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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
탑의 세계의 개벽은 그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찾아왔다.
서서히 기온이 내려가는 듯 싶더니, 어느 순간 온 세상이 새하얀 눈으로 수북이 쌓였다.
전야제의 일로 인해 집에 오자마자 실신한 리오는 그 다음 날의 중천이 되어서야 일어났다.
싸늘한 한기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얇은 이불을 더욱 끌어당겼지만 좀처럼 추위는 가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드럽게 춥구만.’
아직 개벽으로 인해 기후가 변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리오는 여전히 비명을 지르는 몸을 일으켰다.
‘창문이라도 열어뒀나…….’
그러나 눈앞에 보인 창문 밖의 풍경은 예상치 못한 설경이었다.
그제야 개벽에 대해서 떠올린 리오는 겨울로 계절이 바뀌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니 이렇게 춥지……. 근데 큰일인걸. 겨울나기 준비는 하나도 안했는데.’
자원이 풍족한 탑의 세계이니 먹을 것이나 에너지가 부족한 일은 없을 것이었다.
지금 닥친 문제는 리오의 생활에 관한 문제였다.
한기를 막아줄 두꺼운 옷은 구입한 적이 없었고, 이불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여기는 보일러도 없지, 이종족들이야 워낙 튼튼한 몸을 가졌으니 별일 없겠지만…. 큰일인데.’
방안을 따뜻하게 데워줄 무언가를 찾기 위해 리오는 두리 번 거렸다.
과학 대신 마법이 발전한 세상이니, 보일러를 대체할 만한 것이 분명 이 집에 있을 것이었다.
‘… 아아. 벽난로가 있었지.’
평소에는 벽난로의 입구를 닫아두기에 난로의 존재를 깨닫기 힘들었다.
지구에서도 사용해본 적 없는 난로를 리오는 이곳에서 처음 접했다.
보일러 대신 발견한 난로.
곧 방안이 따뜻해질 것을 기대했으나, 한숨을 내쉬었다.
두꺼운 옷과 이불이 없듯이, 자신은 겨울에 대해 아무런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
당연히 난로에 넣을 장작 따위는 없었다.
“벽난로를 사용하시게요?”
의기소침해하고 있는 리오에게 픽시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걸어왔다.
탑의 세계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들을 가이드하는 픽시.
이제 리오에게는 둘도 없는 단짝이었다.
리오의 손바닥만 한 픽시가 어깨를 가볍게 짓누르며 앉았다. 곧 무언가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창고에 보면 샐러맨더의 눈물이라는 게 있어요. 아마 전 주인이 놓고 간 것 같은데… 그걸 이 난로에 넣고 불을 지피시면 삼 일 정도는 따뜻하게 해줄 거 에요.”
“그래? 샐러맨더의 눈물이라… 밖에 나가면 더 사둬야겠네.”
픽시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서 물건을 가져왔다.
금방 난로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고, 방안이 후끈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바닥까지 따뜻해지길 원하는 건 욕심이었다. 양말을 신고 슬리퍼라도 신기로 했다.
“누가 왔네요.”
“응?”
픽시의 말대로 문밖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수초 뒤.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고, 픽시가 모습을 감추자 리오는 상대를 반갑게 맞이했다.
“모만씨? 별일이시네요. 제 집에 다 오시고. 반가워요.”
리오가 이 탑의 세계로 오고 가장 처음 만났던 마을 주민.
그리고 이곳에 정착하는데 가장 큰 도움을 준 인물인 호빗 모만이었다.
그는 정체불명의 물건이 가득 담긴 보따리를 리오에게 건네며 말했다.
“개벽 뒤에는 한 동안 이 세상에 새 주민이 오지 않는다네. 그래서 나도 오늘 부터는 쉬는 몸이지.”
보따리 속의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문밖에서 들어오는 싸늘한 한기는 리오의 몸을 부들부들 떨게 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오세요. 많이… 춥네요.”
“그러지.”
모만은 리오의 집 안으로 들어오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집들이 이후로 처음인데… 변한 게 없구만.”
자신의 집에 누군가 온 것은 모만과 마법을 가르쳐준 안드레이 뿐이었다.
모만의 입에서 변한 것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자 리오는 살짝 당황했다.
“… 워, 워낙 바쁘게 살다보니, 벼, 별로 집을 꾸미는 취미도 없고요.”
“쯧.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야.”
거실에 있는 의자에 앉더니 모만은 리오가 들고 있는 보따리를 가리켰다.
“이렇게 말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어제는 잘 구경했네. 앤서러 리오군. 그건 그 답례야.”
전야제의 일을 모만이 거론하자 리오는 얼굴을 붉혔다.
지인이 어젯밤의 일을 쓰러뜨린 일을 거론하니,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창피하기도 했다.
“다, 답례라니…. 이런 걸 받을 만한 일을 한 건 아닌데…….”
“이 추운 날 고생해서 가져왔으니 받아두게나. 다시 들고 돌아가긴 싫으니.”
“예. 뭔지 몰라도… 잘 사용하겠습니다.”
선물 받은 것을 주변에 옮겨 놓고 리오는 모만의 앞에 마주섰다.
“이것만 주시려고 오신 것 같지는 않으시네요.”
“할 이야기가 있어서 말이네, 자네가 이렇게 승승장구하고 있고, 탑을 무난하게 올라가고 있으니 꼭 이 말을 전해야겠더군. 사실 훨씬 전에 말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오래 전 일이라 깜빡하고 있었네.”
중요한 말인 듯 하니 리오는 귀담아 듣기로 했다.
탑과 관련된 이야기인 듯싶었고, 또 오래된 이야기라고 하니 먼저 귀환을 이뤄낸 선조들과 관련이 있을지도 몰랐다.
리오가 고개를 끄덕이고 얼굴을 숙이자 호빗 모만은 진중한 얼굴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템플러에 대해 알고 있나?”
모만의 입에서 듣게 될 줄은 몰랐던 단어였다. 심장이 요동치는 것과 동시에 리오의 얼굴이 굳었다.
“예. 고작 2층을 올라갔을 뿐이지만… 저도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픽시에게서 들었던 템플러.
‘템플러라……, 주민을 죽여도 패널티를 받지 않는 주민을 템플러라고 하던가?’
리오는 3개월 전, 자신의 동족을 살해하고 3개월 간 탑에 오를 수 없는 패널티를 부여 받았다.
템플러들은 그런 규제가 없는 자들을 뜻하는 말이었다.
거기다 템플러들은 리오가 홀로 1층에 있다고 하면, 오직 리오를 죽이기 위해 리오가 있는 1층의 세상으로 침입을 할 수 있다.
본래 A가 1층에 있다면, B는 A가 있는 1층으로 갈 수 없는 것이 규칙이었다.
둘이 파티가 아닌 이상, 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 규칙을 깨고 강제 침입하며 거주하는 A를 살해하는 자들이 템플러였다.
살해하여 A가 가지고 있는 금전적인 것들은 모조리 빼앗기 위해.
픽시에게 설명을 듣고, 좀 더 템플러에 대해 알아보았던 리오는 책을 통해 몇 가지 이야기를 좀 더 알 수 있었다.
템플러가 되는 방법으로는 탑의 일정 층 이상 오르면, 탑의 보상 대신에 템플러가 될지 선택권을 준다고 한다.
보상이라는 건 귀환이나, 탑을 오르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일 텐데, 그것들을 포기하고 템플러가 된 다는 말은……. 완전히 이곳에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은 이들이 선택하는 것이 바로 템플러라는 말이었다.
‘무슨 일이기에… 템플러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는 거지?’
리오가 템플러에 대해 완전히 알고 있는 듯 하자, 모만은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설명을 할 필요가 없는 듯 하군. 긴 이야기가 될 법했는데…….”
“전에 한 번 딱 듣고, 위험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탑을 오를 거라면 상세하게 알아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시간이 있을 때 자세하게 알아두었죠.”
“그런가? 헌데 표정을 보아하니 아직 내가 할 말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군? 템플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이해를 했어도, 그 역사에 대해서는 공부하지 않았나?”
템플러의 역사까지는 당연히 공부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이 있었으면 모르겠지만, 이것저것 여러 군데에 적힌 것들을 나눠서 읽다보니 그런 세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 아. 예. 역사까지는 좀…….”
모만은 살짝 리오의 눈치를 보았다.
“자네는 자네의 선조들이 모두 깨끗했다고 보는 가? 인간이라는 종족과 자네가 살던 곳의 사람들은 모두 선량하며 하다고 생각하는 가? 솔직하게 말해주게.”
그 말은 생각할 것도 없었다. 지구상에 착한 사람만 있지 않다는 걸 알아채는 과정은 아직 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도 안다.
“아뇨.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별로 자랑스럽고 대단한… 그런 종족은 아닙니다. 종족에 관해서는 자부심을 가지고 싶지는 않네요.”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네. 설마 조금 우월주의 같은 것이 있나 싶었거든. 다행이 그런 건 아닌 모양이야.”
“이제 말씀해주십시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리오의 물음에 모만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마치 듣는 이가 있는 지 없는 지, 확인이라도 하는 듯 했다.
“그런 말을 한 다름 아닌 이유는…….”
말소리를 죽이고 소근 대듯이 입을 열었다.
“템플러들의 집단. 오라클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 자네와 같은 인간이라네.”
“오라클? 살인마 집단입니까?… 그런 곳의 창립멤버라….”
인간이라면 놀랄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이 세상에 와서 필시 어느 인간은 정신이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지구와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변했을 것이고, 결국 그런 악독한 사람이 되고 만 것이리라.
“… 근데 그게 저랑 무슨 연관이라도 있습니까? 단순히 템플러들을 조심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저도 그 오라클이라는 곳에 들어갈 것 같아서 걱정하셨는지요?”
모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리오의 짐작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닐 세. 실은 자네보다 먼저 온 인간들이 그 놈들하고 이런저런 악연을 쌓아뒀거든, 그 탓에 인간이라면 치를 떠는 놈들이지.”
“이, 이런.”
직접적으로 피가 이어진 조상은 아니었지만, 리오는 먼저 지나간 이들의 후대로 취급을 받고 있었다.
조상의 일로 인해 후대가 얼마나 힘든 생활을 보내는지. 리오는 역사서나 대중매체를 통해 간접체험을 했었다.
이런 경우도 분명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무슨 인연을 쌓았는지는 몰라도, 분명 좋은 쪽은 아닐 것이다. 모만이 말하는 이야기의 흐름은 그러했다.
그리고 그려지는 미래는 간단하다. 악독한 템플러라는 살인마들은 리오를 괴롭힐 것이었고, 리오는 고통 받을 것이다.
절로 인상이 찡그려진 리오는 으득 입술을 씹었다.
모만은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