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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283화 (283/287)

< [68화-1] 살아있는 전설 >

[68화] 살아있는 전설

학명: 독깨비(독을 품은 요괴)

서식지: 산골

특징: 안개에 닿으면 부식

위험도: 7종 보통

비고: 도주가 상책입니다.

***

금수저를 너무 만만하게 본 게 틀림없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최무일의 오판이었다. 이 이복동생은 다른 형제들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사람들은 부친으로 모자라 ‘뛰어난 모친의 피’마저 이어서 그렇다고 가볍게 여겼지만, 그렇게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지금!

‘잘못 판단했어!’

한무일에게 탈탈 털린 마왕과 함께 생활하길 3년. 지옥 재건사업의 노동자로 일하면서 수재 카드로 한 게임으로 온갖 보물을 탈취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진귀한 아이템으로도 눈앞의 이복동생을 이길 수 없었다. 워낙 사기적인 아버지야 그럴 수 있다지만….

“제길!”

만남은 좋았다.

대화도 잘 풀린 것 같았고, 부친이 살아있느니 어쩌니 얘기까지 쭉쭉 진행됐었다. 하지만 리이신 팽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아니, 믿지 않는 것 같았다.

돈을 빌려서 어떻게 쓰겠다는 건지부터 속였으니…. 거짓말쟁이로 낙인 찍힌 시점에 무슨 말을 해도 통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다짜고짜 체포하겠다고 할 것까지는 없잖은가!

파지지직!

하북팽가 아들내미에게 중국의 전략무기 ‘폴리검’이 있다는 건 사뭇 말이 안 되지만, 누구의 아들이란 것만으로도 모든 게 말이 됐다.

보기만 해도 섬뜩한 전기를 휘감고 있는 검은, 초능력을 제외한 그 어떤 특수능력도 흡수한다고 전해지는 장비형 괴수.

그 대상에는 최무일이 자랑하는 내공도 예외가 아니었다.

소드마스타의 검기(劍氣)를 쭉 흡수해버리니 답이 없다.

“이만 포기하시고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십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리!”

“외람되지만, 형은 이미 제 [예감]에 잡히셨습니다. 사냥감이란 뜻이죠.”

“...으득.”

부정하고 싶지만 그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포기할 순 없었다.

최무일은 아껴뒀던 비장의 아이템을 꺼냈다. 이거야말로 혹시라도 부친에게 걸리면 쓰려고 아껴뒀던 공간이동 아이템!

공간이동 방해전파가 깔린 ‘마왕의 성’ 같은 곳에서도 탈출할 수 있도록…. 함정을 파고 기다라는 마왕에게 제대로 물 먹이기 위해 개발된 아이템이다.

충전식이 아니라 소모품이란 게 뼈아프지만….

‘여기서 써야 할 줄이야!’

빠르게 좌표를 설정한 최무일은 중국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빈자리에 뇌전이 떨어트리며 도착한 리이신 팽은 낭패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예감]은 그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한국 아니면 일본.

뇌신이라고 불리는 8종 프로사냥꾼으로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좀 더 범위를 좁혀보려고 했지만, 허공에 녹아들 듯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깔끔히 사라진 사냥감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도련님.”

“...한국과 중국 정부에…. 아니, 형제들에게 맡기는 편이 낫겠군.”

부친이 추방지(판타지월드)에 살아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다. 물론, 모친 ‘시링 팽’이 이상한 소리를 하곤 했지만.

자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며,

『우리 모자(母子)는 한 공자님께 선택받았어요.』

...라고 말이다.

한국의 정자 은행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정자’로 태어난 자신에게 ‘선택’ 운운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형제자매 중에서 자신이 좀 특출난 편이긴 하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형제자매가 둘이나 있었다. 어쩌면 그 이상.

리이신 팽으로써는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였다.

게다가,

‘부친께서 뭐가 아쉬우셔서 숨으신단 말인가?’

속물 같지만, 부귀영화(富貴榮華)가 대기하고 있다.

정실 혹은 첩으로 알려진 많은 여인이 세계를 주무르고 있으며,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재혼하지 않고 있다.

기적을 바라며….

그러니 리이신 팽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얘기였다.

게다가 괴인들이 들려준 행성파괴자 ‘오더마인드’의 강함은, 아무리 부친이라도 동귀어진이 한계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거기서 살아남았다면 ‘절대신’이라도 되지 않는 한 무리.

그럼에도 한무일의 생존을 신앙처럼 믿는 자들이 많다. 그걸 탐탁지 않게 여기는 각국 정상들이, 권력자들이 아무리 ‘엘퍼러는 죽었다!’고 노래를 불러도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최무일이 바람을 넣는다면?

혼란은 불가피하다.

(어머! 팽? 네가 웬일이야?)

(긴히 상의할 문제가 있어서 연락했습니다, 누님. 탈주자가 있습니다.)

(탈주자?)

(추방지에서 이복형이…. 최무일이 탈출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거네?)

(맞습니다.)

리이신 팽이 가장 먼저 연락을 취한 곳은 한국의 목포. 지구의 내로라하는 젊은 천재들의 각축장이라는 ‘막찌몬쓰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있는 한유지였다.

그녀의 별명은 ‘여왕님!’인데….

괴수와 인간, 괴인을 가라지 않고 ‘수컷’이기만 하면 누구나 무릎 꿇고 복종시키는 마성의 페로몬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엘퍼러 여성판’이라고도 불린다.

세계의 절반이 아군, 나머지 절반은 적군…. 일 것 같지만, 감히 한유지를 상대로 질투나 적의를 불태우는 여성은 없다.

반대로 찬양하며 따르는 편인데, 그 이유는,

『너! 이 여자와 결혼해.』

...한유지는 세계에 다시 없을 성공률 100% 중매쟁이였기 때문이다!

멋진 남자와 사귀고 싶으면 여왕님을 찾아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

아무튼, 사랑의 전도사로 활약하는 한유지가 합세하면 지구의 모든 총각과 처녀가 협력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약점은 있다.

유부남과 근친(近親)에게는 먹히지 않는다는 매우 사소한 약점이.

(곤란한 부탁이네~, 내 특기는 머릿수인데.)

한유지가 전화 몇 통화만 하면 한국이…. 지구의 모든 총각이 움직인다.

하지만 그 쉬운 방법을 쓰지 말라니?

(누님만 믿습니다.)

한유지의 능력은 페로몬만이 아니다. 그뿐이었다면 혈기왕성한 사내들이 목숨을 내던져가며 그녀를 덮쳤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명도 성공하지 못하고 고자가 됐다.

한유나의 전투능력은 형제자매 중에서 2위. 지켜주겠다는 고위괴수가 너무 많은 탓에 경험부족만 아니었다면 1위도 해볼 만했을 것이다.

게임으로 치면 만능형 캐릭터.

아니, 애초에 세계의 절반을 아군으로 둔 여자와 싸운다는 게 말이 될까?

(정말 귀찮은 동생이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밥이나 사. 나는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 불쌍한 대학원생이니까.)

밥 사게 해달라고 애걸복걸하는 남자들이 줄을 선 한유지에게 ‘식사 한 끼 대접’할 수 있다는 건 영광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건 일반인 얘기일 뿐! 리이신 팽은 가볍게 약속을 잡으며 통화를 마치자마자 일본 도쿄로 연락했다.

여긴 직통이 힘들었다.

공사다망(公私多忙)한 동갑내기 이복남매 ‘카라 미나미’는 인류연구회 회장이란 직함을 성인식 전부터 달고 있는 진짜 천재였으니까.

비서를 둘이나 거친 후에 간신히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리이신. 탈주자 건이라면 알아서 할 테니 다른 용무 없으면 끊는다.)

(어?)

(그 한마디로 없다는 걸 알겠어.)

(하…. 하…. 다 안다면 조심하는 편이 좋다는 것도 알겠네.)

근친임에도 불구하고 최무일은 카라 미나미를 짝사랑했다.

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 별것도 아닌 일로 ‘남자를 무더기로 몰고 다니는 언니’ 한유지에게도 없는 불미스러운 소문이 따라다녔던 적도 있다.

그래서 카라 미나미의 말투는 냉랭했다.

(조심? 최무일을? 그 오라버니는 여전히 바보야. 황무지에서 몇 년 썩더니 이젠 이성마저 굳어버린 걸까나.)

같이 놀자고 보채는 어머니 ‘유키나 미나미’와 왼손으로 체스를 두며, 오른손으로는 무언가를 바쁘게 쓰고 있는 인류연구회 회장.

책상에 붙어사는 탓에 그 능력이 알려질 기회가 없었다.

그나마 알려진 능력은 괴수의 전매특허인 완전기억. 다른 하나는 매우 희귀한, 연금술이라고도 불리는 물질변형.

마법도 쓸 수 있는 모양이지만….

대부(代父) ‘엑시리얼 온드미온’의 조기교육으로 완성된 그녀의 결벽증을 해결하는 용도로, 청결과 청소할 때만 쓴다.

(위치도 알아?)

(어. 제주도.)

(제주도…? 하이엘프 거주지는 왜…?)

(당장은 모르지. 하지만 엘프의 고향이 어딘지를 생각해보면 의외로 간단한 문제가 아닐까.)

(추방지, 판도라.)

(빙고. 나는 바쁘니 이만 끊을-, 어머니! 은근슬쩍 나이트를 옆 칸으로 옮기지 마세요!)

나머지 대화는 아련하게 들렸다.

귀엽게 ‘키리 짱! 엄마도 한 번쯤 이기고 싶어!’라거나, 냉랭하게 ‘승부의 세계에서는 모녀지간도 없어요.’라는 목소리가….

리이신 팽은 제주도에 갈 준비를 했다.

주위에 공간이동 계통의 초능력자나 괴인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문의 후계자인 그가 혹시라도 공간의 틈새에 끼어 비명횡사할 수도 있기에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전용기는 요란한데….’

잠깐의 고민 끝에 리이신 팽은 모친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어쩌면 이편이 더 요란할 수도 있지만.

“웨일풍을 타고 제주도에?”

“네, 어머니.”

“...하이엘프 중에 마음에 둔 아가씨가 있는 거니?”

“그럴 리가요.”

“흐응~, 그렇다면 서두르는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아까 전화와 관련이 있는 거니?”

역시나 전직 사냥꾼다운 ‘시링 팽’의 [예감]이다.

시간도 없고 감출 이유도 딱히 없었기에 리이신 팽은 탈주자가 있음을 설명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조용히 들은 모친 왈.

“조용히 처리해야겠네. 기다려보렴.”

“네? 하지만….”

“우리 리이신은 아빠를 쏙 빼닮았네. 뭐든지 혼자서 해결하려는 버릇. 하지만 그게 만용이나 과신이 아님을 이 엄마는 잘 안답니다.”

“......”

“그러나 때로는 남에게 의지하도록 하세요.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던 그이가 마지막에 ‘지구의 미래’를 인류에게 맡겼듯이.”

발랄한 말투는 ‘남편을 그리워하는 아내’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리이신 팽은 잠자코 모친의 뜻을 따랐다.

왜냐하면,

(은아 언니, 어디세요?)

(영국인데….)

(영국? 또 그 색마를 쪼러 갔구나? 다름이 아니고 언니의 아들 좀 빌리고 싶어서.)

유럽에 있다면 지구 반대편이다.

그렇다면 바늘과 실처럼 모친 ‘한은아’와 늘 함께하는 ‘한무성’도 유럽에 있다는 뜻이리라.

리이신 팽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살 터울의 이복동생인 한무성은 ‘친아들’이란 칭호를 증명하듯 한무일의 자식 중에서 가장 강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경쟁의식을 느낄 수밖에.

그걸 모를 리 없는 모친이 한무성을 찾는 이유가 뭘까?

(최은설 여사의 아들이 제주도에?)

(네, 언니.)

(...알겠어. 나중에 결과가 나오면 연락할게.)

(고마워요.)

그걸로 통신은 끝났다.

근질거리는 입술을 꾹 누르며 기다리던 리이신 팽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남에게 부탁하면서까지 넘기느냐고.

시링 팽의 대답은 간결했다.

(리이신. 방심은 좋지 않답니다.)

(방심은….)

(혼자 쓰러트릴 수 있다고 쭉 생각하고 있잖아요. 이 어미의 말이 틀렸나요?)

(...맞습니다.)

(저는 상실의 고통을 또 느끼고 싶지 않답니다. 방심은 아니었지만, 그이도 죽을 뻔했었죠. 하지만 리이신. 당신은 부친과 달리 불사신이 아니에요. 목숨을 소중히 해주세요.)

(불사신…?)

(아차! 말이 길어졌군요. 웨일풍을 빌려줄 테니 다녀오세요.)

찜찜함을 뒤로하고 리이신 팽은 제주도로 날아갔다.

모친은 협공을 제안했지만….

지구 반대편에 있는 형제와 어떻게 함께 싸운단 말인가?

...그래야 했는데 ‘최강의 후예’는 이미 도착해서 역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간 평온하셨는지요, 팽 형님.”

“어떻게 벌써…?”

“귀환석을 늘 휴대하는 지인 덕분에 어렵지 않게 올 수 있었습니다.”

< [68화-1] 살아있는 전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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