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2] 되돌아갈 시간이다. >
까놓고 말해서….
마신 위그드라실이 후퇴한 시점에 갤럭쉽은 잔챙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방심하진 않는다. 이미 한 번의 실수로 뼈아픈 결과가 도래했기에 다시는 그럴 일이 없도록 신중을 기했다.
우주까지 추격해서 철저하게!
박멸 혹은 유린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아….”
“꺅!”
아주 멀리 떨어지지 않는 한, 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촉수로 심장을 찔러 목숨을 거둔 후, 그 영혼은 영혼석으로 흡수했다. 그러한 반복작업을 통해 깔끔히 정리…. 까지는 무리였지만, 지리멸렬했다.
뭉치면 강해도 각 객체는 7종. 우주형이란 특수성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더는 이전처럼 힘을 못 쓰리라.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초토화한 ‘3대 재앙’치고는 허무한 결말이었다.
‘머뭇거릴 틈이 없군.’
지구의 인류가 멸종 직전까지 몰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
얼마나 복구할 수 있을까?
하지만 무일은 좀 더 냉정하게 생각했다. 자신이 사라지자마자 휘청거리던 지구. 이대로 괜찮을 리 없다.
시간은 좀 걸리더라도 개혁이 필요한 시점.
우주까지 날아와서 보니, 지구는 참 작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원래 작았다!)
(...일어났네. 유일.)
그랬다. 한유일이었다.
육신을 완전히 차지할 기회를 포기한 흡혈귀 왕. 백혈구울이 되고 육신이 뒤죽박죽 섞이는 과정에서 심장에 기생 중이던 본체가 완전히 으스러졌다.
사실상 사망.
다행히 영혼석의 흡입력 덕분에 완전한 죽음만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죽음을 경험한 정신적 피해 혹은 후유증으로 잠들었었는데, 이제야 깬 모양이다.
하렘을 꿈꾸는 괴수가 외쳤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각이었다! 죽음! 영혼석이 아니었으면 정말 완전히 끝장났을 것이다!)
(덕분에 살았다.)
(...흥! 나도 살고자 한 일이었을 뿐이다!)
본인이 그렇게 주장하니 그런 걸로 해두자.
아무튼….
결과적으로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매우 좋다! 늘 한 몸을 공유 중이던 한무일과 한유일이 분리됐으니까.
새로운 육신 하나만 만들어주면 된다.
좀 어이가 없는 점이라면,
‘진짜 인간은 괴수가 되고, 괴수는 인간이 되게 생겼네!’
한무일은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런 일이…!
다만, 이 ‘흡혈귀 왕’이란 칭호는 좀 더 영혼과 관련된 부분이라서 어떻게 될지 미지수였다. 한유일이 인간이 된 후에도 계속 왕으로 판단될지에 대해서는.
아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갤럭쉽 / 7종 특수】
마신 위그드라실을 따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 ‘여성형 괴수’는 뱀페스트와 마찬가지로 ‘왕’이 따로 존재한다. 여기서는 ‘여왕’이 될까.
그 여왕을 잡아야만 한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이 그거다.
무일은 정신을 집중했다.
스스로 ‘괴수처럼’ 됐다고 느낀 가장 큰 부분이 [예감]일 것이다. 백혈구울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그 능력을 잃어버린 까닭!
원래, MID 기술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예감]은 ‘의학’이다. 그리고 ‘뇌’에 직접 시술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중요한 ‘뇌’가 없네?
‘뇌를 새롭게 만들려고 해도….’
무일의 육신은 자유자재로 변형되는 아메바가 아니다. 황진천과 마찬가지로 베이스라고 할 수 있는 ‘인간형’에 괴수 같은 요소가 첨가된 것이다.
물론, 겉보기에 그렇다는 뜻이고, 7종 괴수 ‘조개 인간’인 ‘변강쉘’처럼 내부는 근본부터 그 구조가 완전 다르다.
다시 말해, 사냥꾼의 핵심인 [예감]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세상 끝까지 추적’하는 능력을 상실했다고 봐도 무방.
하지만 ‘괴수처럼’ 변했기에 장점도 있다.
『예지』
미래를 미리 알고 행동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강점이다.
과거에는 ‘5종’ 수준의 [예지]를 했었다.
그렇다면 현재는?
‘저쪽인가.’
공기가 없는 우주이기에 말을 할 수 없다. 아니, 애초에 맨몸으로 우주를 돌아다닐 수 있는 시점에, ‘인간’에서 많이 멀어진 것이리라.
그럼에도 습관처럼 중얼거린 무일은 곧바로 달 너머, 금성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사냥꾼의 [예감]은 상실했지만….
애초에 [예감]은 괴수의 [예지]를 모방해서 만든 기술!
무일은 수많은 가정을 했다. 모든 방위로 자신이 가보는 ‘미래’를. 그리고 허탕 치는 자신의 ‘미래’를 보았고, 마침내 ‘가장 좋은 미래’를 찾았다.
수천 가지의 미래 중에서 선택!
그것이 유일무이한 ‘10종’ 괴수의 [예지]였다.
(오오! 별천지다!)
시야를 공유 중인 한유일이 탄성을 내뱉었다.
천국이 실존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시커먼 무주공간에 떡하니 순백의 구름이 뭉쳐있다. 멀리서 관측하면 ‘은하(銀河)’ 혹은 ‘성운(星雲)’을 연상케 할 것이고, 이렇게 가까이서 보면….
(괴수 천국이군.)
(무일! 너는 감성이 너무 메말랐다! 뇌가 없어지면서 더욱 심해진 것 같다. 어떻게 구름 속을 노니는 미소녀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냐?)
(네가 말한 그 미소녀들이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초토화했다만?)
(예쁘면 용서되는 법이다!)
잠깐이지만…. 한무일과 한유일은 정신이 완전히 융합됐었다.
그런데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
물론, 변화는 있었다.
과거에는 좀 더 계약관계에 가까웠다면, 현재는 혈연보다 더 가까운 신뢰로 묶인 전우(戰友) 이상의 무언가.
(너는 용서해도 나는 안 돼.)
공격은 없었다.
가지각색의 미모를 뽐내는 수백…. 아니, 수천의 갤럭쉽이 길을 열어줬다. 마법으로 우주를 비행하던 무일은 구름 위를 밟았다.
그렇다. 두 발로 확실히 밟고 있었다.
조잡하긴 했지만, 소행성 돌덩어리로 징검다리뿐만 아니라 집도 만든 게 아닌가!
『구름 속의 도시』
아마, 고대인들은 이곳을 보고 ‘천국’을 떠올렸을 것이다. 인간형 괴수를 모르는 그들의 상상력으로 할 수 있는 수준이란 그 정도.
범인(凡人)의 발이 닿지 않는 우주에 사는 ‘인간’을 보며, 자신들과 차별화된 ‘초월적인 신’을 떠올렸으리라.
하지만 무일은 잘 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진짜 신(神)’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신(神)’은 ‘마신’이나 자신처럼 강한 생명체임을.
‘그렇다면 저 여자는 여신(女神)이겠군.’
굳이 별칭을 붙이자면 ‘생명의 어머니’쯤 될까?
아무리 많이 쳐줘도 20대 초중반의 젊디젊은 외형인 갤럭쉽이다. 하지만 하늘의 계단을 밟고 올라간 최정상에는 곱게 늙은 아줌마…. 아가씨 한 명이 권좌에 앉아 있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자애로운 여신.
감추지 않고 당당히 드러낸 커다란 유방(乳房)은 풍요와 생명의 상징 같고, 다소곳이 모은 양손과 양다리도 여성의 순결과 겸손을 뜻하듯이 신성(神聖)하기만 했다.
하지만 저 여자가 바로….
지구를 공격하도록 명령한 마신의 하수인.
꾹 다물어져 있던 ‘갤럭쉽 여왕’의 입술이 살며시 벌어졌다.
“절대자여. 제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공기가 없으면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음파를 전달할 매개체만 있으면 상관없다.
그 매개체는 이 주변을 안개처럼 채우고 있는 솜털.
양털처럼 갤럭쉽의 몸에서 끊임없어 분비되는 미지의 물질이었다.
“우리가 환영할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옳은 지적이십니다. 하지만 저희는 이성적인 존재. 그리고 저는 지도자로서 동족의 생존을 최우선으로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전부 죽이겠다면?”
무일이 이곳에서 본 것은 상상 이상이었다.
빙산의 일각.
그 표현이 이렇게까지 잘 맞을 수 있을까.
한유일이 ‘별천지’라고 부른 이곳의 모든 갤럭쉽이 지구를 총공격했다면 대한민국 목포는 어떨지 몰라도 나머지 지역은 소멸했을 것이다.
그만큼 숫자가 많았다.
이런 무시무시한 괴수가 우주에서 계속 지구를 노린다면?
‘정리해야 해.’
무일이 언제까지고 지구를 지킬 순 없다. 은퇴를 논하기에는 아직 멀고도 멀었지만, [예지]로 본 지구의 미래는 절망적이었다.
정체되고 도태된다.
고대인들이 ‘신’에게 의존하며 노력하지 않던 암흑기처럼.
한무일이란 안전장치가 있는 한, 인간들은 계속 엉뚱한 짓거리를 할 것이다. 그중 하나를 예로 들자면,
『전쟁』
그것도 괴수와 치르는 전쟁이 아닌 ‘인간 vs 인간’의 땅따먹기.
여태까지는 그런 전쟁이 없었다.
왜냐?
미사일 등을 쏴대면, 그 소리나 진동에 자극받은 괴수가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어떤 도시와 나라도 살아남을 수 없다.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다.
땅속에는 ‘대한민국 목포’마저도 순식간에 매장할 수 있는 괴수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가 ‘대지의 정령’ 올란드.
하지만….
한무일이 있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똥을 싸지르면 치워주겠지!』
...라고 말이다.
그런 이기적인 생각의 결과가 이번 사태다.
똥을 치워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엘퍼러’가 죽자마자 홍수에 쓸려가듯 손쉽게 무너져버린 지구의 인류.
이번 사태로 인구가 100년 전의 악몽 때처럼 대폭 감소했으리라!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이런 비극을 겪은 후에는 반성해야 정상.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무일이 [예지]로 본 지구의 미래는 변한 게 없었다.
자신이 있는 한….
『지구에 미래는 없다!』
한무일은 단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당장 없어져도 절망적인 건 마찬가지. 모든 시설과 문화가 파괴된 현재는 자생능력이 거의 괴멸된 거나 다름없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환경과 복지의 악조건으로 계약자가 ‘늙는’ 상황이 곳곳에서 벌어질 것이다. 미녀의 ‘영구불변 미모’는 다양한 MID 건강보조식품과 규칙적이고 안락한 일과(日課)에서 나오니까.
이런 난국에 한무일이 지구를 등지면?
먼 미래를 내다볼 것 없이 ‘못생겨진 계약자’ 때문에 ‘열 받은’ 수호자의 분탕질로 인류가 결딴날 것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
하면, 위협의 요소가 될 수 있는 괴수는 하나라도 줄여두는 편이 좋지 않을까.
“저희가 사라지면 지구도 곧 사라질 겁니다.”
“오만한 발상이군.”
“정말 그럴까요? 한 번쯤 생각해보셨나요? 인간들이 우주라고 부르는 이 세상에, 설마하니 생명체가 저희뿐일까요.”
“......”
그렇지 않음을 무일도 안다.
당장, 지구 주변을 유령처럼 돌아다니는 ‘별똥별 괴수’인 ‘안드로다’만 하더라도 상식 밖으로 위협적인 괴수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이, 작년에 안드로다 하나가 단순한 변덕으로 중국에 자유낙하를 시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무일은 궤변이라고 생각했다.
백만마녀가 차원이동문을 열기 이전까지만 해도 지구에는 ‘괴수’가 없었다.
물론, 전설과 신화에 등장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간혹 있긴 했었지만, 이렇게 무더기로 나타났던 적은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는 차원이동 할 수 없지.’
마신이 지구로 못 넘어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무일을 위협적인 존재로 판단한 마신 위그드라실과 프로메시아가 직접 안 나서고 하수인을 이용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
용량이 지나치게 크기 때문이다.
“제 말이 진실인지는 곧 밝혀질 겁니다.”
“무슨 뜻이지?”
“절대자여. 이번 전투로 저희는 많은 수의 동족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 ‘포식자’가 아닙니다.”
그 말을 들은 직후였다.
무일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미래가 그려졌다.
『지구 없는 태양계!』
세상일은 원래 물리고 물리는 법이라고 했다.
하지만 ‘먹이사슬’이라고 불리는 그 ‘자연의 법칙’ 스케일이 커지면서 이렇게 터무니없는 결과를 부르리라고는….
그리 먼 미래가 아니었다.
언어로 표현한다면 ‘3시간 뒤’라고 할 수 있으리라.
갤럭쉽을 빠르게 정리하고 지구에서 여전히 활개 치는 중인 ‘여왕벌’을 토벌할 예정이었던 무일은 계획을 급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허….”
“원래는 마신 프로메시아가 저희에게 했던 약속이었습니다. 협력하는 대신, 기나긴 위협으로부터의 해방.”
“그랬는데 무산됐고.”
“네.”
“친절한 설명, 잘 들었다.”
“...어? 아?”
한무일이 쏘아낸 촉수가 여왕의 심장을 관통했다.
즉사(卽死).
못다 한 변명은 영혼석 안에서 얼마든지!
주위의 갤럭쉽이 눈을 크게 뜨고 경악하는 가운데, 이 ‘전설의 도시’를 오랫동안 통치해온 아름다운 여왕님을 살해한 남자가 말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줄을 잘 섰어야지.”
“......”
“방금, 나랑 눈 맞은 너. 그래, 너. 오늘부터 네가 여왕이다.”
< [65화-2] 되돌아갈 시간이다.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