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의 탑-70화 (70/190)

<-- 70 회: 3-4 -->

리오는 가슴속의 응어리를 토해내었다. 지구였다면 결코 말하지 않을 그런 말이었다. 하지만 이곳이라면, 쿠란의 앞이라면 상관이 없다.

서로의 차이 때문에, 어차피 리오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그 의미조차 이해를 하지 못하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

쿠란은 리오의 말에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 마족인 그녀는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인간인 리오가 아무리 지구인에서 동떨어진 생각을 가진 탓에 탑의 세계로 왔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인간의 때를 벗지 못한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는 상대의 모든 걸 좋아해야한다. 단순히 몸만 원하는 것은 번식기 때만 만나고 헤어지며, 매년 다른 남자 다른 여자를 만나는 수컷과 암컷. 짐승들이나 하는 짓이다.

리오는 인간이다. 짐승이 될 생각이 없다.

‘그래.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대부분의 이종족들은 짐승이지. 쿠란. 아마 너도 그래.’

생각에 잠겨 있던 쿠란이 입을 열었다.

리오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리 생각해보았지만. 이해가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 데……?”

“이건 설명 해줄 수 없어.”

종족간의 매워질 수 없는 차이를 쿠란도 슬슬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설명 해줄 수 없다는 말을 굳이 추궁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근데… 아까 내가 한 말은 어떻게 할 거야? 역시 너도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야?”

이전 대화를 이해를 하지 못한 까닭에 리오가 대답을 준 질문을 다시 던지는 쿠란.

대화가 이어지지가 않을 정도니, 쿠란은 리오가 자신을 좋아했고, 차버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리오는 그동안 착각 속에 있었던 자신에게 창피함을 느꼈다. 순진무구하고 백치미 끼가 있다고 생각했던 쿠란은 애초에 없었다.

그저 리오만이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고, 같은 마족들이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은 평범한 여성 마족일 뿐.

“어째서 굳이 대답을 들으려 하지?”

“대답에 따라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니까.”

앞으로 리오는 그녀가 내뱉는 말을 가급적 자신의 생각 테두리 안에 두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마족이 아니고 마족의 세계를 단 한 번이라도 간접체험하지 못한 리오가 그 생각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답에 따라서 무슨 결정을?”

사실 그렇게 크게 생각할 필요도 없던 쿠란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파티. 널 내쫓을지, 그대로 받아들일지 고민 중이거든.”

파티에 참여하게 된 이유, 파티를 유지하고 이유는 결정적으로 쿠란에게 있다.

리오는 그런 이유를 떠나서 순수하게 파티 자체가 마음에 들었다. 파티는 가급적 이대로 함께 하고 싶었다.

이 일에 대해서 가슴을 아파하고 상처받는 건 착각 속에 있던 리오뿐이다.

그녀로써는 이 일 인해 리오를 내쫓을 이유가 되질 않는다.

애초에 리오를 좋아하지도 않았고, 리오가 어떠한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눈치를 채지도 못했다. 그런 건 함께 행동했던 동료들만이 눈치 채고, 알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묵인해주면 될 일.

‘대답 여하에 따라 날 내쫓는다고? 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그녀가 했던 말 중에 힌트가 있었는지 리오는 떠올려보기 시작했다.

애초에 나눈 대화도 별로 없고, 만난 날도 적다.

지금 이 순간부터 기억을 거꾸로 더듬으며 정답을 찾아내는 건 리오에게 너무나도 쉬웠다.

“그렇군. 하지만 말이 틀렸잖아 쿠란. 내쫓는 게 아니라 내가 내 발로 나가야 하는 거지. 어찌되었거나 약속은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리오의 말에 쿠란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라? 눈치 챈 거야? 어제 그렇게 눈치를 줘도 모르는 것 같더니만… 그래서 내쫓을지 말지라고 한 건데…….”

리오와 쿠란의 약속.

쿠란은 리오를 자신의 파티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했다.

리오는 쿠란의 의사를 거부했으나, 쿠란의 미모와 끈질긴 성격에 졌다.

그 결과. 조건 세 가지를 걸고 약속 하나를 하고야 말았다.

첫 번째. 리오와 동등한 층까지 오를 것.

두 번째. 리오가 갱신한 업적들을 모두 자신의 이름으로 다시 갱신 시킬 것.

세 번째…….

이것이 유일하게 쿠란이 지키지 못한 사항이었다.

마족의 긍지라고 할 수 있는 계약, 약속의 이행을 그녀는 지키지 못했다.

리오와의 약속이 특별한 마법을 이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쿠란에게 벌은 없다.

단순한 구두약속.

하지만 무보수 선의를 베풀지 않는 마족은 약속이나 계약의 이행을 자존심처럼 여긴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쿠란 본인은 그러한 듯이 말했다.

‘무조건 지킨다고 말했었지.’

그런 그녀가 리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세 번째가 분명… 그래. 마족 쿠란은 탑을 오르며 마법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리오는 그녀가 마법을 사용하는 장면을 탑 내부에서 두 눈으로 보았다.

드레이크를 공격하는 장면을 보지는 못했지만….

드래곤이 되지 못한 변종 드래곤.

드레이크가 가진 드래곤 하트를 공격하고 그 충격으로 인해 하늘에서 떨어질 때.

리오를 받아낸 것은 마법을 사용하던 쿠란이었다.

“응.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네. 난 약속을 잊어 먹는 남자는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뭐 기억하고 있구나. 덕분에 여기서 밤을 새며 네 욕을 한 건 모두 사죄할 게.”

“자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쩐지 술을 그렇게 먹고도 용케 일찍 눈이 뜬다 했지!”

한숨을 내쉬며 리오는 쿠란을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 뭐, 보통 그런 약속은 내가 너와 함께 완수 된 걸로 치고 끝이 난 거 아닌가 싶은데.”

“아니. 그러면 내가 굳이 이야기를 했겠어? 우리 둘 다 그 건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가 있지만…. 그게 끝이 난 건지 아닌지 둘 중에 한 명이 말을 하지 않았으니 계속 되고 있었다고 봐야지.”

“너도 마족인 주제에 터무니없는 약속을 받아들였군. 애초에 불가능한 약속이잖아. 탑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니.”

쿠란을 모욕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보통의 마족. 전투민족 마족이라면 여기서 화를 내겠지만 쿠란은 달랐다.

“뭐, 그런 약속을 받아들이니까 이런 세계로 온 것 아니겠어.”

멍청한 마족이라고 말을 하려다 리오는 그만 두었다. 이번에야 말로 화를 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럼 이유도 알았으니 이제 대답해주지 않겠어? 파티에서 나갈 건지, 그대로 있을 건지. 본래대라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내 파티에 있을 순 없지만. 이렇게 저렇게 꼬였으니 한 번 봐주겠어.”

당당히 말하는 쿠란을 리오는 두 눈에 담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그녀의 파티는 우수하고, 인간인 리오를 기다릴 새도 위로 향할 것이다.

운이 좋게도 귀환을 할 수도 있고, 그러던 와중에 전멸 당해 죽을 수도 있다.

그러니 마지막으로 두 눈에 담았다.

인간 신태준이 이형의 존재가 가득한 탑의 세계로 와서.

처음으로 애틋한 감정을 품었던 여자.

인간 신태준에게는 아니지만, 인간 리오에게는 첫사랑 일 터였다.

하지만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던 감정은 그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싸늘해졌다.

국적이 서로 다른 남녀가 이어질 수는 있어도.

살아온 세계가 서로 다르고, 하물며 종족조차 다르면 이어질 수는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리오는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

망가져버린 방패를 새로 구하기 위해 무기 총판으로 가고 있을 때 이었다.

푸른 비늘을 가진 리자드 맨. 칼과 리사가 리오에게 다가왔다.

“이 시간에 무슨 일들이야? 탑에 있을 시간 아닌가?”

“쿠란의 파티에서 빠져나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시름시름 앓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한 번 널 찾아 다녔다.”

“시름시름 앓아? 내가? 왜?”

“첫 결별이지 않나. 인간은 외로움이라는 감정 때문에 고생을 한다고 해서, 혹여나 네가 쓸떼 없는 일을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했다.”

리오는 냉철한 성격을 가진 리자드 맨. 칼의 말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와의 첫 만남. 그리고 그 이후의 일들을 떠 올려보면, 지금 이 말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웃기지마. 네가 날 걱정한다고? 그럴 리가.”

리오는 칼의 옆에 있는 리자드 맨을 바라보았다. 칼의 반려자. 리사.

온화한 성격을 가진 그녀가 아마 리오를 걱정했고, 칼에게 그 생각을 전한 것이 분명했다.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칼과는 정 반대의 말투와 분위기로 리오는 부드럽게 말했다. 리사또한 리자드 맨 답지 않은 성품으로 답했다.

“걱정할 필요는 없었던 모양이네요.”

“설마 그런 일 때문에 찾아오실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들을 이끌고 리오는 근처의 쉴만한 장소로 이동했다.

한국이었다면 공원이라고 부를 수 없는 푸르름이 넘쳐나는 장소로 이동하자 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쩌다 그 파티에서 이탈 한 거지? 내가 보았을 땐 이탈할 만한 문제가 없어보였는데.”

리자드 맨의 말에 리오는 어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자 확실히 정리하여 말 할 수 있었다.

다만, 모두 말하기에는 자신의 속마음이 섞여있는 터라 구체적으로는 설명 할 수 없었다.

“말 못할 사정이 있었고, 거기다 마족이 중시하는 약속이라는 것 하나가 위반 되었더군.”

“말 못할 사정? 나한테도 말해줄 수 없나?”

웃음을 터트린 리오는 칼과 리사를 보았다.

“이봐. 확실히 당신과 나는 꽤나 알고 지낸지 오래 되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사이는 아직 아닌 듯해.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고, 저번 일도 고맙긴 하지만 조금 이른 것 같은데?”

“…….”

싸늘한 칼의 시선이 가슴을 콕콕 찌르자 리오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말 못할 사정은… 그냥 나 혼자 묻어가면 되는 일이야. 파티를 이탈을 해야 하는 큰 원인이 되질 않아.”

그쯤에서 수긍한 칼은 계약에 대해서 물었다.

“날 파티에 넣는 조건 중에 쿠란 본인이 탑에서 마법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 다는 조건이 있었지. 쿠란은 마족답지 않게, 나 또한 장난으로 생각하고 허술하게 조건을 걸어버리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