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68화 (268/287)

< [64화-3] 멸망 교향곡 >

“끝이 없어.”

“서울만 공격할 것이지, 라고 기도하면 너무한 거려나?”

“유나. 그런 것보다 상대가 좋지 않아. 공기가 희박한 우주의 괴수라니.”

“선영이가 상성으로 밀리는 건 처음인데?”

바람의 마녀 ‘박선영’과 대한민국 국모 ‘선유나’는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보며 불평을 토로했다.

무슨 RPG 게임 이야기 같지만, 엄연한 현실 문제.

그녀들이 30분만 직무유기 해도 서울을 포함한 대한민국 도시 전부가 초토화된다. 그만큼 상황은 절박했다.

몸을 거의 움직이는 법이 없는 용신 ‘와이츠’가 쉬지 않고 하늘을 순회하고, 바람의 정령 ‘엘로엘’이 일으킨 폭풍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막을 수 있을까?

시민들은 진즉 지하벙커로 대피한 상태다. 땅속에 사는 괴수가 습격해오면 생매장당할 수도 있지만, 밖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저 애는 참 열심히 싸우네.”

“윤소영 양은…. 응. 어린애에게 너무 무리한 걸 시킨 걸지도.”

“우린 안 그랬나?”

“선영아. 우리가 고생했다고 똑같이 겪으라고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

“고생은 수호자가 하는 거지.”

선유나는 공감할 수 없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건 수호자가 맞다. 하지만 그 괴수를 달래서 ‘인내심’을 끊임없이 주입하는 건 계약자다.

계약자와 수호자는 계속 교감한다. 그리고 종국에는 성격과 성향이 비슷해진다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견해다.

쌍둥이가 외모 빼고는 다 다른 것처럼.

계약자와 수호자의 의견이나 생각이 같아지는 건 아니다.

이렇게 싸움이 격화되면 ‘사람을 죽이지 말아줘요.’라고 끊임없이 부탁해야 한다. 그것도 고집불통 괴수에게.

“크아아앙!”

윤소영의 7종 수호자 ‘레드군’의 포효가 서울을 쩌렁쩌렁 울렸다.

저 용왕도 참 별난 구석이 있다. 보통, 레드군이라고 하면 다혈질에 수틀리면 사람을 휙휙 죽이는 고위괴수인데, 대단히 잘 참는다.

물론, 활약하는 건 윤소영만이 아니다.

부산을 근위대(뱀페스트)가 맡기 시작하면서 계약자 다수를 서울로 돌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계약자를 꼽으라면,

『고은별 - 재해의 천사』

그녀의 7종 수호자 ‘발키지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맹활약 중이었다.

특히, [예지]와 [예감]으로도 찾기 힘든 구름 속에 숨어있는 ‘갤럭쉽’을 잡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不許)했다.

깃털을 쫙 뿌린 후에 수분흡수! 그러면 목욕탕 수증기가 걷히듯 알몸뚱이 여자가 모습이 드러난다.

바로 그 여자가 대한민국을 초토화 중인 갤럭쉽.

외모는 가지각색이지만, 기본적으로 환상적인 미모를 자랑한다. 그냥 예쁘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몽환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전투 내내 졸린 표정을 고수한다.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아직 사과도 못 했는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고대인 여성이 언급했던 ‘서울의 영웅’ 윤소영은, 당장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도 믿어질 것 같은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흡혈귀의 명령으로 ‘오빠’에게 접근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해방되자마자 완전히 남남처럼 굴 필요는 없었다.

섭섭해 하지 않았을까?

그날 이후부터 쭉 괜찮으냐는 안부 연락은 몇 번 받았다. 하지만 사무적으로만 답하고 대충 넘어갔다.

언젠가 제대로 말해야지….

계속 미뤘더니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소영. 신경 쓰지 마라. 그 존재는 절대 안 죽는다.’

‘엘카르…. 하지만 이미 죽었다고….’

‘그렇게 쉽게 죽어줄 놈이었으면 내 이빨에 먼저 죽었을 것이다.’

‘...응. 그렇겠지?’

윤소영은 힘을 내기로 했다.

오빠가 되돌아왔을 때, 콘크리트 무더기뿐인 서울을 보여줄 순 없으니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서울에는 그녀의 가족과 친구가 있다.

물론, 도시를 지키고자 애쓰는 건 고위계약자만이 아니었다. 가족과 애인, 친구 등을 위해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많았다. 생각보다 훨씬!

그들은 서울 여의도의 괴수대응본부로 모였다.

“계약자로 가입한다고요?”

“네. 이름은 금서희. 수호자는 5종 까까오. 고향은 부산이고…. 나이도 밝혀야 하나요?”

“아니요. 어디…. 16살로 기재해드릴게요. 비상시국이니.”

“어머! 감사합니다!”

한무일의 이복동생 ‘금서희’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이것저것 강제의무를 달게 되는 ‘국가소속 계약자’이기를 쭉 거부해왔던 그녀는 이번에 큰마음 먹고 가입했다.

다른 뜻은 없다.

사랑하는 친오빠가 지키고자 애쓴 세계에 잠깐만 보탬이 될 생각으로. 그녀는 전황을 희망 있게 보지 않았다.

‘이건 못 막아. 너무 터무니없어.’

국가소속 계약자에게만 지급되는 최고급 전투복을 걸치며 금서희는 생각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에 보았기 때문이다. 목포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현실적인 전투를. 그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天災地變)이었다.

그럼에도 돕는 이유는?

저승에 먼저 가 있는 오빠 앞에서 당당하기 위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격이었지만, 가만히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이편이 나은 건 확실했다.

“우리의 가족과 시민을 위해!”

“신임 헌병대장을 따르라! 에쏘스트와 함께 전설을!”

“와아아아!”

한무일의 죽음 이후, 두 자루의 에쏘드는 신속하게 ‘재배치’됐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회수한 건 아니고…. 그런 짓을 시도했다가는 문팽이가 국회의사당과 청와대를 밀어버렸을 것이다.

『유언장』

사냥꾼이라면 누구나 작성하는 사후정리.

자신이 죽으면 선지혜가 폭주해서 대한민국이 사라질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한무일은 매우 꼼꼼하게 유언장을 만들었다.

재산뿐만 아니라 ‘에쏘드’까지도.

매우 특별한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거머쥔 미청년이 사냥꾼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 특공대에서 활동하다가 부친의 생떼에 항복하고 헌병대로 이동한,

“신임 헌병대장, 문세웅입니다.”

끽해야 2급 사냥꾼이었고 경험과 연륜도 미천하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믿을 거라고는 헌병대 대장 ‘문장춘’을 친부로 두었다는 정도.

하지만 그랬던 문세웅은 현재, 모두가 부러워하는 자연미인 ‘장혜린’의 남편이며, 어린 딸을 둔 훌륭한 아버지가 됐다.

어디 그뿐이랴?

세계에 단 하나뿐인 ‘초특급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최강의 사냥꾼 ‘엘퍼러’의 후배이자 제자! 그리고 마침내, 사냥꾼이 오를 수 있는 최고 경지라고 불리는 에쏘스트가 되었다.

그 에쏘스트조차 평범하지 않다.

‘이봐, 세웅. 정말로 싸울 거냐?’

‘당연하지! 남자가 송곳니를 뽑았으면 목덜미에 생체기라도 내야지. 설마…. 흡혈귀 후작인 네가 겁먹은 건 아니지?’

‘그럴 리가. 다만…. 아니다. 네 마음대로 해라.’

한무일과 한유일처럼 상부상조하는 관계로 맺어졌다.

숙주와 뱀페스트가 힘을 합치며 상승효과를 일으킨 건 당연! 타국의 에쏘스트하고는 차원이 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이건, 엘퍼러가 해놓은 안배의 결과물.

자신이 죽었을 경우, 그 힘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는 뛰어난 에쏘스트가 여럿 필요하다는 걸 예감하고 있었다.

...그렇다. 뛰어난 에쏘스트 여럿.

“단검에는 익숙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지.”

“특공대장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좋아. 1조는 나를 따르고 2조와 3조는 후방에서 지원사격한다. 장기전이 예상되는 만큼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걸 최우선으로 한다.”

“네!”

특공대 부대장 ‘이승필’은 한창 연설 중인 의동생 ‘문세웅’을 힐끔 봤다.

녀석, 제법이잖아?

하지만 살짝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문세웅이 계약한 ‘한세리’는 평범한 에쏘드가 아니다. 동정 아닌 남자를 살해하는 저주가 걸려있다!

한세리는 ‘용사님에게 위해를 끼칠 수 있는 저주라서 치웠어요.’라고 했지만, 저주라는 것이 서랍장에서 물건을 빼듯 간단히 정리될 것 같지 않다.

결국은 ‘믿음’이다.

문세웅이 저주의 잔재를 의심하면 그게 ‘진실’이다.

‘이승필 씨. 당신은 걱정이 너무 많소.’

‘그렇습니까? 하면, 대공(大公)께서는 이번 전투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승리하오. 위대하신 폐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

‘한유일 씨가-, 흠흠! 폐하께는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칭에 주의해주시오.’

자유분방한 영혼인 ‘하렘의 왕’과 달리, 바로 밑의 ‘이인자’ 격인 ‘흡혈귀 대공’은 대단히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다.

설상가상으로, 이승필이 계약한 에쏘드 ‘한유나’도 차분한 성격. 먼저 말을 걸기 전에는 대답하는 법이 없다.

옛 주인을 잊지 못해서 의기소침해 있는 건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만, 정령은 그렇게 감성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중국과 일본을 걷어차고 말없이 넘어왔을 때부터 짐작했었지만….

과거는 과거.

에쏘드는 현재 ‘용사’만 신경 쓴다.

“우리는 수색대와 협력해서 인천과 파주, 개성으로 몰려드는 괴수들을 처리하는 것이다. 서울은 헌병대가 맡기로 했다. 질문 있다면 지금 해라.”

“없습니다!”

“좋다. 4종 이하의 괴수에게 다치는 녀석은 지옥훈련을 각오하라. 출진!”

대한민국 최고의 사냥꾼들이 괴수대응본부를 나섰다.

그 선두는 에쏘스트 이승필.

서울방송 국장의 딸 ‘홍영희’를 아내로 둔 덕분에 그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특히, 세상에 몇 없는 에쏘스트가 되면서 절정에 달했으니!

『태극용사, 이승필』

아내가 말리지 않았다면 방송국으로 쳐들어가서 장인어른 멱살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쁜 건 아니다.

헌병대장 문장춘의 노력으로 꾸준히 인기와 인지도를 쌓아온 ‘문세웅’과 함께, 태극용사 이승필은 한국인들의 ‘희망’으로 급부상했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모든 건,

‘한무일 대장님의 안배대로 흘러가는구나!’

이게 바로 [예감]의 궁극(窮極)에 도달한 사냥꾼의 능력이란 걸까?

본인의 죽음을 제외하고는 너무나 완벽하다.

물론, 전부가 맞아떨어진 건 아니다. 유언장에는 ‘영혼석’과 ‘폴리검’에 관해서도 언질이 있었으니까.

아니, 어차피 ‘봉인’할 것들이었으니 상관없으려나?

이승필의 상념을 깬 건 하나의 통신이었다.

(대장님. 목포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빠르게 보고하라. 갈 길이 멀다.)

(네! 무슨 수를 써서라도 3일만 버티라는 전갈입니다. 3일 뒤에 어떤 식으로든 종전이 날 거라고 합니다.)

(...두서없는 통보지만 잘 알았다. 3일. 3일이라….)

이 통신은 이웃하는 ‘중국’과 ‘일본’에도 전달됐다.

그리고 여긴 일본.

수도 ‘도쿄’가 반파되며 어려운 상황에도 빠졌으나, ‘폴리검 공동연구’라는 달콤한 미끼를 비롯한 여러 정책을 통해 빠른 회복세를 타고 있는 극동(極東)의 섬나라.

지리적으로 한국이랑은 바다를 사이에 끼고 있었지만, 무시무시한 ‘3대 재앙’의 재난에서 빗겨나진 못했다.

녀석들의 목적 중 하나, 아니, 과정에는 지구인의 멸족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일본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우주에서 절망이 떨어지는 것보다는 말벌이 낫겠지.”

“......”

“키바. 이게 마지막 기회다. 총리가 아닌 아버지로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어차피 막지 못하면 일본은 끝이겠지만.”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보겠습니다.”

일본 총리 ‘코죠 카즈마’는 멀어져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위기는 늘 기회를 동반한다.

에쏘드를 한국에 헌납한 ‘키바 카즈마’에게, 일본의 희망인 ‘폴리검’을 내준 건 정말 파격이란 말로도 부족했다.

정치의 부조리라고 해도 반박할 수 없으리라.

만약, 지난 사건으로 천왕이 실각하고 정치권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잘해내야 할 터인데. 흠….’

밖에서는 ‘아들 감싼다.’는 비난을 듣는 코죠 카즈마였지만, 그건 괴수에 대해 잘 모르는 무식쟁이들이나 하는 소리다.

키바 카즈마는 뛰어난 프로사냥꾼이다.

유키나 미나미에게는 ‘오줌싸개’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한심한 사내’ 취급을 받지만, 어릴 적부터 스파르타 교육을 받은 그의 실력은 진짜다.

여성편력이 흠이지만….

절제를 모를 만큼 어리석은 남자인 건 아니다.

지난 사건도, 에쏘드를 가지고 한국에 간 것 자체는 잘못이 아니었다. 상식 밖의 인물인 ‘엘퍼러’에게 접근한 게 문제였을 뿐.

사소한 충동이었을 뿐이다.

“그런 엘퍼러가 죽었단 말인데…. 시원섭섭하군.”

“3일만 기다려달라고….”

비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에, 코죠 카즈마는 코웃음 치며 답했다.

“그 고치 말인가? 꼭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이 생겼더군. 기대하지 말게.”

< [64화-3] 멸망 교향곡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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