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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마족이 탑을 오르는데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니, 거기다 그런 조건이라면… 설마 기간이나 몇 층까지인지 그런 세심한 걸 적지 않은 건가요?”
리사의 말에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자신이 파티에 들어가면 그런 조건들은 모두 사라지는 줄로만 알았던 리오였다.
만약 쿠란이 약속이 아니라, 계약이라고 말을 했다면 좀 더 세심히 조건을 달았을 것이다.
약속과 계약은 무게감이 다르니까.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쿠란이라는 분이 묻어가면 되는 거 아닌가요. 리오씨가 장난으로 생각했을 정도면 마족의 계약 같은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마족의 계약.
계약 불이행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널리 알려진 계약이다.
리오와 쿠란의 경우, 쿠란은 리오가 내건 조건을 어겼으니 결국 죽고 만다.
하지만 둘이 행한 것은 평범한 구두 약속이다.
둘 중에 한 명이 피해를 받는 일은 없다. 단순히 둘 중에 한 명. 약속을 중요시 여기는 쿠란의 자존심만이 상처 날 뿐이다.
“맞죠? 마족의 계약이 아니라면 평범한 구두 약속. 그런 거라면… 리오씨는 분명 쿠란이라는 분을 설득 할 수 있었을 거 에요. 난 이 파티에 남고 싶다고.”
설득이고 자시고, 쿠란 본인이 리오를 놓치는 것을 아쉬워했다.
처음에는 리오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시험 하는 투로 대화를 했다. 결국 나중엔 약속에 대해서 리오가 깨닫자 질문을 바꾸고 말았다. 너는 파티에 남을 건지, 아니면 떠날 건지.
“듣고 보니 그렇군. 그 파티에 남을 수 있었다.”
칼의 말을 리사가 이었다. 죽이 맞는 연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어보였다.
“칼씨의 말 대로, 멀리서 보았던 제 눈에도 리오님은 그 파티가 무척 마음에 드는 것 같아 보였어요.”
처음이다 보니 리오의 말에 잘 따라주지 않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결국 자신의 할 일을 다 해주는 동료들.
자신이 없어도, 1인분의 역할을 해주는 동료. 앤서러 리오라는 인물의 몫 이상을 해주는 동료.
그 파티는 부족한 것이 없다. 승승장구하다 막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뒤늦게 쫓아간 자신이 손을 뻗어주면 될 일.
“남아 있을 수 있었는데…. 왜 나오신 거 에요?”
리자드 맨 둘이 말하고 싶은 요점은 하나다.
마음에 들어 한 파티를 왜 스스로 이탈했느냐.
“리사씨. 칼씨. 두 분은 귀환의 탑을 정복한 종족이 몇 종족이나 되는지 아십니까?”
갑작스런 리오의 질문에 둘은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가 곧 답했다.
“난 잘 모른다만.”
“… 소문으로는 유일하게 인간만이 정복했다고 들었어요.”
놀란 칼의 얼굴을 보며 리오는 말을 이었다.
“저는 저의 선조분들과 다르게 탑을 오르고 싶습니다. 그분들은 탑을 앞장서서 오르며, 다른 종족들과의 화합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심을 채우며 홀몸으로 오르신 듯 합니다. 개인의 강함만을 생각하셨죠. 스스로 앞장서서 위험을 모두 제거하고, 다른 주민들은 그저 뒤를 따른 듯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100층의 몰살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시련 없이 위로 향한 모험가가 맞이할 운명은 오로지 죽음뿐.
그 죽음의 장막조차 아르토를 비롯한 선조들은 모두 걷어내었고, 마지막 층에 이르러서 몰살켰다.
몰살의 결과는 주민들의 평균치를 하향시키고, 인간이 좀 더 탑을 오르기 쉽게 도움을 준다.
아르토의 일기장을 통해서 알아낸 탑 공략법.
리오는 똑같은 짓을 할 용기도 없고 의지도 없었다. 템플러가 될 생각도 없다.
‘… 난 반대로 한다.’
원숭이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주민들의 기대였다는 것을 깨달은 때. 그때 했던 각오를 리오는 다시 떠올렸다.
‘나 혼자 귀환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이 탑을 나 혼자 올라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아. 이곳 주민들과 함께 올라간다.’
선조들이 앞장서서 모든 위험을 제거하며 나아갔다면, 가장 뒤에 있는 리오는 가장 뒤에서 주민들을 뒷 받쳐주며 나아간다.
주민들을 방패막이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단련시키는 것. 강한 힘을 가진 오우거나 오크들이 인간 따위에게 기대지 않아도 탑을 오를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저는 제 선조분들이 남긴 힘과 지식으로 그분들처럼 앞서서 나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가장 뒤에서 모든 주민들을 이끌고 가고 싶습니다. 어서 위로 올라가라고 밀어주는 식으로요.”
놀란 표정이었던 칼이 곧 평상심을 되찾았다.
리오의 이 말로 충분했다. 왜 파티를 나왔는지 가장 선두에서서 싸우는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군. 그런 이유에서 파티를 나온 건가. 하긴 그 파티는 너무 완벽하지, 굳이 네가 속해있지 않아도 위로 쭉쭉 올라 갈 것은 분명해. 언젠가 막히는 것은 분명하겠지만.”
“그때는 뒤에서 밀고 올라가는 제가 손을 뻗어주면 될 일입니다.”
칼은 굳어있던 얼굴을 풀었다. 곁에 있던 리사도 무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나와 리사는 네가 파티에 대한 불심을 품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탑을 오르는데 파티는 필수불가결한데,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위로 못가거든.”
리오는 칼에게 내뱉던 껄렁한 말투로 돌아와 답했다.
“방금 말한 대로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보다. 당신. 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그리 나한테 집적대는 거야? 리사씨한테나 잘해주라고.”
칼은 혀를 차더니 갑작스럽게 등을 돌렸다. 평온한 목소리로 몇 마디 말을 남기고 공원 밖을 향해 나아갔다.
남아있던 리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언젠가 말할 줄 알았다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럼. 칼씨랑 함께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너무 늦지 말아요.”
“아… 네.”
위에서 기다린다.
같이 탑을 오르고 싶다는 말을 돌려 말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제 23장 목적확인
리오는 검을 무기총판의 알과 또 다시 재회했다. 그러나 저번과 달리 둘만의 만남으로 끝날 수 없었다.
“다음에 또 무기 문제로 이곳을 오게 되신다면… 조렌 총판장님께서 자신을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총판장님께서…?”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까지는 아니었지만, 조렌 총판장은 만남이 꺼려지는 인물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알과의 만남을 뒤로 미루고 그의 집무실로 안내를 받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고는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총판 내부, 그의 집무실은 엘프답게 검소했다.
“다시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조렌 총판장님.”
“리오군. 퇴사한 이후로 처음인가? 반갑다오. 매일 자네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리는 까닭에 아직도 자네가 우리 식구인 것만 같군.”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저야 기쁠 따름이지요. 감사합니다.”
조렌과의 만남을 껄끄럽게 생각했지만, 리오는 막상 눈앞에서 만나니 편안함을 느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식사라도 하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겠지만… 서로 바쁘지 않나? 간단하게 본론만 꺼내겠소.”
“예. 사실 조렌 총판님께서 저를 찾으실 일이 무엇일까 하고 무척 궁금하던 차입니다.”
서로 속을 떠보거나 똑같은 주제로 대화를 질질 끄는 것은 리오로써도 사양이었다.
“우리 총판의 명장 한분과 만나주었으면 하오. 이건 개인적인 부탁이니 승낙한다면 내 적당한 보수를 준비하겠소.”
“보수라니, 조렌 총판장님께는 그동안 받은 게 많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일 할 때 이런 저런 편의를 봐주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양하겠습니다.”
백발이 무성한 조렌은 희미한 웃음을 띄며 한 장의 편지를 건네었다.
“고맙소. 리오군이 만날 명장은… 케일이라는 분이라오. 여기 편지봉투에 그분이 생활하시는 위치를 적어두었다오.”
조렌이 높임말을 사용할 정도로 대단한 명장이라는 것일까. 혹은 조렌보다 나이가 많은 걸까.
리오는 흥미로운 점을 깨달으며 편지지를 갈무리했다.
“그 케일이라는 분이 왜 저를 찾으시는지… 이유를 알 수 있을 까요?”
조렌은 이유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 그가 살아온 세월의 흔적인 주름이 훤히 보이게 인상을찡그렸다.
말을 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그 모습에 리오는 입을 열었다.
“곤란하시다면 굳이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곤란한 게 아니라오. 그분이 자네를 찾는 정확한 이유가 무엇일지 감이 잡히질 않는 것이라오.”
수많은 거래를 통해 탑의 세계에서 무기 총판을 맡게 된 조렌이었다.
대상인이라고 부를 법한 그가 상대방의 심리를 짐작 할 수 없다니, 리오는 케일이라는 명장이 어떤 이종족일지 궁금해졌다.
‘적어도 모만씨, 스승님 정도로 끝이 어디일지 알 수가 없는 분일 것 같아.’
명장 케일에게는 아마도 잘 보이는 편이 좋을 것이었다. 케일이라는 주민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 행동이 무엇일지 먼저 알아두기 위해, 리오는 그의 종족에 대해서 물었다.
케일의 종족에 대해서 질문 받은 조렌은 또 다시 얼굴에 주름이 잡혔다.
“종족?… 흐음. 이것 참. 설명 해줄 수가 없군.”
리오는 일부러 종족을 숨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른에게 추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쯤에서 조렌과는 헤어지기로 했다.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나머지 궁금한 점은 직접 만나서 풀어야겠습니다.”
방에서 나가려고 하는 리오에게 조렌은 무언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좋은 정보는 아니지만……. 케일님은 자네가 사용하는 무구들을 만드신 분이라오.”
‘내가 사용하는 무구들?’
병장기들을 고르는 과정에서 알이 했던 말을 리오는 그제야 떠올렸다.
‘그래. 알이… 분명 모두 한 대장장이의 손에서 태어난 것들이라고 했어. 지금 사용하는 것들을 구할 때, 익숙한 장인의 무기를 사용하는 편이 좋다고 했었고.’
케일이 어째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지 리오는 조금은 이유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가 케일님과는 좋은 관계가 되었으면 하네. 그게 내 개인적인 바램이라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개를 숙이고 리오는 그의 방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