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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의 탑-122화 (122/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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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8화 역할수행

리오가 떠난 자리. 빈은 리오가 건네준 가면을 바라보았다.

‘부탁을 받았어. 지금은 이 가면을 쓸 수밖에 없어.’

그가 부탁한 대로, 빈은 가면을 쓰고 만들어진 인물. ‘까마귀’를 연기하기로 했다.

까마귀의 바탕엔 리오가 있고, 빈은 그동안 자신이 보아온 리오를 바탕으로 연기해야 했다.

페르소나.

외적인격. 가면을 쓴 인격.

리오의 자화상이 되어 빈은 움직이기로 했다.

“여기에 계셨습니까아…. 한참 찾았다고요. 갑자기 통신마법도 끄고 말이죠오. 헌데 방금 전에 계신 분은 누구십니까?”

익숙하지 않은 가면을 썼다. 빙의 당한 사람처럼, 그를 연기했다.

“… 내 손발이 될 인물이다. 부하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겠군.”

단순한 말이었지만, 페이스는 마법에 걸린 마냥 호흡을 멈추었다. 수초 뒤, 몸을 부르르 떨며 웃음소리를 내었다.

“큭큭. 그렇게 된 건가. 그렇게 된 거라면 나도 배우가 되어주지.”

빈은 당황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페이스는 이어 말했다. 그의 본래 말투로 돌아간 상태였다.

“내가 데리고 온 템플러들의 수는 250.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보는데요오. 다들 굶주려 있습니다. 어서 군세를 공략하도록 하죠.”

빈은 리오의 말을 떠올렸다.

‘시간을 벌어달라고 했어. 무슨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할 일은 최대한 시간을 버는 거야. 그리고 동시에 템플러의 부귀영화를 노리는 자로써 행동해야해.’

시간을 벌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금방 떠올랐다. 아무리 템플러라고 해도 지휘관이 있어야 했다. 상하관계를 굳혀놔야만 했다.

그건 과거, 빈이 속했던 조직도 했던 일이었다.

“지금 이대로 군세를 습격한다면, 조직적인 움직임이 불가능하다. 신생 오라클은 그저 템플러들을 모으기만 하는 역할에서 벗어나야 한다.”

“흠… 뭐, 맞는 말이긴 하네요. 이렇게 싸울 거면 조직을 만들 필요가 없죠.”

쿠란은 페이스의 의도는 살피지 않고 통신채널에 모일 것을 명령했다. 이번 일의 주모자인 까마귀의 말에 따라 모두가 움직였다.

군세가 있는 베이스캠프의 반대편. 리오가 전장을 살피기 좋다고 위치했던 곳의 뒤쪽.

안개에 휩쌓인 인영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유령들이 집회를 벌이는 것처럼, 숲속의 한 가운데를 꽉 채웠다.

그들의 앞에선 빈은 까마귀의 가면을 내보였다. 그 순간 소란스러웠던 숲이 조용해졌다.

“이번 일을 주도한 까마귀다. 이번 기회에 신생 오라클의 총수에 어울리는 지 증명할 예정이다. 모두 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다면, 군세가 가진 TP를 모두 빼앗아 주겠다. 우수한 기량을 가진 자들은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기회 속에서 다른 자보다 비교할 수 없는 이득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모두에게 기회는 평등하게 주어지지만, 기량 있는 자의 결과는 평등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곳에 있던 모든 템플러들의 열정에 불이 붙었다. 그 행동이 악독한 일일지라도.

“그를 위해서 나는 조직을 편성하겠다. 지금 이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은 서로의 손발을 묶는 일만 될 뿐이다. 체계적인 명령 전달, 수행을 위해 너희들을 나눠 분대를 만들 예정이다.”

숲속이 소란스러워졌다. 까마귀의 말은 맞는 말이지만, 껄끄러운 일이었다.

누군가는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할 것이며 함께 움직이면 자신에 대한 정보가 누설될 가능성이 높았다.

빈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템플러들을 보며 리오라면 어떻게 했을지 고민해보았다.

그라면, 템플러들의 마음을 뒤흔들 말을 할 것이다.

이 55층의 상황을 벗어나, 탑의 세계 전체를 보려하고 말할 것이다.

자신의 한 마디 한 마디, 템플러들의 행동 하나 하나가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려할 것이다.

고작 단 한명의 말이라도, 이 고립된 작은 세계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마을과 탑뿐인 세상에서는 작은 돌멩이의 진동도 클 수밖에 없다.

다양한 나라와 종족, 드넓은 하늘과 땅을 가진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영향은 컸다.

단순히 앞일을 보지 말고, 그 이후의 일, 전체를 보고 생각했다.

‘그 남자라면…….’

생각에 잠겼던 빈의 입이 열렸다.

“조직을 만드는 것이 두려운가? 하지만 이 일은 단순히 군세를 사냥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모두 오라클을 위해서다. 생각해 봐라. 지금 우리는 조직을 이루었다. 그러나 하는 일은 단순히 일선을 위한 만남이다… 이래서 탑의 세계를 뒤흔들었던 오라클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나? 난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리오가 몸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빈은 그의 손짓, 템플러들에게 보여주는 몸의 각도까지 그대로 따라했다.

“우리는 단순히 앞일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후의 일까지 고려해서 행동해야 한다. 템플러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원한다면 해도 좋다. 하지만 우리와 반대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탑의 모험가. 특히 파티를 이룬 녀석들을 쉽게 이길 순 없을 거다. 예전과 달리 그들은 우리를 보고 위축하지 않고, 대등한 존재로 여긴다.”

언젠가 리오가 내뱉었던 말을 빈은 떠올렸다.

3년 전. 오라클이 분해되기 전의 템플러는 하나의 재해와도 같았다.

재해를 만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모험가들은 피하려고 애를 썼고,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자연과 싸우는 것은 이길 가능성이 없으니까. 당연히 질 수밖에 없다.

모두가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리오가 오라클을 분쇄시키고, 많은 템플러들을 물리친 이후.

주민들의 인식은 바뀌었다.

한낮 인간 따위도 다가오는 재해를 물리치고 방지할 대책을 만드는데, 자신들이라고 못할 건없었다.

인간과 다른 점은 가진 재주와 외형뿐이었다. 오히려 인간보다 가진 점이 이종족들에게는 많았다.

그것을 인식하고, 템플러가 재해 따위가 아니며, 만나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모두 깨달았다.

그때부터 모험가들은 템플러를 만나더라도 위축되지 않았다. 본 실력을 그대로 꺼내어 탑이 만들어낸 이형의 존재처럼 상대하기 시작했다.

템플러는 더 이상 위협이 아니다.

그때처럼 템플러가 ‘재해’가 되기 위해선, 조직이 아니라 하나의 오래된 파티처럼 행동해야 했다.

서로의 손발을 맞추고, 머리를 모아 고민해야 했다.

과거 번성했던, 순수한 악당들이 모였던 오라클처럼.

“인간 리오가 오라클을 없애고 어떻게 상황이 어떻게 변한지 아직도 모르는 자가 있나? 모험가들은 템플러를 무서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냥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템플러로 의심되는 자들을 검거하고, 축복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게끔 한다. 우리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다. 이기기 위해선, 우리도 똘똘 뭉친 조직이 되어야 한다. 개인의 욕망으로 움직이되, 그로 인한 영향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이 단신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의 무리로써 생각해야 한다.”

남을 믿지 못하고, 남의 것을 빼앗을 줄만 아는 템플러의 조직은 금방 분해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생명과 욕망과 관련 되어 있다면.

욕구에 의해 움직이는 템플러는 결국 공동체를 이룰 수밖에 없다.

정적이 된 숲속에서 빈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도 나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자가 있나?”

정적이었지만 템플러들의 마음은 하나로 뭉쳤다. 자신들을 이끌어 줄 수 있는 자를 찾았다는 기쁨이 보였다.

넘쳐흐르는 욕망을 이제 주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쾌감.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 욕망을 위해서 뭉쳐야 한다는 이유가 생겨났다.

그동안 본능에 따라 움직였던 자들에게 진정한 동료가 생겨났다.

자신과 똑같은, 언제라도 뒤를 후릴 수 있지만,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점.

그래서 신생 오라클의 템플러들은 배신을 할 수 없다.

욕망을 채우되, 모두와 함게 생존을 함께 갈구해야 한다.

“그럼 모두 내 의견에 따르는 것으로 알겠다! 이제 분대장이 되고 싶은 자들은 앞으로 나와라!”

숲이 진동하며 템플러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이스는 잠자코 박수를 쳤다.

“악당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훌륭한 선동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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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잃은 동료들은 어쩔 수 없었다. 한 파티의 리더로써 앞일을 책임져야 했다.

‘침입할 거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벌써 3개월이 지나진 않았을 텐데. 역시 내가 탑에 들어왔기 때문인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남자의 말을 기다릴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도 55층에 오르는 걸 기다리고, 함께 오르는 것.

그러나 주어진 삼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쿠란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위협이 다가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행동조차 하지 말라니, 불가능했다.

“후우. 큰일인걸.”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만이 쿠란의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손재주가 좋은 동료들의 힘으로 만든 베이스 캠프. 막사 하나를 혼자 쓰고 있는 쿠란은 탑 밖의 상황을 떠올렸다.

‘리오는 54층에 들어갔었지. 그 층은 좀 어려운데… 정적과 전갈의미를 알아챈 다면 금방 깨겠지만…. 나는 꽤나 오래 걸렸지. 리오라면 금방 통과 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걸음걸이로 54층을 막힘없이 진행한다면 걸릴 소모시간을 계산해보았다.

‘15일 즈음인가. 리오는 인간이고… 그 파티의 멤버를 생각하면 조금 더 늦어질 수도 있겠네. 어찌 되었든 순탄하게 진행했다면, 지금쯤 탑을 나왔을 거야. 그리고 나를 찾으러 왔겠지.’

여관에 없는 쿠란을 보고 리오는 무슨 생각을 할까. 머리 좋고 눈치가 빠르니까, 금방 쿠란이 탑에 들어갔다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그 상황에서, 리오는 어떻게 움직일까.

쿠란이 탑에 있는 탓에 파티를 맺고 합류할 방법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도움을 주고 싶겠지만, 한 파티가 아닌 이상 그녀가 아는 방법으로는 불가능했다.

‘침입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은…….’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방금 전 템플러의 움직임은 리오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몰랐다.

‘말도 안 되나. 리오가 템플러라니. 어찌 되었든 아까 전 템플러의 움직임이 좀 이상하긴 했어. 각개전투로 물고 넘어지는 게 템플러의 싸움일텐데…. 전술을 아는 누군가가 지휘를 한 거야 분명. 그렇지 않고서야 동서로 나누어져 있던 병력을 가운데로 모을 리가 없어.’

덕분에 고립되었던 동료를 구할 수 있었지만, 쿠란은 템플러의 지휘관이 만만치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대규모의 파티를 운영하고 전술을 이용한 전투를 벌이는 건. 이 탑의 세계에 있어서 그녀만이 유일하다고 봐야했다.

이를 위해서 쿠란은 도서관에 틀어박혀 전술 전략을 공부했다.

‘후. 일단 상황을 파악해 볼까.’

파티 정보를 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홀로그램이 현재 파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나타냈다.

사망자, 중상자에 이르러 그녀가 메모한 각 파티원의 재주들이 기록 되어 있었다.

“397명중… 80명이나….”

과거, 탑을 오르면서 많은 주민들이 그녀의 파티와 함께 했다.

10층, 20층, 30층… 앞자리가 바뀌는 구간마다 희생자는 있었지만, 이렇게 많이 죽는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 마을 주민에게 있어 최대의 적은 같은 주민인가….’

이렇게 많은 동료들을 잃고 나서야 쿠란은 무시하고 있던 책임감을 확실하게 느꼈다.

‘난 여태 동료들의 도움을 받고 여기까지 올라왔어. 이제 내가 도와줄 차례야.’

마음을 다잡고 막사를 뛰쳐나갔다. 앓는 소리를 내는 이, 내일을 걱정하는 이들이 보였다.

“모두 모여줘. 중요한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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