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의 탑-52화 (52/190)

<-- 52 회: 2-18 -->

***

탑의 축복, 마법.

그것들이 없어도 태준의 프로 군인들을 쓰러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이 겪은 실전은 실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니었고, 태준이 겪은 실전은 실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었다.

인간을 죽인 적은 단 한 번뿐이지만, 어떻게 하면 인간이 지쳐 쓰러지고, 어떻게 하면 인간이 죽기 일보 직전이 되는지는 자신이 직접 경험해봐서 알고 있다.

그들은 해본 적이 없다. 대한민국에서 살인을 목표로 행동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또. 그들이 아무리 수십년간 몸을 갈고 닦어 왔어도, 죽음의 갈림길에서 신체를 단련해오고 언제나 몸을 희생하며 탑을 올라온 태준과는 반사신경, 근육량, 심폐량 등, 피지컬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본질적인 실전의 차이, 아무리 갈고 닦아도 절대로 메워지지 않는 피지컬의 차이.

그 외에도 지구에서는 절대로 메꿀 수 없는 것들이 태준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성인남성. 그것도 군인이나 특수요원쯤으로 추측되는 사내들 다수를 상대로, 태준은 이겨낸 것이다.

댕그랑.

일자로 쭉 뻗어있던 철근은 어느새 싸우던 도중 기역자로 휘어져있었다. 그 철근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마지막까지 서 있던 사내가 쓰러졌고, 태준 또한 무릎을 꿇었다.

‘맙소사…….’

이름조차 모르는 여자를 위해서, 또 다른 자신을 위해서, 가족들 위해서 싸웠다.

기쁨보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말하는 18대 1의 전설 같은 걸 이루었다는 만족감은 들지 않았다.

그것은 듣기 좋은 이야기일 뿐이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본인에게는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걸  지금 깨달았다.

해선 안 되는 걸 해버렸다는 기분. 마치 범죄를 저질렀다는 기분. 어린 나이에 여자 친구와 실수를 저질러버렸다는 기분.

‘이대로는…… 탑의 세계 말고는 오갈 곳이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지구의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걸 태준은 해내고야 말았다. 탑의 세계라면 고개를 끄덕일 일이지만, 지구에서는 배척받을 일이었다.

‘정말 난…… 이종족이구나?’

10층을 통과하며 누군가에게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종족들에게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는데, 인간이 보기에는 어떨지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쿨럭… 큭. 넌… 정체…가 뭐…냐? 신…태준.”

자신이 쓰러뜨린 사내의 말에 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난 앤서러 리오. 신태준이라는 사람이 아니라고.”

사내에게서 몸을 돌린 태준은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게 한 여자에게 향했다.

‘괜찮은 건가?’

미리 싸우기 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이 근처의 맨 바닥에 눕혀놓은 상태였다.

다가가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마와 핸들이 강하게 부딪혔나? 가벼운 뇌진탕이겠지?’

머리에서 흐르는 피의 량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남자들이 납치를 하면서도 재빠르게 응급처치를 했는지 흉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이 여자를 어디다 둔담.”

모텔 같은 곳에 여자를 혼자 두다니 걱정이 들었고, 애초에 그곳에 자신과 이 여자가 들어가는 건 CCTV에 기록이 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중에 이 여자가 어쩌다 자신이 모텔에 있는지 알아보려 할 때, 자신을 보고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왜 자신의 남자가 자신을 모텔에 홀로 버려두고 갔는지, 그리고 CCTV의 낯설기만한 모습은 무엇인지.

‘모텔은 안되겠군. 그럼 어디다 두지?’

가장 좋은 방법은 여자 본인이 깨어나서 스스로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이었지만…. 사고로 인한 쇼크 때문인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마법이라도 사용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지구라서 사용할 수 없게 정말 슬프군.’

일단 자리라도 옮기기 위해 태준은 그녀를 들춰 엎으려 했다.

그러나 반가시의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픽시가 행동을 만류했다.

“잠시만요 태준님. 이 여자…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아요.”

“뭐? 그럴 리가…. 가벼운 뇌진탕 아니야?”

“머리의 충격도 그렇고… 온몸에 장기들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어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지만… 이대로 거칠게 옮겼다간 오랜 시간동안 시름시름 앓면서 일생을 보내겠죠. 보통 인간의 몸은 깨지기 쉬운 유리니까 이런 사고에는 어쩔 수 없는 일에요.”

그 말에 태준은 반박했다. 깨지기 쉬운 게 인간의 몸이라니….

“난 그렇지 않았잖아? 그럴 리가 없어. 자세히 살펴봐. 뭔가 잘못 본거 아니야? 여기는 탑의 세계랑 다르다고.”

“태준님이야 말로 잘 생각하세요. 태준님은 탑의 세계에서 오랜 시간동안 고된 생활을 했어요. 그 말은 깨지기 쉬운 유리에서 강화 유리가 된 것에 불과하단 말이에요. 모르시겠어요?”

그 말이 마치 인간이 아니라는 것처럼 들려왔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이야?”

눈이 붉게 출혈되며 흥분되었다. 태준의 길잡이인 픽시의 다음 한 마디가 중요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 에요?”

당황하는 픽시의 말이 들린 다음. 쓰러져 있던 여자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으… 태준씨…….”

생각이 딴 길로 빠졌던 태준은 제정신을 차렸다. 오늘 보았던 가족의 웃음은 이 여자에게 걸려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태준이 탑의 세계로 가게 된 원인. 가난.

그것을 해결 해준 여성.

그뿐 만이 아니라 태준의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자신과 얼마나 깊은 애정을 나누고 있는지는 방금 전의 신음소리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를 살려야한다. 살린다면… 내가 내 가족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어. 아까 같은 놈들이 또 습격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보았던 화목한 분위기는 유지될 수 있겠지.’

가족이 가족을 원망하지 않는 가정.

태준이 원하는 그림이었다.

형은 동생을 원망하고, 동생은 부모를 원망하고, 부모는 자식들을 원망 한다.

하지만 그렇게 싫어해도 떼어낼 수 없다. 없어지면 허전할 관계이니까.

자신이 알던 최악의 가정. 그 2년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 어쩌실 생각이세요?”

태준은 자신의 앞에서 실실 웃으며 모습을 반쯤 드러낸 픽시를 바라보았다.

저 웃음은… 틀림없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다는 걸 말하는 듯 싶었다.

“웃지 마. 실수투성이 가이드 같으니, 이럴 때만 점수를 얻어서 만회하려 하다니.”

“헤헤. 이미 들켜버렸나? 하긴, 눈치가 빠른 분이시니.”

픽시가 꺼낼 카드를 태준은 미리 예상해보기로 했다.

그쯤 해야 놀라서 웃음거리가 안되거니와, 미리 교섭거리를 생각해볼 여유가 생긴다.

‘픽시에게 있어서 이 상황을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은 마법뿐, 하지만 마법은 사용 할 수 없다고…….’

그 생각을 한 즉시 태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픽시가 말한 주의사항. 그것은 태준의 주의사항일 뿐이었다.

픽시에게 해당되는 주의사항이 아니었고… 즉. 그녀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건 리오일 뿐, 픽시가 아니다.

“마법이냐? 마법으로 이 여자를 치료할 생각이야?”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본 듯한 태준의 말에 픽시는 호들갑을 떨었다.

“마, 마법을 쓸거 긴 하지만! 어, 어떻게 알아채신 거 에요?”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서. 네가 마법을 사용해서. 이 여자의 상처를 재생시키려고?”

“예.”

“그건 아무런 불이익이 없는 일인가? 너에게 나, 나에게.”

지구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탑의 세계와 똑같이 마법을 사용한다. 그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건 마치, 지구에는 본래 마법이 존재했었다는 것처럼 들려왔다.

‘그럴 리가 없어.’

다행이도 태준의 생각이 맞았다. 픽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이 지구에는 마법이라는 건 공상의 산물일 뿐이에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요. 아무리 대단한 탑의 세계의 마법사가 이곳에 온다고 한들…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요.”

“그럼 너는 뭐야? 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며?”

태준의 말에 픽시는 손을 내밀었다.

“저 또한 이 지구에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생물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태준님과 함께 이곳으로 이동했지만… 반쯤은 튕겨난 것이나 다름이 없달까요? 저는 탑의 세계와 지구. 두 공간에 걸쳐진 상태나 다름없어요. 그래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죠.”

픽시라는 요정족은 그 어떤 공간이든 뛰어넘는 재주를 가졌다.

그 때문에 이런 상태가 되어서도 일상생활을 보낼 수 있고 평범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저런 차원을 넘나드는 픽시에게 있어서는 두 차원에 걸쳐진 상태는 아무렇지 않다.

하지만 태준도 마도를 공부한 마법사였다. 차원론 같은 말도 안되며 머리 아픈 건 이해하지도, 공부하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말하는 말투로 앞으로 할 말을 예측할 수 있었다.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 지구. 마법이 존재하는 탑.

두 차원에 걸쳐진 픽시.

그 상태에서 마법을 사용한다면… 픽시의 존재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이 픽시를 빨아드릴 것이었다.

그렇게 된 다면… 둘이서 하나나 다름없는 태준 또한 탑의 세계로 귀환하고 말 것이었다.

“네가 마법을 사용하면 탑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말이지…….”

“금방 이해하셨네요. 그런 맥 략이에요.”

태준은 탑의 세계에서 가져온 회중시계를 꺼내었다.

지구로 온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시간.

가족들을 찾아 헤매고, 지인을 만나고, 결국 가족들을 만났다.

가족들은 자신을 알아보진 못했지만, 목소리와 얼굴을 보았다.

그 이상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많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오늘 보았던 것들을 가지고 탑의 세계로 돌아가고… 또 다시 열심히… 위로 올라가면 된다는 생각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