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69화 (269/287)

< [64화-4] 멸망 교향곡 >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고치의 외형은 ‘알에서 태어난 영웅’하고 차이가 대단히 컸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도 신라의 건국신화인 ‘혁거세’로 박힌 환상과 고정관념이 너무 커서, 흉물스러운 고치를 꺼리고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입장이 조금 달랐다.

“한 공자님이 죽었을 리 없어요!”

그중에서도 7종 웨일풍 계약자 ‘시링 팽’이 가장 시끄러웠다.

중국의 국가주석 첸지 죠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팽 소저, 진정하시오. 모두가 아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자국에 좀 더 신경 써주시오.”

그랬다.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국민이 죽어가고 있다.

시링 팽이 좀 더 신경을 쓴다고 해서 생존율이 더 오르는 건 아니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우를 웨일풍이 막아주지 않았다면 수도 ‘베이징’은 초토화됐을 것이다.

중국이 자랑하는 8종 괴수들은 공중전에 취약했으니까.

【하이블 / 8종 보통】

문팽이의 진격을 맨몸으로 밀어붙여 1%쯤 느리게 만들 수 있는 괴력을 가진 악마.

워페레스와 갤럭쉽의 준동으로 날뛰기 시작한 야생괴수들을 처단하고 있었다. 주로 고위급 위주로.

하위괴수는 물량으로 쓸어버리고 있었다.

【쑨우쿵 / 8종 소형】

주위에 바위만 있으면 무한대로 회복하고 복제되는 돌원숭이.

삼장법사와 닮은 점이 많은 ‘샤려 핑 2세’를 만나며 각성한 쑨우쿵은 베이징 시내의 건물을 재료로 해서 홍수처럼 밀려오는 괴수 대군을 막고 있었다.

남은 전력은 전부 상하이로.

엘퍼러의 도움으로 대폭 증가한 수호자 전력도 상하이로 전부 보냈다. 면적만큼 지켜야 하는 인구도 많은 중국이었으니까.

두 대도시로 피난 온 시민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지옥을 방불케 했다.

‘그때까지 끝나야 할 텐데.’

정보과장 ‘위진 창’은 깊은 우려를 억지로 삼켰다.

버티는 건 문제가 아니다.

문제라면,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식량! 배급을 최대한 조절하면서 ‘돼지 괴수, 플라돈’ 같은 식용 괴수를 끊임없이 사냥하고는 있지만, 과연 어떨지….

그나마 다행이라면?

문팽이가 세상을 휩쓸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해뒀다는 것이다. 문팽이가 아닌 다른 ‘3대 재앙’ 때문에 저장해둔 식량을 쓰게 됐지만, 결과적으로 이 덕분에 살았다.

안 그랬다면 폭동이 터져도 진즉 터졌으리라.

“주석. 남은 시간은 23시간 48분입니다. 오차범위 2시간 30분 내외.”

고치가 부화하기까지 남은 시간.

확신은 금물이지만, 마법이 아닌 과학으로, 고치 온도를 측정한 정보를 토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점점 올라가는 온도.

초신성이 폭발하려는 조짐 같았다.

믿기지 않지만, 고치 안은 여자의 자궁과 그 구조가 매우 흡사했다. 초음파 측정기로도 내부 상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쉽지만.

뭐가 나오든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란 건 변함없다.

“하루. 하루인가. 제발 하루여야 할 텐데.”

식량 배급이 뜸해지거나 멈추는 순간, 중국이란 나라의 체계 자체가 무너질 것이다.

인구가 많다는 게 이럴 때는 치명적인 약점!

그나마 위안이라면?

중국보다는 식량 사정이 나은 나라들도 하루 차이라는 점이다. 인류가 아사(餓死)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그리 멀지 않았다.

아마…. 굶어 죽기 전에 공포가 전염되어 자멸할 가능성이 더 높지만.

(주석.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그동안 추수를 하십시오.)

(관우 공. 전사하시면 안 됩니다.)

이름은 관우. 이전 이름은 아담.

가상현실게임의 주입식 교육으로 완전히 뼛속까지 중국인이 다 된 ‘이계의 3대 기사’는, 어느새 중국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에 문세웅과 이윤필이 있다면?

중국에는 ‘관우’가 있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 국가 차원에서 대놓고 협객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중국의 사냥꾼 전력은 수십 배로 상승하는 효과를 보았다.

(물론입니다. 제 목숨은 저만의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괴수가 우글거리는 전장에서 들려온 통신.

무척 든든했지만, 역시나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인류의 미래는….

대한민국 목포에서 결정되리라.

꿈틀.

이게 얼마만의 평온일까?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 어른들의 보호 덕분에 괴수의 위협조차 모르고 자랐던 시기가 떠오른다.

부산에서 나름 잘나가던 프로사냥꾼의 자식으로 태어나, 남자임에도 나름 유복하게 자랐다. 그 유복함이 남들의 피땀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았을 때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때, 무슨 생각으로 가출했더라?

‘아…!’

처음으로 ‘자각’이란 걸 했을 때, 답답한 공간에 갇혀 있음을 깨달았다.

너무나 견고해서 탈출은 꿈도 못 꿀 감옥.

게다가 잔인하게도…. 감옥 밖의 세상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요염한 미소녀, 앙칼진 미소녀, 풋풋한 미소녀, 무서운 미소녀, 사차원 미소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깝지만 먼 거리.

숙주에게는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쩌면 이 또한 노림수였겠지만, 미소녀의 목덜미에 처음으로 송곳니를 박은 순간의 감동….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이런 선택을 했던 게 아닐까?

‘아…!’

외부의 충격으로 상념이 깨졌다.

주마등이 지나가고 머리가 맑아지며 돌아온 현실.

그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느꼈다.

‘나는 누구인가.’

한무일인가, 한유일인가.

인간인가, 흡혈귀인가.

답이 나오지 않아서 이번에는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살펴봤다. 그리고 놀랐다. 더는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구조에.

그중에서도 가장 걱정되는 부분은 머리였다.

이걸 ‘머리’라고 할 수 있을까?

뇌가 있어야 할 자리의 정중앙에는 ‘영혼석’이 있고, 그 주위는 수십 겹의 골판(骨板)과 근육이 얇게 감싸고 있다.

쉽게 표현하면 ‘핵’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뇌가 없음에도 불편함(?)을 못 느낀 건 이 때문인 것 같다.

(죄송합니다, 폐하.)

(큭! 더는 못 지켜드릴 것 같습니다.)

(복수를 부탁합니다.)

공들여서 만든 근위대 전력이 죽어가고 있었다.

어떻게든 살려주고 싶었지만, 아직은 움직일 수 없었다. 꼼짝달싹 못 하도록 무언가가 온몸을 꽉 붙잡고 있었다.

죽어가는 건 그들만이 아니다.

엘퍼러의 사후, 자기 살길을 모색하던 ‘여성형 괴수’들도 쓸려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방어에 취약한 그녀들이 따로따로 행동한 결과.

아니, 이번 경우에는 적의 공격이 지나치게 강한 탓이리라.

(여기가 바다였다면…. 큭!)

(아…. 죽기 전에 당근 하나만 더.)

(빠끔, 마신은 예지 밖이니 어쩔 수 없도다.)

여기에는 ‘8종’도 예외가 아니었다.

쉬임프, 도끼토끼, 아쿠버스, 오니오프가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바탕으로 ‘공공의 적’인 갤럭쉽을 쓸어버렸으나….

그녀들의 죽음도 순식간에 결정됐다.

다미호 추종자의 보호를 받는 구미호만이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지만, 방어선이 뚫리고 집중공격을 당하는 바람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안 돼! 루나! 까쓰! 이거 놔! 선배가…!)

(아저씨! 아저씨~~!)

방어선의 중추 역할을 하던 ‘문팽이’와 ‘올란드’가 몸을 빼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의 계약자를 억지로 고치에서 때어내어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선지혜는 문팽이의 몸속으로.

최은비는 땅속 깊숙이.

배틀씹을 포함한 ‘최강의 괴수’들의 생각이 일치했다.

『더는 못 참아! 이젠 전쟁이다!』

얻어맞기만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 이틀이면 정말 많이 참은 것이다!

저 고치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그들은 ‘내일까지’ 고치가 무사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자마자 공세로 나섰다.

자연스레 방치된 고치.

여기로 갤럭쉽의 ‘절대영도 얼음덩어리’와 ‘초고온 불덩이’가 집중적으로 떨어졌다. 자신들의 안위도 돌보지 않은 채, 끝을 내기 위해서.

모든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고치(?)는 아찔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부터는 소녀가 모시겠습니다, 죽음의 지배자 되실 분이여. 나의 주인이시여.)

사요나락이 공손히 인사하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이변이 발생했다.

죽은 괴수들이 한꺼번에 벌떡 일어서며 다시 싸우기 시작한 것 아닌가! 그 대상에는 쉬임프를 포함한 ‘8종 괴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녀들의 움직임은 꼭두각시처럼 위태위태했지만, 본인들의 기술과 장기를 활용하여 갤럭쉽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살아있을 때보다 더욱 안정적으로.

개별판단이 무리인 탓에 개개인의 능력은 생전보다 떨어졌지만, 군대처럼 단합되었으며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우기에 훨씬 막강했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구나. 죽음의 일족 생존자.)

(불쌍해서 살려줬더니 엉큼하네.)

이틀 전부터 쭉 관망만 하며 여러 사람을 답답하게 했던 ‘백만마녀, 슬라리스’와 ‘공극의 마녀, 쏠비얀’이 한마디씩 했다.

그녀들은 이틀 전부터 힘을 비축하고 있었다.

최악의 순간이 오면, 고치를 다른 차원으로 옮기기 위해서.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걸 존재감이라고 할까?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의 데이터 용량처럼, 용량이 크면 옮기는 것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생명체는 데이터와 달리 나눠서 옮기는 게 불가능하다.

단숨에! 한꺼번에!

하지만 저 고치는 ‘최강의 마녀’라고 불리는 두 사람이 힘을 합치더라도 쉽지 않았다.

엘퍼러 때하고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

하지만 그게 역으로 발목으로 잡고 있었다.

(...저는 이 땅에서 태어난 몸. 당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사요나락 ‘엔츄 베르테’는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저 외계인들이 뭐라고 하는 건지….

물론, 의아하긴 했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는 옷을 입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역으로 벗고 있는 맨몸 탓에 부끄러움과 허전함을 느낄 때가 간혹 있었다.

인간들이 ‘사요나락’이라고, 괴수라고 부르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여겼을 뿐.

그런데 저들은 자신을 ‘인간’이라고 했다.

썩 좋은 혈통은 아닌 모양이지만.

(하긴…. 지금은 핏줄이 중요한 게 아니려나?)

(잘 들어, 죽음의 일족 꼬마.)

(엔츄 베르테에요.)

(...좋아, 엔츄. 우리가 도와줄 테니 어떻게든 이곳을 사수해내야 해. 차원이동을 준비했었는데…. 실패했어.)

차원이동문의 크기를 확장하는 속도는 굉장히 빨랐다. 이 정도면 문팽이나 배틀씹도 들어가지 않을까?

그 정도로 거대하고 특별했다.

하지만 고치가 성장함에 따라 비례하게 증가하는 존재감을 따라잡지 못했다. 역으로 점점 격차가 커지는 중!

몬스터월드 ‘최강의 마녀’와 ‘전설의 마녀’가 힘을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계획을 바꿨다.

진즉, 방어선에 힘을 보탰으면 좋았으리란 아쉬움은 있지만, 후회하진 않았다. 그녀들은 지구인을 믿지 않았고 협력할 마음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아직 늦지도 않았고.

초특급 차원이동문을 열기 위해 모아둔 힘이 어디로 사라진 건 아니기 때문이다.

(이해했지?)

(...저는 주인님만 지킬 수 있다면 상관없어요.)

엔츄 베르테는 시체를 조종하며 야무지게 답했다.

이곳은 그녀의 무대.

게다가 고치 안에서 끊임없이 ‘힘’을 공급해주고 있었다. 안 그랬다면, 시체에 영혼도 부르지 않고 조종한다는 건 불가능했으리라.

(과연! 죽음을 사랑하는 일족다운 대답이네!)

(슬라리스. 시끄럽습니다. 애초에 당신이 유희 같은 걸 안 하고, 곱게 죽었으면 여러 차원이 행복했을 거예요.)

(흥! 쏠비얀. 3천 년쯤 독수공방한 후에도 그런 소리가 나올까?)

(내가 왜 그래야 하죠? 남편감이 눈앞에 있는데.)

마녀들은 시답잖은 대화할 여유마저 생겼다.

문팽이와 배틀씹, 올란드가 적극적으로 공격에 나서고, 희생을 도외시한 요격도 실패함에 따라 갤럭쉽의 숫자가 급감한 덕분이다.

하지만 그러한 희망이 끝난 것도 한순간.

『절망이 찾아왔다.』

피해는 컸지만, 승기를 잡아가던 문팽이의 군세가 단번에 쓸러 버렸고, 단단한 문팽이의 껍질에도 균열이 생겼다.

여섯 개의 머리로 브레스를 난사하던 다두룡(多頭龍), 배틀씹의 머리들에서 여섯 속성의 브레스 대신 고통의 포효가 터졌다.

올란드는 아예 땅속으로 피신했다.

“마신 라그나뢰크 클론…!”

어마어마한 숫자가 홍수처럼 목포를 휩쓸었다.

마신은 존재감이 커서 넘어올 수 없지만, 그 파편에 지나지 않는 클론은 아니다. 물론, 클론이라고 해도 쉬운 건 아니지만, 머릿수를 나눠서 차례차례 넘어온다면?

그 결과가 눈앞에 펼쳐졌다.

저것은 일방적이며 압도적인 힘의 폭거(暴擧).

‘모자라! 부족해!’

답답했다. 죽음이 눈앞까지 다가왔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라그나뢰크 클론들이 이제 몇 초면 당도하리라.

그때, 기적이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숭고한 희생.

(쏠비얀. 노처녀로 죽게 된 소감은?)

(그보다는 당신과 함께 죽게 되어 대단히 유감스럽네요, 슬라리스.)

살해된 게 아니다. 두 마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쇼핑 간다는 듯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마법의 단검으로 본인들의 심장을 찌른 슬라리스와 쏠비얀이 쓰러졌다. 그리고 그녀들의 영혼은 구천(九天)을 떠돌지 않고 곧바로 흡수됐다.

영혼석으로.

부화까지 하루쯤 남은 고치에 균열이 갔다.

그리고,

“기다리다가 죽는 줄 알았다.”

복잡한 심경이 담긴 투덜거림이 들렸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죽음을 기다리던 엔츄 베르테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가 휘둥그레졌다.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몰아붙이던 마신의 클론이 피를 토하며 수수깡처럼 허물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

터무니없는 존재가 세상에 강림했다.

왠지 묵직한….

짓눌리는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 [64화-4] 멸망 교향곡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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