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3] 영웅의 자손들 >
한무일이 아는 최무일의 능력은 크게 2가지다.
하나는 ‘위대한 아버지의 피’를 이었다는 자신감과 믿음에서 오는 뛰어난 [예감], 그리고 다른 하나는 호흡법.
도사들의 건강체조와 비슷한데….
근본적인 차이라면, 장시간 꾸준히 하면 건강을 보조해줄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강함도 손에 넣게 해준다.
순수한 인간이 강철도 구부릴 수 있을 만큼!
(이봐, 레인. 이 분야는 네 주특기잖아.)
(멱살 잡고 흔드시지 않아도 설명하려 했습니다!)
여난(女難)에 시달렸던 과거와 달리, 여우 같은 아내 ‘한 명’과 오순도순 살고 있던 ‘레인’은 갑자기 들이닥친 지주(地主)에 식겁했다.
공기처럼 잊힌 ‘전직(前職) 판타지월드 절대자’는, 소시민처럼 굽실거리며 최무일의 능력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했다.
한유일은 고개를 주어기며 요약했다.
(별거 없네.)
제법 한가락 하는 모양이지만, 눈에 띄는 순간 끝이란 건 변함없다.
문제는 그 사실을 본인도 잘 안다는 점!
환장할 정도로 강한 부친의 [예지]에서 벗어날 비책이 마련되지 않고서는 시도할 수 없는 가출(家出)이다.
‘그 점은 높이 살 만한데….’
최무일이 놓친 점이 있다면 한무일은 ‘순수한 인간’이 아니란 점이다.
그의 흉측한 왼팔을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해왔겠지만….
대단히 과소평가했다.
후각, 시각, 청각, 미각, 촉각….
그 어떤 괴수보다도 발달한 오감을 종합하여 내린 [예측]의 정확도는 무서울 정도로 높다. 그리하여 내린 결론이 이것.
『최무일은 유럽에 있다.』
특히, 청각과 후각의 도움이 대단히 크다.
유럽의 공기에 섞인 ‘판타지월드’의 냄새로 최무일이 이곳에 있다고 단정. 그뿐만 아니라, 호흡법을 익힌 최무일의 규칙적인 숨소리는 수십 km 거리에서도 포착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걸물은 걸물이란 걸까?
몸에 밴 냄새를 단시간에 지우는 데 실패한 최무일이었지만, 강해지는 수단인 호흡법을 중단함으로써 추적을 따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한무일도 불가피하게 인력(人力)을 동원했다.
“감시카메라가 닿지 않는 곳을 중점으로 찾아봐.”
“네.”
“농땡이 부리다가 걸리면…. 알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첩보위성과 감시카메라 등으로 돕고 있는 엑시온의 감시망에 걸리면 좋을 텐데….
모친 ‘최이슬’의 재능을 고스란히 흡수한 최무일은 대단히 성가셨다. 어리석지 않고 침착하며, 사리분별도 뛰어나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많이 듣고 자랐는데, 그래서 더욱 잘해야 한다는 부담과 강박관념이 끝끝내 폭발하고 말았다.
어른 입장에서는 배부른 투정.
뛰어난 재능과 외모를 갖고 태어난 건 축복이다.
‘녀석이라면 이곳에 꼭 오겠지.’
최무일은 도망자 신세지만, 유럽에 한 번도 안 와본 게 사실. 영국이 낳은 연쇄 살인마 ‘셜록 2세’를 처치한 업적을 기린 ‘엘퍼러 기념비’에 꼭 와볼 것이다.
그의 자식이라면 시키지 않아도.
한 번도 보지 못한 부친을 존경하든 싫어하든 간에, 호기심 혹은 애증 때문에라도 꼭 찾아오게 되어있다.
이러한 ‘엘퍼러 기념비’는 중국에 가장 많고 심지어 영상관도 있으며, 한국은 두 번째. 주요 활동무대였으니 당연하다.
거의 활동이 없었던 유럽에는?
고대부터 ‘관광대국’이었던 유럽은 관광상품으로서 이 기념비를 세웠다.
(나뭇잎 한 장이네.)
(...저걸 미화일까? 모욕일까?)
(둘 다겠지.)
벌거벗은 요정(윈드걸스)들에게 둘러싸인 알몸의 청년은 누구? 그의 발밑에 깔린 ‘베레모 쓴 남자’는 확실히 ‘셜록 2세’가 맞았지만.
권선징악의 상징인 셜록 2세는 완전히 뒷전이었는데, 주위에서 관람 중인 사람들은 주로 여체의 아름다움이 세세하게 표현된 윈드걸스를 그림에 담았다.
화가와 사진작가라니….
세상이 많이 변하긴 변한 모양이다.
괴인들의 인간진영 합류로, 괴수의 위협이 대폭 감소했다는 증거이리라.
(그런데 사람이 별로 없네.)
(목적이 없으면 딱히 올 이유가 없으니까. 그 시간에 게임이나 할걸?)
솔직히 말해, 셜록 2세는 별거 아니었다.
그보다는 울프남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낸 것이 엘퍼러의 주요 업적으로서 유럽 각지에 그때의 조각상이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바다를 헤엄치지 않는 늑대인간의 특성상, 영국은 상대적으로 울프남의 침략이 약했기에 ‘셜록 2세’를 더 ‘나쁜 악’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이곳은 한산한 편.
처음 완공됐을 때는 구경꾼도 제법 됐지만, 인터넷에 사진과 동영상 등이 쫙 퍼진 이후로는 ‘셜록 2세’에게 살해된 희생자의 유가족과 이렇게….
‘어? 호오~.’
사진을 찍는 남자 중에 아는 얼굴이 있었다.
조각상의 주인공인 남자 따위는 뒷전이고 아름다운 여체를 사진과 그림에 담기 바쁜 사람들과 달리, 그는 엘퍼러를 보고 있었다.
역시라고 할까?
주기적으로 황진천을 쪼러 유럽을 방문하는 아내 한은아를 따라온 아들 ‘한무성’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의 아들 중에서 능력만으로는 최강.
『혼종(混種)』
순수한 인간이 부친의 유전자를 소량이지만, 이어받았다.
이것이 자연수정과 인공수정의 차이.
정자 은행에 보관된 엘퍼러의 유전자는 순수한 인간이다. 그리고 인공수정은 전부 ‘평범한 정자’를 이용했기에 순수한 인간 아이가 태어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연수정은?
고치에서 새롭게 거듭난 ‘새로운 종’과 관계를 했다.
그 때문인지 잉태 성공률이 극악으로 낮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체력이 무한한 한무일에게는 상관없는 얘기였는데, 이를 악물고 입덧할 때까지 버틴 그의 아내들의 노고가 많았다.
아무튼,
(아깝다. 에쏘드만 들 수 있었어도 황진천을 씹어먹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힘들지.)
(너는 자식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 아니냐, 무일.)
(아니. 에쏘드와 저 아이는 맞지 않아.)
그런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한무성의 몸뚱이는 세계 정상급! 괴인까지 통틀어서 ‘정상급’이란 점에서 정말 우수한 것이다.
자연수정 아이들의 공통점인 ‘마법사’ 재능을 굉장히 잘 다루고, 여기에 놀랍게도 ‘반사’ 초능력을 미약하게나마 쓸 수 있다.
한무일의 영혼석에 흡수된 ‘서세진’의 초능력이 엉뚱하게 새나간 것이다.
아무튼….
최강의 대량살상병기가 방어력마저도 최상급!
물론, 진짜 괴랄 한 능력을 보유한 괴인들 때문에 이 ‘반사’ 초능력도 절대적이진 않지만, 한무성이 강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심한 성격 탓에 거의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러면 무일. 폴리검은 어떠냐?)
(...기사의 검, 레이디를 지키는 방패. 흐음…. 은근히 저 아이가 ‘마마보이’라서 자질은 문제없을 것 같긴 한데….)
(비축분은?)
(없지. 모이는 족족 나눠줬으니까. 게다가 저 아이는 싸움하고 맞지 않아. 힘이 있음에도 유익하게 쓰지 않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너무 빤히 쳐다봤기 때문일까?
한무일과 한무성, 둘의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게다가 감도 좋은 건지, 사진기를 갈무리한 아들이 천천히 다가오는 게 아닌가? 소심한 아이의 용기에 살짝 감탄했다. 그 행동력도 칭찬해주고 싶다.
(무일? 감탄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도망치는 것도 우습지.)
오라는 최무일은 안 오고 다른 아들, 한무성이 와버렸다.
이곳에서 적어도 이틀은 잠복할 예정인 무일로서는 굳이 수상한 행동으로 아들의 의심을 살 이유가 없었다.
최무일이 유럽의 다른 기념비로 찾아갔다면?
그 때문에 다수의 인력을 동원한 것이다. 게다가 무일의 [예측]으로는 이곳이 가장 유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바람을 타고 온 냄새가 가장 짙었던 데다가, 이곳은 최전선 중에서도 최전선. 신분이 불분명한 자가 맨몸으로 뛰어들어 돈을 긁어모으기 가장 좋은 일터다.
실력만 바쳐준다면.
“실례합니다.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것 같았는데요.”
외국임에도 자연스럽게 한국어.
모친이 유럽인, 영국인이면 따라서 영어를 쓸 것 같지만, 세계공용어 혹은 제2외국어로 ‘한국어’가 쓰인 지가 벌써 20년이 넘었다.
그럴 수밖에.
괴인의 출현과 합류로 계약자의 비중이 과거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선지혜’의 지위는 여전히 확고부동했다.
『최강의 인간』
워페레스가 아시아를 공격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무일의 죽음을 확신한 여왕벌이 선지혜에게 까불었다가 순식간에 육지에서 밀려 바다로 쫓겨난 뼈아픈 전적!
문팽이가 나설 것도 없이, 배틀씹이 브레스와 알로 유라시아 대륙을 폭격한 것만으로도 워페레스는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살충제를 치이익~! 대륙 전역에 뿌렸다고 할까!
그런 여자가 딸에게 ‘중2병’ 같은 폭언을 날리며 질투심을 불태우고 있으니…. 지구의 미래가 살짝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혼자만 남자를 찍고 있는 모습이 신기해서 쳐다봤습니다.”
“그, 그건…. 절대로 저는 동성애자가 아닙니다.”
저렇게 말하면 더욱 동성애자로 의심받을 텐데….
한무성에게는 그런 자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올바른 언어의 대처법에 대해 일장연설을 해주고 싶지만, 아들과 처음으로 나누는 대화를 그런 걸로 점칠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화를 짧게 마무리할 생각이었는데…. 욕심이 생겼다.
“저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영혼석에서 ‘너무 평범한 질문이다!’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하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한무성이 답해주길 기다렸다.
아들이 생각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물론, 지구에서 추방된 아이들은 ‘죽은 줄 알았던 친부’와 대면하는 영광을 누린다. 처음에는 불신, 다음에는 혼란, 마무리는 경악.
그러나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다.
성관계는커녕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가 낳는 내 아들하고, 격렬함을 넘어서 치열함(임신이 잘 안 된다.)이 깃든 사랑의 결실하고 같을 리 없잖은가?
“남자로서는 성공, 아버지로는 실격이라고 생각합니다.”
“평범한 답변이군요.”
살짝 실망인걸~.
그의 [예지]를 벗어나지 못한 답변이었다.
이어진 말만 없었다면,
“하지만 명예롭게 전사하셨기에 이만큼 존경받을 수 있었다고도 생각합니다. 살아계셨다면 독재자의 길을 걸으셨겠죠.”
“도, 독재자?!”
황제와 독재자는 일맥상통할 수도 있지만….
둘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
황제는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대지주.
독재자는 혼자 다 먹은 이기주의자.
즉, 황제는 대소사를 전부 독단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 황권이 강한 시기에도 명분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독재자는 그런 게 일절 없다.
옳고 그른 것에 상관없이 내 마음대로~.
소심하다고 생각했던 아들의 독설은 계속됐는데,
“부활하고 전사하기까지 3일이란 시간이 있었습니다. 아십니까?”
“어…. 들어본 것 같군요.”
“당시에는 본인이 전사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그 능력으로 곧바로 워페레스에게 고통받는 유럽을 구제했다면….”
그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의 한계라고 할까?
한무일은 그 3일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이상의 시간이 있었더라도 여왕벌은 놔뒀을 것이다. 그건, 지금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워페레스 여왕’를 살려둔 이유이기도 했다.
‘대적자가 사라지면 인류끼리 싸울 테니까.’
인간의 천적은 인간이란 말이 있다.
그렇다는 것을 잘 알려주는 차원이 바로 슈퍼월드.
우수한 초능력자들이 지구로 원정 가서 한 명도 못 돌아오는…. 사실상 전멸이라고 봐도 무방한 대패(大敗) 이후, 슈퍼월드는 반란과 혁명이 끊이지 않았다.
수많은 차원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과거의 성세는 다 사라지고, 인구는 20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 과거 대비 99%나 줄어들었다.
인간끼리 싸운 결과다.
그에 비해, 폭력과 광기의 배출구로 가상현실게임이 아닌 현실에서 추구하는 자들이 모인 유럽전선 덕분에 지구는 대체로 평화로운 편이다.
“확실히 잘못했네요. 그런 실수투성이 남자에게 기념비와 조각상이라니.”
“그, 그렇지는…. 에….”
함께 욕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한무성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있지만 그래도 아버지….
이번에는 옹호하고자 입을 열려던 그는 떠나가는 청년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언제…?’
한무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왼팔을 보고서 괴인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오감을 속이는 움직임을 보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세상은 역시 넓구나! 나는 떨거지구나!
...라고 궁상맞은, 마이너스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성 씨! 무성 씨!”
“또 여기에 계셨군요! 무성 님.”
이곳에 조각된 윈드걸스에 생기를 불어넣고 옷을 입히면 저런 자태일까?
문세웅이 유행시킨 스포츠카 ‘나브랑모스 레비터’에서 내린 아름다운 절세미녀 둘이 내숭 100%를 두른 채 한무성에게 뛰어오고 있었다.
두 미녀는 그의 팔을 한쪽씩 차지하며 바짝 밀착했다.
“성예린 양과 윤미라 양이 유럽에는 어쩐 일로…?”
“그야 무성 씨를 보고 싶어서죠.”
“얘는! 내가 할 말이었-, 후후…. 무성 님. 뭐부터 하실래요? 식사 아니면 저?”
아들과의 유쾌한 대화를 방해한 두 여인.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둘이라면 자신을 알아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일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 유전자에는 ‘무시무시한 여자’들을 끌어들이는 페로몬이라도 있는 건가?”
성예린과 윤미라.
한때는 슈퍼월드를 대표했던 여성 초능력자들.
지금은 ‘초인동맹 맹주’의 아들이기도 한 20년 터울의 영계에게 꽂혀서 5년째 짝사랑, 열애 중이었다.
< [67화-3] 영웅의 자손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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