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79화 (279/287)

< [67화-2] 영웅의 자손들 >

‘여기도 아닌 건가.’

다 무너져가던 일본을 일으켜 세운 ‘카라 미나미’의 능력에 감탄하면서도, 직접 칭찬해줄 수 없다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물론, 도중에 들키긴 했지만.

(그냥 가는 건 너무하지 않나?)

(엑시온…. 흠…. 알겠습니다.)

프로메시아의 본체는 여전히 몬스터월드에 있지만, 상당수의 장비를 분해해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지구에 옮겼다.

그렇게 야금야금 부피를 키운 ‘프로메시아 2’는 달만큼 커졌으니 그 기술력도 당연히 무시 못 할 수준.

그 주(主) 인격인 ‘엑시리얼 온드미온’에게 걸린 무일은 쓰게 웃으며 기다렸다.

“카레 짱!”

“건강해 보이네, 유키나.”

양팔을 목에 두르며 대롱대롱 매달린 여인의 행동은 여전히 신혼 같다.

그야….

매년 만나는 횟수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으니, 다 합쳐도 기간으로 따지면 몇 개월뿐이 안 될 것이다.

남편으로서 대단히 불성실하다고 할 수 있지만….

엑시온의 위로 아닌 위로에 따르면,

(부부가 오랫동안 함께하면 질리는 법. 그리고 인간의 역사를 참고로, 황제가 여자와 자식 문제로 이 정도면 소년의 처신은 대단히 훌륭한 편이다.)

수긍 가는 건 아니지만, 이것도 자주 들으면 거의 세뇌다.

게다가 이어진 물음에 딱히 반박할 수도 없었고.

(아니면 전부 포기하고 한 여인만 택할 자신 있나? 그러고도 이 지구가 무탈하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기가 드센 여자이기만 했다면 욕먹고 말겠지만….

폭주하면 대륙 한두 개는 가볍게 증발시킬 힘을 가진 여자들이다.

악몽은 20년 전의 그 한 번으로 충분하다. 세계 멸망까지 앞으로 5일 남았다는 등의 시나리오는 앞으로 영영 나오지 않아야 한다.

“카레 짱! 예쁜 아내 말 좀 들어봐! 키리 짱이 글쎄….”

보모와 부친 역할을 겸했다고 할 수 있는 엑시온의 교육방식은 ‘완벽주의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빠릿빠릿한 것 같으면서도 대충 때우길 좋아하는 유키나 미나미하고는 상극이었다. 물론, 그녀는 그런 딸이 귀엽기만 한 모양이지만….

카라 미나미는 그 때문에 늘 난감해 하고 있다.

집을 ‘어지럽히는 엄마’와 ‘청소하는 딸’이란 이상한 구도.

“흠…. 카라에게 직접 줄 순 없지만, 늦은 생일선물.”

판타지월드에서 주운 보물이다.

지구 기준으로 보면 골동품인 것도 상당하지만, 마법이 조금이라도 가미됐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괴인의 출현으로 마법도 꽤 흔해졌지만, 마법을 쓸 수 없는 평범한 인간 입장에서는 중력을 무시하고 지면 위에 살짝 떠 있는 구슬도 신기하다.

점점 가정적으로 변하는 인생….

그러나 이게 가장 어렵다!

무일,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괴수와 목숨 걸고 싸웠을 때라고…. 1기라고 불리는 아이들이 사춘기에 들어선 10년 전부터 절실히 느끼는 중이다.

‘혹시라도 녀석이 뒤늦게 나타나면 보호마법이 발동하겠지.’

평범한 생일선물이 아니라서 약간 미안했지만, 다 안전을 위해서다.

다음으로 유력한 장소는 유럽.

한순간에 싹 쓸려버리며 황무지로 변했었던 대륙이나, 현재는 지구…. 아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유흥대륙이다.

사냥꾼, 영웅, 계약자, 마녀, 괴인, 초능력자, 흡혈귀….

온갖 차원에서 넘어온 자들의 각축장(角逐場)으로, 여기서 흥하거나 망한 남녀가 몰려든 크고 작은 검투장과 매음굴, 도박장 등이 숱하게 널렸다.

유럽이 이렇게 된 원인은?

『야왕(野王) 황진천』

계급제도는 없지만, 황진천이 ‘왕’이라고 불리게 된 정치적 배경에는 ‘여왕벌의 대항마(對抗魔)’란 부분이 대단히 컸다.

유럽은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쭉 전쟁 중이었다.

【워페레스 / 9종 소형】

우수한 유전자를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진화하는 괴수.

워페레스는 ‘오더마인드 파편’으로 세대를 몇 단계는 건너뛰는 진화를 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인류와 괴수의 생존을 전부 위협하는 ‘절대 악’이 됐다.

그리고 그 최전선이 유럽.

지리상으로 보면 뭔가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건 워페레스가 20년 전에 있었던 대규모 폭격을 피해 바다와 지하(地下)로 도망친 까닭이다.

그래서 주요 전장은 지중해와 대서양과 접하는 해안.

덤으로, 땅속이나 하늘에서 기습적으로 튀어나와서 ‘특수한 능력’을 쓰는 패턴이 최근 워페레스의 주된 공격방식이다.

휘익!

확률로 따지면 얼마나 될까?

구름 위에서 유럽을 굽어보는 절대자를 발견할 확률은.

“호오~?”

가벼운 투명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던 무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전에는 분명 들키지 않았었는데 너무나 간단히….

말벌들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대규모공습을 가했다.

과거에는 거의 맨몸뚱이로 싸웠던 워페레스였으나 현재는 괴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독특했다.

아니, 오직 살인을 위해 태어난 만큼 흉흉했다.

공통점이라면 아름다운 얼굴로 잘록한 허리, 하늘하늘한 팔다리 정도. 워페레스란 종족의, 혹은 암컷의 자존심일까?

(무일. 어떻게 싸울 거냐?)

(...정체가 들키지 않으려면 특징은 감춰야겠지.)

무엇이든 분쇄하는 왼팔의 촉수는 한무일의 정체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꼴이다.

인간에게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고 할 수 있겠지만, 워페레스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서 선택한 방식은?

퍽!

맨몸으로 상대해줬다.

흔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괴력’ 능력의 괴인을 흉내 낸다면 한무일의 정체를 눈치채기란 아예 불가능하다.

물론, 이 강함도 터무니없다면 의심을 사겠지만….

“꺅!”

“아윽?!”

“읏!”

괴인 중에는 이런 순찰병쯤은 가볍게 물리칠 수 있는 강자가 제법 많다.

워페레스가 자랑하는 정예병을 이렇게 죽인다면 많이 곤란하겠지만, 이 자리에는 눈 씻고 봐도 정예병은 없었다.

주먹질, 발길질마다 하나씩.

서두르거나 방심하지 않고 차근차근 숫자를 줄여갔다.

‘마법으로 모자라서 초능력까지…?’

안 본 사이에 워페레스의 질도 올라간 것 같았다. 순찰병 주제에 6종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니 말이다.

어쩌면 이곳이 최전선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면 워페레스의 진화는 아직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거나….

뭐가 됐든 무일은 걱정하지 않았다.

완벽한 구세주(엘퍼러)가 사라진 인류는 악착같이 노력하고 있으니까.

워페레스가 진화하는 동안에 인류는 발전할 것이다. 앞으로도 쭉.

(어서 와. 죽음은 처음이지?)

한유일은 죽어서 영혼석으로 흡수된 순찰병 아가씨들을 환영해줬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결국은 영혼의 삶에 익숙해지리라.

한유일이 하나부터 열까지 손본 영혼석 내부는 2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거치면서 ‘또 하나의 현실’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세상이 풍부해졌다.

없는 게 없다고 할까!

굶주리고 늙지 않는다는 점까지 포함하면 천국…. 유토피아(Utopia)라고 해도 좋으리라.

“좌익(左翼)이 밀린다!”

“막아! 이 새끼들아! 다 죽고 싶어?!”

“시간을 벌어다오. 그러면 내 마법으로….”

“얼어 죽을! 그럴 시간이 있겠냐!”

고대에 이탈리아라고 불렸던 나라의 어느 해안.

이곳도 주요 접전지역 중 하나였는데, 외견만으로는 어디가 ‘착한 놈’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흉흉했다.

아이들에게는 조기교육을 통해 ‘워페레스는 절대 악!’이라고 가르치지만, 그 외견이나 태도, 전후처리는 인간보다 훨씬 신사적이다.

깔끔한 죽음.

그에 비해, 생포된 워페레스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지 못한다.

미색(美色)이 떨어지면 생체실험에 쓰이고, 뛰어날 경우에는 튼튼한 우리에 가둬서 사육하거나 이상한 성벽의 희생양으로 쓰인다.

‘어디가 괴수인지….’

무일의 눈에 비친 유럽은 광기에 휩싸인 괴수 천지다.

양쪽 다 생존을 위해 싸운다는 점에서 명분은 충분했지만, 글쎄…. 야왕과 여왕이 한 발자국씩만 양보했다면 좀 더 평화적인 관계가 됐을 것이다.

“야왕! 언제까지 싸울 건가요!”

“진정하시오, 한 부인. 아니면 혹시 그날이오?”

“닥쳐요!”

양쪽 다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엉뚱한 일치를 보여서 문제지만.

어느새 20년째 ‘황진천’이 거주하면서 나름의 역사와 전통마저 생긴 영국의 왕궁. 그런 옛집을 씁쓸한 마음으로 방문한 여인이 역정을 내고 있었다.

고(考)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이동한 무일은 그 광경을 봤다.

마찬가지로, 두 남녀의 대화를 힐끔힐끔 훔쳐보던 아름다운 궁녀(宮女)들은 ‘또 시작됐네.’라는 표정이었다.

“어, 어머니. 진정을….”

잿빛 머리카락의 미청년이 서둘러 만류했다.

좋은 소리는 못 들었지만.

“이게 진정할 문젠가요! 밖에서는 사람이 죽어나고 있어요. 창피한 줄 아세요! 함께 이 폭군을 저지하지 못할망정 이 어미에게 덤비다니!”

“덤비다니요?!”

“불효로 이런 불효가 없습니다.”

드샌 여인…. 전(前) 영국 왕실의 선견지명(?)으로, 계약서에 따라 한무일의 ‘법적인 아내’라는 영예를 안은 전 왕녀, 실바니아 하이로드.

이름도 ‘한은아’로 개명한 그녀의 옆에는 아들이….

어깨까지 움츠리며 위축된 모습을 보이던 잿빛 머리카락의 미청년은, 모친이 찌릿 노려보자 바로 찌그러졌다.

“아들을 잘 키우셨군요, 한 부인.”

“당신에게만큼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

워페레스도 진화함에 따라 ‘괴수 같은 사고’에서 많이 탈피했다. 물론, 여왕벌은 진화하지 않기에 여전히 구시대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녀에게 조언하는 ‘현자’들은 그렇지 않다.

일설에 따르면 용신에 버금가는 지혜를 갖고 있다는데, 한무일이 침입해서 확인해본 바로는 용신보다도 이성적이다.

다만, 여왕의 뇌가 굳어서 발전이 더딜 뿐.

그래도 이 ‘현자’들 덕분에 휴전(休戰)도 영원한 몽상은 아니다.

“...내가 늘 궁금한 부분은, 어째서 한 부인은 내 앞에서 이리도 당당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느냐는 점이오.”

“그러는 야왕은, 어째서 그 건방진 계집을 가만 놔두나요?”

“어머니?!”

숨어서 지켜보고 있던 한무일은 잘 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황진천이 아내 ‘한은아’에게 손을 대면 그걸로 아웃이다. 그동안 유럽의 구심점이 되어 잘 이끌어준 점에 대해서는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선을 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게다가 ‘야왕’의 통치방식은 과격하고 무질서해서, 유럽이 아시아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많이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시상황인데 어쩌라고?』

이 변명은 20년째 계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황진천을 가만 놔두는 이유는 ‘용사의 탈’을 여전히 벗고 있지 않은 까닭이다. 그 실력은 ‘아시아 최강’이라고 불리는 문세웅과 동급!

실제로 이 둘은 3년 전에 붙었었다.

압도적인 승리를 [예측]하고 문세웅을 노골적으로 도발했던 황진천은, 현존하는 ‘최강의 에쏘스트’라는 칭호를 때야 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무승부.

만약, 이대로 황진천은 진전이 없고 문세웅의 싱크로율만 야금야금 올라간다면, 현재의 평행선도 30년 이내에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제법인걸.’

무일은 순수하게 황진천을 높게 평가했다.

용사로서 자질은 떨어지지만, 사냥꾼으로서의 그의 재능은 문세웅보다 높았다. 그 증거로, 녀석은 한은아를 건들지 않고 있다.

건드리면 ‘죽는다.’는 걸 알기 때문!

다른 누구도 아닌 한무일을 상대로 [예감]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 ‘믿음’이 절대 얕지 않다는 뜻이니까.

“...일단은 수색부터 해봐야겠군.”

왕궁을 조용히 빠져나온 무일은 유럽 전역을 뒤지기 시작했다.

물론, 혼자는 아니다.

평화롭게 하늘을 노닐던 ‘날아다니는 돈가스’ 플라돈 무리에게서 약간의 피를 헌납받은 무일은 곧바로 부활마법을 사용했다.

“주인어른. 어째서 하필 저입니까?”

“수색 같은 귀찮은 일은 꼭 남자에게 시키지!”

“하아…. 망나니 아들놈을 찾아주면 되나?”

의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내들이 영혼석에서 소환됐다.

과거에는 현실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그들이었으나….

한유일이 경영(?)을 잘했기 때문일까? 현재는 서로 안 나오려 애쓴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도로 영혼석 안으로 쏙!

무일은 부활의식을 계속하며 말했다.

“최무일은 유럽에 있다, 확실히. 그러니 찾아내.”

“잠깐! 유럽은 구멍가게 이름이 아니라 대륙-.”

“방 빼고 싶어?”

“아니요.”

“그럼, 찾아서 보고해.”

“네.”

< [67화-2] 영웅의 자손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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