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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의 탑-20화 (20/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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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오는 가마솥이 끓기를 기다리다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아까 테일러의 집에서는 속독을 하느라 제대로 읽지 못했었다.

앞부분부터 정독을 해나가자 놓친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테일러의 아버지가 살아있을 적의 아지트라면 많은 사람들이 합숙했을 것 같았다.

이 가마솥, 그리고 아지트의 풍경을 보면 그런 예상이 가능했다.

그러나 테일러의 일기장에는 그런 내용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가 있을 때도 이 아지트에는 혼자였다.

그렇다면 테일러의 아버지가 이곳을 발견하기 전부터 이곳은 항상 이런 풍경이었다는 이야기다.

도대체… 모만이 말했던 인간이 많았다는 때는 몇 년 전의 이야기 일까.

리오는 혹시나 싶어 픽시에게 물었다.

“픽시. 이 아지트를 보면 마치 여러 사람들이 합숙했던 곳 같은데…… 맞아?”

놀랍게도 픽시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여긴… 다섯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합숙했던 장소 같은데.”

픽시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처럼 누나라고 하면 알려드릴게요.”

“기어오르는 구만.”

“하하… 리오님도…… 그, 그냥 알려드릴게요.”

리오가 어깨를 잡으며 몸을 푸는 시늉을 하자 픽시는 항복을 선언했다.

“아까 말씀 드린 대로… 여기는 여러 사람들이 합숙한 곳이 아니에요. 이곳의 풍경이 이런 건… 그냥 살던 사람들이 전 주인의 흔적을 그대로 남겼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아까 전, 허탈한 얼굴로 자신의 과거사를 말하며 이전의 인간들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 것을 보아, 픽시는 모든 것을 털어내기로 한 것 같았다.

더 이상 의심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녀를 의지하는 자신만 병들 뿐이었다.

‘후우…….’

벽화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왔다.

자신이 현재 있는 곳. 인간 길드의 아지트는 여러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

그 사람들은 정말 이곳에서 김체건의 무예가 귀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을까?

“당신들은… 여기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아지트에서 하룻밤을 지새며 리오는 고민에 휩 쌓였다.

“전 주인? 길드 아지트인데 주인이라고 할 사람이 있나?”

픽시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혼자 사용한다면 공용 시설이라도 주인이 아닐까요?”

그 말에 리오는 신음을 삼켰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세계에 길드 아지트라는 것이 생긴 이례로.

테일러 같은 예외적인 인간을 제외하고는. 인간은 단 한 명씩밖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래. 그렇다면… 나라도 전 주인의 물건들을 남겨둘 거야. 사람의 흔적만으로도 그리움은 해소가 될 테니까…….’

부글부글부글…….

갑작스럽게 가마솥이 끓기 시작했다.

상념에서 깨어난 리오는 픽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시킨 대로 물을 넣고 끓였으니, 그 다음을 기다린 것이었다.

“가마솥 망가뜨리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난 이거 가능한 보존하고 싶은…….”

갑작스런 소음이 리오의 입을 막았다.

탑에서 느꼈던 오감이 뒤틀리며 천지가 요동치는 감각은 어떤 감각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진짜로 천지가 요동치고 있었다.

쩌저저적!

땅이 진동을 일으키며 반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뭐, 뭐야!”

무심코 자리에서 일어난 리오는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도로 제자리에 눕고 말았다.

“큰일은 아니니 잠자코 계셔도 되요.”

소란 속에서 얌전한 픽시의 말에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제정신을 차리고 시야를 넓혀보자 주변의 모든 장식들이 흔들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땅은 반으로 갈라지고 있건만…….

수 분 뒤에 지진이 멈추었다. 리오는 식은땀을 훔쳐내고는 가마솥이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지하인데…….”

아래로 내려가는 길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보다 먼저 앞서간 이들의 흔적을 이내 찾아내었고, 그들이 사용했던 튼튼한 밧줄을 발견했다.

“호오… 이거라면 끊어지지도 않겠어.”

밧줄을 근처의 기둥에 묶고 리오는 지하의 안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몸을 밧줄에 실었을 때 생각한 것이지만, 만약 지하의 끝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깊으면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지하는 그렇게 깊지 않았다. 5분여 정도 후에 리오는 바닥에 도달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네요.”

“얼마나 대단한 게 묻혀 있길 래 이렇게 요란 법석인지 나원…….”

가지고 온 랜턴의 화력을 조절하여 리오는 불의 밝기를 높였다.

생각보다 지하는 넓은 듯 했고, 아지트의 크기만큼이나 지하도 넓은 공동인 모양이었다.

천천히 랜턴의 노란 빛이 지하를 비추기 시작하자 리오의 눈이 크게 떠졌다.

“… 벽화?”

교과서에서 보았던 그림들이 먼저 떠올랐다.

원시시대. 혹은 고구려 시대, 고려 시대, 조선시대.

사람이 살아가는 그림을 벽화로 남겨놓은 그림들.

설마 그것들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이라고는 리오는 생각도 못했기에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랜턴의 밝기가 절정에 다다르자 벽화를 자세히 볼 수 있게 되었고 리오는 이내 신음을 터트렸다.

‘단순한 벽화가 아니다.’

후대에 문화와 역사를 전하기 위해 벽화를 남긴 것과는 달랐다.

그림이 좀 더 정교하고 상황이 자세했다. 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듯 했다.

마치… 리오가 탑을 오르기 위해 읽었던 교본서처럼.

그림을 둘러보는 리오의 옷깃을 픽시가 잡아당겼다.

“이걸 보세요.”

벽화에 기대어져 있는 팔십 센티미터의 석판이 있었다.

한글과 한자가 섞인 섞여있으며, 옛 조상들이 사용했던 한글의 흔적들이 보였다. 솔직히 읽기 힘든 내용의 석판이었다.

‘왕의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갔다? 힘든 고생 끝에… 왜놈들의 검을 훔쳤다?’

인상을 구기며 리오는 석판을 해석해 나가기 시작했다.

‘나쁜 마음을 먹었던 순간, 이곳으로 왔다. 돌아가고 싶었고. 지금 나는 그것을 코앞에 두고 있다.’

석판의 기록을 보고 리오는 흥분을 가라 않 힐 수 없었다.

석판을 자신도 모르게 쌔게 부여잡았다. 모래가 우수수 떨어져 내리자 그제야 힘을 풀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돌아 갈 수 있겠으나, 나는 이곳에서 많은 동포들이 생을 마감 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사실을 안 이상. 나 혼자 돌아간다면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리라.’

기록을 남긴 이가 고민한 흔적이 보였다.

리오는 마저 기록을 읽었다.

‘그렇기에 누군가 여기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스스로 수련하여 나와 같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이곳에 나의 무예를 남기노라.’

석판을 내려놓고 리오는 생각에 잠겼다.

이 글귀를 남긴 사람이 누구일지. 상상을 해보았다.

‘때는 조선. 그리고 검과 관련 된 무인…….’

조선시대에 가장 검으로 유명한 사람은 두 명이다.

검선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김광택과 그의 제자인 백동수.

‘아니. 한 명 더 있었지…….’

숙종의 명으로 일본으로 넘어가, 사무라이의 검을 배워온 자. 김광택과 백동수가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이 된 인물.

“… 김체건.”

석판을 내려놓고 리오는 김체건이 남긴 벽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검과 관련 된 그림이라고 보니, 벽화가 무엇을 나타내는지 좀 더 이해가 쉬워졌다.

‘죄다 몬스터, 이종족들을 상대하는 그림이야. 보통 무술 같은 걸 남긴다면 사람을 상대로 그려 놓을텐데…… 오직 이 무술은 여기서 귀환하기 위한 거라는 건가?’

검을 잡은 지 한 달이 막 넘은 리오로써는 김체건이 남긴 무예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가 없었다.

트롤을 상대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룡종을 상대할 때는 어떻게 하는 가. 각 몬스터와 이종족마다 공격이 들어올 때 어떤 자세를 해야 할지 상세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리오의 눈에는 그저 헛웃음이 나오는 그림일 뿐이었다.

‘저런 식으로 오우거를 상대한다고?’

리오는 총판에서 보았던 오우거를 떠올렸다.

5미터는 넘는 거구. 집한 채 정도는 그냥 들어 올리는 막강한 힘.

그런 오우거는 인간이 공격을 받아내는 것부터 불가능 하다. 하물며 신장의 차이 때문에 급소를 공격할 수도 없다.

그러나 김체건의 벽화는 인간이 오우거의 공격을 방패로 방어하여 넘어뜨리고, 급소를 취하고 있었다.

‘뇌내망상을 그려놨군. 김체건이 귀환을 제대로 했는지부터 궁금한데…….’

리오는 픽시에게 김체건이라는 사람이 이걸 어떻게 이용해서 귀환을 했는지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김체건이 조선에서 무엇을 했고, 어떤 식으로 생을 마감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적어도 리오는 그가 귀환을 했다는 명확한 사실은 알고 있다.

‘분명 이것 때문에… 귀환을 했다기보다. 탑의 축복 때문이겠지.’

생각을 정리한 뒤, 리오는 픽시를 바라보았다.

“이것 때문에 네가 그런 행동을 했단 말이야? 착각이 심했군.”

리오는 벽화를 뒤로 하고 다시 밧줄로 향했다.

픽시는 놀란 눈으로 벽화와 리오를 보며 말했다.

“에? 왜 그러세요? 저거 엄청 대단한 건데?”

“글쌔. 나 말고 다른 이종족이 배운다면 대단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인간이 다른 종족을 이긴다는 건 난 상상 할 수 없는데…….”

김체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렸을 적 교과서를 통해 배운 적이 있었지만, 리오는 이런 곳에서 처음 접한 고전 무예를 익히느니 차라리 서점에서 구입한 기초 검술 교본서를 의지하기로 했다.

‘아니, 차라리 유도나 태권도를 믿고 말지.’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으리라 믿었던 리오는 어이가 없는 얼굴로 아지트의 지하에서 나왔다.

지진이 다시 시작되고, 가마솥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일기장을 바라보며 테일러의 아버지가 말한 것이 과연 저것일지 리오는 심히 고민했다.

‘당신은 정말 저걸로 탑을 올랐단 말이야? 저런 옛 무예로?’

시선이 픽시를 향해 돌아갔다.

혹시 자신을 또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일부러 가장 중요한 것을 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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