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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286화 (286/287)

< [68화-4] 살아있는 전설 >

판타지월드도 괴수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됐었다. 토박이 신들마저 포기하게 한 ‘회귀본능’으로 무장한 강력한 폭군들에 의해.

20년 전에 혜성처럼 등장한 한무일에 의해 30분 만에 평정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었을 뿐!

바로 그 20년 전에 엘퍼러를 잃은 지구의 ‘여성형 괴수’들이 분열했던 것처럼, 판타지월드도 비슷한 상황에 놓인 모양이다.

무일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아직은 차원이동이 무리인데.’

비축해둔 힘을 다 쓰는 바람에 앞으로 닷새는 더 묶여 있게 생겼다.

하지만 5일이면….

행성 하나가 초토화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여기에 마신처럼 초월적인 존재가 끼어들면 ‘1분’도 안 걸린다.

그런 불합리함 속에서 무일의 선택은?

“너희가 가서 시간 좀 벌어줘야겠다.”

“예…?”

“그게 무슨….”

“헉!”

“가보면 알 거다. 만나서 즐거웠다, 아들 제군들.”

하이엘프 대사제가 마법진으로 요란하게 발동시켰던 차원이동마법이 순식간에 전개됐다. 그리고 20년 만의 부자상봉은 그걸로 종료!

어차피 또 만나야 한다.

최무일과 달리 한무성과 리이신 팽은 지구로 귀환해야 하니까.

물론….

그들이 ‘가짜 한무일’ 역할을 해냈을 경우의 얘기다. 실패하면 농담이 아니라 판타지월드가 그 둘의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

(무일. 너무 무리한 거 아니야?)

(이게 최선이었다.)

미약하긴 하지만, 자신의 피를 이은 한무성과 리이신 팽은 비슷한 존재감을 풍긴다. 당연히 언젠가 들통 나겠지만, 그전에 귀환하면 된다.

한유일의 핀잔에 그렇게 답한 무일은 행동을 계시했다.

여기서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그럴 리는 없다고 믿고 싶지만, 아들들이 객지에서 비명횡사라도 하는 날에는 한은아와 시링 팽이…. 슬프다는 한마디로 끝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나도 승부수를 던져봐야지.’

마신 크로마티온과 일전!

여태까지는 ‘마법의 신’답게 환영과 분신, 공간이동 등으로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보이는 크로마티온을 매번 놓쳤었다.

그래서 무일은 ‘도주의 신’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번에는 다르지.”

아들이란 변수가 끼어들며 녀석의 계획에 혼선이 생겼다.

그 증거로, 늘 안개가 낀 것처럼 불분명했던 [예지]가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크로마티온의 현재 위치를 알려왔다.

크로마티온이 무슨 수로 판타지월드에 연락망과 정보망을 뿌려뒀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 하지만 그게 지금 허점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쯤 많이 당황하고 있으리라.

아직 몬스터월드에 있어야 하는 한무일이 판타지월드에 등장했으니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고 해도 좋다.

(무일!)

(...그래. 망설일 시간도 아깝지.)

녀석의 영혼을 흡수해야 차원이동을 바로 쓸 수 있다.

사냥에 실패한다면? 또 놓치고 만다면?

죄 없는 아이들을 사지로 보낸 셈이다.

나의 아들들이라면 이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아빠 노릇도 제대로 못 해준 무일은 그게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잘 안다.

“내가 갈 때까지만 버텨다오.”

마신 크로마티온의 은신처로 순간이동 했다.

그리고 같은 시각.

보안을 포함하여 또 도망치지 못하도록 판타지월드의 어느 지하감옥으로 보내진 최무일과 달리, 한무성과 리이신 팽은….

“이 무슨…?”

문언으로만 들었다.

요정의 황제 ‘엘퍼러’ 주위에는 늘 아름다운 요정들이 즐비했었다고.

하지만 단연코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치부를 가릴 생각도 없는 미희(美姬)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한무성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이 전라의 미녀들 정체는 바로 판타지월드의 여성형 괴수들!

토박이 절대자(신, 드래곤, 마왕)들과의 수많은 사투를 벌이고도 살아남은 그녀들의 역량은 지구의 고위괴수들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하렘…!”

동정인 한무성보다 리이신 팽의 상황판단력이 더 빨랐다.

아니, 사방에서 출렁거리는 젖가슴의 횡포와 은밀하지 못한 그곳 때문에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는 한무성보다는 이쪽이 그나마 건전했다.

이곳은 신의 땅.

인기순위(신앙)가 곧 서열로 직행하는 이 가혹한 세계는 압도적으로 여성 비율이 높다. 생물학적인 이유라고 할까?

남신(男神)의 우락부락한 근육은 ‘전쟁의 신’ 같은 전문직(?) 외에는 쓸모가 없다. 반면에 여신(女神)들은 ‘행운의 신’이니 ‘풍요의 신’처럼 좋은 분야를 전부 독점 중!

신체적인 특징으로 99% 이기고 들어간다.

그 결과가,

“어머! 맛있게 생긴 아이네. 쓰읍.”

“그분이랑 비슷한데?”

“얘! 너는 어느 별에서 왔니?”

“귀여운 용사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세요! 할짝.”

여신들에게 둘러싸인 라이신 팽은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한무일 앞에서는 절대 보여주지 않던 본성!

리이신 팽은 암사마귀에게 붙들린 수사마귀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미지의 공포’ 앞에서.

그렇다고 저 폭거나 다름없는 미색을 향해 야만스럽게 칼을 붕붕 휘저을 수 없었다.

음란한 자태조차 신성불가침영역처럼 거룩했으니까.

판타지월드 자체의 인구가 대폭 감소하면서 그녀들의 신력(神力)도 과거의 성세에 비하면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신이었다.

하물며 한둘도 아니고 이렇게 여럿이 뭉치면….

여체의 신비나 환상이 사라진 도련님이라도 버틸 수 없다.

‘아아! 어머니…. 소자(小子)는 이렇게 갑니다.’

한무성과 리이신 팽은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가녀린 외모를 지닌 여성에게 폭력을 쓸 수 없다는 이유가 아니다. 그거라면 ‘여성형 괴수’인 워페레스를 사냥해본 시점에 끝난 논재.

이건 좀 더 단순한 문제인데….

지구에서 제법 강자로 통하는 둘이 현재는 ‘최약자(最弱者)’였다. 일대일로 싸워도 패색이 짙은 상대가 수백, 수천?

가상현실게임에서 레벨 1000 찍은 최상위권 플레이어를 뜬금없이 레벨 2000 사냥터 한복판에 던져놓은 거나 다름없다.

최상위권 플레이어가 뭔 대수라고?

이런 능력 밖의 사냥터에서는 ‘농부의 모종삽(!)’도 위협적이다.

“아, 아버지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여러분께 실망하실 겁니다!”

약간의 시차는 있었지만, 한무성과 리이신 팽은 비슷한 말을 했다.

쉽게 말해서….

아빠에게 이를 거야!

이 나이 먹고 ‘처음 보는 친부’에게 고자질할 생각부터 했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느꼈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 했다. 이대로 있다가는 더는 자신이 아니게 변할 것 같았으니까.

쾌락에 몸을 맡기면 그만이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송두리째 증발해버릴 것 같다.

『괴수』

시간이 흐르며 지구에서는 ‘괴수’라는 호칭이 사라지는 추세다. 이건 고대인의 숫자가 20년 전에 벌어진 인류생존전쟁으로 급감하며 생긴 현상이다.

괴수란?

괴상한 짐승이란 뜻이다.

하지만 그 ‘괴상한 짐승’이 더는 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면? 많이 알려졌다면? 그 시점부터 더는 ‘괴수’라고 부를 수 없다.

그냥 지구의 생명체, 동식물.

바로 이 시기에 태어난 한무성과 리이신 팽에게 ‘괴수’란 무척 낯선 단어였다. 하물며 둘은 좋든 싫든 프로사냥꾼 부친을 둔 탓에 괴수와 만날 기회가 흔했다.

생각해 보라!

옆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향해 ‘얘는 괴수야!’라고 말하면 설득력이 있나.

‘이게 바로 괴수…!’

하지만 그런 둘도 이 순간만은 ‘괴수’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고 있었다.

인간의 형태에 뿔이나 날개, 비늘, 꼬리 등이 추가로 붙은 ‘괴인’을 볼 때도 괴상하다고 느끼지 못한 한무성과 리이신 팽.

그러나 눈앞에 이 ‘완벽한 여인’들을 보며 괴수라고 느꼈다.

괴상하다는 건….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게 아니다.

좀 더 원초적인 본능에서부터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건 좀, 아니, 많이 곤란한데….”

“어린 수컷이 맹랑하네.”

“무언가 비슷하다고 느끼긴 했지만 아들이었어?”

여성형 괴수들이 실망하며 흩어졌다.

하지만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고자질하겠다는 뜻은 ‘한무일의 생존’과 일맥상통했으니까.

절대적인 수컷 ‘한무일’의 등장으로 약 20년 전부터 ‘잠시’ 중단됐던 암컷 괴수들의 영토분쟁, 신경전이 또 한 번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녀들은 한무성의 [업보]를 통해 ‘그’를 보았기 때문이다.

열렬히 사랑하는 수컷이 싫어하는 짓에 시간을 할애하는 암컷은 없으리라.

‘이, 일단은 산 건가!?’

한무일이 원했던 아들들의 역할은 ‘가짜 한무일’이었다.

본인의 얼굴이 많이 팔린 것도 아니기에 비스름하기만 하면, 마신을 사냥하는 ‘잠깐’의 시간쯤은 끌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대단히 큰 오산!

남자친구나 남편의 손만 잡아봐도 어디서 무슨 짓을 했는지 다 아는 여자들의 초능력(육감)을 무시한 처사다.

게다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동질감』

한무성과 리이신 팽이 그녀들을 보며 ‘이게 바로 괴수다!’라고 느꼈듯이, 여신과 여성형 괴수들은 이 둘에게서 ‘조금 호감 가는 인간’이란 인상뿐이 못 받았다.

한무일을 볼 때하고는 달리.

영혼까지 송두리째 내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과정이나 의도야 어땠든 결과와 목적만 보면 ‘판타지월드 안정화’는 달성한 것 같았다.

“네. 혈육입니다, 아마도….”

리이신 팽은 말끝을 흐리며 자신감 없는 말투로 답했다.

당장에라도 잡아먹을 기세였던 여신들이 갑자기 말투부터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까지 성스럽게 보이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겪었던 모든 위협이 환상과 악몽인 것처럼.

어느새 주위는 ‘고결한 누님’ 혹은 ‘존귀한 여왕’ 같은 여인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별천지, 지상낙원이 됐다.

‘정말로 아들이 맞을까?’

달라진 여신들의 태도를 보며 새삼스레 ‘격’의 차이를 실감했다.

아버지를 들먹인 것만으로….

자신을 간단히 소멸시킬 수 있는 ‘무서운 괴수’들이 얌전해졌다. 저들을 여자 혹은 암컷이라고 정의한다면 내숭이 아닐까.

『신의 아들』

반쯤 장난으로 제주도에서 그런 소리를 했었다. 그리고 최무일이 ‘아버지!’라고 몇 번이나 말했으며 ‘그 남자’도 인정했다.

하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없었다.

도저히 혈육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능력 차이 때문에.

모친 ‘시링 팽’이 ‘불사신’이라고 했던 건 조금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부친의 생존을 알고 있었으리라.

덤으로, 어째서 감췄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답 없이 강하셨기에….”

리이신 팽과 마찬가지로 한무성도 비슷한 생각 중이었다.

필연적으로 엘퍼러의 영웅담을 듣고 자란 그들이 어림짐작한 부친의 능력은 현재 자신들의 약 1.5배 정도.

그들도 ‘8급 프로사냥꾼 자격증’을 땄기에 내릴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심각한 착각이란 말인가!

부친을 곧 따라잡을 수 있다고 떠들던 자식을 보며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째서 그때마다 미묘한…. 난처한 표정을 지었는지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비교 불가』

덤으로 이런 존재가 지구에 남아있었다면 세상이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그 누구도 본연의 재능을 갈고닦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오직 ‘한무일’이란 절대적인 권력자에게 잘 보이려는 생각뿐이 안 할 것이다. 모든 부귀영화가 그에게 귀결되어 있으니까.

신(神)의 그림자만 닿아도 쓸려버릴 모래성(노력)에 투자할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장, 이곳 상황만 봐도 그렇다.

모든 게 한무일을 중심으로 굴러가고 있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건가…. 아니면 정자를 바꿔치기했다던가….”

여전히 본인들을 인공수정이라고 믿는 두 청년은, 아예 ‘나는 누구의 아들이지?’ 같은 마이너스적인 생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이 있었다.

오자마자 여신들의 육감적인 환영을 받은 한무일이 리이신 팽에게.

여성형 괴수들의 시큰둥한 인사를 받은 한유일은 한무성에게.

“너는 부정할 수 없는 내 아들이다.”

“하지만….”

“내 젊었을 시절을 그대로 복사해둔 것 같거든. 심지어…. 유복하지만 부친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란 것까지도. 아! 참고로 난 마마보이는 아니었다.”

“그, 그건…. 좀….”

“당당히 어깨를 펴라! 자랑스러운 내 아들아!”

“아, 아버지….”

대사는 아무래도 한유일과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한무일은 씩 웃었다.

사냥꾼이 쌓아온 [업보]는 거짓말을 안 하기에 자랑스럽다고 확신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이랴?

한무성과 리이신 팽은 ‘적당히’를 모르는 괴수의 흑백논리처럼 극단적이었던 자신의 박애주의와 희생정신을 닮지 않고 잘 성장해줬다.

“네가 무슨 생각 중인지 다 안다.”

“예?”

“나처럼, 괴수처럼 될 필요는 없다.”

“그, 그건…!”

“언제까지고 인간답게…. 연애도 적당히 하면서 지구를 부탁한다.”

< [68화-4] 살아있는 전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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