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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287화 (완결) (287/287)

< [종장] 모두가 잊고 있는…. <완결> >

[종장] 모두가 잊고 있는….

학명: 익시리트 (경험치)

서식지: 가상, 현실

특징: 가상세계 주민이었습니다.

위험도: 7종 대형

비고: 싸잡아서 괴수

***

세상이 변했다.

한때는 괴수의 침공으로 인류는 비좁은 도시에 고립됐었고, 그 돌파구로 현실이 아닌 가상현실…. 가상현실게임에 의존했었다.

하지만 한 위인의 불꽃 같은 희생으로 의문의 운석충돌을 막은 날부터 ‘괴인’이 출연하며, 다시 한 번 세상은 달라졌다.

『괴수?』

얼마 안 남은 고대인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현재는 그 누구도 더는 ‘괴수’를 ‘괴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정도로 익숙해졌고, 현재는 인류의 유일한 대적자로 여왕벌 ‘워페레스’만 남은 상태. 그만큼 ‘괴인’들은 강했으며 계약자와 수호자의 질은 사기적인 수준으로 진보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냐면….

『가상현실게임이 몰락했다는 얘기.』

여전히 ‘무서운 야생동물’이 설치고 다니지만, 인류는 그들의 서식지를 몰아내고 다시 인류의 영역을 복구하기 바빴다.

선지혜 여사가 ‘버려진 땅’인 목포를 재건해서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었던 것처럼, 현재는 적당한 땅에 깃발만 꽂으면 돈을 긁어모을 수 있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느긋하게 게임을 할 시간 따위 있을쏘냐!

(띠링! 축하합니다! 던전을 클리어하셨습니다!)

(띠링! 경험치 51,313 획득! 명성 442 획득!)

...하는 사람이 있었다.

한때는 모두의 주목을 받았지만, 그 모두가 가상현실세계에서 등을 돌리는 바람에 외롭게 이 넓은 세계를 지키는 남자가.

이 가상현실게임은 지나치게 오래됐다.

사랑과 우정, 희망이 살아 숨 쉬는 꿈의 세계라고 역설했지만, 모두 지나간 얘기. 도시에 고립됐을 때는 따로 할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했으나 지금은 아니다.

현실도 상당히 ‘판타스틱’하다.

하지만 이 질려버린 세계에 꿋꿋하게 남은 프로게이머.

(임진호 씨! 또 게임 중이십니까?)

(아니, 여보! 증손자 백일잔치가 있는데 게임이라뇨!)

(임진호 선배님…. 요즘 시대가 어느 때인데….)

한때, 가상현실게임의 절대자로 군림했던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다.

하나를 꼽자면,

‘인류와 가장 힘든 시기를 함께한 가상현실세계를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세상은 돈이 전부가 아니다!’

과거에 가상현실게임으로 사람이 몰린 이유는 또 있다.

현실에 도사리는 괴수 때문에 따로 할 게 없다 보니 사람이 몰렸고, 자연히 시장경제가 형성되며 돈이 굴러갔다.

하지만 지금은?

게임은 게임이고, 현실은 현실!

게임만 잘해도 잘 먹고 잘살던 시기는 지났다.

“슬럼프를 극복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하아…!”

임진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느새 30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위인 ‘한무일’이 ‘카르 4세’라고 불린 시기에 고용하려 했던 적이 있었다.

가상현실게임에 싫증 났으니까!

여기서 아무리 발버둥 친들 현실의 자신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한 ‘벽’을 깨고 다시 프로게이머로 복귀했을 때는 이미…. 괴수를 능가하는 괴인의 출현과 문세웅 같은 신성(新星)의 활약으로 가상현실은 몰락하고 있었다.

(불만스러운가?)

그때였다.

옥구슬 굴러가는 여인의 미성이 삽입된 시스템 음성이 아니다.

낮은 중저음.

굳이 비교하자면 던전의 최종 보스가 사형선고를 내릴 때, 어깨에 힘을 잔뜩 주며 목소리를 까는 것하고 비슷했다.

임진호의 이마에 주름이 3줄 그어졌다.

요즘 세상에 ‘보이스 피싱’이라니?

막 욕설을 해주려다가 참았다. 어떻게 보면 이자도 시류를 역행하고 있지 않은가? 동정과 더불어 동질감이 임진호를 멈춰 세웠다.

심지어 답변도 해줬다.

(불만스럽지! 대단히!)

대충 맞장구만 쳐줄 예정이었는데 나이를 먹었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부터 노인의 넋두리가 되어버렸다.

보통은 ‘자식 키워봐야 다 소용없더라.’ 같은 대사가 흘러나와야 했지만, 임진호는 가상현실게임의 부당한 대우에 대해 역설했다.

인간은 이기적이다.

지구와 인류를 구한 위인(한무일)의 희생을 잊고 자기 잘난 맛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건 가상현실게임도 마찬가지.

가장 힘든 시기를 100년 넘게 함께한 게임을 어찌…!

(잘 들었다. 충분히 공감한다.)

(정말로?! 정말인가?!)

(물론이다, 친구여. 다시 오만해진 인류에게 ‘신의 철퇴’가 필요한 시기다. 망설였지만, 그대의 말을 듣고 결정했다.)

(결정…? 갑자기 그 무슨…. 아니, 그보다 자네…. 흠…. 당신은 누구십니까?)

임진호를 어리벙벙했다.

올드유저, 하드유저를 위한 이벤트인가?

이 가상현실게임의 창시자인 한국의 와이츠 ‘미카헬로 싸이어’는 그렇게 감성적이고 서비스에 충실한 용신이 아니다.

공명정대한 그 고지식한 용신은 게임을 균형 있게 참 잘 만들었지만, 올드유저와 하드유저를 우대하긴커녕 배려조차 하지 않았다.

이게 그 결과.

임진호를 비롯한 극소수만 남았다.

그 극소수도 어린 애송이들이 대부분이고 노장(老將)은 그 혼자다.

(친구여. 내 이름이 중요한가?)

(그야….)

(나는 그대를 도와줄 수 있다. 그리고 그대는 나를 도와줄 수 있고.)

(...서로 돕자는 건가? 파티를 맺자고?)

임진호는 자신 외의 올드유저가 있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기뻐했다. 안 그래도 혼자서 깰 수 없는 던전 때문에 막힌 퀘스트가 많았으니까.

둘이라면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했다.

물론…. 이 친구를 자처하는 자의 레벨이 똥이라면 다 허사지만.

(파티? 이 세계의 용어로는 함께 싸운다는 뜻이었나?)

(응? 아, 뭐, 그렇네만.)

(그렇다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군. 좋다! 파티를 맺겠다! 신의 계약을!)

(얘기가 갑자기 산으로 가는 느낌인데….)

임진호는 살짝 불안해졌다.

뭔가 잘못 밟은 걸까?

말동무가 생겼다고 잠시 해이해진 걸지도 모른다.

(친구여. 그대는 여기서 얼마나 강한가?)

(NPC를 포함한 인간 종족 중에서는 최고지. 혼자서 못 깨는 던전은 꽤 되지만, 그건 내가 약해서가 아니라 다굴…. 협공 때문이고.)

(즉, 최강이란 건가?)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흠흠!)

헛기침을 날리며 무안함을 달랜 임진호는 말을 아꼈다.

겸손의 미덕이랄까?

말은 걸어온 상대는 이상한 구석이 많았지만, 말투로 보아하니 나이가 좀 있는 것 같다. 새파란 애송이라면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파티하고 싶지 않지만….

지금처럼 말동무만 되어준다면 짤짤이…. 성장을 도와줄 생각도 있다. 솔직히 이젠 더 강해져도 무의미했으니까.

현실적인 한계에 봉착했다.

던전에서 협공을 받아도 홀로 물리칠 수 있을 만큼 지금보다 2배, 3배쯤 강해지기 전까지는 더는 할 게 없는 상황이다.

즉, 던전 클리어가 더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50년 뒤에나 되려나?

(...최강의 사냥꾼과 비교하면 누가 더 강한가?)

(진짜 현실의?)

(그렇다.)

어째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임진호는 잠깐 생각한 후에 성심성의껏 대답해줬다.

다시 말하지만….

이젠 정말 할 게 없는 상황이라 시간이 많다.

(7종 괴수를 보통 500레벨 몬스터와 비등하다고 하지. 그리고 8종은 개체마다 격차가 심한 편이지만, 대체로 800레벨로 추산하는데…. 현재, 지구에서 가장 강하다는 문세웅이 8급 프로사냥꾼 최상급. 대략 ‘1000’쯤 한다고 보면 돼.)

그리고 임진호의 현재 레벨은 ‘1813’이다. 문세웅이 무더기로 덤벼도 이길 수 없을 만큼 레벨이 깡패인 셈!

문세웅이 에쏘드를 비롯한 좋은 장비를 하고 있는들, 신의 축복과 용의 뼈로 만든 자신의 아이템 발끝에도….

하지만 현실의 자신은 2레벨쯤 할까?

살짝 자괴감이 들었지만, 임진호는 애써 무시했다.

(...한무일이라면?)

(카르 4세? 흠…. 고인(故人)하고 비교하는 건 좀 껄끄럽지만, 살아생전 그의 최종 능력은 9급 프로사냥꾼 최상급. 지금의 나보다 약간 약하다고 보면 돼.)

(......)

(어이! 이봐! 듣고 있어?)

(잘 들었다, 친구여! 그대는 내가 가장 원하는 대답을 가장 설득력 있게 설명해주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다.)

(마지막이라니…. 더 물어봐도 되는데…. 흠흠!)

심심했던 임진호는 마음껏 자랑하고 싶었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슬럼프를 극복하고 30년 동안 쌓아올린 업적과 획득한 아이템, 사기적인 스킬 등등…. 설명해주고 싶은 게 참 많았다.

그 미지의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친구여.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

(소망? 아아, 목표?)

(그렇다.)

(흠…. 프로리그가 없어지며 프로게이머란 직업도 사라지긴 했지만, 여전히 내 영혼은 프로게이머지. 그리고 프로게이머는 항상 최고가…. 최강이 되기 위해 싸워야 한다. 그 길을 막는 자가 있다면 쓰러트릴 것이고, 도전해오는 자가 있으면 무찌를 것이다!)

젊고 패기 넘치던 시절에 했던 연설문을 응용해 보았다.

낯뜨겁긴 했지만, 어차피 이곳에는 자신과 ‘친구’뿐.

무슨 말이든 못하겠는가?

게다가 잘난 척은 원래 살짝 부풀어지는 법이다.

(상대가 인류의 영웅이라도 말인가?)

(물론!)

(...친구의 대답에 한 치의 거짓말도 없음을 확인했다. 그러니 믿겠다. 나의 복수를, 나의 원한을, 그대가 대신 이루어주리라고.)

(앙?)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하지만 ‘친구’는 계속 하고 싶은 말을 떠들었다.

(친구여. 최강의 되겠다는 그대의 바람을 잘 들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하나의 파티. 계약은 성립됐다! 나는 피의 복수를! 그대는 최강의 자리를!)

(갑자기 뭔….)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세계는 재구축되리라.)

빛이 가상현실세계를 뒤덮고 임진호는 기절했다.

그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현실.

하지만 그 현실은 지금 조금도 평화롭지 않았다. 150년 전에 보았던 지옥이 다시 한 번 펼쳐지고 있었으니!

지구는 격동을 맞이했다.

“도망쳐! 세상이 미쳤어!”

“괴수다! 괴수가 나타났다!”

“게임의 몬스터가 왜?!”

단정적으로 말해서….

가상현실과 현실 세계의 융합!

그리하여 이 새로운 ‘적’에게 명칭도 붙었다.

『익시리트』

그건 비단 몬스터 ‘익시리트’와 달라진 환경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가상현실게임의 아바타가 현실의 사용자들과 합쳐졌다.

그러니까...

게임 캐릭터를 열심히 키운 사람들이 현실에서도 최고가 되는 부조리가 발생했다는 뜻이다. 현실에 충실히 살아온 사람들을 전부 엿 먹인...

당연히 그 프로게이머들 때문에 세상의 모든 질서와 상식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그 최대 수혜자는 임진호.

전설의 프로게이머였던 그는 이 엉망진창인 세계에서 그야말로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힘이 생기면 쓰고 싶어지는 법!

“이젠 내 시대다!”

임진호는 확신했다.

그런 그가 기껏 생각해낸 거라고는 한무일이 그랬던 것처럼, 최고의 절세미녀만 모아놓은 자신만의 하렘을 만드는 것이었다.

하렘은 남자의 로망 아니겠는가?

당연히 그 대상에는 한무일의 여식들도 있었다.

그 대표주자는?

『한유지』

『카라 미나미』

선지혜와 유키나 미나미의 무남독녀(無男獨女)!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다며 결혼하지 않은 그녀들은 여전히 처녀였다. 게다가 한무일의 피를 이었다는 점에서 왕족이나 다름없는 정통성도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돌진하지 않았다.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그랬던 것처럼 몬스터를 처리하고 명성을 쌓으며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남자인지를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게 바로 회춘인가? 하하!”

딸들을 데려가겠다고 ‘통보’한 임진호가 움직였다.

문팽이와 배틀씹을 포함한 고위괴수가 지키고 있지만, 그 방어망을 정면돌파로 뚫어버린 그는 집까지 쳐들어갔다.

곧 이 많은 군세가 처가(妻家)로, 나의 것이 되리라!

그런 마음에 부풀어져 있던 임진호였으나,

퍼억!

경쾌한 타격음!

모든 공격을 회피하거나 막으며 막힘없이 진격하던 그의 얼굴에 주먹이 박혔다. 게임의 외모보정을 받았던 준수한 얼굴이 떡으로 변하기까지는 그야말로 찰나.

뇌진탕(10초 스턴)에서 풀린 임진호는 보았다.

고금을 통틀어 모든 게임의 진리.

몬스터와 캐릭터의 머리 위에는 레벨과 이름이 표시된다.

【????? / 한무일】

하지만 레벨은 보이지 않았다.

레벨 차이가 극심하게 날 경우에 보이지 않도록 설정된 시스템 영향. 문제는 자릿수가 크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물음표의 개수가 5개…?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이름이 그대로였다.

‘한무일이라니…?’

동명이인?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저 강함이 그 증거! 어떻게 이런 일이! 정말로 게임처럼 죽은 자도 되살아난 걸까?

아무 짓도 안 했는데 혼자서 상태 이상(혼란, 그로기)에 빠진 임진호가 무슨 생각을 하든, 그 전설이 된 남자가 말했다.

레벨과 이름은 관심 없다는 태도로 엄하게.

“그 아이들을 얻고 싶으면 용사가 된 후에 다시 도전해라.”

“아….”

“그나저나…. 며칠 안 본 사이에 세상이 확 변했군.”

“아….”

최강의 프로게이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앞의 존재는 모든 게이머가 달려들어 쓰러트리는 ‘이벤트 몬스터’보다 깡패. 아무도 모르던 세상의 진짜 부조리를 목격한 기분이었다.

그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예쁜 처녀가 득세하더니, 이번에는 게임 폐인? 참나!”

< [종장] 모두가 잊고 있는…. <완결>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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