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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라면 날 편히 여겨도 좋네.”
드라칸 안드레이의 말이 있었음에도 케일은 저자세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조금 돌려 새롭게 나타나는 이에게 재차 인사했다.
허공에서 불이 일어나고, 바람이 회오리치며, 토양과 물이 진득하게 섞였다. 정령왕이며 주점을 운영하는 베로드의 등장이었다.
“이런 이런, 내가 인간의 호출을 받다니. 얼마만의 일인지 모르겠군.”
혀를 차며 베로드는 술을 들이켰다.
“역시 자네도…. 흠 그 아이가 무슨 일을 또 벌이려고 하는 지 갈피를 못잡겠군.”
“보나마나 신생 오라클이니 뭔지 하는 녀석들의 일을 방해하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 때문에 요즘 시끄럽습니다. 주점을 운영하다보니 이런 저런 소문을 듣는데…. 분명 그 일과 관련된 일로 불렀겠죠.”
베로드는 도자기 몇 병을 자신의 앞에 소환시켰다.
“한 병 드십시오. 새로 만든 겁니다… 아. 케일씨. 당신도 드시겠습니까?”
케일은 거부의 의사를 밝히고 손님을 주변 탁자에 옮겼다.
안드레이는 오랜 만에 마시는 술을 홀짝이며 케일에게 물었다.
“자네는 들은 것 없나?”
케일은 리오가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신생 오라클에 가입했다는 말을 떠올렸다.
‘말해도 되는 겁니까? 리오.’
눈치를 보아하니 둘은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만 말한 비밀을 남에게 발설할 수는 없었다.
케일은 모르는 투로 말했다.
“앤서러에 관한 이야기만 주고 받았습니다. 안드레이님이야 알고 계신게 없으십니까? 리오에게 모종의 조치를 취했다고 들었습니다.”
안드레이는 케일이 리오에게 건 목줄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든지 리오를 감시 할 수 있는 목걸이.
“그 아이가 그런 것까지 말했나? 꽤나 마음을 터놓은 사이인가 보군. 분명 나는 그 아이를 언제든 감시할 수 있는 목줄을 채우긴 했지만, 그 작업이 아무리 나라도 힘이 드는 것이라서… 최근 나의 아버지를 수면기에 이끄는 탓에 통 볼 수가 없었네.”
안드레이의 아버지란 그를 창조해낸 드래곤을 말하는 것이었다. 탑의 세계의 절대자. 최강의 종족이며 탑의 난이도를 상승캐 하는 요인.
그 때문에 항상 수면기로 접어들어 난이도를 하락하게끔 만든다. 안드레이는 최근 그 일을 하고 있느라 리오를 감시할 수 없었다.
베로드는 술을 마시며 물었다.
“분명 그분이 깨어나신지 3년 정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는 의식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군요. 분명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뭐, 내가 못난 탓이겠지.”
아직도 아버지가 수면기에 접어들지 못했다는 건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과 같았다. 드라칸은 탑의 세계의 균형을 맞추며 자신들을 만들어낸 드래곤을 잠재우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지 못하니 씁쓸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그 아이가 무얼 하는지, 나는 모르고 있네. 자네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군.”
“사실 또 무슨 사고를 칠지 기대가 됩니다. 이번에는 무엇으로 놀라게 해줄지… 큭큭.”
케일이 이어서 말을 하려고 할 때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도착한 듯, 발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또각.
온 몸을 가린 로브를 뒤집어쓰고, 자신의 종족을 가리듯 리오가 그들의 앞에 섰다.
이내 후드를 벗고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를 찰랑이며 고개를 숙였다.
“다들 오랜만이십니다. 모두 갑작스러운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소 건방지긴 했지만 네놈이라면 그럴 이유가 있겠지.”
“리오. 또 무리한 일을 하려는 것이더냐?”
“무리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호의적인 셋의 말을 듣고 리오는 굳은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할 말은 그들의 호감을 저버릴 말이었다.
“베로드씨는 항상 저에게 기억나는 술이 없냐고 물으시지요. 그때마다 저는 레서피를 대강이나마 알려드렸습니다. 이건 빚입니다.”
베로드는 리오의 말에 표정이 굳었다.
“… 너의 그 대강 나불거린 레서피 때문에 내가 굉장히 고생했지만, 확실히 그건 빚이긴 하다. 무슨 부탁을 하려고 하는 거지?”
베로드의 말을 무시하듯 리오는 케일을 향해 말했다.
"케일씨는 앤서러를 남기기 위해 석상을 조각하며 이따금씩 저에게 지적을 받았습니다. 그건 저만 알 수 있는 것들이었지요. 이것도 빚입니다.“
이전에 만났을 때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케일은 그때의 변명을 다시 내뱉으려 했지만 그만 두었다.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리오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스승인 안드레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표정이 변한 케일과 베로드에 비해 안드레이의 표정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신 또한 어떤 말을 들을지 알고 있으면서 나오는 여유의 미소였다.
“그래서, 나에겐 어떤 빚이 있지?”
리오는 얄굳게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라고 없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스승님께선 저와 한 약속을 어기셨습니다. 저에게 주신 선물. 이 목걸이. 분명 여기엔 저를 볼 수 있는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저를 분석하고 필요한 것들을 물심양면 지원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가 탑을 오른 5년. 초반을 제외하고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이 없습니다. 저는 댓가를 받지 못하고 저의 사생활과 모든 것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보상을 바랍니다.”
안드레이의 눈이 크게 떠질만한 말이었다. 얼마 전에만 해도 금서지정을 받은 책 몇을 건네주었더니만,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마치, 건네주었던 모든 것들이 사실 필요 없었다는 말이었다.
“… 억지다. 너무하는군”
그동안 건네주었던 금서들을 거론하려고 했지만, 확실히 자신은 리오에게 큰 도움을 준적이 단 한번 밖에 없었다.
‘마법을 처음 배울 때 말고는… 심지어 그때도 내 마법을 직접 가르쳐 준게 아니었지. 방식만 알려준 거니까….’
받은 건 많은데, 돌려준 것이 적다. 이것저것 꼬집을 순 있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덮어두기로 했다.
사실 무슨 부탁을 하려고 빚을 거론하는 건지 무척이나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못해 인정하지. 원하는 보상은 무엇인가? 앤서러 리오.”
리오는 품에서 세 장의 마법진을 꺼내었다.
“… 이건?”
“소환사인입니다. 무엇인지 알고 계시죠?”
소환사인.
리오가 만들어낸 독자적인 마법이다.
소환사인을 남긴 마법사는 타인에게 소환될 수 있었다.
단, 자신이 그 특정 층을 오를 때의 시점으로 소환되며, 사인을 남긴 마법사 본인이 소환 되은 것은 아니다.
과거의 망령이 소환되듯. 별개의 존재가 소환된다.
쉽게 말해서 과거를 기준으로 삼아 소환해내는 것이다.
리오가 20층에 소환사인을 남겼다면, 타인이 소환사인을 통해 20층을 오르던 시절의 리오를 소환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미숙한 앤서러를 사용하고, 가진 축복조차 적었던 때의 리오를 말이다.
“재미있군. 나 보고 소환사인을 남기라는 것이더냐?”
“스승님뿐만이 아닙니다. 다른 두 분도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55층에.”
55층이라는 말에 셋은 인상을 구겼다. 그 층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흠. 왜 하필 그런 층에…….”
셋 중에서 가장 소문을 많이 접하는 베로드만이 상황을 파악했다. 55층에 머물고 있는 군세, 그들을 습격하는 템플러.
리오는 템플러들을 막고자 자신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저도 소환사인을 남길 겁니다. 부디 함께 남겨주셨으면 합니다. 개벽 이후에 회수를 하셔도 됩니다.”
케일과 베로드, 안드레이는 서로 시선을 부딪쳤다. 의견을 공유하는 눈빛 속에서 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부한다.”
한숨 끝에 들려온 말. 부정의 말에 리오는 주먹을 쥐었다. 이런 가능성도 염두 해두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애초에 빚이라고 말하는 것도 억지였다. 그 때문에 리오는 다시 한 번 권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55층은 너도 알다시피 시험의 장이다. 모험가가 정말 55층에 어울리는 자인지 평가한다. 그렇지 않다면 절대로 통과할 수가 없지. 하지만 너의 소환사인을 사용한다면 그 누구든 55층을 통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나 우리와도 같은 자들을 소환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너의 제안에 동의할 수가 없다.
리오는 입술을 깨물고 셋에게 고개를 숙였다.
“… 이 방법이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됩니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시간이 촉박해졌기 때문에 먼저 가보겠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리오는 저택을 나갔다. 쾅. 하고 대문이 닫히며 리오는 울부짖었다.
되는 것이 없다. 템플러를 막아낼 방법은 이것 밖에 없었건만, 가로 막히자 앞길이 막막해졌다.
이대로는 군세가 없어진다.
쿠란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 잘못되었다. 그녀가 죽을 지도 몰랐다.
‘아, 안 돼! 무언가 다른 수단이…!’
미리 공략법을 알고 제몫 이상을 할 수 있었던 리오는 55층의 시험을 통과했다. 단 번에, 다치는 일 없이 통과했다. 이 상황에서 소환사인을 남길 순 있었지만. 자신 혼자 남긴다고 수백 명의 템플러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 어떻게 하지? 이러고 있을 틈이 없어!’
침입을 하여, 템플러 상태로 템플러들을 방해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후의 수단이다.
템플러의 수장을 포기하고, 자신이 각오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쿠란만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일이었다.
목표로 했던 것은 55층 통과를 위한 ‘군세’의 약화, 템플러들의 위상을 높여주며 자신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었다. 최후의 수단을 쓴다면 모두 포기해야한다.
“… 이, 이! 되는 것이 없어!”
화를 내어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일단 55층으로 돌아가 보려던 찰나….
리오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 금서.’
그것은 55층의 일을 알기 전에 스승님에게 받은 한 권의 책.
템플러 아르토처럼, 선지자를 소환해낼 수 있는 매개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