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회: 5-12 -->
와르르르륵!
깨진 거울마냥 철벽이 비산했다. 바로 밑에 있던 기계익룡의 위로 무너진 철벽조각들이 떨어져내렸다.
“리, 리오?”
예상도 못한 듯, 설마하는 눈으로 철벽 너머를 바라보는 쿠란이었다. 리오는 대답대신 자신이 치고 있던 익룡의 뿔에 다가갔다.
마치 샌드백을 치는 마냥, 와이번의 머리 위에서 리오는 뿔을 계속해서 가격했다. 한번, 두 번, 세 번… 손과 발, 심지어 머리까지 이용하며 충격을 주던 어느순간,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얼음을 제어하던 익룡의 머리가 축 내려갔다. 몸체에 있는 발전기가 마나 공급을 끊은 것이다.
깨어나있던 다른 와이번의 머리는 쿠란이 막고 있었고, 남아있던 머리가 기어코 깨어났다.
깨어난 불을 제어하는 머리가 리오를 향해 입을 벌렸다. 과연 앤서러로 막을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는 순간 리오의 팔을 검은 채찍이 묶었다.
강제로 끌어당겨지며 쿠란의 곁에 착지한 리오는 한숨을 돌렸다.
“고맙긴 하지만… 다음 부터는 미리 말해줘. 공격인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미안.”
혀를 내밀며 웃는 쿠란이었다.
남은 익룡의 머리들이 쿠란과 리오을 향해서 브레스를 내뿜었다. 서로 거리를 벌리며 안전한 위치로 이동했다.
@
하늘에 떠 있는 일곱 개의 달.
여자는 탑의 세계가 처음인 마냥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옆에 있던 픽시의 말이 사실처럼 다가오기 시작했다.살던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침엽수림.
가슴까지 오는 잡초.
무엇보다 가장 크게 느껴지는 다른 공기.
정말 자신은 이계로 온 것이다.
그녀의 옆을 날아다니던 픽시가 입을 열었다.
“이제야 제 말을 믿으시겠어요? 당신이 있던 곳과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요.”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자는 근처에 있던 개울가로 다가갔다.
바닥이 보일 정도로 투명하다.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의 눈은 투명하고 비늘이 아름다웠다.
평상시 징그럽다고 생각했던 아가미가 귀엽게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이계에 대해 믿음이 굳혀갈 무렵.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인간처럼 생겼으니, 귀는 뾰족하고 체형이 작은 종족. 여자의 허리 정도 오는 크기의 체구를 가진 호빗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줄 알았건만, 그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한 여자는 입을 열었다.
“누, 누구세요?”
호빗은 당황하던 표정을 지우곤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호빗 모만. 당신을 마을까지 안내하겠네.”
@
마도공학으로 이루어진 익룡이 하늘을 날며 브레스를 내뿜었다. 창처럼 내려 꽂혀지는 번개. 대지를 뜨겁게 달구는 화염. 정신없는 40층의 공동에서 리오는 하늘을 주시했다.
“쿠란!”
리오의 말소리와 동시에 쿠란의 마법이 시전 되었다. 주변에 다가온 푸른거인들을 상대하던 그녀는 금세 오의 곁으로 이동했다.
쿠란이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것을 확인하고, 리오는 익룡이 자신에게 쏘아보낸 브레스에 몸을 부딪쳤다.
파지지직!
전도체를 가진 전격 브레스는 막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정말 빛처럼 움직였다면 리오가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움직였을 것이다.
다행히 익룡의 브레스는 전자였고, 앤서러로 막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리오는 브레스를 이용했다. 익룡에게 다시 돌려보내지 않고 쿠란이 상대하던 푸른 거인들을 향해 날린 것이다.
푸른 거인 두 마리가 전격 브레스를 맞고 주저앉았다. 그 사이 쿠란이 마법을 완성시켜 검은 창을 쏘았다.
거인의 가슴 언저리에 사람 머리만한 구멍이 생겨났다. 곧 푸른 오라가 리오와 쿠란에게 스며들었다.
“온다!”
하늘을 체공하던 기계익룡이 비명을 지르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다리를 세운 것이 잡아챌 모양이었다.
그러나 둘에게 닿는 것은 불가능했다. 쿠란이 급히 검은 안개를 만들어내어 시야를 방해했다. 동시에 리오는 무기와 방어구를 손상시키는 용도였던 금속부식 마법을 시전했다.
‘본래 무기와 방어구를 파괴시키는 마법이지만…. 몸이 금속으로 이루어진 기계익룡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안개를 뚫고 나타난 기계익룡의 모습은 처참했다. 푸른 색이었던 익룡의 모습은 녹색으로 물들었다. 다시 날아날 힘도 잃은 듯, 리오나 쿠란이 별다른 수단을 취하지 않아도 홀로 철벽에 부딪쳤다.
‘녹색오라의 힘은 육체를 강화시키고, 푸른오라의 힘은 마나와 같은 정신에너지를 강화시키지. 마침 나와 쿠란에게 걸려있던 푸른오라 덕분에 마법이 제대로 들어갔어.’
바둥바둥거리고 있는 기계익룡은 다시 일어날 힘도 없는 듯, 마나엔진의 구동음만 내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녹슨 탓인지 소리가 매끄럽지 못했다.
“생각보다 쉽게 깼는데, 오라들이 무슨 힘을 가졌는지 알아내는 것만 꽤 걸렸는데….”
쿠란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평소 동료들을 이용해서 탑을 올랐던 만큼, 지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마저 전투를 끝내려고 할 때 였다. 잠자코 있던 쿠란이 입을 열었다.
“리오. 묻고 싶은 게 있어.”
“전투 중이다 쿠란. 나중에 묻는 게 어떨까?”
“아냐. 지금 묻고 싶어.”
그 말을 하며 쿠란은 자신의 흑마법을 사용했다. 기계 익룡에게 거대한 암흑 창이 꽂혔다.
몸이 부식되어 방어력이 낮아진 익룡의 몸이 완전히 관통되었다.
완전히 전투불능이 된 익룡을 보고 리오는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쿠란에게 몸을 돌렸다.
“쿠….”
그러나 자신의 등에 닿고 있는 차가운 물체를 느끼곤 몸이 굳었다.
날카롭게 서 있는 푸른 칼날. 연약한 인간의 몸쯤은 찢기고 안을 보여주기엔 충분한 단검이었다.
놀랐던 리오였지만, 쿠란의 행동에 대해 의문은 품지 않았다.
‘칸나의 등 뒤를 조심하라는 말은… 이것이었나.’
언젠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의 죄를 쿠란이 알게되고 죗값을 달게 받으리라는 건. 그때의 일을 시작하면서 알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군세를 분해시키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잘못된 일임을 알면서도 행했다.
‘이렇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며칠간 가슴에 있던 응어리가 녹아사라지는 것 같았다.
함께 생활을 함에도 감정에 충실히 행동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의 동료를 자신이 죽였기 때문이다.
죄책감 때문에 쿠란에게 솔직하게 대해지 못했고, 옆에 있어도 안절부절한 마음만이 들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불안감. 죄책감. 후회가 마음을 편치 못하게 했다.
“미안 쿠란.”
“사과 하지마.”
등에 닿고 있는 단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동료였던 자를 죽이는 것이 두려운 건지, 아니면 복수의 달성에 희열을 느끼고 있는 건지 리오로써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둘의 사이가 파탄이 나더라도, 리오는 한 가지 사실만 쿠란이 알아주었으면 했다.
서로의 종족관 때문에 자신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알아주기만 하면 된다.
“쿠란.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한 건지. 알고 있어?”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단검의 흔들림이 멈추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한 리오는 이어질 충격에 대비했다.
아마 자신을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애정의 결과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도 알고 있었다.
그런 식의 방법밖에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라는 변명은 할 수 없다.
좀 더 감정에 솔직해지고 자신의 손으로 처단했던 템플러들처럼 욕망에 충실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구애에 대한 쿠란의 대답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도 리오를 진심으로 좋아했어. 함께 하고 싶었고 내가 쉴 곳이 여기 다 라는 느낌을 받았어. 하지만 지금은 아냐. 아무리 날 위해서 그런 짓을 했다지만, 그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야.”
눈앞의 남자에 의해 죽어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두.
이 남자의 계략 때문에 죽었다는 걸 알았다는 순간, 얼마나 허망감을 느꼈던가.
자신이 그 누구보다 믿었던 존재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남자의 행동이 모두 자신을 위해서 한 것이었음을, 희생이였음을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모른 척 하고 있기엔 함께 했던 동료들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리오와 나 때문에 너무 많은 주민들이 죽었어…. 하루하루가 죄스러워.”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며 리오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피로 물든 구애법의 죄는 사죄할 도리가 없다.
“그러니까… 리오. 이제 그만 서로 편해지도록 하자.”
대답을 하기도 전에 쿠란이 움직였다.
날카로운 비수가 리오의 배를 뚫었다. 이물질에 거부감을 느끼며 몸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부들부들 떨리며 손발이 배를 부여잡았고, 등을 빼내려 발버둥쳤다.
하지만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쿠란이 단검을 좀 더 깊숙이 찌르고, 좌우로 움직이며 리오의 죽음을 앞당기려 했다.
‘역시… 고통은 익숙해질 수 없나.’
죽음이 코앞까지 왔건만, 살고자하는 의지는 불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고통에 대한 발버둥만 칠 따름이었다.
사람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품는 것은 갈망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포기한 인간은 사는 것을 포기한다.
결정적으로 말하자면, 리오는 후자였다.
탑의 세계로 오는 순간, 지구의 신태준에게 나아갈 길은 없어졌다.
귀환을 한다고 한들, 이 세계에서 살던 자신이 지구를 살아갈 순 없다.
하물며… 돌아간다고 한들, 몇 년의 세월이 지난 후란 말인가.
자신이 알던 지구는 변해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또 다른 신태준이 마련한 자리에 자신이 앉을 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귀환이란 말인가. 단지 그 세계에서 살기 위해 귀환을 한다는 말인가.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구 나이로 35살인 리오이자 신태준은.
사실상 귀환의지를 상실했다.
탑을 올랐던 건 단순한 의무감 때문이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출근을 해야 하고, 맛도 없는 밥을 살기 위해 먹어야하는 것과 같다.
의무감.
덧 붙여… 한 여자 때문이었다.
“큭!”
쿠란이 단검을 뽑아내었다. 핏줄기가 뿜어지며 혈액이 역류했다.
입에 피가 흘러나오고, 눈이 붉어지는 걸 느낄 때,
쿠란이 다시 한번 단검을 찔렀다. 이번에는 심장의 뒤였다.
푸욱!
가슴의 한 가운데에 박힌 비수.
그것을 보며 리오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미안.”
호흡이 멎어가는 걸 느껴졌다. 호흡이 가팔라지고 입에 머금은 피를 뱉어낼 힘도 없어졌다.
쿠란은 단검을 뽑아내고 죽어가는 리오에게 말했다.
“나는 리오를 리오처럼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아.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니, 그런 건 할 수 없어. 내가 단순히 리오에게 했던 행동들은 긴밀한 친밀감을 위해서였지.”
리오의 몸을 바닥에 눕히며 쿠란은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빛을 잃어가는 리오의 눈을 보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리오를 이용하기 위해서 그러한 행동들을 한 거야. 이 정도는 리오도 알고 있었겠지? 알면서도 나에게 빠져든 거 맞지?”
대답할 힘 따윈 없었다. 리오가 아직까지 숨을 붙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나 때문에 한 일이잖아? 감사의 인사 정도는 할게.”
쿠란의 얼굴이 다가왔다. 아직 끊어지지 않은 신경이 입술에 닿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고마웠어 리오.”
그 말을 끝으로 리오의 목숨이 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