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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의 세계를 지나간 정복자들 중 그 누구도, 리오처럼 주민들의 생각을 바꾼 자는 없었다.
“그 아이는 어떻게 갔나?”
“글세. 마을 밖으로 나가고 알게 된 거지만... 이 밖에서는 축복을 사용할 수가 없었네.”
“그런가. 자네도 모르는 거군.”
“천하의 드라칸이라면 리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거라고 생각했다만. 내 헛된 기대였나보군.”
“말했잖는가. 그 아이를 신경 쓸 정도로 여유가 있지는 않다고.”
그 말에 모만은 리오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렸다.
안드레이는 자신의 부모인 드래곤이 각성하지 못하도록 애를 쓰고 있다. 그 때문에 리오를 살필 여유가 없다고 했다.
‘분명 리오가 그분을 쫓고 있고 있던 것 같은데.’
“이미 지나간 일이긴 하네만. 리오가 그분에 대해서 질문했던 것이 떠오르는 군.”
“리오가?”
“탑에서 그분의 정신체를 만난 모양이야. 알고 있냐고 묻더군.”
“그래서 뭐라고 했나?”
모만은 숨김없이 리오에게 말했던 그대로 말했다.
“알고 있다고 한들 무엇을 할수 있는가? 상대는 비록 정신체이기는 하나, 드래곤. 결코 만만한 상대도 아니며 적대할 이유도 없다고 했지. 리오라면 내 말을 이해했을 걸세.”
둘은 리오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상상해보았다. 오라클과 같은 직접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는 이상, 드래곤이라는 위대한 존재에게 적대감을 품을 일은 없을 것이었다.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 오히려 원만한 관계를 가지려 할 것이다.
“흠.”
하지만 리오가 죽기 전에 페이스와 만났다는 점이 둘에겐 걸렸다.
페이스라는 위대한 드래곤. 위대한 정신체가 리오에게 함부로 정체를 밝혔을 리가 없었다.
둘의 만남에는 이유가 있다. 리오가 원했던, 페이스가 원했든 서로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 중 한 명에게는 상대를 만나야할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이유 가질 가능성이 있는 건 페이스 뿐이었다.
‘아버지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조차 없었던 리오다. 아버지와 만나기 전 까지 용건은커녕 그 존재를 떠올릴 수도 없었을 거다.’
‘리오는 페이스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그 때문에 나를 찾아왔지. 용건이 있었다면 그런 질문을 하진 않을 거다.’
모만이 탑의 축복 : 위상을 가졌다는 것을 리오는 알고 있다. 페이스와 만나기 전에, 페이스를 만나려고 리오 쪽에서 원했다면 어디서 만날 수 있는지 모만에게 물어보았을 것이다.
‘리오에게는 아버지를 만날 용건이 없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아버지는 리오에게 용건이 있었다. 죽기 전에 만났다면 용건이 해결 되었을까? 해결되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정신체이라고는 하나, 죽는 걸 가만히 두고 봤을 리가 없어.’
안드레이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하네. 볼일이 떠올랐네. 이만 가봐야겠군.”
리오와 아버지가 연관이 되어있다.
현재 아버지의 목표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오직 하나 뿐인 자신의 몸을 되찾는 것. 자식들에게 봉인당한 몸을 되찾는 것.
리오와 만났던 용건은 목표의 연장선상이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리오를 만났던 것이다.
‘혹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리오의 마법. 최악의 마법사라 불리며 마법의 대가라 불리는 드라칸 조차 막지 못한 알터의 마법을 아버지가 손에 넣는다면.
마음껏 다룰 수 있게 된다면 막을 수 없다.
분위기가 변한 안드레이를 보고 모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든 모양이군. 드라칸의 예감을 무시할 순 없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미안하군. 다음에 시간이 날 때 내가 그곳으로 직접 가지.”
“그런가? 부디 그 예감이 틀리길 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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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만은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흥겹게 술을 마셨다. 취기에 올라 그답지 않게 코가 벌겋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슬슬 돌아가도록 할까.’
모만에게은 이 마을이 아니라 다른 마을에 자신의 집이 있었다. 축제를 끝내기에는 이른 시간이기는 했지만, 취기도 올랐고 돌아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이 적당했다.
다가올 개벽을 맞이 해야한다. 다음 연도에는 어떤 계절이 찾아올지 예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 왔으면 좋겠군. 오라클이니 모험가들이니 시끄러운 일들이 모두 눈에 묻히도록. 주민들이 차분하게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해.’
물론 자신에게도 그 시간은 필요했다. 이미 죽어버린 남자를 잊기 위한 시간. 최초의 앤서러가 부탁한데로, 또 다시 찾아온 인간을 위해 이런 저런 준비가 필요했다.
그렇게 자신이 있을 곳으로 돌아가려는 찰나, 모만은 잊고 있던 약속을 떠올렸다.
‘모리안을 깜빡했군.’
이리나의 여관에서 일하고 있는 모리안과의 약속이었다. 인간을 주제로 축제를 준비했다고 하니 한 번쯤 가보고 싶어졌다.
발걸음을 돌려 여관으로 향했다. 이미 그 근처에는 수많은 주민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호빗인 그를 덥쳐 몸을 덩실덩실 춤추게 만들었다.
지나가던 주민이 권한 술을 마시고, 그 열기에 취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발걸음을 멈추진 않았다.
기어코 이리나의 여관 앞에 당도한 모만은 당찬 걸음으로 안에 들어갔다.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여관은 밖보다 열기가 뜨거웠다. 묘한 음식과 묘한 장난감으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인간만이 먹는 음식과 놀이기구인 모양이었다.
‘카드 맞추기 인가.’
“쓰리고!”
“올인!”
“뭐야. 이거 왜 이렇게 매워!... 맛있긴 하네.”
숨 가쁜 여관이었다. 모만의 뒤로 새로 들어왔던 주민들은 자리가 없자 다시 나갔다.
모만은 시간을 들여 끈질기게 자리가 비길 기다렸다.
“응? 모만씨? 어서오세요! 기다렸다고요! 조금 일찍 오시지!”
한 참 일하던 모리안이 모만을 발견했다. 빈자리로 안내하더니 자신이 자랑하는 음식들을 추천했다.
“이건 어떠세요? 조금 맵긴 한데. 식욕이 돋구는 요리라고 해야 할까요. 먹으면 먹을수록 매운데 계속 먹게 되는 그런 요리에요.”
“적당한 걸 주게. 기대가 되는 군.”
“헤헤. 금방 내올게요. 기다려주세요.”
모만이 자리를 비웠다.
리오와 다르게 밝은 성격으로 이 세계의 적응하는 그녀는 모만에게 있어서 몹시도 생소했다.
탑의 세계는 인간이 죽고 난 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인간을 소환하고는 했다.
이번에는 그 패턴이 깨졌다. 그 만큼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그 이유가 모리안의 성격과 연관되어 있을 지도 몰랐다.
‘그래도 금방 적응해서 다행이군. 리오는 굉장히 힘들어했는데...’
모리안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리오와 비교를 하고 만다. 하지만 곧 그녀의 매력에 빠져들어 리오에 대한 기억을 잊고 만다.
그가 어떻게 접시를 잡았고, 어떤 손으로 컵을 들어 물을 마셨는지, 어떤 분위기로 자신을 대했는지 가물가물해졌다.
‘하긴, 인간의 역사를 뒤덮을 수 있는 건 인간뿐이지, 리오도 그랬고. 탑은 리오를 잊혀지기 위해 바로 모리안을 소환한 건가.’
리오에게 향했던 기대는 과도했다. 탑을 정복하기도 전에 일으킨 사단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을 잊혀지기 위해 탑이 모리안을 소환했다면 맞는 이야기다.
모리안은 리오처럼 탑을 오를 생각이 없다. 모리안을 끝으로 인간이 한동안 소환되지 않는다면 인간은 평범하게 살고, 힘없는 약한 종족으로 기억 될 것이다.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잊게 될 것이다. 리오가 처음 탑의 세계로 왔을 때처럼.
“짜잔. 모만씨. 제가 직접 만들었다고요. 한 번 드셔보세요!”
어느새 나타난 모리안이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리오와 겹쳐본 모만은 화들짝 놀랐다.
그의 덜컥 놀라는 모습에 역으로 놀란 모리안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노련한 종업원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다.
“제가 리오라는 분과 그렇게 닮았나요?”
모만의 내심을 찔러본 모리안이었다. 모만은 평상심을 되찾았다.
“아, 아닐세. 그저 인간이라는 부분만 닮은 거지. 성격이나 생김새는 전혀 달라. 그는 모리안양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냉혹하고 계산적인 남자였지.”
“그런가요. 하지만 다들 저를 그분하고 겹쳐보는 듯 하더라고요.”
모만과 같은 반응을 보인 이들이 한 두명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변명을 하듯 모만은 말했다.
“나는 단지. 옛 기억과 혼동을 했을 뿐이네. 그와 나는 친밀한 사이였네. 이따금식 자네처럼 나에게 식사를 대접하곤 했지.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 것 뿐이네. 너무 신경쓰지 말게나.”
“예예. 저도 신경쓰지 않아요. 단지 그 사람과 저는 비교 할 수도 없는데, 비교 당한다는 건 좀 다른 방향으로 기분이 나빠져서요.”
“다른 방향? 무슨 말이지?”
모리안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졌다. 평온한 얼굴로 말했다.
“저와 그 분을 겹쳐보는 건 이 마을 주민들에게 있어서 어쩔 수 없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진 않아요. 하지만... 이곳에 그런 영향을 끼쳤던 분이 저로 인해서 잊혀진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기억 위에 제가 덮어진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아져요. 제가 먹칠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누구보다 리오와 겹쳐보고 있던 것은 모리안이었다. 같은 인간이라는 이유로 주민들의 시선을 의식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시선의 이유를 알고 있던 그녀야 말로 가장 리오와 자신을 겹쳐보았다.
'피해를 받는 자는 피해의식이 가장 크다... 인가.‘
모만은 언젠가 리오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피해의식이 심하기 때문에 모만은 오라클의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았음에도 마을에서 나갔다. 스스로 진실을 밝히고 퇴출했다.
리오는 그것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모만의 결심은 막을 수 없었고, 그 후에 내뱉은 말이었다.
피해를 받는 자는 피해의식이 가장 크다.
‘리오. 너도 그 때문에 죽은 거겠지?’
피해의식 때문에 죽어간 남자를 생각했을 때, 모만은 모리안의 뒤에서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주민을 보았다.
얼핏 보인 후드 안속의 미소가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한 순간, 거대한 덩치의 주민이 시야를 가렸다.
덜컹!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모만은 검은 로브의 주민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없어...?’
그 사이에 자리를 옮겼거나 비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마, 그 남자가 아직도 살아 있을까. 그럴 일은 없다.
모만의 축복에 앤서러 리오는 감지되고 있지 않다. 죽었다.
‘나도 참. 모리안을 보다가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군.’
“왜 그러세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모리안이 모만을 불렀다. 자신의 착각을 인정하며 모만은 미소를 지었다.
그 남자는 이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