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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을 등지고 검은 기류를 흘리고 있는 리치였다.
그의 앞에는 보랏빛의 구슬이 리오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소. 신이시여.”
낯익은 리치의 정체는 온슈타인이었다. 그의 첫마디에 리오는 인상을 찌푸렸다.
“웃기는군. 신이라니… 설마 네가 인공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의심을 했었던 적이 있었는데. 내 의심대로였다니.”
“그세 계획을 꽤뚫어 보시다니. 역시…….”
‘방금 전 나를 신이라 부른 것도 그렇고… 날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해 말투는 여전히 고압적이었다. 사실은 자신을 신따위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리오는 온슈타인의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네가 믿는 건 누구지?”
“그건….”
곤란하다는 듯이 리치 온슈타인은 말을 흐렸다. 방금 전 자신을 신이라 불렀음에도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확답을 내리지 못하구려. 하지만 이걸 귀공이 갖는다면 나 또한 선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오.”
온슈타인은 갑작스럽게 리오쪽으로 보랏빛 구슬을 던졌다. 땅바닥에 부딪치고, 데구르르 굴러오기 시작했다.
구슬은 자연스럽게 힘을 잃고 멈추어야하건만, 기이하게도 리오를 향해서 점차 빠르게 굴러오기 시작했다. 마치 주인에게 돌아가듯이.
"진혼?"
리오는 진혼에 대해서 떠올렸다.
흑마법사 알터의 아티팩트. 리치가 아니었으나 리치나 가지고 다닐 법한 라이프 포스 베슬.
일반적인 베슬이라면 누구나가 사용할 수 있지만, 여태 그 누구도 사용할 수 없던 마력구.
그 존재에 대해서라면 당연 마법의 대가인 안드레이와 다른 드라칸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리오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그 존재에 대해서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다는 건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온슈타인이 나에게 이걸? 왜?'
리오는 페이스에 대해서 떠올렸다. 애초에 그자가 리오에게 알려준 만큼, 그라면 온슈타인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을 것이다.
이해가 일치하니까.
온슈타인은 자신만의 신을 위해 알터가 필요하고, 페이스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알터를 필요로 하니까. 둘은 협력할 수밖에 없다.
마도를 위해 언데드로 타락한 마법사인 만큼, 온슈타인도 페이스를 보았을 때 그의 정체에 대해서 눈치를 챘을 것이다.
드래곤이 자신에게 협력을 요구한다. 타당한 이유라면 온슈타인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페이스와 한패인가? 그가 진혼을 나에게 넘겨주라고 했겠지. 아닌가?"
"맞소.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어보았자 무의미한 물건. 귀공에게 넘겨주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소."
"나에게 줄 예정이었다라."
'진혼을 가지고 있던 온슈타인이라면 어느정도 연구는 해보았겠지. 나에게 넘겨준다는 건 연구가 끝났다는 건가?'
생각에 빠질 무렵, 리오를 향해 태양이 빛을 쏘았다.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막았다.
태양을 등지고 있던 리치의 기운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침이 밝아오르고 있구려. 진혼을 넘겼으니 이만 가보겠소."
앞으로 다가가 사라지려고 하는 리치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진혼의 영롱한 빛과 태양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잠깐!"
리치의 옷가지를 붙잡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치가 내뿜는 마력일 뿐이었다.
안개로 변한 온슈타인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완성된 진혼을 기다리겠소 나만의 신이시여."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리오는 웃음을 터트렸다.
“날 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말투는 고상하게 내뱉는군. 믿고 있기는 한건가?”
진혼을 가지고 리오는 돌아가기로 했다.
제 44장
'진혼인가...'
집으로 돌아온 리오는 방안에 놓인 진혼을 바라보았다.
55층을 통과한 이후부터, 무언가 흐름이 느껴지고 있었다.
자신이 누군가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온슈타인의 습격, 메데이아의 조사, 인공신과 알터, 진혼.
하나 하나가 누군가의 의도가 느껴졌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의 공통점.
그것은 페이스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알터에게 볼일이 있다고 했지. 그는 내가 진혼으로 알터를 소환하기를 기다리고 있어.'
온슈타인도 마찬가지였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그도 알터를 기다렸다.
'이대로 알터를 소환하는 것이 좋을까?'
리오는 가능한 정복자들을 소환하고 싶지 않았다. 탑의 세계를 먼저 앞서나간 선지자들.
그들은 분명 탑의 공략을 알고 있고, 인륜과 맞바꾸어 막강한 힘을 얻었다.
소환을 할 수 있다면 큰힘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정복자들을 조율할 수 없다면, 아트로때 처럼 큰사고와 위기를 맞이할 것이다.
그 때문에 리오는 아르토의 일기와 같은 다른 정복자들의 물건이 있음에도 쉽게 소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저번 55층의 일을 처리하면서도 소환을 하지 않았던 것은 그러한 위험 때문이었다.
'진혼을 이용한다면 알터를 소환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 뒤의 문제는 장담할 수 없어. 그때와 달리 내가 성장했다고 하지만... 정복자를 당해낼 순 없겠지.'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자신은 같은 인간 앞에서 무력하다는 것을 아르토 앞에서 느꼈다.
강탈로 빼앗은 재주들을 제외한다면 자신에게 무엇이 남을까.
앤서러? 그외의 축복들?
그것만으로는 리오에게 자신감이 생기지 않았다.
지구에서 넘어온 인간 신태준에게는 재능이 없다.
잡다한 지식들을 활용할 줄 아는 재주만 있을 뿐, 물리적으로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재주란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며 비열하기까지 한 선지자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진혼이 손에 들어왔다고 한들... 당장 사용할 필요는 없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손으로 진혼을 집었다. 보랏빛 구슬의 표면은 딱딱하건만, 표면은 손가락을 포근하게 감싸안는 것 같았다.
알터와 관련된 물건이라는 걸 떠나서, 진혼이라는 알터의 유물은 기묘했다.
마법사로써 진혼에 대한 호기심이 들썩거렸다.
‘단순한 마법연구의 일환으로 조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은데.’
진혼에 마력을 불어넣어보았다. 그 어떤 특별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마나를 넣어보았다. 이번에도 이변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수첩을 꺼내든 리오는 마나와 마력의 반응에 대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진혼을 반응시켜야 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처음엔 간단한 것부터 해볼까.’
진혼에 마법 사용해보고, 앤서러를 이용해서 충격을 주어보았다. 다소 과한 충격이었건만 진혼은 여전히 보랏빛만 내고 있었다.
“리오. 뭐해?”
방에서 마법이 사용되는 걸 느낀 쿠란이 리오에게 다가왔다. 곧 책상위에 있던 진혼을 보더니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라이프 포스 베슬? 리오. 리치가 될 셈이야? 나야 뭐 나쁘진 않지만...”
“내가 리치가 되는 게 왜 너를 고려해야하는지 모르겠지만. 걱정 마라. 이건 이미 죽은 마법사의 라이프 포스 베슬... 로 추정되는 것이다.”
“추정? 무슨 말이야? 이게 라이프 포스 베슬이 아니고 뭐야?”
리오는 쿠란도 흑마법사라면 알터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말했다.
“흑마법사 알터의 베슬이야. 그가 리치라고는 나도 상상도 못했는데, 이런 물건이 발견되었어.”
알터는 진혼을 만져보곤 말했다.
“이런 마력구라면 라이프 포스 베슬이 맞긴 하네. 알터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 이런 재미있는 물건을 리오 혼자서 독차지 하려고 했단 말이야?”
“나도 오늘 아침에 입수했어. 방금 전까지는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지. 그러던 도중에 반장난으로 이것저것 해보기 시작했는데… 솔직히 알터의 물건이라 그런지 마법사로써 호기심이 생긴다. 같이 조사를 해보는 건 어때?”
“당연한 걸 물어보네. 어디까지 해봤어?”
바로 진혼에 대해 알아보려는 쿠란을 만류했다. 오늘의 예정은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었다.
“진혼은 놔줘. 오늘은 할 일이 있어 쿠란.”
“응?”
리오가 파티에서 빠져나와 개인행동을 시작한지 3일째.
55층의 돌파조건은 매우 쉽기 때문에 빈과 칼, 리사는 벌써 공략 마지막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