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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권외차원에서 왔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과 다르게 제가 있던 차원은 기초 교육을 필수적으로 받게끔 국가에서 법으로 지정했거든요.”
아론의 얼굴에 기대감이 엇비쳤다. 리오의 말을 엿듣고 있던 회계단의 직원들 몇 고개가 돌아갔다.
“그럼 그렇지. 나의 조부께서 괜히 자네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네.”
조렌처럼 시험을 위함인 듯. 아론은 주변에서 적당한 종이와 펜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직원 중 한 명이 아론에게 다가와 깨끗한 서류다발을 건네었다.
“얼굴을 보니까 시험이 아니라 아예 일을 시작해도 잘 할 것 같은데, 회계단장님. 그냥 일을 맡겨버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밀린 일이 산더미 같은데…….”
“으음… 아직 내 밑으로 들어오는 게 확정 된 것도 아닌데…….”
서류에 적혀 있는 내용은 외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기밀사항일 것이다.
어느 회사를 가든, 당연히 회사일은 밖으로 빼돌리지 않는 것은 기본 상식이었다.
리오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굳은 의지를 내보였다.
“혹시 오늘 여기서 내쫓아진다고 하더라도, 오늘 본 것들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겠습니다.”
어지간히도 리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부하직원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인간의 말은 믿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네놈이 가져왔으면 좀 가만히 있어라!’
인상이 구겨지려는 것을 참고 아론의 허락을 기다렸다. 자신을 바라보는 아론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좋네.”
직원에게서 서류를 건네받고 리오에게 빈 책상을 내어주며 아론은 물었다.
“우리 회계단은 회계와 관련된 일도 하지만, 내부 감사도 같이하고 있네. 이것은 며칠 전의 거래장부일세. 위에서부터 계산이 맞는지 맞춰보게. 자네가 정말 셈을 잘한다면 주로 하게 될 일은 이런 일이 될 테야.”
아론은 잘해보라는 듯 리오의 어깨를 두들겼다.
주변에 있던 직원들에게서 웃음이 섞인 말이 들려왔다.
“회계단장님. 가장 어려운 걸 신참한테 시키다니, 너무 한 거 아닙니까?”
“그거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 단장님밖에 없지 않습니까?”
“너무하십니다 그려. 하하.”
재고 맞추기나 다름없는 장부.
빈 금액 맞추기.
액셀이라도 할 수 있었으면 좀 더 편했겠지만, 이 세상에서 그런 편의를 바랄 수는 없었다.
그러나 편의가 없어도 여기서 원하는 건 단순한 더하기 빼기에 불과하다. 반복하다 보면 머리가 아플 테지만, 리오는 이보다 더한 계산도 해보았다.
“… 이걸 하면, 뭔가 혜택이 있습니까?”
리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론은 평상시 주변 직원들에게 내걸었던 조건을 리오에게도 똑같이 내걸었다.
“아까 저 친구가 말한 것처럼. 사실 이 일은 가장 어려운 일이네. 그러나 자네가 처음임에도 완벽히 할 줄 알고. 빠른 속도로 한다면. 내부 감사는 자네가 일을 전담하게 되네. 자네가 만약 그 일을 맡게 된다면? 말단인 주제에 우리 총판에서 꽤나 힘을 갖는 것이나 다름없지. 근데 이건 둘째 치고… 우리 부서에서는 나는 이런 조건을 걸었네.”
부하직원들의 장난기 섞인 말이 들려왔다.
“어이 인간. 미리 말하지만…. 그거 저 회계단장님 밖에 제대로 못하니까 대단한 조건을 걸어뒀다고. 넌 절대로 불가능하니까 괜한 기대는 하지 마.”
얼마나 꿀 같은 조건을 내걸 길래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
리오는 오히려 기대가 부풀었다.
“장부의 감수가 끝나면 퇴근을 몇 시에 하든 나는 상관하지 않겠네. 그리고 보너스 매달 지급. 능력 있는 부하직원은 우대를 해줘야하지 않겠나? 어떤가? 이쯤이면 아무리 힘들어도 재무감사 업무도 할 만하지 않나?”
혜택은 거기서 끊었지만, 사실상 진급 기회도 남들 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오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싶었다.
본래.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직장에서는 얌전히 조용히 지내야 할 테지만.
리오는 입신양명, 입신출세까지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빨리 이 세상에 적응하고 등 따뜻하고 배부른 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 행동이 중요하고 잠깐의 괴로움을 버티면 될 일이었다.
볼펜을 따라한 것인지, 볼펜보다는 두꺼운 막대를 쥐고 리오는 흰 종이에 천천히 정확한 계산식을 써내려가며 장부를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비쳐졌다.
***
조렌 무기 총판의 내부감사원이 된 리오는 연이어서 뛰어난 수리능력을 입증했다.
남들은 하루 종일 걸릴 일을 리오는 십분이나 삼십분 정도면 해낼 수 있었고, 가장 어려운 일인 재무감사도 혼자 여러 명 몫을 해내었다.
인간은 자신들 보다는 나은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잔뜩 무시했던 총판의 이종족들은 이제 리오에게 고개를 들 수가 없게 되었다.
분명 인간보다 지능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종족도 리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니, 모두가 리오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주입식 교육, 그리고 무한에 가까운 반복 학습의 결과지.’
말하자면 그 어떤 식이 나와도 답을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퀴즈처럼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기분이다.
‘고등학생때로 돌아간 기분이군.’
리오는 오늘도 자신에게 할당 된 일을 해내고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탑의 세계에 모인 종족들은 기초수리 능력이 뒤떨어진다.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녀석들을 제외하고는.
머리에 근육만 찬 것인지 글도 모르며 숫자도 모르고 자기 종족의 역사는 가장 최근의 것만을 기억하는 놈들뿐이다.
그런 녀석들 투성이인 곳에서 제대로 된 장부 작성이 될 리가 없다.
작성은커녕, 실거래에서 구멍이 나거나 오히려 어이가 없는 이득을 안겨 온다.
리오가 이곳에 온지 근 한 달이 지났지만, 장부가 제대로 맞는 날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래서야 비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어. 모두가 실수투성이일 뿐이니.’
여태 총판이 돌아가고 있었다는 것이 우수울 따름이었다.
‘한정된 세상, 한정 된 인구, 그런 세상이니 어떻게든 잘 돌아갈 수밖에 없나?’
본래 자신의 할 일이었던 재무관리, 재무검사를 리오에게 맡긴 아론은 자신의 방에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한 리오는 그의 소감을 기다렸다.
“… 이상입니다.”
“음… 훌륭하군.”
보고서를 직접 눈으로 읽으며 아론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오가 온 뒤로 총판 전체가 조용할 날이 없다.
지금은 모두가 쉬쉬하며 덮어두고 있지만, 자신의 조모인 상단장이 이번 달 정산을 시작하면 피바람이 불어올 것이었다.
“이번에도 구멍이 많군.”
“… 예.”
리오가 오기 전까지 아론이 했던 일이었지만, 이렇게까지 구멍이 연이어서 발견되지는 않았었다.
그 말은 아론 자신도 그동안 실수를 하고 있었다는 말이었다.
“수고했네. 자네 덕분에 우리 총판의 문제점이 하나 하나 드러나고 있군. 상단장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고 계시네. 앞으로 지금처럼 일해주게나.”
“노력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리오는 아론의 방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아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리오를 붙잡았다.
“아 잠깐.… 일과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나?”
본래대로라면 리오는 오늘 하루의 일과가 끝났으므로 퇴근을 해야 옳았다.
그렇기 때문에 상관인 아론은 리오에게 시간이 괜찮은지 묻는 것이었다.
이곳에 온지 한 달이 넘었지만, 종족의 차이 때문인지 친한 사람이 여태 없는 리오는 퇴근 이후로 누구를 만나거나 해야 할 일이 딱히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 모만씨와 만나기로 했던가?’
일주일 전에 잡았던 약속을 떠올린 리오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녁에는 약속이 있습니다만…….”
방에 있는 고풍스러운 시계를 확인하자 오후 두시경인 것을 확인했다.
상관인 아론이 무슨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녁 전까지 이어질 이야기는 아닐 것이었다.
“저녁까지 이어질 긴 이야기는 아니네. 잠깐… 차 한잔을 나눌 정도의 시간이면 되네.”
“그렇다면 상관없습니다.”
“시간을 내어주어서 고맙군. 내 직접 차를 끓이도록 하지.”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치려 했으나, 즐거워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고 리오는 그만 두기로 했다.
‘차를 자주 즐기나 본데?’
시간이 날 때 차와 함께 먹을 만한 것을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리오는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엘프답게 정령 친화력과 마나 친화력이 뛰어난 아론은 간단한 마법을 구사할 줄 알았다.
주전자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마법과 정령을 이용해 뜨거운 물을 금세 만들어내었다.
“맛은 없지만 몸에는 좋다네.”
‘녹차잖아?’
아론이 건넨 찻잔에는 리오에게는 친숙한 차가 담겨 있었다.
씁쓸하지만 고운 향은 벌써 한 달이나 볼 수 없게 된 가족들을 떠올리게 했다.
“… 음? 왜 그러나?”
“아, 아닙니다. 헌데,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표정이 아련해진 리오의 얼굴 탓인지 아론은 자신이 차를 잘못 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리오가 녹차라고 알고 있는 라프라스의 차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그저 맛이 쓰기 때문이라고 넘겨짚었다.
“실은… 자네 때문에 우리 총판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네.”
갑작스런 아론의 말에 리오는 당황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서두가 없는 자신의 말에 당황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흘러나온 아론은 한숨을 흘렸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 자네가 너무 일을 열심히 하고, 훌륭하게, 깔끔히, 빈틈없이 해주는 까닭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이네.”
그제야 리오는 아론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리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총판의 내부감사, 재무관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