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2] 살아있는 전설 >
지인…? 온몸을 던져가며 애무하는 아가씨들을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이복동생의 태도는 뻔뻔함을 넘어 감탄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한무성은 이성(異性)에게 관심이 없었다.
대화를 나눠보면 ‘존경하는 어머니’와 ‘강해지는 방법’에 관한 얘기뿐.
‘재미없게 사네.’
여체의 환상을 성인식(15살) 이전에 깼을 만큼 조숙한(?) 영웅호색(英雄好色)의 소유자 ‘리이신 팽’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류였다.
물론, 본인의 생각이 그렇다는 거고….
일찌감치 동정을 땐 ‘하북팽가 도련님’은 그 뒤로 지극히 건전한 생활을 해오고 있었다. 사춘기에 품었던 ‘여체의 환상’이 사라지면서 흥미를 잃었달까?
부친이 걸었던 길(?)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답습 중인 두 청년은, 울창한 숲과 깔끔한 갯벌로만 이루어진 제주도를 질주했다.
이윽고 당도한 하이엘프 마을.
“여기도 많이 변했군.”
“네. 5살 생일에 왔을 때는 정말 볼품없었죠.”
“이젠 성소(聖所)로서 구색을 다 갖췄네.”
처음에는 관광지 같은 방안도 나왔으나 그 결정권자(한무일)가 사망하며 붕 떠버렸다. 그렇다고 침략자도 아닌 하이엘프를 초능력자들처럼 ‘노예’ 같은 홀대도 무리.
결국에는 ‘황제 재단(財團)’에서 맡기로 했다.
그 시작과 목적은 ‘사생아가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비 보조’였지만, 그 대전제부터 틀리는 바람에 돈이 쌓이기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정자』
이런 걸 자궁에 넣을 수 있는 시점에 이미 평범한 집안이 아니니까.
그리하여 ‘황제 재단’의 자금은 제주도에 투입됐다. 하이엘프를 거둬들인 ‘엘퍼러’에게 책임이 있고, 그녀들도 그분만을 영원히 따르겠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로 탈바꿈했다.
처음에는 각인의 영향이 대단히 컸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자식은 부모의 종교를 따라가는 법.
제주도에 격리된 탓에 사회경험이 적고, 여전히 살아있는 조상님들에게 ‘우리의 주인님은 영원히 그분뿐’이라는 식으로 주입식교육을 받으며 결과는 뻔하다.
“다른 세계에 온 기분인걸요.”
“흠. 여기서 우리는 ‘신의 아들’인가.”
“신의 아들치고는 평범하지만요.”
리이신 팽과 한무성은 농담 아닌 농담을 주고받으며 계속 이동했다.
최무일이 이곳으로 도망쳐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의 아들』
이것만 증명할 수 있으면 적어도 이곳 제주도에서는 막강한 권세를 누릴 수 있다. 그 어떤 엘프도 ‘신의 아들’에게 절대복종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이미 이곳은 하나의 종교국가.
하이엘프의 일과는 하나부터 열까지 ‘한무일’이 연관되어 있다.
그 예로, 여성은 결혼, 연애, 성교 금지!
너희는 모두 신의 여자라는….
종족의 존속을 위해 순혈(純血)을 이어야 한다는 목적이 변질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이엘프 여성은 예외 없이 ‘처녀 수태’를, 인공수정만 한다. 그랬다가 몇 년 전부터는 아예 ‘임신하는 마법’을 개발하며 과학의 도움도 필요 없어졌다는데….
“형님은 탈주자의 목적이 뭐라고 보십니까?”
“도망자가 엘프 하렘을 꿈꿀 리는 없고….”
제주도에는 온통 하이엘프 여성뿐이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여성’이란 수식어도 사라지고, 하이엘프는 원래 ‘귀가 뾰족하고 마법을 잘 다루는 절세미녀’란 고정관념이 등장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닌데….
어느새 수십 km를 달린 둘은 ‘하이엘프 남성’의 옷깃조차 보질 못했다.
임신하는 마법마저 등장하면서 종족 번식에 남성이 필요 없어지고, 사고방식도 ‘내 남자는 오직 그분뿐!’이니 당연했다.
『아들?』
아들을 갖고 싶어!
그런 이단자가 나올 법도 한데, 20년 동안 그런 사례는 없었다.
이건 ‘하렘의 왕’을 자처한 한유일과 ‘엘퍼러 효과’ 탓인데, 자연스럽게 한무일이 ‘남자를 싫어한다!’란 해석이 나와버렸다.
하이엘프가 자신들의 신이 싫어할 짓을 할 리 없었다.
“그보다는 차원이동일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아! 그럴 수 있겠네.”
차원이동문 같은 슈퍼월드의 과학을 빌리지 않고 타인을 다른 차원으로 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자는 오직 ‘하이엘프 대사제’뿐이다.
신을 모신 최초의 신도.
동족을 이끄는 지도자.
가장 아름다운 하이엘프.
이 전부가 그녀를 부르는 수식어들이다.
신(한유일)께서 공증한 ‘가장 아름다운 엘프’인 그녀는, 가장 먼저 사랑받고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친인척들에게 신을 뵙도록 주선했다고 전해진다.
그리하여 감복(흡혈+각인)한 하이엘프 종족은, 노리개(아내)와 감금(피라미드)의 삶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이 신화(神話)의 시작.
『세르네스 사우스엘븐』
리이신 팽과 한무성은 그 대사제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최무일이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에게 부탁해서 다른 차원으로 탈출한 후라면 추적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차원이동은 정말 찰나에 끝나니까.
바로 눈앞에서 ‘0.5초’ 차이로 최무일을 놓치는 광경이 선했다.
‘그럴 순 없지!’
한무성과 리이신 팽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속도를 올렸다.
여기가 섬이라서 그나마 다행일까?
이주민 하나 없이 토박이 하이엘프만 사는 땅.
태아로 있을 때부터 신(神)뿐이 모르고 자란 하이엘프는 순진무구했다. 그리고 어렸다. 그래서 그녀들은 무작정 질주하는 두 남자를 막지 않았다.
검문도 없고 경비도 없다.
그 덕분에 마법으로 세워진 대신전까지 단숨에!
같은 시각,
“나는 신의 아들, 최무일이다!”
둘의 예상처럼 최무일은 대사제를 만나고 있었다.
한무성과 리이신 팽처럼 ‘특별한 아들’이 아닌 청년은 얼마 안 남은 내공을 쥐어짜서 이곳까지 왔다.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은 그런 최무일을 물끄러미 보았다.
피라미드에 잠입한 한유일이 ‘여기서 가장 예쁘다!’라고 칭찬했던 ‘완전무결한 미소녀’의 노골적인 시선을 받고 얼굴을 붉히는 청년.
아랫도리도 피가 쏠리려는 것만은 어떻게든 억제하고자 애썼다.
‘침착하자, 침착해. 여기서 실수하면 다시 그 지옥으로 끌려간다고.’
눈앞에 하이엘프는 성욕의 대상이 아니라 유일한 구명줄이다.
최무일은 구름 하나 없는 청명한 하늘 방향으로 시선을 피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는 내공구결도 암송….
그러한 노력의 보답일까?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는 마법뿐이라고 생각하면 오산! 전설에 나오는 엘프처럼 상대의 거짓말 여부를 분별하는 ‘깨알 같은 능력’도 있다.
“신의 아들이시군요, 최무일 님.”
“그렇다!”
“하면, 이 신의 노예에게 무슨 용무이신지요?”
노예를 자처하는 그녀 때문에 다시 불끈불끈 하려는 몸뚱이를 간신히 진정시킨 최무일.
대사제는 모르지만, 그는 이 환상적인 하이엘프를 안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에게 차원이동마법을 써서 그 지옥으로 보낸 장본인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원망하는 건 아니다. 예뻐서 용서해 주는 게 아니라, 이게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의 일이기 때문이다.
추방지 ‘판타지월드’가 일방통행인 이유.
그건 쌍방향이 연결된 차원이동문이 아닌 차원이동마법을 써서 그렇다.
지옥에 던져버린다고 할까!
“나를 슈퍼월드로 인도하라!”
“...송구하게도 소녀는 최무일 님을 그곳으로 보내라는 신탁(神託)이나 공문을 받지 못했어요. 그러니 그 소원은 들어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신의 아들이다!”“신은 아니시죠.”
“그…. 흠….”
딱 잘라 말하는 세르네스 사우스엘븐 때문에 최무일은 말문이 막히며 초조해졌다.
이건 그가 예상했던 시나리오가 아니다!
아버지 당사자가 아니니 ‘명령’을 받지 않겠다는 그녀의 태도는, 이 대신전 밖의 일반적인 하이엘프와 달랐다.
그녀들은 ‘신(神)’만 들어가면 뭐든 따르니까.
과거에 이걸 악용해서 하이엘프를 성희롱했던 ‘신의 아들’이 있었다. 이 기막힌 생각을 해낸 당사자에게서 들은 정보니 틀릴 리 없다.
지옥에서 잘 지내고 있으려나…?
‘뭐가 다른 거지?’
하이엘프의 종교가 탄생한 배경과 역사를 모르니 당연했다.
대사제라고 불리고 있지만,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은 ‘신도’이기 이전에 본인의 표현대로 ‘흡혈귀 노예’였기 때문이다.
각인은 대물림되지 않기에 후손들은 순수한 ‘신도’지만.
그 차이가 여기서 드러났다.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에게 ‘신의 아들’은 민간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최무일 님께서는 곤경에 처하신 모양이군요.”
호칭에서 알 수 있듯 ‘주인님의 자식’을 우대했다.
생판 모르는 남남은 아니란 뜻이다.
“......”
“그렇다면 개인적으로 도와드릴 순 있어요. 주인님께서도 아들의 위기를 소녀가 외면하길 원치 않으실 테니까요.”
“아! 그렇다면…!”
“네. 차원이동을 도와드릴게요, 다만….”
“다만?”
“아! 아니요, 아무것도.”
최무일은 뭔가 찜찜함을 느꼈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따라오라는 대사제의 뒤를 바짝 쫓아가며…. 국보급 하이엘프의 요염한 엉덩이 율동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길 얼마나 흘렀을까?
어느새 그는 거대한 마법진 한가운데 있었다.
이전에도 한 번 겪었던 광경!
그때는 죄인 신분으로 꽁꽁 묶인 채 있었지만, 지금은 당당히 서서 차원이동마법이 발동되길 기다렸다.
‘이제 난 자유다!’
환골탈태하겠다는 본래의 목적은 실패했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슈퍼월드에는 ‘영약’을 대신할 ‘마정석’이란 게 있으니까!
편하게 ‘금수저 동생’ 덕을 좀 보려다가 실패했다. 그러니 이번에는 편법이 아닌 직접 돈을 버는 정공법으로 자유를 얻으리라!
그런 꿈에 부푼 최무일은 어깨의 긴장을 풀었다.
마침내, 마침내…!
자신은 진정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잠깐~!”
“멈춰라!”
대신전 대문이 덜컹 열리며 또 다른 불청객이 등장했다.
본능만으로 마법을 다루는 마법사지만, 엘프가 ‘마법’이라고 부르는 ‘마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두 미청년.
리이신 팽과 한무성이 마법진 안으로 겁도 없이 뛰어들었다!
그 둘과 달리 ‘마술’에 대한 상식은 좀 알고 있는 최무일은 경악했다.
“이대로 발동된다?!”
자신을 붙잡으러 온 형제들과 함께 차원이동이라니!
자유가 저만치 도망치고 있었다.
아니, 그전에, 변수가 섞인 이 차원이동마법이 제대로 발동될지 의문이다. 그런 불안감을 떨쳐낼 새도 없이,
번쩍!
세 남자는 지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하이엘프 지도자, 세르네스 사우스엘븐 대사제는 ‘제대로 발동된 마법진’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위험했다고.
동시에 ‘신의 아들’에게 사죄했다.
‘어쩔 수 없었어요.’
원래는 최무일의 소원대로 슈퍼월드로 보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물질’이 끼면서 그녀가 한 번의 차원이동으로 보낼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해버렸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에 좌표를 수정했다.
이 또한 하이엘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업적이고 실력이었지만, 그녀에게 차원이동마법을 가르쳐준 존재가 ‘신(神)’이니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부족한 마력은 주인님께서 보태주시겠죠.”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주인님을 귀찮게 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
그리고….
장소를 옮겨서 이곳은 지구가 아닌 몬스터월드.
무시무시한 괴수들의 고향!
지구의 1,300배에 달하는 광대한 크기의 ‘아르테르 행성’에 불시착한 미청년들은 각자 다른 의미로 경악했다.
“도대체 여긴 어디야?!”
“우와! 뭔 나무가 이리 커?”
“헉! 어째서 아버지가?!”
소란스럽게 떠드는 세 청년을 향해.
그들과 어딘가 비슷하게 생긴 남자가 작게 말했다.
땅속으로 자취를 감춘 참치를 느끼며,
“쉿! 조용히 해. 암투나가 도망치잖아.”
< [68화-2] 살아있는 전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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