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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생각하자 앞뒤가 맞았다. 모든 것은 우연.
“뭔가 짚이는 것이 있는 모양이군.”
베로드의 말에 리오는 화들짝 놀랐다. 생각에 집중한 탓에 그의 앞이라는 것을 어느덧 잊고 말았다.
“확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만…….”
“딱히 네 생각을 듣거나 도움을 줄 마음은 없다. 여기서 나갈 생각이라면 따라와라.”
“예.”
베로드는 앞장서서 저장고의 출구로 향했다.
서늘한 저장고를 나왔다. 밖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주변을 돌아보자 베로드가 운영하는 펍의 뒷 마당이었다.
‘가게의 지하에 그런 공동을 만들다니… 역시 정령왕인가. 그런 지하라면 무너질 텐데….’
베로드는 저장고의 입구를 위장킨 뒤 리오에게 무관심한 태도로 말했다.
“사령술이라는 것도 보았으니 이제 너한테 볼일은 없다. 난 이만 가보도록 하지.”
정이 들법 했건만, 쌀쌀한 태도의 베로드에게 리오는 섭섭함을 느꼈다.
“아… 예. 감사합니다.”
베로드가 펍의 안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아니 아르토와 함께 남은 리오는 입을 열었다.
“당신을 소환하고 너무 저장고에만 있었네…. 이제 좀 실감이 되려나? 여기가 당신의 미래 세계야.”
아르토는 저번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굳이 정확히 말하자면 100층을 오를 때의 모습이 아니었다.
베로드의 의견을 반영하고, 그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버리지 않았을 때를 상정했다.
그러다 보니 아르토의 나이, 가진 힘 등이 무척이나 낮아졌다.
리오가 원했던 ‘탑의 모든 공략을 알고 있는 소환수.’에서는 멀어졌지만, 같은 앤서러를 사용하는 인간 소환수라는 부분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나의 소환수라는 부분을 제쳐두고, 나와 같은 지구에서 온 인간이야. 같이 성장하면 되.’
베로드가 조언을 해주었던 것처럼, 리오는 술사와 소환수의 관계가 아닌,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러나 아르토는 생각보다 소심한 건지, 아니면 인간을 믿지 않는 것인지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일기장이랑… 그 아들을 볼 때는 이런 성격이 아닌 것 같았는데 말이지….’
인형같다.
외모가 인형처럼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행동거지가 누군가의 말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인형 같았다.
말은 결코 없고, 단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젓는 행동 뿐.
‘소환을 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던 걸까…….’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리오는 생각했다.
함께 행동하다보면 마음을 차차 열 것이다. 그렇게 막연히 생각하고 리오는 앞으로의 일정을 떠올렸다.
‘우선은 그 도서관을 다시 가봐야 해. 정말 내가 습격을 당한 이유가 그 도서관 때문인지 확인을 해봐야겠어… 그리고 그 금서보관소에서 읽었던 책. 그것도 다시 읽어 보고 싶은데…….’
그 책을 다시 사서장 빈에게 부탁을 하자니, 리오는 그녀가 오라클과의 싸움에 휘말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을에서까지 리오를 습격한다면, 주변 지인들 또한 안전할 리가 없었다.
‘거기다 그 거기는….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는 호빗들, 오갈 곳 없는 호빗들의 유일한 일자리 장소야. 그곳의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빈에게 피해를 주는 건. 할 짓이 못 되.’
그 책을 빌리고, 혹 도서관과 오라클이 연관이 있는지 직접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추후의 수단으로 밀어두기로 했다.
자신의 손으로 그 책을 얻어낸다. 그리고 도서관이 오라클과 연관이 있는지 알아내기로 했다.
베로드의 펍에 있던 리오는 마을의 정중앙에 솟은 탑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탑의 눈동자라 불리는 모만이라고 해도 탑의 대기실에 있는 리오는 보지 못할 것이었다.
‘오라클들은 내가 오직 혼령으로만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거야.’
모만이 정말 오라클이라면, 리오가 변한 모습을 두 번이나 보았을 것이다.
한 번은 8층에서의 싸움, 두 번 째는 오라클들이 직접적으로 싸움을 걸어왔을 때.
그 외에는 리오는 게놈 해저드를 통한 변신을 한 적이 없었다.
두 번이나 연속으로 팬텀으로 변한 모습을 보았다면, 리오가 ‘팬텀으로 밖에 변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을 가졌을 것이다.
‘그 생각의 허를 찔러야 되. 그 도서관에 들어가서… 이것 저것 알아보기 위해서는.’
탑의 대기실은 리오만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고, 그 누구도 리오의 허락이 없는 이상 들어올 수도, 볼 수도 없다.
‘대기실에서 게놈 해저드로 모습을 변신시킨 뒤, 마을로 돌아와 도서관으로 간다면…….’
확신은 없지만 성공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혼령이 아닌 다른 이종족의 모습으로 변한다면, 변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모만은 리오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계획을 정리하며 리오는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현재 상황이 정리되기 전까지, 아르토와 함께 움직이는 건 무리였다.
“아르토씨. 여기가 제 집입니다. 제가 현재 누군가와 함께하기엔 위험한 상황이라서요…. 여기서 절 기다려주셨으면 합니다. 자세한 상황은 추후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아르토는 리오의 집안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기 집처럼 생각하셔도 됩니다. 딱히 뭐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요. 집에만 계시는 게 갑갑하시면 밖에 나가셔도 됩니다.”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그저 긍정의 의사만 고개로 표출했다.
아르토에게 집 안내와 조심해야할 것들 등, 현재 오라클과의 문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고 리오는 집밖으로 나왔다.
‘혼자 나둬도 되려나….’
마치 어린아이를 홀로 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기장을 통해 아르토가 어린 시절에 이곳에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현재 그의 나이는 자신과 크게 차이가 없어보였다.
‘걱정할 필요 없겠지… 아니, 애초에 누가 누굴 걱정한다는 거야? 자기 몸 하나 지킬 정도라면 나보단 저분이 더 잘 지킬 텐데.’
고개를 으쓱하며 다시 리오는 탑으로 향했다.
개벽 때 계절이 정해지면, 그 계절로 일년 내내 보내는 탑의 세계 특성상. 여전히 밖은 춥고 눈바람이 몰아쳤다.
처음 탑의 세계로 왔을 때는 탑이 칠흑처럼 보였건만, 겨울이 되었기 때문인지 순백의 탑처럼 보였다.
지금의 탑을 보고 있노라면, 순결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였다.
검은 티 하나 없고, 거짓하나 없으며 더러움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그 탑의 아래는 정반대다.
욕심으로 움직이는 자들과 그들을 처벌하려는 인간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제 28장 침입
집을 들렸다 탑으로 향했지만 시간은 여전히 오전이었다.
이제 막 탑을 오르는 모험가들이 하나 둘 모이며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와중에는 리오와 친한 주민들 또한 있었다.
아직 그들을 눈치 채지 못한 리오는 탑의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늘 따라 주민들 수가 적은 걸…….’
탑의 입구 앞은 항상 아침마다 북적거리고, 오늘도 마찬가지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확연히 느낄 정도로, 누가 탑을 올라가는지만 다들 보고 있을 뿐, 실제로 입구를 향하는 모험가들은 수가 적었다.
‘나 때문인가…….’
그 이유가 무엇일지 길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엊그제 있었던 오라클과 리오의 소동. 그것이 어느 주민들에 의해 소문이 났다고 베로드가 말했다.
오라클은 전부터 공포의 대상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번 일처럼 크게 일을 벌인 적은 처음이었다.
리오가 10층과 20층을 오라클의 방해 속에서 헤쳐나갔던 것처럼,
오라클들은 자신들의 방해공작이 실패했다고 마을에서까지 일을 크게 벌리진 않는다.
그 층의 일은 그 층의 일, 그 날일은 그 날의 일.
뒷 끝이 없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리오는 마을에서 템플러들에게 습격당했다.
단순 템플러라고 해서, 무조건 오라클의 구성원 일리는 없지만, 그 당시 사고의 흔적은 수십 명이 조직적으로 움직인 흔적이 남았다.
그런 움직임을 보일 수 있는 템플러들의 파티는 단 하나. 오라클뿐이었다.
오라클이 리오를 마을에서까지 습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이 있는 마을 주민이라면 누구나가 알 수 있다.
뒷 끝이 없는 오라클이, 뒷 끝이 행동할 리는 없다. 만약 하게 되더라도, 탑에서 해결 할 뿐, 마을에서 할 필요는 없다.
마을에서 할 필요가 없는데, 마을에서만 굳이 해야만 했다면… 리오에게 오라클이 그러한 행동을 이끌어낼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는 마을에서 여러 추측이 난무하지만, 가장 타당한 것은 하나였다.
‘리오가 오라클의 약점을 쥐거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라클들은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한 것이다. 라고 주민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현재 마을의 분위기는 좋지 않고, 탑을 오르는 주민들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
약점이 잡힌 오라클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일지도 모른다.
죽기 직전의 사냥감이 최후의 발악을 하듯, 오라클들도 무언가 할지도 모른다.
가령, 큰 건수만 노리는 오라클들이 무차별적인 축복 사용을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무언가 수를 써야해. 이대로는 탑을 오르는 모험가가 줄어서 물가에도 영향을 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