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3 회: 6-26(제 56장 결말) -->
‘... 이런 생각은 하면 안 되려나.’
하지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시도를 해보고 싶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며 리오는 픽시의 머리를 검지를 쓰다듬었다.
“그동안에 있었던 바쁜 일들을 정리할 시간이야. 픽시... 다음에 또 부를 테니까 기다려줄래?”
좀 더 리오와 함께 있고 싶었던 픽시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인지 리오의 볼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며 사라졌다.
“...찜 당한 건가?”
살짝 어이가 없으면서도 기쁜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가볼까...”
리오는 마을로 향하는 문을 바라보았다. 흰 방에서 거대한 철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문 너머는 보이지 않았지만 어떠한 풍경이 펼쳐져 있을지 훤히 상상이 되었다.
그 풍경은 두렵지 않다. 자신이 원했던 것이며 예상했고 받아들이기로 했던 것이었다.
자신이 만들기로 한 탑의 세계.
이 세계를 만든 ‘탑’조차 마음에 들어했고, 스스로 주민의 일에 간섭했다.
신과 자신과 주민들이 만든 탑의 세계.
이제 맞이할 차례였다.
대기실에서 나갔다.
휘황찬란한 태양빛이 두 눈을 가렸고, 무의식적으로 두 눈을 감았다.
손으로 그늘을 만들고 조심스럽게 눈을 떴을 때.
주민들이 리오가 처음 탑을 올랐을 때처럼 수근 거리고 둘러싸고 있었다.
다가오는 쿠란을 보며 리오는 미소를 짓고, 살구빛으로 물든 두 손을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제 56장 결말
눈을 떴다.
따사로운 햇살이 침대를 덮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촉감은 어느 때와 같이 부드러웠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끔 했다.
누운 채로 두 눈을 껌벅거리며 리오는 쿠란이 베고 있는 팔을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으으음...”
잠결에 쿠란이 뒤척였다. 검은 머리와 정반대되는 하얀 피부가 언뜻 보였고, 평소보다 더욱 아름답게 보였다.
쿠란에게 빼앗긴 시선을 억지로 돌려,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그녀에게 덮어주고는 방안에 있는 거울 앞에 섰다.
뚫려 있던 가슴 언저리는 다부진 근육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온 몸에 흉터는 여전했지만, 리치였던 흔적은 없었다.
조심스럽게 손끝으로 자신의 몸을 쓸어 올리며, 리오는 거울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붉은 실’을 바라보았다.
목 뒤에서 시작된 붉은 실 한 가닥이 리오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붉은 실...’
리오를 휘감은 붉은 실은 쿠란의 목 뒤와 연결되어 있었다. 리오와의 차이점이라고 하면 그녀의 붉은 실은 몸을 휘감지 않고 단순히 리오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부스럭.
“일어났어?”
붉은 실에 의해 공명을 한 것일까, 잠에서 깨어난 리오의 각성에 의해 쿠란은 일어섰다. 기지개를 피며 가슴이 부푼다. 쿠란의 천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나신을 보고 리오는 고개를 돌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앤서러 리오는 감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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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탑의 입구에서 감옥으로 다시 끌려온 리오는 저항 한 번하지 않고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온 몸이 쇠사슬로 묶기고, 마법을 금제 당했다. 눈은 안대를 씌울 필요도 없었다. 빛 한점 들어오지 않으니 완전한 어둠 속에 고립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간수는 한 명도 없었다. 리오는 그저 빈 건물에 감금된 것에 가까웠다.
다시 인간으로 돌아온 것뿐이건만, 리치였을 때와 달리 리오는 정신력의 한계를 크게 느꼈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지치고, 눈은 침침해졌다.
배식을 해주는 인물도 없었기 때문에 항상 배고픔에 시달렸다. 목은 모래를 씹는 것처럼 항상 건조했고 리오의 편의를 봐주는 것은 무엇하나 없었다.
마을에서 리오에게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는다는 걸 이용한 고문이었다. 금새 정신력이 바닥난 리오는 하루의 반 이상을 밤에 빠져들었다.
솔직히 매일 잠에 빠져드는 것을 보면 탑이 리오의 편의를 어느 정도 봐주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리오라는 인간의 삶을 빨리감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간이 흘러있었다.
아니, 아무 것도 없고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는 감옥이니 시간이 흐른 사실 조차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을 망각하며 포기하고 쏟아지는 수면에 정신을 맡겼다.
리치였을 때와 달리 리오는 무엇 하나 계획하지 않았다. 그때는 자신이 계획한 일이 진행 도중이었기 때문에 정신력의 한계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지금은 아무런 희망도 없기 때문에 마냥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냥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얼마만인지, 빛도 소음도 없는 그야말로 공허의 감옥에 누군가 문을 열었다.
자신이 풀려나는 건 일말의 희망도 품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 자신처럼 이곳에 갇힌 것이리라.
그러나 감옥으로 들어온 자들은 리오의 구속을 풀기 시작했다. 인간에게는 너무한 굵은 쇠사슬과, 구속복이 나가떨어졌다.
얼마만의 자유인가. 피가 통하지 않았던 곳에 혈액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잃어버린 감각들을 되찾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온몸이 저린 뒤, 손 끝을 움직여보았다. 부들부들 떠는 것을 보니 아직 섬세한 작업은 힘들 것 같았다.
간수인지 모를 인물이 들고 온 횃불을 감지 할 수 있던 것을 보아, 시각은 여전한 듯 했고 청각 또한 문제 없었다.
탑의 규칙이 적용된 것인지 얼마지나지 않아 온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단지 오랜만이기 때문인지 처음에는 말을 더듬거렸다.
“무, 무슨 일...이지?”
한 동안 대화를 하지 않았던 리오에게는 너무나 빠를 정도로, 간수로 보이는 자는 입을 열었다.
“죄인 리오. 너의 공개 재판을 열기로 했다. 결과에 따라서 너는 다시 주민으로 돌아가거나, 너를 위해 지어진 이 감옥에 영원히 썩게 될 것이다.”
“재...판...”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죄인 리오는 재판을 벌일 필요도 없는 명박한 증거와 증인들이 있었다.
굳이 재판을 벌여 리오의 죄를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대변하는 입장에서는 필패가 약속되어 있었다.
가령, 쿠란이나 빈, 그 외의 지인들이 리오가 벌인 일들은 모두 계획적이며 단순히 해를 끼치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다. 라는 걸 밝힌다고 해도 그것 뒷받침 해줄 증거들이 없었다.
모두다 짐작일 뿐이다. 리오는 그저 아무 생각없이 취미로 오라클의 리더가 되었고, 군세를 몰락시켰다. 또한 드래곤을 각성 시켰다.
모험가들이 어떻게 움직일 것이라는 것을 모두 다 짐작으로 계획하여 이뤄낸 것인데, 그 누가 리오의 선의를 증명한다는 말인가.
아무리 빈이 리오의 생각을 그대로 따라한다 하더라도 불가능하다.
‘무의미한 일이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결론을 내리며 리오는 간수들과 함께 감옥 밖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느끼는 아침 햇살에 인상을 찌푸리며, 포박된 채로 리오는 재판소로 향했다.
재판소라고 해봐야, 임시로 만들어진 곳일 뿐이었다. 탑의 세계에는 ‘악’을 심판할 기관 같은 건 없었다.
넓직한 공터를 가진 탑의 입구. 나름 재판소의 구실이 갖춰진 곳에 들어서자 주변을 둘러싼 수많은 주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속닥 속닥
힐끗 힐끗 쳐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리오는 그 모습이 6년전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도, 이종족들은 자신을 힐끗보며 작게 속삭였다. 리오로써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피해망상증에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피해망상증이 아니리라. 명백하게 죄를 저지른 이상 주민들이 떠드는 대화는 험담일 것이 분명했다.
그때와 유일하게 다른 것이라면, 리오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많이 떠들어라. 내가 걸어온 길이다. 책임을 져야겠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임시로 만들어진 단상위에 올라섰다. 지금까지 리오를 데리고 온 간수와 경비병이 자리를 교체했다.
“그럼, 앤서러 리오의 재판식을 시작하겠소.”
진행자가 재판식을 주도했다. 곧 오십여 명의 인물이 나타나며 재판소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