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72화 (272/287)

< [65화-3] 되돌아갈 시간이다. >

이유와 변명이 어찌 됐든 책임자는 책임을 져야 하는 법. 갤럭쉽 여왕을 멋대로 죽이고 새로 정하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반항은 없었다.

여왕이 몇 번이나 강조하며 말했던 것처럼 ‘동족’을 최우선사항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리라. 어느 쪽이 생존에 유리한지도 잘 알고.

그런 상식적인 생각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예지]로 이미 이렇게 될 줄 알았던 무일은,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착수했다.

“지구를 향한 그 어떤 적대적인 행위도 중단한다.”

“네.”

손바닥 뒤집듯 바꾼 신임 여왕에게 지시를 내렸다.

머리에 왕관 같은 감투조차 쓰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무리 전체를 통솔하게 된 여왕은 절대자의 명령을 그대로 하달했다.

나쁘게 말하면 꼭두각시!

“노예들은 전부 지구 방어에 투입한다.”

“전부…. 네.”

놀랍게도 갤럭쉽 종족은 노예를 따로 두고 있었다. 엉성하긴 해도 뚜렷한 형태를 띤 이곳의 모든 것은 그 노예들이 만든 것이다.

동족은 아니다. 연약한(?) 저 몸으로 벽돌이나 나를 수 있겠는가!

어디까지나 약한 종족.

대표적인 괴수는 둘이었다.

【오토러스 / 5종 특수】

7종 판타이탄의 하위 버전이라고 하면 이해가 쉬울까?

지구의 전산망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휘젓고 다니던 판타이탄과 달리, 그 능력이 한정됐으며 형태가 제한적이다.

무슨 말이냐?

부품이 충분해도 몸을 자유자재로 바꾸지 못한다. 그저 있는 기계장비 그대로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페어리언 / 5종 소형】

갤럭쉽과 함께 우주의 아름다움을 담당 중인 괴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요정’처럼 생겼는데, 외모와 분위기는 딱 ‘신의 심부름꾼’ 혹은 유명한 벽화의 ‘전령’을 연상케 한다.

겉보기 나이는 13세 전후의 남녀.

그 탓에 생식기 빼고는 성별을 구분하기 쉽지 않으며, 그 미숙한 외모가 이미 성체라는 것이 또 놀랍다.

아동학대처럼 보이지만….

100년 전에 그런 헛소리를 했던 사람은 추방됐다.

페어리언이 부순 인공위성과 우주선의 숫자가 끔찍하게 많았으니까.

“그 녀석은 내가 처리한다.”

여기서 ‘그 녀석’이란 3시간 뒤에 지구로 당도할 행성파괴자.

지구에 당도하기 전에 처리할 생각이다.

갤럭쉽이 군말 없이 무일의 편이 된 것도 이러한 대답을 듣기 위함이리라.

“모시겠습니다.”

“아니. 나는 됐으니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분부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자기소개 같은 진부한 시간도 생략했다. 무일은 갤럭쉽을 아군으로 끌어들였다는 확신이 들자마자 그곳을 떠났다.

남은 시간은 3시간.

짧다면 짧은 시간을 활용하여 지구로 귀환했다. 사실, 지금부터가 중요하다. 지구의 미래를 결정지을 순간이니까.

조용히 목포로 돌아온 한무일은 선지혜를 만났다.

만능의 마법으로 ‘원상복구’ 된 목포에서 의연함을 가장한 채 기다리고 있던 그녀는 그를 보자마자 말없이 폭 안겼다.

“...늦었네.”

“흐윽…. 흑! 으아앙!”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무일이 한마디 건네자마자 아이처럼 우는 선지혜.

이번에는 ‘짝퉁’이 아닌 진짜다!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 품에 매달리는 가인의 등을 부드럽게 보듬어주길 잠깐, 무일은 검지로 그녀의 갸름한 턱 끝을 올린 입술을 맞췄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덤으로 지구의 인류가 선지혜의 손에 사라지리라.

..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았다.

지구나, 자신이나!

다만, 예전처럼 양손을 쓸 수 없다는 점만큼은 무일도 안타깝긴 했다. 신체 일부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백혈구울이 됐지만….

이 흉측한 왼팔만은 어쩔 수 없었다.

여인의 부드러운 살결은 이 ‘괴수의 팔’에 닿기만 해도 상처가 생긴다. 그만큼 이 왼팔은 흉흉, 살기등등했다.

“선, 선배…?!”

항상 진도는 여기서 멈췄었다. 하지만 오늘의 한무일은 달랐다.

강인한 오른팔만을 이용해서 선지혜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예고 없이 곧바로 순간이동 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빈방으로.

“시간이 많지 않아.”

“...그 왼팔. 역시 뭔가 있네.”

똑똑한 선지혜는 깨달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음을.

한무일의 신체 일부처럼 흡수되며 스르르 사라진 망토 안쪽으로 인간이 아닌 ‘괴수의 육신’이 드러났다.

소소한 변화는 남자의 밋밋한 젖꼭지와 배꼽이 없다는 것. 포유류가 아닌 조류, 곤충류처럼 알, 고치에서 태어난 특징이리라.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강렬한 변화는,

“맞아. 이 왼팔은 마신 라그나뢰크의 능력이야. 운이 좋았어.”

처음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만약, 라그나뢰크의 영혼을 흡수하지 않았다면 지금쯤 한무일의 전신(全身)은 끔찍한 괴물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원래는 모든 생명체의 가능성을 품은 ‘백혈구울’이 됐어야 정상.

그러한 변화 혹은 성질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소를 왼팔이 ‘꽤’ 흡수했다. 라그나뢰크 왼팔 능력은 빛마저 빨아들이는 능력이었으니까.

신체의 변태(變態)마저도 흡수했다.

“그래서?”

“지구에 계속 머물지 않을 생각이야.”

한무일이 내린 결론.

그것은 자신이 모습을 감추는 것이다.

구설수를 좋아하고 남을 험담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왼팔은 좋은 먹잇감. 그게 뭐 어쨌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미래는 이미 확인했다.’

그가 [예지]로 앞서서 본 ‘인류의 태도’는 최악의 형태로 진행됐다.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억지로 끼워 맞추듯이!

이대로 그가 지구에 안주하면, 괴물이 된 ‘엘퍼러’의 통치는 거부하면서도 보호는 바라는 이기적인 세상이 올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그뿐이었으면 차라리 다행이다.

보호받으며 차근차근 쌓은 힘으로 반란!

이 뒤는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그래서?”

“또다시 이번 같은 일이 있으면 안 되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무안함을 감춘 한무일은, 한 손만으로는 불편해서 마법까지 동원하여 선지혜를 알몸으로 만든 후에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자신도.

남자가 내 여자라고 침을 발라두는 가장 확실한 방법.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확인하는 가장 원초적인 수단.

“진심인가 보네….”

“나는 절대로 죽지 않아. 하지만 최은비처럼 막무가내로 믿어달라고 하는 건 못할 짓이란 것도 알아.”

“그래서 이거?”

“흠흠! 남자인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라고는 이뿐이야.”

이미 [예지]를 통해서, 선지혜의 수호자 문팽이가 광분 혹은 폭주하지 않으리란 점까지 확인을 끝마쳤다.

굳이 여기에 사족을 붙이자면….

말은 안 했지만, 문팽이와 ‘거래’를 한 셈이다.

녀석은 계약자가 지나칠 정도로 ‘미지의 왕’에게 의존하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뼛속까지 새겨진 그러한 감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이』

자식을 낳고 어머니가 되면 그러한 마음이 분산되지 않을까?

십중팔구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는 남편을 ‘오빠~!’ 혹은 ‘자기야~!’라며 따르던 아내가, 애 엄마가 되자마자 남편은 ‘짐꾼’ 혹은 ‘지갑’ 취급하듯이.

아이를 낳게 되면 보육원에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전적이 있는 선지혜지만, 한무일이 눈앞에 없는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소중한 접점이니까.

한무일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

“여기가 야외였다면 아슬아슬해서 훨씬 좋았을 텐데.”

훔쳐보는 사람이나 감시카메라가 없도록 도시는 ‘폐허’로 만들겠지만.

선지혜의 푸념을 들은 한무일은 쓰게 웃었다.

물론, 엎드리고 있는 그녀는 그의 표정을 보진 못했지만,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합쳐진 둘.

순결이 대단히 중요한 계약자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잘못을 저질렀다는 기분에 휩싸인 선지혜는 육체보다 정신적인 쾌락에 휩싸이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프면….”

“아니. 계속해, 계속.”

괴수의 무한한 체력과 정력으로 무장한 한무일은 끝날 때까지 괜찮았지만, 선지혜는 10분(아마도.)을 못 버티고 실신했다.

...이런 걸로 애가 생길까?

한무일은 고개를 갸웃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역사적인 순간을 겨우 100분(미리 언질)만 할애한다고 칭얼대던 ‘지구 최강의 여자’는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여기서 현실과 가상의 괴리감을 느꼈다.

‘게임과 동영상은 역시 믿을 게 못 되는군.’

동정이 깨지면 하늘에서 축복이 내려올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면 ‘대마법사 자격증’을 회수해간다든가?

선지혜 외에도 아직 만나야 할 여자들이 많았지만, 한무일은 곤히 잠든 그녀 옆에 누운 채 1시간을 함께한 후에 움직였다.

(쩝. 놀릴 거리가 사라졌네.)

더는 동정(童貞)이 아니라니!

모든 걸 지켜보고 있던 한유일은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듯이 투덜댔다.

상당히 많은 수의 영혼이 육체를 얻어 영혼석을 빠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았다. 그리고 한유일만 이례적으로 당연히, 여성 생활공간에 있었다.

그의 소원대로 ‘하렘’ 성취!

심지어 모든 여자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 함께했던 동료, 지인, 친구가 육체를 얻어 현실로 나갔으니! 남은 여자들이 안달 난 것도 당연했다.

(유일 님, 소녀를 봐주세요.)

(쟤보다 제가 더 예쁘답니다.)

(무용담을 들려주세요.)

한유일이 육신을 얻어서 현실로 나갈 수 있음에도 남아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 많은 미소녀를 놔두고 어찌 떠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하렘의 왕’으로서 그런 매정한 짓을 하기 싫었다. 게다가 한무일을 대신해서 영혼석 내부를 꾸미는 것도 재미있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이 안에서는 한유일이 ‘최강’이고 ‘최고’였다.

(그래서 언제 나올 건데? 애들이 너를 애타고 기다리는데.)

한무일만큼은 아니지만, 아니, 숫자로만 따지면 압도적인 미소녀들이 한유일을 벌써 그리워하고 있었다.

아직은 괜찮다. 고치에서 나온 지 하루도 안 지났으니까.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자유시간 6시간이 무시됐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무언가 사달 났음을 깨달으리라.

...사달은커녕 다른 여자들이랑 희희낙락 중이었지만!

돌아오길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는 여자들에게 그런 건 못할 짓이란 게, 한유일의 파트너인 한무일의 생각이었다.

(흐음…. 어쩔 수 없지.)

영혼석에 계속 안주하면, 한무일이 지구를 떠날 때도 함께 끌려가게 된다.

한유일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 육체를 만들-.)

(아니! 나는 앞으로도 너와 함께한다! 무일!)

(왜…?)

(너는 내가 없으면 또 무리하다가 죽을 거다! 그러니 내가 옆에서 감시해줘야 한다. 너는 아주 성가신 숙주…. 내 형제다!)

(...고맙다.)

(고마우면 쏠비얀 좀 불러줘라!)

공극의 마녀? 그건 좀….

도시복구를 마친 쏠비얀과 솔라리스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구의 문제는 한무일이 부활함으로써 곧 정리될 테지만, 몬스터월드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으니까.

심각성으로 따지면 엇비슷했다.

비록, 몬스터월드는 원흉인 ‘마신’들이 직접 행동에 나서겠지만, 한무일이란 공통의 목적으로 움직였던 지구 때하고는 사정이 달랐다.

『견제』

가위바위보처럼 물리고 물리게 되어있는 세력구도.

마신 라그나뢰크가 사라지면서 그 균형이 와장창 깨져버렸으니, 새로운 규칙 혹은 질서가 잡힐 때까지 ‘최강의 마녀’와 ‘전설의 마녀’가 버텨줘야 했다.

마신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그녀들은 충분한 억제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낙관만 할 수 없지. 이 또한 내 업보이니….’

어쩌면 제2의 고향이 될지도 모른다.

지구에서 새롭게 ‘인간’으로 부활한 ‘여성형 괴수’들은, 한무일이 제공해준 지팡이를 잃으면 평범한 인간에 가까워졌다.

가까워진 것이지 인간은 아니다.

괴수의 피로 만든 탓에 유전자배열이 완전 다르고, 생식능력도 흉내 낼 순 있어도 결실은 낳지 못하니까.

그래서 복구작업 중이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면 본래의 육체로 최대한 돌아가는 방향으로.

단검 하나로 깔끔한 자살을 한 쏠비얀과 솔라리스가 대표적인 예. 그 둘은 아직 식지 않은 본인들의 육신으로 돌아간 후에 차원을 넘었다.

“슬슬…. 갈 시간이 됐나.”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남은 시간은 앞으로 약 1시간.

1시간이면 아직은 여유롭다고 할 수도 있지만, 지구 혹은 그 일대에서 싸워서는 안 되기 때문에 꼭 그렇지도 않다. 싸움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한무일은 다시 우주로 향했다.

갤럭쉽이 두려워하고 경계하던 행성파괴자를 마중하기 위해.

< [65화-3] 되돌아갈 시간이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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