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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네. 리오군.”
모만이 언제나처럼 미안한 얼굴로 리오에게 다가왔다.
“아닙니다. 아직 모만씨에게 갚아야할 빚이 많은 걸요. 덕분에 몸도 빠르게 회복할 수 있었고, 여기 탑에서 금방 적응 할 수 있었고… 모만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땟을지 상상도 할수 없네요.”
“그렇게 말해주니 조금이나마 내 마음이 편하구만. 허허.”
일처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고, 탑의 세계로 오는 새로운 주민들 또한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리오와 모만은 평소보다 일찍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아까 보아하니 이름을 잘 지어주더군, 자네에게 이름을 받은 새주민들은 모두 만족스러운 얼굴이었어.”
“그런 것 같더라고요. 불만족스러워서 자리를 지키는 분이 없어서 다행이었어요. 앞으로도 이랬으면 좋겠네요.”
“나도 한동안은 이런 식으로 순탄하게만 흘러갔으면 좋겠네만… 난 자네가 걱정되네.”
뜻밖의 말에 리오는 고개를 갸웃했다.
“걱정이라니? 아이 참. 인간에게 너무 선입견이 있으신 것 아닙니까? 고작 이런 일을 했다고 제 몸은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웃음을 터트리며 리오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고작 이런 일을 했다고 몸이 어떻게 되다니, 공사장의 노가다가 더욱 힘들었다.
“아니네. 나는… 그저. 자네가 나 때문에 탑을 오르지 않는 게 아닐까 싶어서…….”
“아…….”
모만의 말에 리오의 얼굴이 굳었다.
지구를 다녀오고 서너 달이 지난 지금. 그 전까지 매일 한 층씩 올랐던 것과 다르게 리오의 진행사항은 무척 느렸다.
서너달 동안 고작 오른 층은 다섯 층.
거기다 모만을 본격적으로 돕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탑을 오른 적이 없었다.
‘벌써 탑을 마지막으로 오른지 한 달이나 되었군.’
귀환을 접어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탑을 오를 맘이 전혀 생기지 않고 있었다.
분명 집에 다녀오면, 그리움 때문에 좀 더 열심히 탑을 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워낙 지구에서 예상치 못한 사실들을 알았기 때문인지 그리움이나 의욕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자신이 없이도 가족들이 이전보다 잘 살고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전과 달리 자신 또한 가족들이 더 이상 그립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스스로를 위해서 행동해도 되는 걸까.
그리움에 사무칠 여유가 리오에게는 있지 않았다. 이곳에서 사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마법이 포기한 리오.
정교한 기계에서 나사가 하나 빠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 대체품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이 꽉 찼다.
“지금은 제가 탑을 오르지 않고 있지만……, 마냥 모만씨를 도우며 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름대로 어떻게하면 좀 더 탑을 쉽게 오를 수 있을지… 그런 걸 생각하고 있달까요?”
사실을 말했다. 모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의 괜한 걱정이었군. 내가 보기엔 자네가 나를 핑계삼아 탑을 멀리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거든.”
“그런 건…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나를 도와줄 셈인가? 위에서 자네를 기다리는 탑의 모험가들이 제법 있는 것 같던데.”
자신을 기다리는 주민들이 있다는 말에 리오의 얼굴이 변했다.
누군가를 기다린다면, 기다리는 당사자에게 직접 말하면 될 터였다.
그러나 그런 말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던 리오였다. 더군다나 위에서 기다린다니.
“위에서 기다린다는 말은… 저 보다 윗 층에 있는 주민들이, 저를 기다린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네.”
“저와 함께 파티라도 맺고 싶은 모양이군요. 함께 위로 올라가고 싶다. 이겁니까…….”
지금 마을에는 리오에 대한 기대가 한 꺼풀 꺾인 상태였다.
10층 이후의 더딘 진행. 10층까지는 업적을 갈아치우며 진행해왔지만, 그 이후로는 이전 같은 기행은 없었다.
그리고 한 달이나 탑을 가지 않은 상태.
리오에 대한 이야기를 슬슬 묻히고 다른 탑의 모험가에 대한 이야기, 혹은 마을의 사건사고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미 리오는 분위기상 탑을 포기한 것으로 보였다.
“남들이 보기엔… 저는 탑을 포기한 것으로 보이는 게 아닙니까?”
“자네는 포기할 생각인가? 왜 그런 말을 하지?”
모만의 말에 리오는 발끈했다. 탑을 멀리하고, 의욕이 없던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귀환을 하고 싶다는 의지는 남아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하나? 아까도 말했지만…, 나의 눈에는 자네가 탑을 포기한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아. 방금 한 말도 그런 마음이 있지 않은 이상 나올 리가 없고.”
리오는 거짓말을 둘러대려다 그만두기로 했다.
“포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고생해서 목표 하나를 달성 하고 나니깐 지쳤고, 그게 앞으로 아홉 번이나 남았으며, 심지어 믿고 있던 기둥이 썩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깨달으니까…….”
말문이 막혔다. 그냥 힘들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었다.
모만은 마을의 입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곳을 지나간 자네의 선조들 대부분이 모두 이 세계를 정복했네, 어떤 자는 검을 기묘하게 다루며 독특한 무술을 사용했고, 어떤 자는 최악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극악무도한 흑마법을 펼쳤네,”
모만의 말은 이어졌다.
“저번에 모든 것을 말하지 않았네, 실은 오라클을 만든 그 잔혹한 인간은 그런 집단을 만들면서도 뒤에서는 모험가들을 물심양면 지원했네, 사실상 그때의 오라클은 의미가 있는 필요악이었지. 불나방처럼 탑에 뛰어드는 주민들을 막아서게 했다고 해야 하나……. 망가진 것은 그 뒤의 일이고.”
호흡을 가다듬더니 기억을 되새기는 듯, 수초 뒤 모만은 입을 열었다.
“또 어떤 인간은 드워프 보다 뛰어난 손재주로 기묘한 물건들을 만들었네, 누군가는 무법지대에 가까웠던 이 마을을 정리해내었네.”
수많은 선조들의 업적들을 모만에게 들으며 리오는 입을 벌렸다.
자신이라면 절대 할 수 없을 일들, 마치 먼 나라의 위인들의 이야기처럼 들려왔다.
“이곳에 온 인간들은 모두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런 대단한 일들을 해내더군. 물론 하지 못한 자들도 있지만….”
모만은 고개를 돌려 리오를 바라보았다. 힘들어 지쳐있는 리오를 위아래로 훑었다.
무심코 눈동자를 모만과 부딪힌 리오는 안드레이가 해주었던 모만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탑의 눈동자 모만.
모만의 동공에는 탑의 주민들이 한 번씩 비춰진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기 때문에 붙여진 이명이었다.
리오는 스승인 안드레이에게 모만의 이명에 대해서 전해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만이라면 그 이름에 적합하다. 그 누구도 토를 달수 없는, 탐을 낼 수도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 눈을 가진 이가, 자신을 위 아래로 훑어본다?
‘탐색… 같은 게 아니야.’
무심코 눈동자가 부딪혔지만, 모만의 그 전의 행동과 상황을 볼 때, ‘비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천 년을 살아가는 드래곤이, 자신의 수발을 들기 위해 드라칸이라는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내었다.
그 드라칸이 친구라고 부를 정도로 오랜 시간 이 탑의 세계에서 마을 입구를 지켜온 호빗이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인간 중에는 자네가 제일 포기가 빠르군.”
***
이튿 날.
픽시 덕분에 늦은 아침을 맞이하는 걸 피할 수 있었던 리오는 이른 새벽부터 집밖으로 나왔다.
탑을 올라가지 않아도, 의욕이 없어도 몸에 익은 생활은 항상 하게 되었다.
아직 새벽의 해 조차 뜨지 않은 시간에 리오는 거친 조깅을 시작했다.
힘들기 때문에 운동을 하고 있을 땐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기계가 되어 한참을 달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달리다보면 어느새 해가 뜨고, 그 빛에 인상을 찡그리며 리오는 집으로 돌아가 모만에게로 향한다.
‘오늘도… 가야겠지.’
어제 밤. 그런 말을 들었다고 안 간다면 속 좁은 놈이 되고만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리오는 모만에게 가기로 했다.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야. 앞으로 착실하게 준비를 하겠다고…….’
구체적인 방법이나 그런 건 없었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의 기분상의 문제였다. 슬럼프에 가깝다.
당장 도전해야할 15층이 어려워서 리오가 탑에 도전하는 걸 망설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의욕상실만 해결한다면 또 다시 승승장구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계획을 짜내며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리오의 옆에 누군가 마주 서서 달리고 있었다.
“당신이 리오야? 누군가 했는데 그때 그 인간이잖아?”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
한 때 리오와 같은 지구인인가 싶었지만 머리에 솟아난 멋스런 두 개의 뿔은 이종족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족…?’
마족은 흔히 알려진 사악한 악마나 다름이 없다고 리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딱히 마족과 친하게 지낸 적은 없었다.
‘애초에 나에게 먼저 다가온 마족도 없었지만.’
마족들은 대부분 밤에 생활하기에, 낮에 생활하는 리오와는 접점이 없었다. 사실상 친해질 기회도 없었다.
그러함에도 이렇게 마치 리오를 만난 적이 있는 투로 다가오는 마족은 누구란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 색기발랄한 마족이라니,
“누, 누구십니까?”
“나 기억 안나? 모두의 앞에서 내 이름을 떵떵 부르며 부끄럽게 했으면서.”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부끄럽게 하는 리오는 이 세계에 없다.
“… 으음.”
상대를 아무리 보아도 첫 만남에 대해 기억이 나질 않는 리오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마족과는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남자로써 생길 수밖에 없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으니 처음부터 어긋난 시작이었다.
“죄송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요?”
“애초에 내 이름을 네가 지어주었는데……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네. 인간들은 모두 다 기억력이 나쁜 가?”
인간 전체를 모독하는 말에 리오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제 마족과 친해지고 싶다느니, 존대를 하던 건 그만두기로 했다.
“됬 어…. 내가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걸 보면. 얼마 전에 이 마을에 들어온 녀석인가 본데. 그래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싸늘한 리오의 태도에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마족은 살갑게 말했다.
“응. 당신이랑 그 옆에 있던 호빗이 소개시켜준 일은 재미있었지만, 마족인 나한테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뭐, 애초에 이곳에서는 체면 같은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모양이지만……."
“다른 일을 하고 싶다. 이 말인가?”
“응. 난 탑을 오르고 싶어. 동료를 모아서 무시무시한 놈들이 있다는 윗 층으로 한 번 가고 싶어. 너와 함께.”
“너의 특기를 살려서 다른 일을 소개 시켜주는 것은 어렵지 않…….”
마족에게 들었던 말을 리오는 다시 한 번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