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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변화
낮선 누군가의 말에 태준은 몸을 돌렸다.
한참 가족들을 맞이할 기쁜 마음에 너무 서둘렀던 걸까. 타인이 보기에는 자신의 행동이 의심스러워 보였던 것이라 생각했다.
“아…. 전 이 집에 볼일이 있어서…….”
낮선 사내는 근처에 사는 취업준비생 인 듯. 토익과 관련된 서적을 옆구리에 낀 채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이 집말입니까? 무슨 볼일이신지요? 여기는 제가 하숙하고 있는 집입니다.”
그의 말에 태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가족들이 여기서 살지 않는다고?’
“저, 정말이십니까?”
“예. 반년 전부터 이곳에서 제가 살고 있습니다만……. 저에게 볼일이 있으신 게 아닌 모양이군요.”
“아… 네. 그럼 그 전에 살던 분들은… 아니, 하숙을 하신다고 하셨죠.”
오랜 시간 이 집에서 신세를 지낸 태준은 집주인과 안면이 있었다.
월세가 밀리는 것을 항상 봐주면서 어린 태준의 급식비까지 대신 내줄 정도로 친한 사이였다.
‘아주머니라면… 가족들이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알고 계실거야.’
대학생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태준은 집주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태준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
골목길에 작은 슈퍼를 운영하는 집주인을 찾으러가니, 다행히도 2년 전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모!”
가족보다 먼저 만난 지인.
피가 이어진 이모는 아니었지만, 이모라고 부를 정도로 태준과 집주인은 사이가 깊었다.
반가움이 넘쳐흘러 태준은 순식간에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이게 누구야? 태준이잖아?”
호들값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 집주인은 태준의 얼굴을 손으로 쓰다듬으며 2년 동안 변한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못 본지 반년 밖에 안 되었잖아? 근데 신수가 훤해졌네?”
“이런 저런 일이 있었죠.”
탑에서 지낸 1년. 지구에서는 2년이 흘렀다.
1년 동안 뼈를 깎는 고생을 통해 탑을 올라온 태준은 그동안 모두가 알던 태준의 모습이 아니었다.
신체는 좀 더 우람해질 수밖에 없었고, 얼굴에는 노련미가 흘렀다.
‘… 근데. 반년?’
가족들의 행방불명에 이어 또 다시 알 수 없는 집주인의 말.
태준이 탑의 세계로 간지 2년이다. 그 사이에 지구의 신태준은 사라졌다.
대신 탑의 세계에 리오라는 인간이 나타났다.
그러할 지언데, 마치 집주인의 말은 태준이 탑의 세계에 있는 기간에도 지구에는 태준이 있었다. 라고 들리는 듯 했다.
소름 끼치는 것과 동시에 태준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하. 버. 벌써. 반년이나 되었나요?”
“그렇제.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 겨? 군대를 한 번 또 갔다 온 겨?”
“그, 그냥 좀 험한 일을 하고 지냈어요.”
“에? 좋은 색시 만나서 일 할 필요도 없는 거 아니었는 겨? 그렇게 가족들 홀라당 데리고 이사를 가버릴 정도인데……. 하긴. 요즘 시대에 일 안하는 남자는 좀 그렇제?”
‘좋은 색시?’
집주인이 말해주는 이야기를 머릿속에 적어 넣는 태준.
그러나 가면 갈수록 얼굴은 창백해져갔다. 틀림없이. 이 지구에는 자신 말고 다른 신태준이 존재하고 있다.
“그, 그렇죠. 남자가 집에만 있어서 되겠습니까? 일도 하고 그래야죠…….”
대화를 하던 도중. 슈퍼에 손님이 찾아왔다.
담배를 사러 태준과 집주인의 대화에 끼어드는 사이. 태준은 생각을 정리했다.
‘… 다른 놈이 있다고?’
이가 갈리는 일이었지만. 망연자실할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탑에게 있다고 생각되었다. 탑의 세계의 일이 해결 된다면…. 태준이 영구귀환권을 얻어낸다면, 모든 것이 해결 될 것이라고.
‘그 빌어먹을 놈을 당장이라도 쫓아내고 싶지만… 듣자하니 나 대신 가족들을 잘 데리고 살고 있는 모양이고…. 지금 이대로 두는 편이 좋겠지.’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함께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태준은 욕심을 참기로 했다.
그저. 가족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기로 했다.
‘어차피…. 하루 밖에 못 있어….’
짜증이 나고 화가 났다. 본래라면 지금쯤 가족들을 모두 불러 즐겁게 식사를 하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를 할 것이었다.
물론 탑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하고, 마지막에는 가져왔던 금괴와 보석들을 건넬 것이다.
나는 그동안, 행방불명 되었던 일년 동안. 이렇게 돈을 벌어왔다고.
그리고 또 다시 벌기위해, 나는 내일 또 떠나야 한다고.
하지만 이제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태준아?”
자신이 이모라 부르는 이의 목소리에 태준은 화를 눌러 앉혔다.
“… 예.”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거제?”
“… 예.”
자신에게 지구에서 허락된 시간은 하루뿐이기에 태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나가는 길이었던 지라… 이만 가볼게요. 볼일이 있어서…….”
“그래. 나도 일이 있응께.”
밖으로 나온 태준은 가족들이 이사 간 곳을 모른 다는 걸 깨달았다.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들과도 친하게 지낸 집주인이라면 현재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지만. 자신이 가족들의 집주소를 묻는 것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어떻게 알아낼 방법이 없을까 하던 차에, 슈퍼의 근처에 있던 동사무소를 떠올렸다.
‘… 등번을 출력하면 현재 살고 있는 주소를 알 수 있을 거야.’
탑의 세계로 가서도 고이 간직해 두었던 지갑 속에는 몇 푼의 지폐와 멀쩡한 주민등록증이 있었다.
어렵지 않게 등본을 얻어낸 태준은 자신의 가족들이 현재 살고 있는 주소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삼성동?’
그다지 가본적은 없었기 때문에 상상은 되지 않았지만, 소문 정도는 들어서 태준도 알고 있었다.
그 근처에서 산다는 건. 중산층 이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어지간히도 돈 많은 여자를 잡았나 본데…….”
자신도 못하는 일을 자신의 가짜가 해냈다는 사실이 태준은 질투가 났다.
‘얼마나 대단한 여자를 사로잡고… 그 뿐만이 아니라 가족들을 모시게 살고 하다니, 대단한 놈이군. 정말…….’
여기서 삼성동까지 가려면 꽤나 멀었다.
아까운 하루라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기 위해. 태준은 재빠르게 등본에 적힌 주소로 향했다.
***
‘곤란하군.’
주소를 본 순간 눈치 챘지만,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은 오피스텔인 모양이었다.
당연히 비밀번호를 모르는 태준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입구에서 서성거리자니 경비원에게 눈치가 보였다.
‘부모님의 얼굴이라도 보겠다는데……! 되는 일이 없네!’
한숨을 내쉰 후, 오피스텔의 바로 앞이 보이는 커피숍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가족들 모두가 자가용을 구입했다면 의미 없는 일이었겠지만, 이렇게 오피스텔이 보이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보면… 분명 가족 중 누구 한 명쯤은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커피숍에서 죽치다 못해 엉덩이가 아파올 때 쯤, 익숙한 무리가 태준의 시야에 잡혔다.
덜컥!
자리에서 일어난 태준이 창문을 향해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머니! 아버지! 형!’
이 늦은 시간까지 밖에서 무얼 하다 온 걸까. 외식을 했으리라 생각한 태준은 자신의 가족들이 여전히 화목하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웃음을 지었다.
‘다들 변하지 않았구나.’
변한 것은 자신뿐이었다. 지금 저들 사이로 자신이 나타난다면, 틀림없이 저 화목함은 깨질 것이다.
고요한 호수에 돌멩이가 떨어진 듯한 파문이 일어날 것이다. 그들이 알고 있는 태준과 자신은 다르니까.
‘그놈은……?’
집주인에게서 들었던 또 다른 자신을 찾기 위해서 태준은 눈동자를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자신의 가족들 주변에는 자신과 똑같은 인물은 없었다.
‘아쉽군… 없나…….’
대신이라고는 뭣하지만, 가짜가 가족들에게 소개했다는 여자의 얼굴은 볼 수 있었다.
‘내 취향이긴 한데……. 정말이지, 어떻게 저런 여자를 꼬신 거지?’
지적인 외모에 기품이 넘치는 걸음걸이. 예전 태준이었다면 보자마자 기가 팍 죽어버려 말 조차 걸지 못할 여성이었다.
‘그야말로 커리어우먼이라는 느낌인데….’
남자이다 보니 여자에게 시선이 고정되고 말았다. 지구로 온 목적을 상기시킨 태준은 다시 가족들을 바라보았다.
근처로 가지도 못하니, 조금이나마 이렇게 멀리서 눈에 담아둘 수밖에 없다. 저런 본적도 없는 여자에게 시간을 빼앗길 순 없었다.
목소리라도 듣기 위해 태준은 커피숍의 밖으로 향했다.
무언가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족들. 그들 사이에 자신이 없다는 것이 너무나 원통스러웠다.
‘정말 되는 일이 없다.’
당장이라도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참으며, 태준은 가족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들어가 있으세요. 어머니. 전 태준이를 데리러 갔다올게요.”
“그러려무나.”
“제수씨. 원래 그 녀석이 데리러 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한 소리 할까요?”
“괜찮아요. 저희 아버지께 이런 저런 일 배우느라 바쁜 거니까… 어쩔 수 없죠. 그럼. 이만 가볼 게요.”
가족들은 오피스텔의 안으로 들어갔다.
태준은 그들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가짜가 현재 집안에 없고 외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그 녀석을 한 번 내 눈으로 보는 편이 좋겠어.’
일이 어떻게 꼬였는지, 그 녀석이 정말 자신의 가짜인지 확인을 해보고 싶었다.
웃음이 흘러나올 뿐인 이야기지만, 자신이 가짜일 가능성도 배재할 순 없었다.
애초에 신태준은 탑의 세계로 간 적은 없었다. 라던가.
“… 빌어먹을. 픽시. 이게 어떻게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