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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의 탑-60화 (60/190)

<-- 60 회: 2-26 -->

***

어렵지 않게 15층을 통과하고 나니, 예전과 똑같이 해가 저물어 갈 즈음에 탑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탑을 오른 걸까, 아니면 10층 위는 확실히 이전 층들과 다르다는 걸까.

업적을 따내는 것을 해낼 수 잆었다.

‘신경 써서 움직였는데도…. 어쩔 수 없나.’

탑에서 내려온 순간, 다른 주민들이 갱신한 업적들이 눈앞을 가렸다.

하나 하나 읽어 내려가며, 리오는 하나의 이름을 찾아내려 애를 썼다.

‘오늘도… 해냈군.’

놀랍다기보다 리오 안의 의욕이 좀 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누군가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면, 한 발자국 위로 올라가고, 따라올 수 없도록 벽을 설치해두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기록을 남길 각오를 되새기며 리오가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리오!”

고운 미성의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리오는 뒤를 돌아섰다.

한 때 한국인이 아닐까, 그런 착각을 했었던 쿠란과 그 뒤를 따르는 몇 무리들이 있었다.

“오랜만! 탑을 올라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너무 한 거 아니야? 그런 무지막지한 조건을 걸어 놓고 또 위로 올라가다니!”

리오는 그녀와 함께하는 무리들을 보고 동료라 추측했다.

‘… 마법을 사용하지 말랬더니, 동료를 이용한 건가?’

그렇다면 쿠란이 리오의 기록을 깰 수 있었던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는 것이 분명 빠르고 쉬울 테니까.

“그러는 넌. 혼자 하는 줄 알았더니 다른 주민들을 이용해서 내 업적을 깨낸 모양이군. 애초에 혼자라는 조건을 걸지 않은 내 실수지만.”

“에? 하지만, 네 업적들. 혼자 해낼 수 없는 기록들이잖아.”

탑의 세계로 온지 얼마 되지 않는 쿠란과 그의 동료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리오가 처음 이곳에 와서 고립되어 있었는지…….

하지만 지금은 리오에게 ‘고립’이라는 단어는 떠올릴 수 없었다.

쿠란이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증명해주기 위해, 리오는 주변에 있던 낯익은 일부 모험가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넌 내가 누군가와 같이 탑에 들어가는 걸 본적이 있나?”

리오의 말에 주변 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건 본적이 없어. 거기 아가씨. 그 양반은 매일 밤 서큐버스들이 집 앞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해대도 문 한번열지 않는 인간이라고.”

음담패설에 리오의 눈이 찌푸려졌지만, 쿠란은 놀라며 입을 가렸다.

“혼자 한 건 줄 알았는데…….”

“이제 와서 조건들을 수정할 생각은 없어. 날 동료로 넣고 싶으면 그때 그대로의 조건대로 해라. 나와 동등한 층까지 올라오고, 10층까지의 업적들을 모두 갱신하며 올라올 것. 넌 마법을 사용하지 않을 것.”

당연하지만 쿠란이 올라오는 만큼, 리오도 위로 향할 것이다.

“그냥 잠깐 놀랐을 뿐이야. 조건이 그대로라면. 자신이 있어.”

“그래. 그럼 잘해봐라.”

쿠란에게서 몸을 돌렸다. 자택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예전처럼. 탑에 모든 것을 쏟는다면 리오가 현재 가야할 곳은 집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다.

“픽시. 아지트로 간다. 한동안은 예전처럼 거기서 먹고 자고 할 테니까…. 짐 옮기는 걸 부탁할 게.”

***

리오는 10층에 도전하게 된 쿠란일행이 한 동안은 발이 묶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 또한 그러했고, 10층은 어렵기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뒤를 노리는 오라클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예상은 처참히 깨지고 말았다.

하다 못해 수일 이상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10층을, 쿠란일행은 단 이틀 만에 통과해버렸다.

‘내가 반이나 걸렸는데…… 오라클 놈들은 뭘 했던 거지?’

으드득, 이가 갈리며 무능한 오라클들을 비웃었다.

‘됬 어. 내가 예정대로 하루에 일 층씩 올라가기만 하면 된다. 지금까지 딱히 어려움을 느낀 건 없어.’

문제는 10층처럼과 같은 20층이었다.

20층도 여태까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난이도를 자랑한다면, 리오는 또 다시 애를 먹을 것이었다.

무음 캐스팅과 알터라 불렸던 최악의 마법사가 사용한 사령술은 이미 탑 전체에 알려진 상태였다.

저번처럼 오라클들이 순순히 당해줄 리가 없었다. 변수로써 작용하지 않는다.

‘20층을 통과하는 것보다. 역시 제일 큰 문제는 그 놈들인데……. 분명 또 만나겠지.’

모종의 이유로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있는 듯 했으니, 다시 한 번 만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17층을 도전하고 있는 리오의 앞에 낯익은 인물이 나타났다.

“오랜만입니다? 리오님. 다시 올라오실 줄 알았다고요. 정말이지. 그대로 밑바닥 인생을 영위하시는 줄만 알았습니다.”

얼굴에 검은 안개가 끼어 있거나, 흐릿하게 보이는 등,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자신의 형체를 숨기는 이들.

마침 오라클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리오는 눈앞에 나타난 자가 템플러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번에… 나랑 한 번 붙었던 놈인가?’

주변을 살폈다. 혼자 온 모양인지 다른 템플러는 보이지 않았다.

“저를 방해할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리오님 혼자 계신데 굳이 다른 이들을 불러올 필요는 없지요. 리오님을 모시는 건 저 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리오님의 얼굴이나 볼겸, 인사드리러 온 것 뿐이니까요.”

“그런 말투는 그만 둬, 너희들이 살인귀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괜찮았을 테지만, 알고 있는 이상. 너희들한테 그런 말을 드는 건 정말 소름 끼쳐.”

그렇지 않아도 강탈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는 리오로써는… 템플러들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불안감에 휩 쌓였다.

이러다, 정말 자신도 템플러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리오는 인간으로써 해선 안 되는 일을 이미 한 번 저질렀다.

21세기의 인간으로써, 도적윤리에 기초하여 수십 년간 지켜왔던 규칙이 깨져나간 상태다.

한 번 저질렀기 때문에 두 번, 세 번, 여러 번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그건 안 되지요. 조만간 저희를 이끌어주실 분인데…. 아무리 저희가 미쳐있어도 위아래는 있는 법입니다.”

그 말에 리오는 템플러들이 왜 자신을 같은 동류로 끌어들이려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 탑을 오르는 수많은 모험가들처럼, 템플러들도 한 때는 탑을 오르는 모험가였다.

지금은 그저 이 세계에 적응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악행을 저지르고 있지만…. ‘미친놈들이더라도 귀환하고 싶다는 건가?’

탑의 세계에 두 가지 부류의 주민이 있다.

귀환을 위해 오르는 모험가, 부족한 것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냥 이곳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주민.

오랜 시간 이 탑의 세계를 살아가면서 리오는 후자를 선택한 사람들도 귀환에 대한 욕심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리오가 가족들을 그리워하듯, 그들도 무언가를 그리워한다.

“너희도 나와 함께 위로 가고 싶은 거냐? 너희 같은 놈들은 차라리 이곳이 낫지 않나? 어째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살기 좋은 탑의 세상.

리오도 자신의 모든 지인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 모두와 함께 살고 싶은 상상을 몇 번이고 했다.

이곳에서, 가족들과 함께 산다면 정말 천국 같을 것이었다.

탑을 오를 이유가 리오에게 사라지니 싸울 이유가 리오에게는 없어지고, 평범한 일생을 보내면 된다.

물가가 안정되어 있으며 범죄의 위협도 없고, 마을에서는 죽지도 않으니 제 수명대로 살수 있다.

타인의 마음을 리오가 파악할 수 없듯, 템플러들의 생각이 어떨지 알 순 없었지만, 적어도 누군가를 죽이고 쾌감에 젖는 템플러들에게는 고향보다 이곳이 살기 좋을 것이었다.

물가가 안정되었다는 이유보다는, 범죄의 현장에서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다는 안전장치가 있고, 마을에서는 그 누구도 자신이 템플러인지 알아볼 수가 없으니까.

그러나 리오의 말에 템플러는 어깨를 들썩였다. 웃는 것 같아 보였다.

“리오님은 큰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이곳이 저희들이 원래 있던 곳보다 좋다고요? 전혀. 전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들끓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끓는 소리만으로도 리오는 한순간. 심장이 덜컥할 정도의 겁에 질렸다.

몇 번 경험했던 살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경험했던 살기들은 오로지 리오를 향해 내뿜는 것이었다면, 눈앞의 템플러가 내뿜는 건 이 탑의 세계 전체를 향해 내뿜는 것이었다.

“저희는 탑을 오르는 모험가들을 상대할 땐 전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리오님들은 어떻죠?”

“전력으로 도망치지. 힘을 보존해서 전력으로 다음 층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고.”

“그렇습니다. 저희를 바라봐주지 않는 이 세계는 재미가 없습니다. 시시하다는 말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 템플러들을 정벌할 생각조차 하지 않아! 도망칠 생각만! 보통의 세계였다면 쫓고 쫓기는 추격이! 서로에게 어떻게 해야 치명타를 안길 수 있을지 생각을 할 텐데!”

리오는 얼굴조차 모르며 이름도 알 수 없는 템플러의 살기어린 말에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렇다.

자신도 그렇고, 템플러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같이 ‘외면’ 뿐이었다.

템플러는 가급적 피한다. 위험하니까, 더러우니까, 가까이하면 좋을 것이 없다.

리오는 탑이 모험가들에게 보내는 ‘재해’와 처럼 어느새 여기고 있었다.

탑은 탑을 보다 어렵게 하기 위해, 템플러 라는 축복을 만들어 내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리오와 탑의 주민들은 어느 순간부터 ‘템플러’들을 탑의 내부에서 생성되는 몬스터들과 똑같이 여기고 있었다.

그 이유는 탑의 축복, 탑의 규칙은 이곳의 주민에게는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탑의 축복 : 템플러는 살해하려는 대상의 위치로 이동할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피해자는 가해자의 정보를 일체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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