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5] 영웅의 자손들 >
무일은 정말로 눈을 감고 차분히 기다렸다. 하지만 비행기가 착륙하고 손님들이 내릴 때까지도 최무일의 움직임은 없었다.
한유일의 말처럼 북극에서 뛰어내린 걸까?
일단은 의심을 피하고자 다른 손님들 틈에 섞여서 내렸다.
...어디까지나 겉보기에 그렇다는 얘기고, 마법으로 만든 환영을 보내둔 채 몸을 숨긴 무일은 어울리지 않는 잠복을 시도했다.
‘여전히 이해가 안 돼.’
무슨 수로 자신의 [예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공극의 마녀’ 쏠비얀의 갑작스러운 등장으로 풀렸다. 차원이동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해낸 그녀는,
“무일 님!”
활짝 웃으며 그에게 덥석 안겼다.
그녀의 뒤편에는 모범생 분위기의 미소녀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제가 보는 앞에서는 체통을 지켜주세요, 어머니….’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마녀 같다고 할까?
과거의 쏠비얀 성격과 옷차림을 빼다 박은 소녀의 이름은,
“에일라.”
“거의 3년 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 저보다 오래 사실 것 같으니 인사치레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래.”
“...이럴 때는 좀 섭섭한 표정을 지어주십시오. 아무튼, 마신 크로마티온이 제국 북서부에 나타나서 행패 부리고 있습니다.”
무일은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잠복하자마자 몬스터월드에서 사고 치기 시작한 마신.
『최강의 마신 - 마법의 정점, 크로마티온』
최무일과 크로마티온의 접점은 찾기 힘들다. 활동했던 차원이 다르니까.
판타지월드와 몬스터월드.
괴수가 양 차원에 다 서식하니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신처럼 거대한 존재가 왕복하기에는 지나치게 ‘좁은 문’이다.
다만….
‘내가 가능한 일을 ‘마법의 신’이 할 수 없을까?‘
겉보기에는 인간 수준으로 작은 편에 속하지만, 한무일의 정수가 깃든 영혼석에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영혼이 살고 있다.
육체가 없기에 부담은 거의 없다시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이 정도 숫자가 되면 어마어마한 용량이 돼버린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마법위력도 그만큼 상승했다는 점.
그럼에도 늘 차원이동은 쉽지 않다.
수색에 잔챙이 사내들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소위 ‘광신도’라고 불리는 여자들은 차원이동의 동력원(動力源)으로 쓰인 직후에 전부 탈진해 있는 상태다.
“도발이군.”
올 테면 와보라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최무일이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건가?’
이런 구차한 짓까지 해서 마신에게 무슨 득이 있을까?
만나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안 만나보고 무시한다는 선택지는 없다.
몬스터월드, 아르테르 행성에서는 마신 둘을 씹어먹은 한무일을 ‘무일신(武一神)’으로, 줄여서 무신(武神)으로 숭상하고 있는데, 이미 국교(國敎)로 채택된 나라가 적지 않다.
그 주축은?
『엘퍼로드 교국』
신생국가지만, 인펠리아 제국과 오르페온 마도제국, 모르베토 왕국을 포함한 34개 중소국가를 합친 대제국이다.
순수한 육지면적으로만 따져도 유라시아 대륙의 약 57배에 달하는 광대한 영토!
인구는 마신의 위협이 거의 사라지며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추측불가!
한무일은 ‘시황제’ 겸 ‘구세주’로 되어있다.
이집트에서 초대 파라오를 신격화한 것과 비슷한 맥락.
“아버지. 바로 가셔야 합니다.”
“그 정도로 다급한 건가…. 슬라리스는?”
“성녀님께서 견제하고 계십니다.”
한무일과 인연 있는 모든 여성이 아이를 가진 건 아니다.
그를 따르는 여인 중에서 독하지 않은 여성은 없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가진 수를 다 동원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백만마녀’ 슬라리스.
아이러니하게도….
엘퍼로드 교국의 ‘2대 황제’는 ‘괴수의 자손’이 가져갔다.
『인펠리아』
인펠리아 제국의 수호자였던 ‘캥거루 괴수’는 딱 하룻밤, 사정사정해서 한무일과 지구에서 관계를 갖더니 단번에 임신하고 출산까지 직행했다!
그렇게 해서….
지구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는 몬스터월드로 넘어가도 인간의 형태가 유지됐다. 덩달아 인펠리아 본인도 탈피(脫皮)하더니 완전히 ‘인간형’이 돼버린 게 아닌가!
기가 막혀서 물어봤더니….
‘캥거루 외형이 가죽옷이었다니….’
본체마저 주머니에 들어가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 ‘다용도 캥거루 가죽옷’의 용량이 너무 커서 지구까지 들고오진 못했었다는 것이 인펠리아의 수줍은(?) 설명이었다.
아무튼, 초거대 교국의 ‘2대 황제’는 그렇게 탄생했다.
『로한 엘퍼로드』
꿈이 ‘주머니에 미녀 가득!’인 걸 제외하면 유능한 편.
매일 누나(에일라)에게 혼나는 게 일이지만…. 정말 중요한 대소사는 언제든 신탁(한무일과 통신)을 받을 수 있는 성녀 ‘슬라리스’가 주축이 되어 제국이 굴러간다.
쏠비얀은?
딸과 함께 여행하며 포교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혼란스러운 슈퍼월드까지 가서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약(?)을 판다는 모양인데….
이번에는 어떻게 알았는지, 본국의 문제를 직접 알리러 왔다.
“...가봐야겠군.”
자신을 보자마자 미련없이 후퇴할 마신 크로마티온의 모습이 [예지]로 보였지만…. 이렇게 얼굴이라도 안 비치면 정말 많은 피를 보게 될 것이다.
무일은 보험(?)으로 남겨뒀던 오더마인드, 라그나뢰크, 위그드라실의 영혼을 쥐어짜서 차원이동 했다.
이걸 써버리면…. 한동안 차원이동은 무리일 것이다.
이어서 쏠비얀과 에일라 모녀도 사라졌다.
그들이 떠난 뒷자리.
계속 숨을 참고 있던 청년이 ‘푸하!’ 소리를 내며 이산화탄소를 토해냈다.
“큰일 날 뻔했네! 에너지가 완전히 소진되긴 직전이었는데 아슬아슬했어!”
여객기 분뇨통에 숨어있던 청년의 이름은 최무일.
지옥(판타지월드)으로 추방되기 전의 그였다면 이런 곳에 숨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행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인간으로 변신한 도마뱀 암컷에게 강간까지 당해보며 정신력이 강해졌다!
그년이 ‘드래곤 로드’라나?
지옥의 신들보다도 강한 아버지에게서 도망칠 수 있는 몇 안 되는 괴물이다.
‘하지만 이젠 나도 해냈다!’
그 ‘명예의 전당’에 자신의 이름도 오르리라!
뛰어난 아이템 덕을 보았지만, 아무렴 어떠하리. 인간과 엘프를 노예 이하의 가축처럼 다스리던 마왕이란 작자는 좋은 무기가 없어서 떡이 됐었나?
물론, 협조자도 있었다.
“다른 차원의 신이 나를 도울 줄이야….”
이름은 크로마티온. 직업은 마법의 신?
기하급수적으로 세를 불리고 있는 ‘아버지의 제국’인 엘퍼로드 교국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연합국의 배후.
그런 동맹에도 불구하고 밀린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지옥(판타지월드)의 그 변태, 창녀 같은 신들과 동맹협상을 맺으려는데, 아버지가 있으면 방해되기에 다른 차원에 묶어두는 게 이번 사건의 개요.
최무일, 자신은 그 덕을 톡톡히 본 경우다.
“충전할 방법이 있으려나.”
큼지막한 보석이 박힌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아득히 먼 옛날에~, 마왕의 성에 끌려간 성녀를 구출하러 떠난 용사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특별주문’된 아이템.
마왕은 물론이고 신의 눈과 귀마저 속일 수 있다고 전해진다.
뭐…. 성녀의 아랫배가 불룩한 걸 보고 충격받은 용사는 넋 놓고 있다가 마왕의 기습으로 허망하게 사망!
이런 내력이 있는 목걸이는, 오랜 세월 동안 보물창고에 썩고 있다가 최무일이 카드게임 전리품으로 마왕에게서 따냈다.
효력은 이제 다했다.
지구에서는 신성력(神聖力)을 모을 방법이 없으니 사실상 일회용품인 셈.
한무일이 돌아오면 가차 없이 끌려갈 것이다.
‘그럴 순 없지.’
아버지를 오랫동안 관찰해온 최무일은 제법 상세히 알고 있다.
사기적인 [예지]에도 허점이 있음을.
길게는 십수 년 뒤의 미래마저도 보지만, 그건 ‘가능한 미래’뿐이다.
무슨 수를 써도 ‘찾을 수 없는 미래’뿐이면 영영 발견할 수 없다. 이길 수 없는 강자를 상대로 ‘승리의 미래’가 안 보이는 것처럼.
최무일은 그에 대해 비책도 생각해둔 상태다.
『환골탈태』
각성하여 자신의 신체구조를 최적화하는 현상. 지옥에서는 ‘그랜드 소드마스타’라고 불리는 지고한 경지에 들어서는 초입 단계다.
일단, 환골탈태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갈아치우기 때문에 ‘완전히 딴사람’이 된 자신을 찾을 방법은 없다.
그것이 최무일의 계획.
지구까지 와서 생뚱맞게 환골탈태라니? 그랜드 소드마스타라니?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만, 그는 중국에서 그 꿈이 실현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지구의 무림에는 내공심법이 없지.’
최무일도 지옥(판타지월드)으로 추방되기 전까지는 ‘숨만 쉬어도 강해지는 기술’ 같은 편리한 반칙이 실존하리라고는 조금도 믿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아무튼, 내공을 길러주는 영약이나 영초 등이 중국에서 헐값에 거래되고 있었다. 건강식으로 먹기에는 독하고, 용신이 개발한 건강보조제가 눈에 띄게 훨씬 뛰어나니까.
그것들은 싹 사들여서 독식할 수만 있다면?
전설의 그랜드 소드마스타에서 그치지 않고 더 위로…. 자신을 강간하고 홀연히 떠난 ‘드래곤 로드’에게도 복수할 수 있으리라!
물론, 당장은 숨는 게 목적이지만.
(누구십니까?)
(나야, 나. 최무일.)
(어? 형? 하지만 형은….)
(추방됐었지.)
(흠흠!)
중국의 3대 가문 ‘하북팽가’의 장자는 무안함의 헛기침을 연발했다.
수상쩍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머니 ‘시링 팽’ 때문에 목 뒤로 식은땀을 주르륵 흘린 ‘리이신 팽’은 화장실로 도망쳤다.
소가주(小家主)가 이래도 되는가 싶지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그는, 혈통부터 재능까지 나무랄 게 하나도 없어서 하북팽가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 탓에 줏대가 없고 우유부단하달까?
대신에 주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전형적인 노력형이었다.
『뇌신(雷神)』
하북팽가라는 뒷배 외에도 ‘리이신 팽’에게 쫓아다니는 수식어다.
딱 들어봐도 별호, 무림명(武林名)!
리이신 팽은 세계를 통틀어도 유일한 ‘진짜 무림인’이었다.
사실은 마법사가 맞는 말인데, 부친에게 물려받은 마법적 재능을 무공으로 승화시켰다. 없는 무공을 마법으로 대처해서 발전시켰다고 할까?
이 이름에서처럼 잘 다루는 계통은 뇌전(雷電).
뇌전을 다루는 용신 ‘아쿠버스’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팽아. 돈 좀 빌려다오.)
(돈이요? 그러죠. 얼마나 필요하신데요?)
리이신 팽은 추방됐던 이복형제에게 어떻게 돌아왔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판타지월드 ‘판도라’는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니까.
차라리 근래에 다시 부활한 교도소(사형 혹은 추방 전에 잠시 머무는 용도) 쪽이 훨씬 탈출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지만 차원이동이라니?
슈퍼월드하고는 차원이동문이 항시 연결되어있기라도 하니 전혀 가망 없진 않지만, 판타지월드와 지구는 일방통행이다.
그러니 20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던 ‘석방’이라고 보는 편이 맞으리라.
이게 상식적인 생각이다.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돌아왔으니까.
(한…. 10억 원쯤….)
최무일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도 이 ‘똑똑한 이복동생’이 무슨 생각 중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돈을 빌려달라는 요청에도 선뜻 손을 내미는 것이리라.
하지만 액수는 다르다.
형제지간에 빌릴 수 있는 한도를 아득히 초월한 10억 원!
유럽의 ‘워페레스 최전선’에서 ‘아름다운 말벌’ 한둘만 운 좋게 생포하면 쉽게 거금을 마련할 수 있지만….
최무일에게는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목걸이의 에너지가 지구에 오자마자 급속도로 줄어진 탓이다.
(다행히 제 용돈 범위 안이네요.)
(그래?)
(국제전화인 걸 보니 중국이시네요. 직불카드로 준비해드릴까요?)
(나야 그래 주면 고맙지.)
이 금수저 자식!
최무일은 안도와 분노를 동시에 느꼈다.
(고모에게 깜짝 선물이라도 하려고요? 형이 돌아온 걸 아시면 정말 좋아하시겠네요.)
(하하! 비밀로 해줘.)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요?)
(상하이 공항. 네가 오면 내가 찾아가도록 할게.)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리이신 팽은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하북팽가쯤 되는 대가문의 중요인사라면 프라이버시가 없다. 개개인에게 비서와 조력자가 붙으며 두뇌 역할 해줄 인물들로 구성된 부서가 따로 있을 정도다.
그건 소가주 ‘리이신 팽’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한참 동안 의견을 듣고 상세히 알아본 끝에 결론을 내렸다.
“돌아와선 안 될 분이 찾아오셨군.”
< [67화-5] 영웅의 자손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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