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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악마다. 하지만 너무나도 순수했고 규칙과 규정을 지켰다. 악마로써 그런 것에 얽메이는 건 말도 안 되었지. 모든 악마가 한 대 묶였는데 말이다… 그 탓에 이런 세계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런 존재가 신물 따위에 쓰러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 불완전한 악마니까.”
“아니야. 당신은 여기서 쓰러지 않아. 악마는 하나의 사상을 말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염소거인은 갑작스럽게 일어섰다. 바닥에 피의 홍수를 만드며 쿠란에게 날아온 물의 창을 막아내었다.
“왜! 왜 그렇게까지!”
가슴 절반이 날아간 바포메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가장 오래함께 했던 동료가 쓰러지자 쿠란의 이성이 날아갔다.
마족답지 않았던 그녀가 마족으로써 행동했다.
뿔이 날카롭게 솟아오르고, 숨기고 있던 꼬리와 날개가 튀어나왔다. 한 마리의 짐승이 되어 낮은 울음소리를 내었다.
“쿠, 쿠란!”
쿠란이 동료들의 보호를 거부하듯, 앞으로 튀어나갔다. 이성이 날아간 그녀는 병기가 되었다.
퍼퍼퍼펑!
마족 쿠란이 지나간 자리엔 운석이 떨어진 마냥 땅이 뒤집어졌다. 꽤나 고서클 마법인 어스퀘이크였다.
순식간에 템플러 여럿이 땅바닥에 파묻혔다. 쿠란을 향해 석궁을 겨누면, 쿼렐이 터져나갔다.
쓰러진 나무들은 템플러들을 포박했다. 곧 옴겨 붙은 겁화가 템플러를 태웠다.
날개가 한 번 펄럭이면 그녀의 앞에 있던 적들은 갈가리 찢겨 날아갔다. 대부분이 나무의 가지에 몸이 박혀 죽어갔다.
가까스로 접근했던 템프러는 무기를 휘둘렀으나, 예상외의 신체능력에 절규하며 내장이 뜯겼다.
뱃속의 장기가 붙잡힌 자는 채찍처럼 몸이 휘둘러지며 무기로 사용되었다.
마족으로써의 쿠란은 동료를 잃은 슬픔, 분노를 토해내듯 자신의 가진 모든 마력을 뿜어내었다. 그 누구도 쿠란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바포메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장시간 저항을 하던 그녀의 주변에는 어느새 템플러들이 모여있었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쿠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킬킬 거리는 템플러들. 어깨를 들썩이며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모두가 웃고 쿠란을 바라보았다.
‘모두 어디…?’
자신을 버리고 떠났거나, 모두 죽었거나. 쿠란은 어찌되었든 이제 자신 혼자만 남았다고 판단했다.
“… 하.”
이제 끝이다. 군세도 탑도, 자신도.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폭포로 인해 캠프가 파괴당하고 동료들은 한명 한명 당해버렸다.
각오의 차이에서 생긴 일었다. 상대는 퇴로에 불을 지르고 금기를 범하며 욕구를 충족시켰다.
그에 비해 군세는…….
‘날 위해서. 내가 뭐가 잘났다고….’
쿠란이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템플러들은 각자 무기를 쥐고 다가가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건. 템플러 중에서 누가 먼저 쿠란의 명줄을 끊느냐였다.
사신이 다가오고 있건만 쿠란은 입을 벌린 채 눈을 감았다. 모두의 희생으로 살아남을 생각은 없었다.
파티의 리더로써 짐이 더욱 무거워졌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었다.
‘나는….’
이렇게 죽는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아쉬웠다. 아직 해보지 못한 것, 가고 싶었던 것, 가지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앤서러 리오와 탑을 오른다던가.
언제적 리오가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을 별처럼 여긴다는 말이었다.
‘난 당신의 별이 될 수 없어 리오. 나는 당신에 비하면 형편없는 걸.’
오히려 쿠란에게 있어서 리오가 별이었다. 따라잡고 싶지만 따라잡을 수 없는, 머나먼 이상이자 목표였다.
그보다 탑을 앞서가더라도, 앞서 있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언제라도 그가 뒤쫓아 올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20층에서 리오와 파티를 짜고 행동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55층은 물론이고 다음 층까지 올라갔겠지. 그런 생각을 했다.
함께했더라면, 별이 될 수 있었을까.
리오의 기대에 부응하는 여자가 되지 못했다. 당장은 그것이 가장 아쉬웠다.
아쉬움. 그런 감정을 느끼고 쿠란은 잃어가던 삶의 의욕을 일으켜세웠다. 저항할 순 없겠지만 눈이라도 떴다.
그 순간.
익숙한 마법진이 바닥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큭.”
평소 보던 새겨진 마크는 달랐지만, 마법진이 하는 기본적인 기능은 눈에 익었다.
55층에 새겨진 시간. 그것을 되돌려 지나간 자를 불러오는 마법.
이 세계에서 유일한 인간만이 가능하며 그가 만든 독자적인 마법.
소환사인이었다.
‘당신은 정말…….’
소환사인에 손을 뻗었다. 마력을 불어넣자 반응하기 시작했다.
템플러들의 눈에는 소환사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 탓에 그들은 쿠란이 무엇을 하는지 몰랐다.
그것이 방심을 불렀다.
파아아아앗!
소환사인에서 검은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어떠한 형상을 만들어내었다. 검을 두드리고 있는 망치의 그림이었다.
“저, 저건 소환사인!”
템플러들은 그제야 소환사인의 존재를 눈치채고 이를 갈았다. 3년 동안 그들을 괴롭힌 마법이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 앤서러 리오가 55층을 올랐나! 하지만 그의 동료들은 탑에 오르지 않은 걸로 아는데!”
소환사인, 리오의 등장.
그것만으로도 다급함을 느낀 템플러들이 재빠르게 쿠란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검과 망치의 그림에서 하나의 인형이 나타났다. 사람을 닮은 모양은 마치 리오를 보는 듯 했다.
검사를 두드리는 대장장이.
명장 케일이었다.
“… 누, 누구?”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가 나타나자 쿠란은 당황했다. 하지만 곧 그가 펼치는 무예를 보고 리오와 연관이 있는 자임을 눈치 챘다.
그는 맨손으로 다가온 템플러들의 무기를 잡더니, 마치 앤서러를 사용하는 마냥 튕겨내었다.
“… 앤서러?”
케일의 정체를 알 수 없던 템플러들의 물음이었다. 케일은 심장의 마나발전기를 구동시키며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케일. 앤서러를 흉내 낼 수 있는 마도공학인형입니다.”
신사처럼, 허리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몸을 움직이더니 순식간에 모여있던 템플러들을 밀쳐내었다.
움직임을 읽고 반격하려던 이들이 일부 있었다. 케일은 그들에게 고스란히 모든 충격을 되돌려 주었다.
상대에게 받은 충격을 증폭시켜 모조리 되돌리는 무술. 앤서러였다.
“큭… 앤서러는 인간만이 사용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전 인간을 본따 만든 인형입니다. 그 탓에 흉내정도는 가능합니다. 얼마나 앤서러 리오와 차이가 있는지 시험해보시겠습니까?”
케일의 말에 템플러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앤서러의 약점은 대인전이었다. 1:1에 강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공격 또한 방어할 수 없다. 그 정도는 굳이 템플러가 아니더라도 마을 주민들이라면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어느 템플러가 손을 들고 제스쳐를 취했다. 하나, 둘, 셋을 세면 단 번에 공격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약속한 제스쳐를 취한 순간. 남아 있던 수십 명의 템플러가 오직 케일만을 향해 달려 들었다.
파도가 밀려오듯,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템플러들이 케일을 쓰러뜨리기 위해 움직였다. 아무리 케일이라고 해도 막을 수 없는 상황.
쿠란의 앞에서 또 다른 인영이 나타났다.
“이런 이런, 나 같은 위대한 몸을 움직이게 하다니.”
불과 바람, 물과 토양으로 누군가의 신체가 만들어지더니 곧 주점의 주인이며 정령왕. 베로드가 나타났다.
그가 귀찮다는 듯 손짓을 하자 흙벽이 솟아났다. 하늘에서 날카로운 얼음 조각이 떨어졌고 주변에 넘실거리던 화염이 템플러들을 공격했다.
자연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정령. 그 중에서도 정점에 서 있는 존재가 베로드였다.
아무리 수많은 템플러가 모여들어도, 베로드가 일으키는 기적은 이길 수 없었다.
케일은 놀란 얼굴이지만, 인형답게 무미건조한 어조로.
“… 도와주지 않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저야 그런 말을 한 마디도 안했기 때문에 온 겁니다만.”
정확히 말해서 케일과 베로드의 속마음을 정확히 떠보지 못한 안드레이의 말이었다.
리오에게 도와주지 않겠다는 말을 이 둘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다가 안드레이가 대신 대답을 한 것뿐이었다.
“어…음. 비즈니스입니다 케일씨. 저와 그녀석은 사업상 파트너이기도 하거든요.”
적당한 변명을 둘러대고 휘파람을 부르며 베로드는 토벽을 치웠다. 자연의 힘을 이길 수 없었던 템플러들이 보였다.
“큭… 고작 두 명의 지원병이 왔다고 우쭐하지 마라. 우리는 아직……!”
쿠란은 그 템프러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어느새 목소리에 활기가 넘쳐났다.
“소환사인은 리오만의 전유물이었지. 하지만 이렇게 다른 주민도 사용하고 있어. 이게 무슨 말을 뜻하는지 몰라?”
쿠란은 최대한 마력을 짜내었다. 마법에 통달한 마족답게 그녀의 마력은 끝이 보이질 않았다.
“이런 의미야.”
바닥을 향해 손바닥을 내리치자, 반딧불이 날아오르듯 무수히 많은 소환각인들이 빛났다.
“… 이, 이럴 수가!”
시시각각 55층을 채우는 무수히 많은 주민들.
모두 쿠란을 구제하기 위해 소환사인을 새긴 탑의 모험가들이었다.
단 번에 전세가 역전되자 템플러들은 뒷걸음칠 쳤다. 일부는 벌써 도망치고 있었다.
케일은 이런 상황까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베로드에게 물었다.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리오가 준 범용 소환각인은 세 개였던 걸로 압니다만…….”
“이 탑의 세계에는 드라칸이라는 위대한 분이 계시죠 케일씨. 그걸 잊으셨습니까? 고작 자신의 제자가 만든 마법의 복제쯤은 별거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복제를 부탁해서 마을에 뿌렸습니다. 어차피 소환각인을 새긴다고 해서 큰 일이 벌어지진 않으니까요. 자신에게 뭐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쿠란은 55층에서 나오고, 리오에게 도움을 대차게 거절당한 이후로 많은 주민들에게 파티권유를 했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하지만 쿠란은 단 한명도 파티에 가입 시키지 못했다.
이미 석달 뒤, 55층에 템플러들이 침입한다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기 때문이었다.
석달 안에 55층을 통과하지 못한 다면, 템플러들의 습격을 받게 된다. 그 때문에 모두 도박을 하지 않고 거부한 것이었다.
그 수는 적지 않았다. 아마 그때 거부를 한 자들이 도움을 준 것이리라.
‘모두……!’
쿠란은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이 중에 이 모든 상황을 만든 남자가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