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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의 탑-127화 (127/190)

<-- 127 회: 4-26 -->

다행인지 서쪽과 동쪽의 템플러 무리들의 기세가 다소 줄어들어 있었다. 중앙으로 모여드는 것은 어렵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도주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템플러와 싸우면서 예상했던 일이지만 점차 줄어가는 동료들을 보고 쿠란은 정신적 공황을 느꼈다.

‘아, 안 돼. 더 이상은…….’

폭포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캠프에 남아있던 동료가 사망했다. 전투를 치르면서 템플러에게 모든 것을 뺏기며 죽어간 동료들은 벌써 백이 넘어갔다.

397명의 군세는 이백도 채 되지 않는 수밖에 남지 않았다.

빈은 템플러의 목숨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았지만, 쿠란은 군세의 모두를 자신의 일부처럼 여겼다.

그 차이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쿠란의 판단력은 흐려지고 동료들의 죽음이 자신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했다.

부담이 가중되고 자신의 선택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어떻게 파티를 이끌 든 동료의 희생을 필수불가결하다. 이미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범위를 떠났다.

“쿠, 쿠란! 쿠란! 이 상황에서 뭐하는 거야! 정신차려!”

동료의 말에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쿠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아있는 군세의 대부분이 모여있었다.

“말한 대로 중앙에 모였어. 하지만… 포위당하고 만 것 같은데."

쿠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폭포가 무너지는 순간부터 이미 망조에 들어섰다. 그대로 싸웠어도 조금 오래 더 싸울 수 있었을 뿐이었지만, 자신은 동료들의 죽음을 앞당겼다.

‘아, 아냐, 이렇게 모였으니까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야!’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모두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친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일말의 희망을 품으려 했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템플러들을 보고 절망을 느꼈다.

군세를 포위한 템플러들. 숲속에 지른 불들은 여전히 쾌쾌한 냄새를 낳으며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미친놈들...'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하고, 그 과정은 신경쓰지 않는다. 설사 위험도가 높은 일이더라도 그 끝에 얻어낼 결과만을 생각하고 움직인다.

그것이 템플러였다. 이성을 잃은 광전사와 같지만 확실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움직이는 자들.

그들 앞에서 소중한 것들을 버릴 수 없는 모험가는 결코 이길 수 없다. 똑같이 무언가를 희생할 각오를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쿠란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된 이상. 전면전 뿐인가.'

마음을 다잡고 쿠란은 입을 열었다. 그동안의 지휘와는 판이한 방식으로 말했다. 그녀가 어떤 각오를 했는지 보여주는 듯 했다.

"전술과 전략은 생존이야. 전원 죽기 살기로 포위망을 뚫어. 동료의 희생으로 적을 쓰러뜨리고, 살아남아. 최후의 명령이야."

여태 동료를 아끼던 쿠란이었다. 리더의 변화에 군세는 크게 호응했다. 나약한 자들은 더 이상 폐를 끼칠 수 없다는 듯 앞장섰다. 애초에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도 이들이 제몫을 못했기 때문이었다.

55층을 오르며 느낀 죄책감을 덜듯. 힘이 없는 자들이 몸을 방패로 삼아 강자들을 돕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야. 설사 죽는다고 해도 후회는 없어. 내 주제에 55층까지 올라왔으니까."

어느 소인의 말에 쿠란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던 이가 고개를 숙였다. 55층의 돌파법을 알고 있음에도 행하지 않던 쿠란을 원망했다. 그리고 짐이 되고 있던 이들을 몹시 미워했다. 그러나 역시 함께 탑을 오른 동료다. 이미 아무리 미워도 떼어낼 수 없는 관계가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희생은 자신의 살을 떼어내는 것과 같았다. 애증이었다.

“자. 가능하다면 살아남자고!”

군세가 의기투합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템플러들은 혼자 싸우는 마냥 진열 같은 건 상관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내 몫이야!”

욕심에 눈이 멀어버린 템플러의 말이었다. 눈앞에 수많은 병사를 두고도 두렵지 않은 듯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반항하는 것도 끝이다!”

확실하게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한 템플러가 마주친 군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쑤욱. 무언가 박히는 섬뜩한 소리. 전장에서 노래를 부르듯 터져나오는 비명.

쿠란은 눈을 돌렸다. 줄어가는 동료들의 숫자를 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이러기 위해서 파티를 모은 것이 아니었다.

혈통이나 종족과는 상관없이, 누구나가 탑을 오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고 함께 해야지만 비로소 완전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마왕이 된 것처럼, 수많은 이종족들을 이끌고 이 세계를 호령하고 싶었다.

그것이 곧 꿈이었고 목표였다.

“꿈은 깨기 마련인가….”

어디선가 익숙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거대한 덩치를 가진 타우비스트의 몸에 여러 명의 템플러가 달라 붙은 것이었다.

오미터가 족히 넘는 덩치를 가진 타우비스트에게 템플러들은 모기처럼 달라붙어 무기를 쑤셔박고 있었다.

고통을 참을 수 없는 타우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그의 몸이 쓰러졌다.

그리고 타우의 몸이 한 순간 타오르며 곁에 있던 템플러들이 함께 재로 변했다. 아군을 희생으로 삼아 모두가 싸우고 있었다.

아군이 아군의 목을 베는 듯한 광경처럼 느껴졌다. 살기위해서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설사 자신과 친했던 동료를 이용해서라도, 눈앞의 적을 죽이려 했다. 쿠란의 명령인 ‘생존’이라는 말이 없었어도 그들은 이렇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이든, 엘프든, 마족이든. 누구에게나 욕망이 있다. 살고자 하는 욕망, 빼앗고자 하는 욕망.

누구나 템플러갈 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욕망을 자제하느냐 마음껏 풀어헤치느냐의 차이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이성을 유지하고 동료를 믿는 것은 상황을 타파할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군세에게는 ‘희망’이 너무나도 작게 보였다. 우울한 날의 별처럼, 뚜렷하지 않고 안개 너머로 보였다.

그런 상황, 이런 전쟁에서는 누구나 미치는 것은 당연하다.

미쳐버린 동료들을 이끌고 탑을 오를 순 없었다.

이제 ‘군세’는 끝이었다.

만약, 이 싸움이 끝나더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쿠란. 파티를 만든 걸 후회하고 있나?”

20층 이전, 리오를 쫓기 시작했을 때부터 쿠란과 함께한 바포메트가 말을 걸어왔다.

염소의 머리를 한 거인. 그는 덩치만큼이나 커다란 쇠망치를 어깨에 메고 물었다.

그의 물음에 확답을 내리지 못한 쿠란은 우물쭈물 거렸다.

“… 이런 상황이 되어버렸으니 후회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둬라.”

바포메트는 두꺼운 근육을 꿈틀거리며 싸우고 있는 동료들을 향해 망치를 겨누었다.

“아무도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 여기서 죽더라도, 그 누구도 널 원망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올수 있었던 건 모두 너의 덕이었고 함께 했던 동료들 덕분이었다.”

“그럴 리가….”

“나는 분명 강하긴 하다, 하지만 너를 비롯해 다른 녀석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수 없었을 거다. 모두가 마찬가지다. 혼자서는 완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로 의지했다. 그렇지 않다면 일이 이렇게 되기 전에 해결을 보았겠지.”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해결을 하는 것이 리더의 몫이었다. 결국 이러니 저러니 해도 쿠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약한 동료들도 제몫을 할 수 있도록, 성장을 재촉해야 했다.

“그렇다고 자기잘못이라 생각하진 마라. 우리가 살던 세계에서도 그렇듯, 이 세계도 결국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예상할 수 없고, 대비를 할 수 없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러한 세계를 원해서 이곳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탑의 세계는, 분명 누구나가 살기좋은 세상이 아니던가.

‘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에….’

탑의 세계에서 나가려고 했기 때문에, 진짜 세계를 보여준 것이다. 만약 네가 본래 세계로 돌아간다면, 이러한 일을 무수히 많이 겪을 거라는 것을 경험시켜 주듯.

탑은 위로 가면 갈수록, 본래 세계를 망각하고 있던 자를 일깨워준다.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려주고, 세계에서 쫓겨난 자가 돌아가려한다면 혹독한 훈련을 시킨다.

공동체에서,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어쩔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뿐이다. 오히려 나는 이 상황에 감사한다. 그동안 내가 받은 은혜, 너와 동료들에게 받은 이득들을 모두 돌려줄 수 있게 되었으니.”

바포메트는 쿠란을 등졌다. 자신을 태우는 촛불처럼 화려하고 고귀하게 타오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쩔 수 없는 상황이더라도, 그건 나와 우리들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다. 너는 살아라. 올라가라. 원한다면 귀환해라.”

“무, 무슨 말이야, 모두 함께 올라가야지.”

“아니, 55층을 올라갈 수 있는 건 너뿐이다. 우리 모두는 너를 위해서, 너만을 위해서… 죽겠다.”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염소의 거인은 망치로 바닥을 내리쳤다.

쿵! 소리와 함께 앞으로 달려나간 그가 템플러들을 향해 포효했다. 대기가 울 듯 살이 떨렸다.

“나는 사바트의 염소! 마녀들의 신이며 악마를 칭하는 바포메트다!”

검은 불꽃이 한순간 염소거인의 몸에 일렁거렸다. 불꽃이 사라진 뒤 그의 몸에는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바, 바포메트?”

템플러들 일부가 뒷걸음칠 쳤다. 바포메트는 하나의 종족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었다.

전 세계의 악마를 통틀어서 하는 말. 그것이 바포메트였다.

하나의 사상에 가깝다. 그러나 사상이 피와 몸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어떨까.

악마라 불리운 모든 것들의 능력을 사용하고, 모든 악의 정점에 있다는 말이었다.

“서, 설마했는데…!”

거대한 염소거인은 주춤하는 템플러들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휘두르는 망치에 맞아 하늘로 날아가는 자도 있었고, 그가 시전 한 악마의 마법에 당해버린이도 있었다.

불꽃을 일으키고 바람을 부며, 쿠란이 사용한 웨더 컨트롤. 기우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악마의 능력.

눈을 마주친 자들을 돌로 만들며, 그가 밟은 그림자의 주인은 움직임이 봉쇄된다. 악마의 숨결을 들이 쉰 자는 독에 걸려 몸이 허약해졌다.

그야말로 세상의 모든 악.

원한이 모여 소문을 퍼뜨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의 공포를 만든다. 그것이 악마고 모든 악마를 지칭하는 말은 바포메트였다.

누구나에게 전염되는 병처럼, 바포메트의 주변에는 사상자가 늘어났다.

그러나 그도 결국 탑의 세계의 주민이었다. 탑은 막힌 길을 만들지 않는다. 단지 뚫을 수 있는 길을 만들 뿐이었다.

그 어떤 강대한 적도 쓰러질 수밖에 없는 약점을 만들어둔다.

템플러들 일부가 품속에서 신성한 기운이 깃든 로자리오나 검을 꺼내었다.

악을 멸하는 것은 결국 선이다. 단지 성자 중에서도 템플러가 있을 뿐이다.

성자가 속한 세계에, 신에게 템플러의 길이 옳다면 악마를 멸할 수 있는 도구쯤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었다.

검은 안개에 휩쌓인 템플러답지 않게, 밝은 빛을 내뿜는 도구들로 염소거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성검과 신물로 분류되는 물건들로 인해 악마의 기적들은 모두 막혔다. 오히려 바포메트를 존재감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악마로써의 존재감을 모두 잊고, 템플러들의 가슴 속에서 피어나던 공포가 사라졌다. 그때부터 바포메트가 쓰러지는 것은 당연했다.

오로지 육제적인 힘으로 템플러들을 상대했다. 그러나 개미처럼 많고 근성을 발휘하는 템플러들에 의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던 군세도 힘을 모았으나, 염소거인의 뿔이 꺾이고, 망치가 깨져버리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죽어가는 그를 돕기 위해서 쿠란은 마법을 사용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마법을 영창하고 염소거인의 주변에 검은 불꽃을 일으켰다.

템플러들이 주춤하는 것은 잠깐이었다. 그 순간에 군세는 치고 들어가 염소거인을 둘러쌓다.

“바, 바보! 죽으면 안 돼. 여기서 죽을 만한 녀석이 아니잖아?”

염소거인은 흐려가는 눈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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