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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5장 태동
리오의 눈이 떠졌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는 것도 잠시, 온몸의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뒤에 있던 기계익룡의 삐그덕대는 숨소리가 들려왔고, 쿠란과의 일이 벌어진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왜 아직도 살아있지?’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땅바닥의 차가움도, 찔려버린 상처의 고통도 없었다.
죽어버린 시체에 자신의 정신만이 남은 것 같았다.
“일어났나?”
목도 움직일 수 없는 리오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자. 시각으로 보이는 검은 마나 때문에 흑마법사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너는 운도 안 좋군. 아니지… 성격도 나쁘고 융통성도 없는 건가? 감정을 위해서 움직였다지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를 못하겠군.”
리오가 쿠란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 마법사였다. 말투와 풍채를 보아하니, 페이스나 온슈타인은 아니었다.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나? 후회를 하고 있나? 뭐, 그렇겠지. 인정하고 그 마족에게 저항하지 않았던 걸 보면…….”
흑마법사는 쥐고 있던 지팡이를 땅에 부딪쳤다. 익숙한 모양의 보랏빛 구슬이 박혀있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빨려들어갈 법한…….
“삶에 대한 애착도 없고, 그렇다고 지구로 귀환을 하고 싶지도 않은 남자지 넌. 하지만... 만약 되살아난다면 이렇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싶다.”
지팡이에서 보랏빛 마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담배연기가 리오를 맴돌 듯, 리오의 몸을 감쌌다.
“귀환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 대신에 이 세상을 바꾼다. 네 입맛대로…. 여태 네가 해온 일과 다르지 않아. 템플러들을 배척하면서 그들을 돕고, 모험가들과 템플러가 단결하게끔 만든다. 그와중에 주민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인식을 바꾸는 거지.”
보랏빛 연기가 리오의 몸에 스며들었다. 그 순간 몸의 일부에 힘이 돌아왔다.
“탑의… 세계를 바꾸라고?”
칸나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마을 주민을 멍청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충고.
자신의 마음대로 이 세상은 바꿀 수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실은 갈망했다.
어디에나 있는 부조리와 불균등을 구제하고 싶었다.
이 세계가 지구처럼 변하지 않도록, 지구의 닮은 점이 없어지도록.
종족의 격차와 축복의 유무를 없애고 싶다.
“할수만 있다면….”
할 수만 있다면 할 것이다. 쿠란을 위해서 무엇이든 했던 것처럼, 리오는 자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낼 것이다.
자신을 적대하는 구 오라클을 해체시켰던 것처럼, 템플러들이 다시는 자신에게 침입을 할수 없도록.
탑의 세계로 온 이유와 일맥상통한 이유. 리오라는 자신의 개인의 행복과 가치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신을 갉아먹더라도, 이런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더라도.
‘… 아니,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하지 않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뤄낼 것이다. 이 세계의 시스템을 바꿀 것이고 스스로 탑이 되어 이 세계를 관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는 것은. 이 남자의 말처럼 귀환을 완전히 포기한 다는 것이다.
자신이 평생 살 집을 관리하는 것처럼 탑의 세계를 관리한다.
마법사는 리오의 머릿속을 들여다 본 마냥 입을 열었다.
“이미 돌아가 보았자잖아? 네가 돌아간다고 한들 그 세계가 바뀌진 않아. 천하의 앤서러 리오도 평범한 계약직 사원이 되겠지. 이곳에 오기 전처럼,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게 반복되는 거야. 그런데도 돌아가고 싶나? 가족을 보고 싶어서? 외로워서?”
하찮은 감정.
스스로 웃음이 터져나올 정도로 외로움이나 그리움이 하찮게 느껴졌다.
이미 자신에겐 그러한 것 따윈 없다.
수년 간 탑을 오르며 자신에게 남은 건 탑의 지식 뿐이다. 그 외의 기억들은 모두 지워졌다고 무방했다.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의 말투, 하나 뿐인 형의 모습.
처음 좋아했던 여자애, 가장 친했던 친구.
온 동네를 방방 뛰어다녔던 자신, 골목대장을 자처했던 기억.
방황하던 고교 시절, 가정형편을 원망하던 생활.
이미 모두 잊었다.
그때의 단편적인 기억만 떠오를 뿐이다.
지구따위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마음은 굳혔나? 굳이 대답을 물어볼 필요는 없겠군. 그렇다면 너에게 다시 기회를 주지.”
리오의 몸에 다시 힘이 돌아왔다. 뚫린 상처들은 여전히 아물지 않았지만, 마치 이종족이 된 것처럼 아픔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날 되살린 건가?”
“그럴 리가. 그 어떤 마법을 써도 죽은 자는 되살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너도 알 텐데? 다른 방법을 썼지.”
알터의 사령술이 떠올랐다.
사령술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온갖 마법들이 합쳐진 대마법이었다.
소환 마법. 하지만 소환하는 것은 과거의 존재다.
매개체를 통해서 과거의 존재와 이어져, 마법사가 소환할 수 있게끔 하는 것.
리오는 이것을 통해서 소환사인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었고, 덧붙여 과거의 정복자를 소환해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아니, 이 시간대에서는 자신뿐이었다.
마법을 만들어낸 본인.
알터라면 리오보다 능숙하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당신….”
보랏빛 구슬이 달린 지팡이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아공간에 담겨져 있을 물건이 상대에게 있었다.
라이프 포스 베슬. 마법사의 영혼이 담긴 마력구.
진혼이라 불리는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단 한 명이었다.
리오가 정체에 대해 묻기도 전에, 마법사는 지팡이를 바닥과 부딪쳤다.
“또 보도록 하지… 아니, 다음엔 만날 수 없으려나.”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으며 알터는 모습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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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사가 모습을 감춘 뒤, 리오는 갑작스런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정신을 차리는 건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기계익룡은 자연사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알터라 추정되는 마법사와의 만남이 꿈처럼 느껴졌다.
진혼에 담겨있는 그가 자신을 되살린 것이다.
하지만 옷을 벗어 상처입은 자신의 몸을 보는 순간, 그가 행했던 것은 시간역행의 소환술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이건.”
알터에게 망자를 되살릴 수 있을 정도의 마법이라면 역시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사령술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터가 자신에게 사용한 것은 전혀 다른 마법이었다.
인간의 몸이라면 상처를 입고 움직일 수 없다. 아무리 과거에서 되살려졌다고 해서, 상처를 입고 움직일 수 없다는 건 아르토가 증명했다.
“나는….”
뻥 뚫린 심장.
단검으로 헤집어진 복부.
“언데드… 리치인가.”
그제야 자신의 창백한 피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전과 다른 알 수 없는 힘도 느껴졌다.
본래 앤서러 리오에게는 없던, 강력한 흑마력이 체내에 있었다.
축복을 쓰지 않으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던 리오가, 마법 그 자체가 되었다.
“그럼 내 라이프 포스 베슬은…….”
설마하는 심정으로 아공간에서 진혼을 꺼내었다. 자신의 물품중에 마력구가 되어줄 물건은 이것뿐이었다.
급히 꺼내어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알터의 진혼은, 리오의 진혼이 되어버렸다고.
‘그럼 이 안에 있던 알터는 어디로 간 거지?’
라이프 포스 베슬에 담겨 있던 알터의 영혼파편.
그 속에 자신이 들어갔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이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알고서 행한 마법이겠지? 날 리치화 시키다니.’
진혼을 바라보며 혹시나 아까 전의 알터가 보일까 기대를 해보았다. 그러나 오히려 알터에 대한 궁금증만 커질 따름이었다.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싶었다.
다시 모습을 보일 리가 없었기 때문에 리오는 한숨을 내쉬며 진혼을 다시 아공간에 넣었다.
그러던 도중.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리치는 라이프 포스 베슬만 있다면 언제든지 살아날 수 있다.
단, 라이프 포스 베슬만 있다면 죽을 수도 없다.
그는 지구로 돌아간 정복자로 유명했다. 이렇게 베슬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소름을 느끼며 리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가 정확히 이 세계로 언제 온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지금은 죽었다.
이곳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탑의 세계에 인간은 한 명뿐이라는 규칙은 어겨진 것이 된다.
자신이 이곳에 왔다는 건, 그가 없다는 것이 된다.
‘… 만약. 인간에서 리치가 된 주민을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의문에 대한 답은 탑에서 나가는 순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