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85화 (285/287)

< [68화-3] 살아있는 전설 >

인생의 황혼기나 권태기는 아니지만, 살면서 최고의 즐거움은 ‘먹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무일은 낚시를 즐기기 시작했다.

여전히 별미 중의 별미로 통하는 암투나.

포식자를 알아보는 이 ‘괴수 참치’가 덤벼들지 않는 탓에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더욱 도전정신이 불타는 걸지도 모른다.

『마법으로 뚝딱?』

물고기를 잡겠다고 저수지의 물을 다 퍼낼 순 없잖은가?

게다가 낚시꾼의 마음이란 게 있다.

생선가게를 놔두고 어째서 물가에서 시간을 허비하느냐고 할 순 없는 법. 이것이 인생이고 철학 아니겠는가!

아무튼, 오늘은 [예지] 같은 편법까지 동원해서 명당을 잡은 보람이 있었다.

훼방꾼이 셋이나 와서 떠들썩하게 했음에도 암투나가 걸린 것이다. 아니, 이들이 ‘미끼’가 되어준 덕분에 쉽게 낚은 걸지도?

퍽! 퍽! 퍽!

무일의 왼팔에서 쏘아진 촉수들이 암투나 아홉 마리의 단단한 머리를 관통했다. 이렇게 한꺼번에 안 잡으면 기겁하며 도로 숨어버릴 테니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암투나가 흘린 ‘은색 피’가 뭉치며 사람의 형태가 됐다.

“용사님! 오늘은 대박이네요!”

만나고 2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용사님’이라고 부른다.

커다란 암투나를 무슨 고등어 쥐듯 간단히 옮기는 여인.

하이엘프 대사제의 몸매를 보고 혹했던 최무일이지만, 눈앞의 여성에게만큼은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지옥에서 제법 지겹도록 봐온 상대였으니까!

존재 자체가 ‘판타지’ 같은 ‘궁극의 여체’였지만 이 여자만은 사절이다.

『한세리』

겉모습은 지구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에쏘스트 문세웅의 파트너 ‘한세리’와 같았지만, 완전히 별개의 영혼이다.

굳이 말하자면 분리됐다고 할까?

좀 더 간단히 정의하면 그녀가 바로 필살기 ‘마기나로크’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싱크로율 100% 위업을 달성한 용사에게 귀속된 영혼.

“미끼 운이 좋았지.”

“용사님도 참~. 운도 실력이랍니다!”

마법이 얼마나 만능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초대형 냉장고가 여러 개 딸린 부엌이 초원 한복판에 등장하고, 한세리가 한 마리를 제외한 모든 암투나를 냉장고에 넣는다.

여기까지만 봐도 비현실인데….

앞치마를 두른 그녀가 일류요리사, 뱃사람도 울고 갈 만큼 빠른 손놀림으로 ‘참치 괴수’를 해체하여 요리로 탈바꿈시키기까지는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접시에 하나, 둘, 셋, 넷….

한세리의 ‘암투나 정식(定食)’이 빠르게 차려졌다.

“할 말은 많겠지만 일단 먹고 하지.”

“아…. 네.”

“알겠습니다.”

“으으….”

비슷하게 생긴 네 남자가 한 테이블에 둘러앉아 조용히 식사했다.

처음에는 그게 상당히 어색했지만, 바로 잡은 싱싱한 암투나로 만든 한세리의 요리가 상당히 훌륭했던 탓에 어느새 다들 적극적으로 수저를 놀렸다.

후식으로 나온 정체불명의 ‘암투나 뼈 젤리’라는 것까지 먹은 후에야 다들 멋쩍은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게 됐다.

물론, 여기에 한무일은 해당하지 않았다.

여기 세 미청년보다 오래 산 연륜이 아니라 이미 앞으로의 전개를, 미래를 알기 때문이다.

‘그랬군, 그랬어.’

최무일을 보자마자 ‘마신 크로마티온의 음모’가 [예지]로 뚜렷하게 전해져왔다.

판타지월드의 신들과 동맹을 맺는다….

그 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해, 방해의 소지가 다분한 자신을 다른 차원으로 유인할 용도로 최무일이 선택된 모양.

신들이 뭉치면 성가신 정도로 그치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한무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그건, 판타지월드 신들의 80%가 ‘여신(女神)’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남신(男神)’들하고는 사이가 안 좋지만, 대세를 뒤집긴 힘들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네.”

핏덩이 같았던 아이들이 이렇게 장성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세리 같은 절세미녀를 똑바로 볼 수 있을 만큼 남성의 지위와 힘도 상승했다.

무일이 저 나이 때는….

미녀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망이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표정을 굳힌 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한무성.

지금부터 [예지]로 읽은 그대로의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존재하며, 때때로 지구의 미래에 영향을 끼친다.

이 아이들이 그만큼 큰 역할을 한다는 뜻이리라.

...당연히 최무일은 예외고.

“은퇴한 프로사냥꾼.”

물론, 여기서 ‘아임 유얼 파더(I'm your father)!’ 같은 답변도 가능하다. 하지만 최무일 때문에 이미 들통 난 내용을 재방송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부친을 자처한다니….

그런 반전드라마 같은 진행은 뻔뻔스럽고 낯뜨거워서 사절이다.

“제 아버지가 맞습니까?”

“그게 중요한가?”

“제 어머니를 사랑하십니까?”

하지만 한은아의 아들 녀석은 상당히 끈질겼다! 게다가 돌려서 말하는 어휘를 구사하지 않는 게 또 자신이나 그녀를 닮았다.

이게 이리도 성가실 줄이야!

『나중에 너도 자식에게 당해봐라.』

이 저주(?)가 지금처럼 와 닿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애당초 대화 자체가 처음이려나?

바로 몇 시간 전에도 한무성과 대화하긴 했지만, 그때하고는 상황이나 관계가 달랐다.

무일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최무일을 살짝 노려봐주면서.

저 녀석이 입만 다물고 있었으면 어떻게든 피해갈 선택지가 있었을 터인데, 현재는 [예지]로 아무리 뒤져봐도 없었다.

“좀 더 유익한 질문 없나?”

“저에게는 중요합니다.”

“내가 무슨 대답을 하든 이미 너는 확신하고 있어. 그리고 세상은, 지구는 과거를 그리워하지 말고 지금처럼 쭉 미래를 향해 나아가야 해.”

“미래요? 그걸 지금-, 읍?!”

마법이란 참 유용하다.

끈질기고 시끄러운 아들은 조용히 시킬 수 있어서.

표현 그대로 ‘입 다물게’ 만들었다. 한무성의 반사 초능력은 물리적인 특수능력에는 강하지만, 이런 ‘상태 이상’ 계열에는 취약하니까.

아니, 무일의 물리력이면 반사를 아득히 넘어설 것이다.

거의 죽겠지만.

“자! 다음 차례!”

무일은 ‘시링 팽’의 아들, 리이신 팽을 쳐다봤다.

앞에서 먼저 필터를 해준 덕분일까?

제법 발전된 질문이었다.

“...어머니는 알고 계십니까?”

“알지. 네가 아쿠버스의 능력을 쓰는 바람에 ‘페이 링의 아들’이 아닐까, 같은 혼란을 겪었던 시기도 있었고.”

“헛! 정말입니까?”

“침대에 누운 링링은 대단히 솔직하지.”

“아…….”

어떤 광경을 상상해버린 리이신 팽은 말이 없어졌다.

참고로 ‘페이 링’에게는 아들이 없다. 아니, 솔라리스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갖지 못했는데, 전혀 잉태하지 못한 게 아니라 도중에 유산했다.

그래서 ‘다시’ 노력하긴 했는데….

한무일의 주치의였던 ‘오돈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궁이 지쳤다.’고 한다. 그래서 여태까지 둘째를 가진 아내가 없는 거고.

페이 링은 그나마 도중에 유산하면서 20년 만에 자궁이 회복됐다. 그리고 현재, 재임신에 성공한 그녀는 극도로 조심하고 있었다.

‘좋은 결과가 나와야 할 터인데….’

생명의 탄생은 [예지]로도 읽어낼 수 없는 모양이다.

성별은 미리 알 수 있지만!

무사히 태어난다면, 선지혜와 마찬가지로 페이 링이 바라지 않았던 ‘딸’이다. 이건 의심의 여지가 없는 100% 확정.

미리 알려주면 임산부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기에 당연히 비밀이다.

“...너도 할 말 있으면 해봐라.”

무일의 시선은 끝으로 최무일에게 향했다.

하지만 역시나 자신을 오랫동안 봐온 녀석이라서 그럴까?

두 아들하고는 확연히 달랐다.

“이미 다 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는 신처럼 모든 걸 알고 계신 분이시니.”

“하지만 신은 아니지. 이처럼 너를 놓쳤으니.”

어떻게 보면 ‘같은 신’ 크로마티온의 안배 때문에 놓쳤다고 할 수 있지만, 무일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가 본 ‘신(神)’이란?

한결같이 남들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존재였을 뿐이다.

판타지월드를 지배했던 신들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미각(味覺)은 남아있으나 식욕(食慾)에서 해방된 그들에게 남은 건 비정상적인 성욕(性慾)뿐.

본능에 대단히 솔직한 생명체였다.

그 덕분에 손쉽게 ‘여신’들을 굴복시킬 수 있었고.

“저에게 이만 자유를 주십시오.”

“탈출한 녀석이 뻔뻔하게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지난날의 잘못을 많이 반성했고 이젠 효도를 하고 싶습니다.”

바로 옆에서 그 말을 들은 리이신 팽은 입술이 간질간질한 모양이다.

모친 최은설을 울렸던 녀석이 효도라…?

판타지월드에 갇혀 살았던 최무일은 모르겠지만,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은 최은설은 다시 요직을 맡는 조건으로 ‘새로운 정자’를 요구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구하려면 대단히 비싸니까.

그녀의 요구를 정부에서 받아들였다는 얘기까지는 어찌어찌 들었는데, 그 뒤로는 잘 모르겠다. 역시나 ‘임신’ 같은 ‘생명의 탄생’은 [예지]도 신통치 않았다.

“네 말이 거짓말이란 것에 내 자리를 걸 수 있지.”

한무일의 자리.

무척 멀게 들리겠지만, 가장 알기 쉬운 걸로는 ‘하이엘프의 충성’ 같은 걸 들 수 있다. 판타지월드의 여신들은 그를 흠모하며 자발적으로 따라는 거라 힘들지만.

아무튼, 한무일에게는 무형(無形)의 재산이 많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최무일이 언성을 높였다.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아버지가 본인의 ‘자리’를 걸었다는 건, 자신을 전혀 믿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무슨!”“그리고 이 말을 듣고 발끈, 솔깃한 네가 10년쯤 얌전해지리란 사실도.”

“......”

“네 말처럼 많은 걸 아는 내가 장담하건대, 최무일, 이 불효막심한 아들아! 네가 개과천선하려면 앞으로 23년쯤 남았다.”

“23년….”

“이 말을 안 해주려던 이유는, 듣고 자포자기한 네가 더욱 삐뚤어져서 기간이 더 늘어나기 때문이란다.”

“캑!”

그 말을 듣고 좌절하는 최무일.

한무일은 무릎을 꿇고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아들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미래를 위해 지구를 속였듯이.

그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이렇게 속였다.

개과천선하려면 23년 남았다고 했지만, [예지]로 본 최무일이 정신 차리려면 78년 뒤…. 사실상 무기징역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거짓말을 해줌으로써 미래를 바꿨다.

『선의의 거짓말』

이번처럼 ‘신’ 같은 변수가 또 없다면 최무일은 18년 뒤에 석방될 것이다.

녀석에게는 이번이 기회였던 셈!

마신 크로마티온이 개입하면서 원래 예정되어 있던 38년이 대폭 줄어들었다. 이건 ‘한순간의 변덕’만으로도 미래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존재를 만난 영향이 아닐까?

그렇게 따지면 한무일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그리 쉽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다.

최무일에게는 놀리듯이 말했지만, 실제로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걸로 대충 교통정리가 된 것 같은데….”

수풀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부엌과 테이블이 마법처럼 사라졌다.

무일은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한 두 아들을 돌아봤다. 그가 계속 지구에 남아있었다면 없었을 아이들을.

안 태어난다는 게 아니라 지금처럼 올바르게 자라지 못했을 거란 뜻이다.

20년 전의 지구처럼 응석받이였을 테니까.

편모가정(偏母家庭)이었던 탓에 애들이 ‘마마보이’ 기질이 있지만, 망나니로 자라는 것보다는 100배 낫다고 본다.

최무일 같은 녀석이 실질적인 힘마저 갖췄다면….

개구쟁이의 장난 선에서 그치지 않는다.

“아, 아, 아….”

“아빠 아니면 아버지. 그도 아니면 파파? 뭐든 편하게 불러.”

“큼! 아버지는 언제까지 모습을 감추실 겁니까?”

“앞으로도 쭉.”

이건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문제다.

입의 봉인의 풀린 한무성은 대단히 불만스럽다는 얼굴의 한편으로는 ‘역시!’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속내를 들여다보자면?

어째선지 모친 한은아가 조금도 한무일을 그리워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입으로는 ‘죽은 남편을 다시 보고 싶다.’고 하지만 그녀는 거짓말에 서툴렀다.

다행히도 그런 한은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정치인 중에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아저씨. 언제 돌아와요?)

판타지월드 ‘판도라’에서 통신이 들어온 것도 그때였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최은비.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이 ‘아저씨, 오빠, 여보.’라는 패턴을 예상했지만, 최은비는 바로 그 문턱에서 멈추고 역으로 후퇴했다.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저는 엄마가 될 자신이 없어요.』

선지혜나 유키나 미나미 같은 철부지 엄마도 있건만! 최은비는 성장함에 따라 자신의 모친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깨달았다.

닮고 싶어하는 것도 당연지사!

하지만 ‘그런 엄마’가 될 용기나 자신이 없던 그녀는 현재까지도 평행선이었다. 달리 표현하면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다는 집착이 없었다.

아무튼….

최은비는 엉망진창인 판타지월드 토지개발에 없어선 안 되는 존재다. 대지의 신(神) ‘올란드’가 그녀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 위대한 정령을 옮긴다고 얼마나 고생했던가….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왜?)

(괴수들의 조짐이 심상치 않아요.)

< [68화-3] 살아있는 전설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