 악수 한번 할까요?”
오늘 하루가 기대된다.
거칠 게 없다.
* * *
“악수요?”
여 직원 중 한 명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머, 웬일이야? 강 주임님이 악수하자는 소리를 다 하고?”
이전에는 악수는커녕, 옷깃 스치는 것도 조심히 했었다.
“그냥요~.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가워서요.”
하지만 이제 내 악수는 보통 악수가 아니다.
“호호. 그래요. 우리 악수 한번 해요. 기적의 남자 강태평 주임님~.”
지금 얘기 나눈 여 직원을 포함해 나보다 먼저 출근해 있던 직원 세, 네 명과 돌아가면서 악수를 하였고.
나와 악수를 하자마자, 사람들은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 하하. 신기하네. 무슨 고위 공직자랑 악수하는 기분인데요.”
― 그러니까요.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죠?
― 강 주임~. 아침 먹었어? 김밥 줄까?
예전에 나는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일만 했었다.
어떻게 보면 내가 먼저 그들을 멀리했었다.
하지만 이제 달라질 것이다.
나와 악수하며 기분 좋아진 그들은 내게 살갑게 얘기했다.
― 강 주임님~. 얘기 좀 해줘 봐요~. 궁금해~.”
“뭘요?”
― TV도 나오고 했잖아~. 그 누구더라? 유명한 앵커랑 인터뷰도 하더만.
“이따가요~ 이따 점심 같이 먹어요~ 얘기 많이 해드릴게요.”
― 어머 진짜 이상해.
― 웬일이야~. 점심을 같이 먹재. 호호.
점심도 항상 구석진 곳에서 혼자 먹었었다.
갑자기 달라지면 좀 이상한가?
― 강 주임? 괜찮은 거지? 아직 아픈 거 아니지?
“하하. 아니에요. 아프긴요. 죽다가 살아나서 그런가? 이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동료분들과 어울리면서 즐겁게 살아 보려고요.”
내 속마음은…….
‘이제 조심하지 않고 살아도 돼서요. 지금까지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게 아니었어요.’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주임님~.”
홍지아 사원이 다가왔다.
“주임님 안 계셔서 너무 힘들었어요. 힝.”
나이 25세. 내가 속한 영업 3팀의 막내다.
우리 회사는 사장을 제외하고 총 10명의 직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영업팀. 한 팀당 3명.
그리고 회계, 인사 등을 관리하는 직원 1명.
이렇게 총 10명이다.
즉각 영업팀은 팀장 1명과 팀원 2명인 셈인데, 내가 없었으니 홍지아 사원이 X뱅이 쳤을 것이다.
더군다나 우리 팀장님 성향이라면…….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알아요~. 알죵. 아휴~, 강 주임님 나와서 진짜 다행이다. 헤헤.”
“하하. 그래그래. 수고 많았어.”
나 또한 활짝 웃었다.
그런데…… 홍지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 근데 뭔가 이상해요! 잠깐만요!”
그러게, 나도 좀 이상한데.
아……, 맞다.
“엇! 강 주임님 말 놓으셨네요?!”
홍지아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우리 회사에 취업했다.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하여, 항상 밝고 구김이 없었는데.
볼 때마다 귀여운 막내 여동생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아? 으응.”
“헤헤.”
홍지아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날 보며 헤벌쭉 웃었다.
그녀는 같은 팀이자 유일한 팀원인 나와 가까이 지내고 싶어 했지만.
난 항상 거리를 뒀었다.
그녀가 내게 계속 말을 놓으라고 해도.
난 끝끝내 5살 어린 그녀에게 깍듯하게 존대를 하며 거리를 뒀었다.
“주임님이 저한테 말 편하게 하니까, 조으다. 히히.”
생각하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자연스럽게 말이 편하게 나온 것이다.
조심하던 마음을 좀 내려놓았다고…….
신기하네.
“역시 극적으로 살아나서 그러신가 봐요. 나중에 속초 가서 번지점프 한 번 더 하고 오세요. 그럼 또 업그레이드? 히히.”
하지만 그녀는 ‘푼수’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말을 길게 하면 안 된다.
“니가 가라, 속초.”
“…….”
“하하하.”
난 어색하여 일부러 큰 소리로 웃었다.
‘니가 가라, 하와이’ 억양으로 농담 한번 뱉어봤는데.
홍지아가 이렇게 정색할 줄은.
“흠. 팀장님은?”
“여전하시죠~.”
지금 시각 오전 10시.
출근 시간이 1시간 지났지만, 팀장 자리는 비어 있었다.
“사람 쉽게 안 변하잖아요~. 아! 아니지.”
홍지아는 혀를 쭉 내밀고 말했다.
“강 주임님 보면 그 말도 꼭 맞다고 할 순 없네요. 헤헤.”
역시.
변 팀장은 양반은 못 된다.
“아이고~, 시장 조사가 빡세구만~.”
거친 숨소리와는 다르게 너무 단정한 복장.
물어보지도 않은 말을 중얼거리며 그는 자리를 찾아갔다.
“이른 아침부터 백화점에 얼마나 사람이 많던지. 뭐 괜찮은 물건 없나 조사 좀 하려 했더니만~.”
“백화점 이 시간에 문 안 여는데요?”
난 웃으며 그에게 다가갔고.
“아, 마, 맞다. 남대문 시장을 백화점으로 잘못 말했네! 하하!”
변성준 팀장.
그답게 아주 자연스러운 뻔뻔함으로 말을 바꾸며 날 반겼다.
“이야~, 강태평이~ 왔구만! 하하.”
“팀장님, 안녕하세요.”
난 꾸벅 인사하며 손을 내밀었다.
“어? 악수하자고?”
변 팀장은 ‘뭐지?’ 싶은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강 주임 손은 처음 잡아보는 거 같은데? 하하. 웬일이야?”
“오랜만에 봬서 반가워서요.”
“하하. 그래. 그래.”
변 팀장은 내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살아 돌아온 거 축하하네.”
“헤헤. 그러게요. 사장님 외조모 조의금 들고 가셨다가, 하마터면 강 주임님의 조의금이 될 뻔했잖아요.”
홍지아가 웃으며 한 마디 거들었다.
이걸 농담이라고?
어이가 없어서, 홍지아를 살짝 째려보았지만.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래, 넘어가자. 회사 생활 원래 이런 거였지. 사소한 것에 급발진하면 안 된다.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좀 쉬었다오지.”
“많이 쉬었어요.”
“못 가봐서 미안해. 도저히 속초까지 갈 시간이 안 나더라.”
변팀장은 딸 둘에 외벌이 가장이다.
그리고 팀원 한명이 공백이다 보니, 여유가 없기는 했을 것이다.
“괜찮습니다.”
“난 자네를 위해 기도했어”
“…….”
“기도가 통한 거야.”
달리 대꾸 할 말이 없었다. 뭐 그냥 그런 걸로.
“아, 우리 강 주임 돌아온 거 기념하여 이번 주에 회식 한번 하지?”
그러면서 변 팀장은 내 눈치를 살폈다.
항상 핑계를 대며 회식은 단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기에.
“아~, 네, 좋습니다. 오늘도 상관없고요~. 팀장님 편하신 날 하시죠.”
“오…….”
변 팀장은 홍지아를 향해 물었다.
“이 친구 왜 이래? 강태평 주임 맞아?”
“아직 병원에 더 계셔야 하나 봐요. 헤헤.”
어째 푼수기가 더 강해진 것 같다.
아무래도, 홍지아는 나중에 기회 봐서 한마디 해줘야겠다.
“강 주임! 바로 일할 수 있지?”
“네. 그러니까 출근한 거 아닙니까.”
“그래, 홍지아 씨. 바이어 제안서 준비하는 거 강 주임이랑 같이 해.”
“넹~.”
홍지아는 밝게 웃으면서 대답했고.
변 팀장은 외투를 챙겼다.
“그럼 난 시장 조사 좀 다녀올게.”
* * *
진일상사.
돈 되는 건 다하는 무역회사.
전문성 따위는 없다.
그냥 안 되는 거 없고, 수익 나오는 건 다 한다.
“그러니까, 모자 수입을 해서 납품한다고?”
“네, 제이엠인터내셔날에서 제안서를 보내 달라고 하더라고요.”
“우리 회사가 그런 걸 해본 적이 있었나?”
“없죠.”
“근데 그걸 왜 받았어?”
“사장님이 오더 따와서 시키니까요.”
아……, 오자마자 난관이네.
한번도 해보지 않은 제품 제안서를 만들어야 한다라…….
“제안서 목적이 뭐야?”
홍지아는 눈을 끔뻑끔뻑하며 말했다.
“우리 물건 사달라는 게 아닐까요?”
“무슨 소리야. 오더를 따온 거라며.”
“…….”
홍지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변 팀장님은 뭐라셔?”
“지혜롭게 알아서 잘하라고 하시던데요.”
“아……, 지혜롭게.”
휴우―.
한숨이 나왔다.
변 팀장의 시그니처 사운드. ‘지혜롭게’.
그래도 내가 만난 상사 중에는 변 팀장이 제일 낫다.
부지런한 상사보다는, 멍청하고 게으른 상사가 훨씬 낫다.
“회의록 좀 줘봐.”
“오홋! 역쉬~. 진일상사 브레인 강 주임님~.”
“…….”
난 소위 일류 대학이라 불리는 곳을 졸업했지만, 똥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부러 규모가 작은 회사를 찾아서 입사했다.
그러다 보니, 우리 회사에서 내 이력은 약간 별종 취급이었고, 뭘 하든지 간에 브레인으로 불렸다.
“뭐야~. 가격 제안서를 말하는 거네. 보고서는 좀 만들어 놨어?”
“아직이요.”
“미팅이 언젠데?”
“오늘 오후 4시입니다.”
“뭐어?”
황당하다. 오후 4시 미팅인데, 아무것도 안 되어 있다고?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해보고 안 되면 몸빵 때우고, 약속을 다시 잡자고 하시던데요. 걱정 말라고 자기가 책임진다고.”
“누가?”
“변 팀장님이죠.”
우리 팀장님은 마음이 참 편하고, 이렇게 대책 없이 책임감만 높으시다.
“아오~, 샘플이랑 제품 스펙 빨리 가져와 봐!”
* * *
그나마 다행인 건, 모자의 원부자재 상세 스펙과 단가는 알아봤다는 것이다.
“샘플 사진부터 빨리 다 찍어봐.”
찰칵. 찰칵.
홍지아는 카메라를 다루는데.
왜 저렇게 찍지?
사진 촬영?
이젠 내 주특기가 되었다.
가장 확실하게 검증된.
“자자. 스톱.”
홍지아는 열심히 찍다 말고, 날 바라봤다.
“겨우 그렇게밖에 못 찍겠어?”
“네? 그럼 뭘 어떻게 찍어요?”
난 그녀의 핸드폰을 뺏었다.
“영혼이 안 실렸잖아.”
“영혼이요? 모자 샘플 찍는데?”
“어디 보자……. 이쪽이 반사광이 괜찮네. 모자를 거기 탁자 위에 하나씩 올려놔 봐.”
예전엔 무서워서 카메라에 손도 못 대었는데.
이젠 뭐…….
“여기요? 이렇게요?”
“오케이!”
찰칵! 찰칵!
내 손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셔터 버튼을 누르는 내 손에 확신이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홍지아에게.
“모자 한번 써볼래?”
“모자를요? 제가요? 왜요?”
“잔말 말고, 어서 써봐.”
홍지아는 스냅백 모자를 꾹 눌러썼고, 난 쉴새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찰칵! 찰칵!
“굿!”
쉴 새 없는 셔터 소리.
마치 전문 사진가가 모델 촬영을 하는 듯한 액션.
직원들은 모여들고 있었다.
강태평은 무아지경에 빠져 셔터를 눌러 대고 있는데.
무릎을 굽혔다 펴고, 누워서 찍기도 하며, 완전히 핸드폰 카메라와 물아일체가 된 전문 사진가 같았다.
― 아니, 강태평 씨 사진 작가였나?
― 폼이 예사롭지 않은데?
찰칵! 찰칵!
“자! 모자를 하늘로 날려!”
심지어 카메라를 자유자재로 돌리며 셔터를 눌러대는데, 마치 곡예를 하는 것 같았다.
강태평의 호응에 힘입어, 홍지아도 완전히 몰입했다.
두 사람은 제안서에 넣을 샘플 사진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것 같았다.
“헉. 헉. 강 주임님! 이게 마지막 샘플이에요.”
“오케이~, 컷!”
찰칵! 찰칵!
― 우와~.
― 이래서 몰입한 사람은 멋지다고 하는 건가.
헉. 헉.
강태평은 주변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는 LCD 화면을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좀 아쉬운데.”
그는 시계를 보고는.
“아, 시간이 부족해. 어쩔 수 없지.”
* * *
점심 식사 후.
난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컴퓨터로 옮긴 후, 포토샵 프로그램을 열었다.
“주임님.”
“응?”
“포토샵 쓰실 줄 알아요?”
“글쎄. 해보면 되지 않을까?”
써본 적 없고, 배워본 적도 없다.
그냥 엑셀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지금의 내 손이라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그냥 PPT로 옮겨서 빨리 제안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도 없는데, 무슨 포토샵까지…….”
역시…… 기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오랜 기간 써왔던 것처럼, 신기하게도 너무나 쉬웠다.
“자기는 남자 친구 만나러 갈 때 화장 안 하고 가도 돼?”
“네?”
“사진도 똑같아. 본판도 중요하지만, 이쁘게 가꾸고 화장을 해주는 것도 중요해.”
홍지아는 신기한 듯 내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새 이미 내 손은 사진을 리터칭 하며 빠르게 보정하고 있었다.
“저……, 강 주임님.”
“응?”
“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난 보정 작업에 집중하느라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 얘기해.”
그녀는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는 내 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병원에 계시면서 포토샵 학원 다니셨어요?”
# 포토샵
Before: 써본 적이 없음.
After: 이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