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의 탑-130화 (130/190)

<-- 130 회: 5-1(제 41장 정복자) -->

제 41장 정복자

@

노을이 지고 있었다.

요염한 붉은 빛을 내리며  탑을 붉게 변모시키고 있었다.

쿠란은 여관을 바라보며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상기했다.

리오를 쫓기 위해 만들어진 파티, 그의 합류와 이탈, 이어진 시련과 고난. 그리고 군세라고 불리기 까지…

탑의 세계를 호령하고 쿠란을 여왕으로 받을며 지탱해준 이들은 이제 없었다.

드넓은 여관에서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더 이상 파티를 만들 기력도, 탑을 오를 생각도 없었다.

'처분 해야겠지.'

쿠란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머물렀던 여관을 둘러보았다.

수백 명이 함께 생활했던 여관의 유지비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잔고가 바닥나기 전에 처분하기로 정했다.

'꿈만 같아. 내가 55층까지 올랐던 게…'

눈을 감으면 아직도 왁자지껄한 여관풍경이 떠올랐다. 술주정을 부리던 엘프 노라, 노래를 부르는 오크 데릴, 장단을 맞추던 오우거 보몬.

가만히 있어도 흥이나고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던 그때가 영원할 줄 알았다. 꿈만 꾸던 풍경이 그대로 구현화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이런 꿈은 깨기 마련이라고.

앞자리가 바뀌는 층마다 적지 않은 동료들이 죽어나갔고, 그때마다 많은 수의 주민을 파티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런 반복을 여태 해오면서 자신에게 이런 미래가 닥칠 거라는 것쯤은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예상… 은 했었는데.'

마주본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언제나 자신에게는 동료가 있었다. 이런 소실감따위 느낄수 없을 정도로 언제나 자신의 주변에는 주민이 넘쳐났다. 활기가 있었다.

"흐. 흑."

차가운 한기가 불어오면 쿠란의 주변에 벽을 세우듯 동료들이 모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찬 바람에 몸을 부르르 떨며 쿠란은 뒤로 돌았다.

이제 이 땅을 다시 밟는 일은 없을 것이다. 즐거운 추억이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족의 눈물이라. 어울리지 않군요오."

여관의 입구에 누군가 서 있었다. 붉은 석양을 등지고 문을 막고 있는 광대였다.

"누, 누구?"

"어릿광대 페이스라고 합니다아. 당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찾아왔죠오."

신사처럼 가슴까지 손을 올리며 광대는 고개를 숙였다. 어느덧 쿠란에게 뻗은 손에는 하얀장갑과 흰 편지가 있었다.

쿠란은 눈물을 훔치며 울먹거림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이야기?"

"복수를 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신의 파티는 그곳에서 멈춰설 리가 없었습니다. 템플러도 그곳을 공격할 수 없었습니다."

사라진 군세에 대해 이야기를 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죽어간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55층에서 죽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 지도 모른다. 55층에 어울리는 모험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죽인 이들까지 용서하는 것은 아니었다. 템플러들을 향한 분노는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었다.

화가난 표정으로 쿠란은 말했다.

"군세가 55층에서 멈춰설 리가 없었다고? 템플러들도 공격할 리가 없었다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농담따먹기를 하려는 거면 주제를 잘못 골랐어."

광대는 기대고 있던 벽에서 몸을 세웠다. 눈밑의 눈물방울이 쿠란에게 보였다. 마치 자신의 감정처럼 그가 대신해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군세는 템플러의 습격을 받지 않았더라면 55층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곧 다가올 개벽도 있고, 그곳에서 모두가 성장 한다는 선택지도 있었습니다."

광대의 말에 쿠란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군세는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55층을 통과할 수 있었다.

"하, 하지만 템플러들이 있잖아. 어차피 그들은 개벽전에 군세를 공격할 것이었어."

실제로 55층을 통과하지 못하는 군세에게 템플러들은 침입을 해왔다. 55층의 적에게 죽거나, 템플러들에게 죽는 건 언젠가 다가올 운명이었다.

"아뇨. 아닙니다아. 누군가 손을 대지 않았더라면, 템플러들이 군세를 공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겁먹은 하이에나들이었거든요. 그들을 이끄는 자가 나타나지않았더라면, 군세는 개벽버프를 받고 55층을 통과했을 겁니다."

쿠란은 그제야 광대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지 알아차렸다.

어쩔 수 없다고 여겼던 동료들의 죽음은 누군가의 의지에 의한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죽어나간 것이다.

"누구야? 누가 주모자야?"

쿠란의 검은 눈에서 붉은 기운이 멤돌았다. 아직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적에게 살기를 내뿜었다.

광대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행동을 취하곤, 입을 열기 시작했다.

@

나른한 아침이었다.

뜨거운 햇볕에 인상을 찡그리며 리오는 삐그덕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멍한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욕실로 이동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을 적시자 잊고 있던 광경이 떠올랐다.

널부러진 시체들, 바닥을 적시는 피, 데굴데굴 굴러가는 머리.

짐승처럼 변한 쿠란.

그리고 자신이 오라클의 영수가 되던 순간.

'벌써 하루가 지났나.'

한동안 너무나도 바쁘게 움직였다. 숨쉴틈 없이 움직인 결과.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쿠란을 도우면서 리오는 혼자 55층을 혼자 올라왔다. 뒤쳐진 동료들을 기다려야했다.

오래간만의 여유.

리오는 물기를 씻으며 아침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예정이 어떻게 되세요?"

한평생을 리오와 함께하는 픽시가 나타났다. 그녀는 어지간히도 리오가 궁금한 듯. 사사건건 간섭하며 예정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한동안 탑을 오르진 않을 거야. 최근에 너무 바빴으니까. 몸도 나른하기도 하고… 일단 오늘은 스승님을 뵈러 갈 것 같은데."

드라칸 안드레이는 리오의 마법스승이다.

쿠란을 돕던 도중 리오는 그에게 자신의 독자적인 마법인 '소환사인'의 마법진을 알려주었다.

안드레이는 소환사인을 통해서 쿠란을 돕지 않겠다고 했지만, 제자의 부탁을 거부한 것이 미안한 듯. 다른 형태로 도와주었다.

바로 소환사인의 양산.

누구나가 리오처럼 소환사인을 남길수 있게 되었다.

탑의 주민이라면 누구나 타인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신이 원한 방향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볼때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소환사인을 통해서 모험가들은 단결하기 시작할 것이고, 단결한 모험가들을 사냥하기 위해 템플러들도 단결할 것이다.

'감사인사를 해야겠지. 내 억지를 들어주셨으니까.'

안드레이 스승님을 뵙고 나면 시간이 남을 것이다. 그 후에 자신을 도와주었던 빈이나 베로드, 케일을 만나기로 했다.

아침식사를 치르고 리오는 나갈 준비를 끝내었다.

용의 성지로 향하던 도중, 주민을 내쫓는 익숙한 기운을 또 다시 느꼈다.

누군가를 향해서 내뿜는 것이 아닌, 세상을 향해서 내뿜는 거대하고 흉내 낼 수도 없는 살기.

그 살기는 리오가 최근에 만났던 누군가의 것과 비슷했다.

신생 오라클이 재결성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했으며, 우스꽝스러운 광대분장으로 템플러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는 남자.

페이스의 살기와 비슷했다.

'역시 그는…'

광대에 대해서 리오는 스승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했다.

페이스의 육신은 탑의 세계를 위해 희생당하고 있다. 탑의 난이도를 낮추기 위해 드라칸들은 자신의 아버지를 강제 수면기에 접어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현재 드래곤의 정신인 페이스는 마을에서 활보하고 있다. 마음대로 탑을 오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드래곤이 완전한 수면기에 접어들지 못한 건 페이스 때문일지도 몰라.’

드래곤이 깨어난 건 리오가 아르토와 싸운 직후였다.

3년 동안 드래곤은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드라칸이 손을 쓸 필요도 없었다.

‘페이스는 드래곤 본인이라고 봐도 되겠지. 다음에 만날 땐 어째서 깨어있냐고 물어봐야겠어.’

시장을 빠져나왔을 때 였다.

용의 성지에 근접했을 때, 리오는 등 뒤에서 화기를 느꼈다.

“윽!”

등 뒤를 돌아보는 순간 검은 화염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미 앤서러로 막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펑!

무척이나 큰 폭발음이 나며 리오의 몸에 검은 화염구가 부딪쳤다. 곧 검은 화염이 리오의 몹을 뒤덮었다.

갑작스런 폭발음 때문에 드래곤의 살기에도 불고하고 용의 성지 주변에 주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뭐, 뭐지? 누가 마을에서 화약이라도 썼나?”

“저건 흑마법이잖아? 어떤 놈이 용의 성지 주변에서 저런 걸 쓴 거야?”

주민들의 말이 들려왔다. 살을 태우는 고통 속에서 리오는 손과 발을 움직이기 위해 애를 썼다.

손이 원을 그리고, 발이 진각을 밟았다. 그 순간 온몸을 태우던 검을 불길이 리오의 손바닥 위로 모였다.

극한의 경지에 오른 리오의 앤서러였다. 가공은 할 수 없지만, 그 어떤 에너지든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었다.

‘어떤 놈이냐?’

불길이 걷은 리오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돌보지 않고 습격자를 찾았다.

탑의 축복 : 탐색이 발동되어 리오를 습격한 흑마법사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되돌려주지.”

리오의 손위에서 넘실넘실 거리던 검은 화염이 주문자를 향해 되돌아갔다. 갈색 로브를 입은 흑마법사는 지팡이를 흔들었다.

펑!

흑마법사가 시전 한 실드에 검은 화염이 부딪쳤다.

‘검은 불꽃일 때부터 예상했지만, 역시 흑마법사인가? 흑마법사가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기에 이런 공격을 한 거지?’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흑마법사는 곧 후드를 벗으며 가슴에 손을 올렸다. 간단한 인사였다.

“리치 온슈타인이라고 하오. 지금부터 벌일 무례에 대해 먼저 사과를 하겠소.”

“지금부터 벌일 무례? 하. 겸손한 악당이군 그래. 나에게 무슨 볼일이 있길래 이런 마을에서 습격을 하는 거지?”

마을에서의 싸움은 ‘듀얼’이라는 탑의 축복을 사용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

탑의 축복 : 듀얼은 탑의 규칙 일부를 벗어나게 해주는 축복이다. 마을에서는 그 누구도 죽지 않지만, 듀얼을 사용하면 죽을 수 있었다.

방금 전 흑마법사의 화염구를 맞고도 리오가 멀쩡한 것은 탑의 규칙 때문에 화상이 금방 회복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귀공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있소. 긴 말을 하지 않겠소. 능력을 보여주시오.”

“능력?”

되묻기 전에 온슈타인의 입에서 룬어가 흘러나왔다. 그가 들고 있는 지팡이에서 검은 마력이 넘실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