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의 탑-132화 (132/190)

<-- 132 회: 5-3 -->

숙성시켜놓은 보리맥주를 꺼내어 한잔 건네었다. 시원한 노란빛 맥주가 방금 전 느꼈던 살기를 잊게해주었다.

“인사차 들렸는가? 아니면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건가?”

탑의 축복 : 위상을 가진 모만이라면 지금까지 리오가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리오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기로 했다. 스스로 붕괴시켰던 오라클을 부활시켰다는 사실을.

“저. 오라클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모만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 아무렇지 않는 표정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네. 자네는 이 세계를 자신 마음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지 않나. 뭐 그렇다고는 해도 자네가 스스로 영수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지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제가 오라클을 지배할 수만 있다면 예전과 같은 조직이 되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겠지. 자네가 오라클을 만들어서 마냥 악당이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네. 헌데 그걸 말하려고 왔는가?”

“아뇨. 실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허허, 자네의 인맥이면 굳이 날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만.”

정보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보다 모만이 정확했다. 그의 눈은 탑의 세계 구석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또 무엇이 알고 싶은 건가? 맨 입으로 알려주기도 좀 그러하니 적당한 보수를 치른다면 얼마든지 알려주도록 하지.”

“거래입니까?”

모만을 비롯한 신원이 파악된 템플러들은 마을시설을 이용할 수 없었다. 주민들에게 배척받기 때문이었다.

수용소의 마을을 짓는 것은 어느 정도 지원을 받지만, 그러함에도 생필품이 부족한 것은 어쩔수 없었다. 아마 모만이 원하는 보수란 생필품일 것이었다.

“맞네. 여기서 생활하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거든, 자네에게 심부름을 좀 부탁하고 싶네만.”

“그럼 거래완료라는 걸로. 필요한 것들을 적어주세요.”

모만은 자신에게 필요한 품목들을 양피지에 적어 리오에게 건네었다.

“자. 그럼 자네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스승에게 묻지 않고 나에게 왔다는 건, 나만이 말할 수 있는 걸 묻고자 하는 것이겠지.”

리오는 생각을 정리한 후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아침부터 소란이 있었습니다. 낯선 흑마법사가 저를 습격해왔는데, 알터의 마법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고 있더군요. 사령술과 아르토에 대해서요.”

“아아. 흑마법사라… 알터의 마법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메데이아를 말하는 것이겠군. 박해받는 흑마법을 널리 알리려고 하고, 규제를 없애려고 하는 자들이지.”

모만은 잠시 말을 골랐다.

“쉽게 말하자면 단순한 흑마법사들이 모인 모임이야. 마력을 사용하는 종족이라면 그 단체에 대해서 모두 알고 있지. 아마 자네의 소중한 그녀도 그 단체에 속해있는 걸로 안다만.”

‘… 쿠란을 말하는 건가. 확실히 그녀는 마력을 사용하는 마족이니까. 힘을 기르기 위해 그런 단체에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런 단체에서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걸까요? 오라클과 관련 된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메데이아의 목적에 대해서는 모만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맥주를 들이켰다.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군. 메데이아라는 단체는 알고 있지만 그들을 지켜본 건 아니니까. 여태까지 딱히 뭔가를 해왔던 것도 아니었고…. 내가 알기로 배척받는 흑마법의 교류를 위한 모임이었거늘, 자네를 습격하고 알터의 마법에 대해 알고 있다면 평범한 모임은 아닌 것 같군.”

리오는 더 이상 모만에게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슬슬 자리를 일어나려고 할 때,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

“… 모만씨는 페이스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그 이름은… 뭐라해도 이 세계 최강의 종족이야. 자네가 함부로 부를 분이 아니네.”

리오는 모만이 손을 떠는 것을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페이스라는 이름은 떠올리기만해도 두려운 것일까.

오랜 세월을 살아온 모만은 페이스가 본래의 육신을 가졌을 때를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써는 페이스의 이름을 함부로 말할 수도 없고, 대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이 지금 수면기에 빠져있지 않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지요.”

모만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다고 한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지?”

그 말에 리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짐작할 수도 없는 세계를 향한 살기를 내뿜는 존재.

페이스가 무엇을 하든 리오는 물론이고 베로드도 케일도 드라칸도 아무것도 할수 없다.

“리오. 그분은 자네가 어떻게할 상대가 아닐세. 절대로 적으로 생각해선 안 돼!”

“다행히도 아직까진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저도 제 주제는 아니까요.”

자리에서 일어선 리오는 모만에게 머리를 숙였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약속한 대로 생필품은 보내드리겠습니다.”

@

템플러 수용소에서 마을로 돌아갔다.

아직 해는 따사로웠고, 집으로 돌아가기엔 시간이 일렀다.

‘빈들도 아직 내려오기엔 멀었고… 베로드씨나 찾아뵐까.’

낮술을 할 생각은 아니지만, 리오는 발걸음을 베로드의 주점으로 옮겼다.

리오가 지구에서 알고 있던 술들의 특징을 알려준 결과, 베로드의 주점은 인기를 끌고 있었다.

과묵한 분위기의 주점이 맘에 들었던 리오는 그 점이 조금 아쉬웠다.

딸랑.

주점 입구의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금세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후끈후끈한 열기에 인상을 찡그리며 리오는 안쪽의 빈자리에 앉았다. 금방 접객원이 나타나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리오님? 아. 베로드님을 뵈러 오신 건가요?”

“그것도 있고, 적당히 시간을 떼우려고 왔죠. 베로드씨는 지금 계신가요?”

접객원을 금방 불만어린 표정이 되었다.

“이렇게 바쁜데 유유자적 책이나 읽고 계시죠 후우. 불러드릴까요?”

“네.”

잠시 뒤 베로드가 나타났다. 리오가 주문했던 술은 가져오지 않고 자신이 먹던 것을 가져왔다.

“뭡니까 그건. 손님에게 너무 무례한 것 아니신가요?”

“네가 시킨 것보다 비싼 거다. 잠자코 먹는 게 어떻겠나?”

술냄세가 풀풀나는 베로드는 유리잔을 리오 쪽으로 덜컹 던지곤 얼음을 만들어내었다. 정령왕답지 않은 능력남용이었다.

“감사인사 따위를 하려고 온 건가? 비즈니스였다. 그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니다.”

베로드는 리오가 주점을 방문한 이유를 짐작했다. 리오는 그가 건넨 잔을 들이키며 말했다.

“그것 말고도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오늘 아침의 일은 들으셨나요?”

주점을 운영하는 주민답게 소문을 접하는 것은 빠를 것이었다. 리오가 누구와 어디서 싸웠는지 정도는 베로드라면 알고 있을 것이었다.

“아아.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가던 도중이었지.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 앤서러가 무엇인지 이제야 좀 알겠더군.”

“보고 계셨던 겁니까? 도와주지도 않고 너무하시는군요.”

“딱히 도울 필요가 없었잖나.”

“그렇긴 하지만…. 뭐 넘어가도록 하죠.”

갑작스럽게 베로드는 기분나쁜 미소를 지었다. 리오의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네놈. 근래에 들어서 제법 건방지게 변했어. 나쁘지 않군. 예전엔 언제라도 죽을 것 같았는데.”

“배짱이라도 없으면 이 세계에서 살아갈 수 없더군요.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리오는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시켰다.

“저도 아는 분에게 들었습니다만, 오늘 저를 습격한 흑마법사는 메데이아라는 단체의 일원이라고 합니다. 규제받고 있는 흑마법사들이 드라칸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제자인 저를 습격한 건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 그놈들이 단순히 화풀이를 하기 위해 너를 습격한 게 아니라는 건 대화를 통해 알았을 텐데.”

베로드는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온슈타인이라는 흑마법사는 리오에게 계속해서 능력을 보이라고 했다.

그것은 알터의 마법을 배운 리오의 흑마법을 보여달라는 것이었다.

“목적이 있겠지. 그러고 보니 여기서 주저리 떠는 놈들을 통해서 들은 것이 있는데…….”

“베로드씨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기대는 하지 말라는 태도로 베로드는 말했다. 별로 확신이 가는 정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너도 마법사라면 마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겠지. 마력이 어떻게 생기는 줄은 알고 있나?”

리오는 언젠가 보았던 기초마법서를 떠올렸다.

“언데드나 마족과 같은 이들이 마나를 만드려고 할 때 생기는 에너지라고 들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마나를 오염시키서 마력으로 바꾸지만요.”

“뭐, 대강 맞는 이야기다. 메데이아라고 하는 놈들이 너를 습격한 것은 마력과 연관이 있다.”

메데이아와 마력, 리오의 접점.

여태 메데이아라는 단체하고는 마주친 적이 없던 리오로써는 무엇 때문에 그들이 자신을 습격했는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연관이 있는 거죠?”

“신성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나?”

리오의 질문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말이었다. 리오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채로 대답했다.

“신성력은 자신이 믿고 있는 신에게 사용할 권리를 부여받고, 권한을 받은 신도가 마나를 흡수 했을 때 생기는 에너지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베로드는 리오도 알고 있는 유명한 말을 인용했다.

“이 말을 알고 있나? 백과 흑은 한 장 차이다.”

‘백과 흑? 한 장 차이?’

무언가 떠올랐다. 설마하는 심정으로 리오는 베로드에게 물었다.

“마력도 신성력과 마찬가지라는 겁니까?”

“그렇지. 신성력은 신도의 신앙심이 깊어질수록 그 능력과 수용할 수 있는 양이 늘어나지. 마법사의 마나와는 다르게 말이야.”

마법사는 마나를 쌓는다.

성직자는 신앙심을 탐구하고, 탐구할수록 많은 신성력과 능력을 얻는다.

‘마력은… 둘 다 인가? 쌓을 수도 있고 악신을 믿는 걸로 힘을 얻을 수 있는 건가?’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리오가 읽었던 마법서에도 여러 차례 거론되었던 이야기였다.

“마력을 사용하는 신을 믿고, 신앙심을 가진다면 흑마법사는 이중으로 성장할 수 있군요. 스스로 단련해서 쌓는 마력, 신앙심을 가지는 것. 하지만 그게 왜 저랑 연관이 있는 거죠?”

자랑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리오는 무신교였다. 신과 관련된 일을 벌인 적은 없었다.

“네놈이라면 이 말도 알고 있겠지.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 주변 이들이 신으로 추앙한다면, 그 사람은 신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인공적인 신이 된다는 말이지. 신으로 추앙받는 본인의 의사는 무시되고, 믿는 이에겐 힘이 부여된다. 메데이아라는 단체는 어느 특정 흑마법사를 인공 신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어.”

템플러가 관련 된 일보다 머리가 아파왔다. 자신을 신으로 추앙하려고 한다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후보 중 하나가 저라는 말씀이시군요.”

“나도 언뜻 들은 이야기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만.”

술을 마시고 리오는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골치가 아플 땐 머리가 몽롱해지는 담배가 제격이었다.

머릿속을 정리하고자 불기 시작한 담배였지만, 리오는 방금 전의 대화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만약,

만약 메데이아가 자신을 믿는다면.

‘유명한 흑마법사는 나와… 쿠란뿐인가.’

쿠란은 여왕으로 군림하던 군세의 리더.

리오에게 신도가 생긴다면 그들이 무엇을 근거로 신앙심을 품을까.

탑의 세계 유일한 인간,

업적을 갱신하는 뛰어난 감각.

인간을 초월한 무력.

모두 의미가 없었다. 이것만으로는 누군가에게 신앙심이 생길 수 없었다.

‘내가 신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이야기야. 단순히 어떤 마법사의 망상일게 분명해. 메데이아는 애초에 그런 조직이라고 했으니까. 분명 다른 이유가…….’

베로드가 리오의 상념을 깨웠다. 그는 웃음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만약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가 메데이아라면 너를 신으로 추앙할 것 같군.”

“그건 또 무슨 농담이십니까? 드라칸님들도 계시고, 베로드씨도 계십니다. 저보다 강하고 믿음직스러운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신이 되는 조건은 단순히 강함이 아니다 리오. 신으로 받들 여질 대상이 어떤 행위를 했느냐가 중요하다. 믿는 자들은 기껏해야 신의 발자취를 쫓으며 신앙심을 굳건히 하거든. 하물며 마법사라는 족속들의 신이라면… 논리적인 근거가 필요하지.”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질 나쁜 농담은 이쯤 해주셨으면 합니다.”

앤서러 리오가 흑마법사들의 신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

베로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희 종족은 탑의 세계에서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그 어떤 종족도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내었다. 그 기록은 모두가 잊고 있지만 찾으려면 찾을 수 있지.”

드래곤조차도 할 수 없었던 일.

힘을 가져도 해낼 수 없는 일을 유일하게 해낸 종족.

육체적 기량으로는 탑의 세계 최약의 종족이 해낸 일.

그것은 탑의 정복이었다.

“잊었나? 우리에게 있어서 너는 유일무이한 정복자의 후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