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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장 내부 감사원
언제나 그곳에 있는지, 마을의 중앙에서 외곽까지 달려 나간 리오는 모만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제처럼 마을 입구에서 새로운 주민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멍하니 있는 모습이 심심하지도 않은 듯 했다.
“안녕하세요. 모만씨.”
“음…?”
지나가는 구름을 보고 무슨 상상이라도 하고 있었던 걸까? 모만은 리오가 근접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 했다.
아마 마을 밖에서 오는 새 주민은 금방 알아챌 테지만, 안쪽에선 오는 기존 주민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멍한 눈으로 있다가 리오를 보고 빙긋 웃었다.
“어제의 그 인간 친구로군. 실로 오래만의 새주민. 그리고 인간이었지.”
또 다시 멍한 얼굴로 변한 모만이었다. 무언가 회상을 하는 듯 했다.
“예전의 마을이었다면… 인간 같은 희귀 종족이 주민으로 왔을 땐 모두가 성대하게 환영 축제를 벌였을 텐데 말이야. 드워프들의 차가운 흑맥주. 노움들이 땅속에 묵혀둔 양주들이 그립군.”
리오는 희귀 종족이라는 부분에서 살짝 궁금증이 일어났다.
“인간이 희귀 종족이라니, 어째서죠?”
“글쌔. 일단 이 탑의 세계로 오는 인간은 애초에 적을뿐더러… 와도 쉽게 적응은 하지만 짧은 수명 때문인지 다른 종족들에 비하면 빨리 자연으로 돌아가고 말지. 예전에는 온갖 여성 종족들이 어떻게든 인간의 씨를 보존하려고 노력을 했는데… 뭐 잘되진 않더군.”
그쯤 되니 궁금한 부분이 바뀌었다. 희귀한 종족이라서 예전엔 환영 축제도 해줄 정도였다니. 단순히 희귀하기 때문일까?
리오의 속마음을 읽은 듯이 모만은 말을 이었다.
“… 우리들이 그런 노력을 하고, 인간들에게 좋은 대접을 한 이유가 궁금해졌겠군. 뭐… 자네도 어제 하루를 이 세상에서 생활했으면 느꼈겠지. 이종족들이 자네에게 좀 친절한 것 같지 않나?”
멍청하게 생활했던 어제의 생활을 쭉 돌이켜본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바퀴벌레만도 못한 인간을 이종족들은 대우를 해주고 있었다. 오늘 만난 리자드 맨, 이프리트, 일부 마족들을 보면 그러했다.
“왜… 그런 거죠?”
작은 키의 호빗. 모만은 리오에게 다가와 다리를 두들겼다.
“이 안에 있는 것 때문이지.”
“뼈…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호빗은 손짓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피?”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이후에 머리를 숙이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키가 130정도인 모만에게 얼굴을 숙인 리오는 그가 자신의 머리를 검지로 두들기는 행동을 취하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더욱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나?”
“… 예.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간 모만은 옛 이야기를 꺼내는 노인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 여기 이 마을은 말 그대로 ‘마을’이었지. 그러나 보다시피 지금은 ‘도시’지. 우리들은 여전히 마을이라 부르고 있지만 말이야.”
그것은 리오가 마을을 처음 보고 느낀 생각을 그대로 말로 옮긴 것이었다.
“나도 전해들은 이야기이지만. 이 세상의 처음에는 탑만 있고 거주 시설, 편의 시설은 아무것도 없었다고 하네. 마을은 처음부터 없었지.”
“설마 마을을 인간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하실 려는 건 아니죠?”
장난스러운 리오의 말에 모만은 히죽 웃었다.
“예끼. 그럴 리가. 이보게. 자네가 살던 세상에 드워프에 대한 지식이 없나? 드워프는 흙만 있으면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놈들이지. 마을과 편의 시설 같은 건 당연히 그놈들이 만들었네.”
자신의 예상이 당연하게 빗나가자 리오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럼 도대체 여기 주민들한테 인간이 뭐 길래 그렇게 잘해주는 겁니까?”
과도한 친절, 무상의 선의는 없었지만. 관심은 괜한 스트레스를 느꼈다.
이유라도 알고자 리오는 모만을 재촉했다.
“간단한 이야기네. 드워프와 모든 이종족들이 가지지 못한 것을 인간은 가지고 있지. 간단히 말하자면 자네의 재능이라고 할까?”
재능이라니,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리오는 웃지도 못할 말에 입술을 곱씹었다.
‘그러니까. 여기 주민들은… 평범한 나에게 뭔가 특별한 재능을 기대한다. 이 말이야?’
별 대단한 기술도 없는 리오였다. 평범한 인문계를 졸업하고 평범한 문과 대학을 졸업한 리오다.
이곳에서 무슨 재능을 꽃피운다는 말인가.
모만은 말을 이었다.
“자네는 이런 탑의 세계에서 이런 규모의 도시로 확장이 가능하리라고 보나?”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죠?”
“생각해보게. 처음엔 마을이었어. 그러나 이렇게 커졌지. 근데 그게 외부의 도움도 없는 상태로 이루어졌네. 그것도 온갖 종족들이 섞인 탓에 모두의 화합은 맞을 리가 없는 상태. 그것이 가능하리라 보는가?”
리오는 마지못해 고개를 저었다.
종족마다 개성이 있다. 기름과 물이 섞일 수 없듯. 이 세상을 살아가는 종족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종족들이 모두 힘을 합해 마을 증축이 가능했을 리가 없다.
“… 뭐. 그런 불가능한 걸 가능하게 한 것이 인간이라는 말이지. 그런 리더쉽을 보인 인간도 있고, 어떤 인간은 드워프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기이한 발명품 같은 것을 내보였지. 마나 발전소? 과학? 문외한이라 난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걸 만들어내는데 인간들이 큰 공헌을 했다고 하더군. 사실상 개성이 뚜렷한 종족들이 모여서 평화롭게 마을이 유지되고 있는 건 모두 인간들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 인간이 없었다면 여기는 욕구만을 충족시키는 장소가 되었을 테니까.”
‘… 나 말고 먼저 왔다간 한국 사람이 있는 건가.’
사실 리오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느낀 것은 이곳이 중세시대 풍의 도시라는 것뿐이었다. 문물은 현대와 다를 것이 없었다.
밤이 되면 켜지는 전등. 주변에 누군가 다가가면 물을 내뿜는 분수대.
간단히 판타지 세상이니 ‘마법’이라는 신비한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을 자기합리화 했던 리오였지만. 모만의 말로 모든 것이 설명이 가능했다.
현대인은 자신 말고도 누군가 있었다.
판타지 세상에 현대인이 떨어져 문명을 발전시킨다. 그런 소설을 여러 번 읽어 본적이 있었던 리오는 이종족들이 어째서 인간을 우대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핸드폰을 최초로 개발한 사람이 눈앞에 있으면 누구나가 그럴 수밖에 없지.’
모만은 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많은 종족들이 인간을 그리 가깝게 여기지. 자신들이 본래 있던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을 당했어도 이제는 여기서 사는 일이니 덮어두고 말이야.”
“그렇군요.”
리오는 정보를 여기서 생활하는데 이용하기로 했다.
이종족들에게 인간이라는 것만으로도 호감도가 올라간다면, 이 세계에서 성공하는 것이 어쩌면 쉬울지도 몰랐다.
모만은 리오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듯. 표정으로 속을 읽어내었다.
“하지만 말이지. 지금은 다르네.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가 친절한 것은 아니네.”
호감도를 이용하려고 했던 리오는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무슨 말씀이시죠?”
“예전에는 내가 말한 대로. 인간들에게 모두가 친절했다는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시간이 흐르면 은혜를 잊는 법 아닌가? 많은 이들이 자네에게 호감을 가지고 먼저 접근한다고 해서 자네는 그걸 이용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네. 얼핏 잘못했다간 오히려 화를 입기 십상이지. 내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강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리오는 이해했다.
아마도. 리오가 누군가의 호감을 이용하려고 하면, 분명 주변에서 시기하는 자가 나올 것이다.
왜 능력도 없는 인간이,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런 특혜를 받는지.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라면 그런 시기는 없고 묵인 될 테지만, 은혜갚기의 시절은 이미 옛날에 지났다.
‘…남의 호감을 이용하는 건 별로 해먹을 만한 게 아니군.’
떪은 감을 씹은 표정이 된 리오였다.
한숨을 내쉴 때 쯤. 리오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온갖 고생을 한 뒤 여태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리오였다.
미묘한 표정으로 리오는 모만을 바라보았다.
“끌끌. 그러고 보니… 자네. 내가 어제 소개한 일자리는 어떻게 했나?”
해는 이미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여관에서는 자신이 없어진 것을 알아챘을 것이고 지금 돌아가 보았자 해고된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할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내팽겨 친 건가? 그래서 식사도 하지 못한 거로군. 쯧쯧. 할 수 없지. 내 오늘만은 식사를 나눠주도록 하지.”
근처의 풀숲에 숨겨둔 걸까. 모만은 어디론가 가더니 보따리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찐 감자와 고구마, 온갖 과일들이 보따리 안에 숨어 있었다.
허겁지겁 식사를 나눠먹고 난 뒤, 그는 리오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쩔 건가? 일단 여기서 정착하려면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개를 끄덕인 리오는 입을 닦고 정중한 자세로 말했다.
“모만씨. 저는 일단… 학자 출신입니다. 인간 사이에서는 머리가 좋다는 말이죠. 여러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어제와 같은 여관 일은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분명 저에게 딱! 맞는 일을 모만씨께서 찾아주실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요약하자면 쉽고 간단한 일을 원 한다는 말인가?”
식은땀을 흘리며 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만은 생각에 잠기는 듯. 눈을 감았다.
“으음… 머리가 좋다라…….”
잠자코 있던 리오는 그가 묻는 질문에 착실하게 대답했다.
“산수는 제법 할 줄 아나?”
공부는 꿇리지 않게 했던 리오였다. 모만이 산수 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듯 하자 리오는 관련이 있는 자격증 몇 개를 공부했던 걸 떠올렸다.
“예전에 회계사로 잠깐 일한 적도 있습니다. 산수는 꽤 합니다.”
엄연히 말해서 계산은 컴퓨터가 한 것이지만. 리오는 자세한 사정은 숨기고 둘러대었다.
어차피 실생활에서 원하는 계산이란 더하기 빼기 곱셈 나눗셈 정도의 사칙연산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