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회: 6-19(제 55화 반전) -->
쿠란의 충고가 없어도 다들 베테랑이었다. 침을 흘리며 지도를 그리는 오크 여럿이 있었지만, 그들은 식욕을 참으며 연회궁을 통과했다.
연회궁을 나왔음에도 코 끝에 감도는 향신료의 냄세에 쿠란은 배고픔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자 허기가 도진 듯, 대다수의 파티원들이 말린 육포를 먹고 있었다.
‘배가 고파서 힘이 빠진 것보다는 낫겠지.’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쿠란은 연회궁의 범위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어...? 그러고 보니.”
육포를 다 먹고 깨달은 것이었지만, 연회궁에서는 전투가 없었다. 심지어 그곳을 지키는 경비병이나 시종조차 없었다.
‘나래궁에서는 기사단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쿠란은 리오가 오기 전까지 궁을 지키는 기사단과 전투를 벌였다는 말을 알사크에게 전해들었다.
당연히 이번 궁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이렇게 요리만 차려놓고 도망 갈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귀족이라는 직함의 습성을 생각하면 이럴 만도 하긴 해.’
반란군이 생겨나고, 모험가라는 제 3세력이 나타나며, 황실 밖에서는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정확한 시대적 상황을 파악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이러한 세력들이 등장한 요인에는 황실의 무능함과 귀족의 나태함이 주원인이 되었을 것이었다.
귀족으로써의 일에 충실히 하지 않은 이들이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면, 여태까지의 전투에서 큰 피해가 없었던 것과 연회궁의 문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연회궁이었지, 귀족들이 파티를 즐겨하던 장소일텐데... 어느 정도 깊숙이 온 건가? 반란군의 본대는 리오와 우리가 처리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거야. 궁을 지키는 황실군이 문제이겠군.’
분대장들을 불러 상의하기에는 시간이 없었다. 환영궁에서 지원병력을 막아낼 그들을 희생 할 순 없었다.
그들이 싸우기도 전에 황실 전역을 제압하는 것이 쿠란이 원하는 결말이었다.
“리더. 길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생각에 빠져있던 쿠란에게 동료가 말을 걸어왔다. 대지의 정령이었다.
“길이 넓어져?“
길이 점차 넓어진 다는 것은 외길이 갈라진 다는 말이었다. 여태 황실이 외길로 이어졌던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당연히 여러 갈래로 길이 나눠질 것이라 쿠란은 예상하고 있었다.
‘궁이 여러 개라면 리더의 선택이 중요해. 각 궁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가지는 지를 먼저 파악해야겠지.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정보가 단 하나도 없어.’
잠시 뒤, 쿠란의 예상대로 길이 갈라졌다. 가기 편하게 안내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각 궁의 이름으로 뜻을 유추하며 쿠란은 분대를 나눌지 고민했다.
때 마침, 분대장 두 명이 다가와 조언을 내뱉었다.
“리더. 60층의 공략법은 황실 제패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궁을 제압해야지 통과한다면, 분대를 나누는 것이 효율적일 겁니다.”
“내 생각은 다르오. 안전에 안전을 기해, 모두가 뭉친 상태로 궁을 공략해야 하오. 그것도 황제가 있을 거라고 추측되는 곳을 말이오. 결국 황실이란 황제를 위한 곳. 황제를 제압한다면 황실은 뒤따라 올 것이 내 생각이오.”
“그렇다간 뒤를 지키고 있는 동료들이 버티질 못합니다!”
“나도 이런 말을 하기는 싫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야 하오!”
분대장들의 논쟁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만, 결정은 내가 하겠어. 싸울 필요는 없어.”
눈을 감고, 신중한 결정을 하는 듯 그녀는 장시간 동안 고민에 빠졌다.
제 55화 반전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를 각성시킨다.
드라칸 안드레이는 드래곤으로써 현신했다.
금빛 비늘이 몸을 뒤덮고, 꼬리가 튀어나와 바닥을 두들겼다. 균형을 유지 할수 없을 정도의 풍압을 일으키며 날개를 펄럭였다.
결계의 크기 때문인지, 드래곤으로써의 외형은 작은 편이었다. 기껏해야 건물 반채 만한 정도랄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힘을 잃은 인간을 처치하는 데 충분했다.
도망갈 곳도 없고, 저항할 힘도 잃었다. 리오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케일이 건네었던 검을 꺼내들었다.
스르릉!
잡념이 사라지는 청아한 소리가 성당에 울려퍼졌다. 리치에게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소리였다.
마나와 같은 특별한 기운은 없었지만, 검 자체가 스스로 푸른 빛을 발광했다. 대장장이가 집어넣었던 화로속의 열기가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았다.
'역시... 좋은 검이다.'
리오가 탑을 처음 올랐을 때부터 사용했던 무기들은 모두 케일이 만든 것이었다. 무기총판의 직원을 통해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케일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했다.
검을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항상 사용한 것 처럼 손에 익었다. 마치 팔과 일체가 된 듯한 느낌.
어쩌면, 안드레이를 검 만으로 쓰러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그 몸으로 용을 베려하는 가! 가소롭구나!"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었다. 검을 쥐고 앤서러의 자세가 아닌, 언제 잃은 본 건지 기억조차 가물 가물한 검술서의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선공을 했다. 앞으로 발을 내딛으며 툭 튀어나온 안드레이의 입을 향해 시원한 일격을 가했다.
캉!
'큭! 명불허전이군, 아무리 검이 좋아도 드래곤의 비늘은 베어낼 수 없는 것인가?'
안드레이의 콧잔등과 검이 부딪쳐 튕겨나갔다. 충격에 몸을 가누기도 전에 안드레이는 콧소리를 내며 하얀 이를 드러내었다.
지지직!
간신히 뒤로 몸을 넘어뜨려 피해내었으나, 로브의 가슴 부분이 안드레이에게 물렸다. 천조각이 찢겨지는 소리가 나며 리오의 몸이 위로 들려올려졌다.
입에 물린 리오를 안드레이는 위로 내동댕이쳤다. 결계의 천장으로 치솟던 리오는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검을 휘둘렀다.
콰지지지직!
결계가 반발작용을 일으켰다. 리오의 손끝을 태웠던 것과 달리 케일의 검은 태우지 못하고 결계로써의 역할만 수행했다.
"크아아아!"
리오의 아래에 있던 안드레이가 괴성을 터트리며 붉은 입을 벌렸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리오를 그대로 삼킬 생각인 모양이었다.
드래곤의 체내로 삼켜진다면, 아무리 진혼이 있어도 리오는 되살아 날 수가 없다. 순식간에 최악의 가정을 떠올리며 리오는 허리에 힘을 주었다. 몸을 회전시키며 안드레이의 입을 향해 검을 베었다.
휘리리리릭!
비늘이 없는 입안이라면 상처가 나는 걸까, 안드레이는 순식간에 입을 닫고 풍압을 일으켰다. 공중에 있던 리오의 자세가 무너졌다.
방어가 풀린 리오. 그 순간 안드레이는 날아오르며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안드레이의 발톱.
위에서 아래로 긁어지는 발톱은 마치 세개의 검이 동시에 공격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검사 세명이서 공격하는 듯한.'
드래곤의 발톱에서 리오는 환영을 보았다. 검을 든 세 명의 검사가 동시에 공격한다.
먼저 공격 하는 것은 가장 왼쪽에 있는 검사였다. 두 번째는 가운데, 그 뒤는 가장 오른 쪽.
대각선으로 한 자루씩 공격을 해온다. 그렇게 느낀 리오는 무너진 자세에서 공격을 이었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상태로 안드레이의 가장 왼쪽 발톱과 부딪친다. 무의미한 행동일 정도로 리오는 발톱 중 하나와 부딪쳐 공중에서 땅으로 쳐박혔다.
언데드의 장점 덕에 고통은 없었다. 곧 바로 자세를 잡고 다시 하늘로 향해 도약했다. 위로 치솟으며 가운데 발톱과 검을 맞닥드렸다.
몸 속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어차피 죽어 있는 몸이라며 자신의 상태를 무시했다.
이미 한 번 죽어보았기 때문에 죽음이 두렵지 않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해보지 못하고 쓰러진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종족의 한계를 뛰어넘고, 자신이 선을 그어놓은 한계를 돌파한다. 가능하다면 댓가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을 모두 주고, 자신이 할수 있는 것을 한다.
아직, 리오는 한계를 보지 못했다.
"으아아아아!"
부러진 팔뚝에 힘을 주었다. 몸을 구성하던 마력이 조금이나마 움직인 것 같았다. 뼈를 두르고 있는 새빨간 근육에게 강제적인 명령을 내려, 이어서 검을 휘두르려 했다.
일격을 이용하여 지상으로 내려오고, 이격으로 발톱에 대항한다. 그리고 삼격을 날리려는 순간.
방금 전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자신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발톱이 멀어진다. 그와동시에 드래곤과 연결되어 있던 발톱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 발톱을 베었어?'
아무리 명검이라고 한들, 드래곤에게는 상처를 입힐 수 없다. 용인이기는 하나, 드래곤으로 현신한 안드레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