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67화 (267/287)

< [64화-2] 멸망 교향곡 >

“탈출한다!”

“갈 곳이 없습니다! 맹주!”

“빌어먹을!”

유럽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괴수대응연맹은 괴멸했다.

1차로 황진천이 강력한 수호자를 전부 쓸어버리고, 2차로 계약자를 빼앗긴 위치봉이 사령부에서 폭주하는 바람에 업무가 마비됐다.

그리고 마지막 3차.

무려 100년이란 역사를 자랑하던 괴수대응연맹은 워페레스의 침공으로 초토화됐다. 그나마 아직은 온갖 보호시설 덕분에 ‘소멸’만은 면했지만….

그것도 금방이다.

“맹주님. 이만 그녀를 버리심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 우리가 인질처럼 계약자를 붙잡고 있기에 위치봉이 마법 공격을 안 하고 있는 걸세!”

“헉! 그, 그런 겁니까?!”

“이런 답답한 사람들을 봤나!”

아몬 헤이젤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폭주한 수호자에게서 시간을 벌 순 있을지 몰라도 이 지하통로 밖의 괴수들은 그렇지 않다. 유럽 전역에 퍼지고도 연맹을 포위한 워페레스 숫자는 물경 3천!

이 숫자는 아마, 중국의 8종 수호자 ‘쑨우쿵’ 다음 가는 물량공세의 폭거일 것이다.

‘안일했다.’

그 엘퍼러가 죽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모든 국가의 계획은 ‘엘퍼러의 생존과 원조’를 대전제로 짜여 있었다. 그런데 그 밑바탕이 어긋나니 주춧돌 빠진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 결과.

상상조차 못 했던 ‘괴수의 침공’에 우왕좌왕하던 100년 전보다 인류는 훨씬 더 빠르게 무너졌다. 전력 면에서는 100배쯤 강해졌음에도.

『변명?』

할 말이야 많다.

대패하고만 안일한 대책과 사유를 ‘인류의 진보를 위한….’이란 대사로만 포장해서 수십 개는 만들 자신 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영원히는 아니지만 ‘당분간’ 지구의 군사력을 엘퍼러에게 의존하며 군자금을 절약하고, 그 절약한 돈으로 연구와 문화사업에 쏟아부었다고….

이딴 말이 인제 와서 쓸모가 있을까?

강대국이고 약소국이고 할 것 없이 국가의 형태를 완전히 상실한 나라가 태반이었다.

‘인류는 이대로 끝나는 건가?’

그야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머지않은 미래에 거의 원숭이 수준으로 몰락하리라!

공룡에게 잡혀먹히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던 원시인류 이상으로 힘든…. 석기시대부터 다시 시작하게 될지도? 아니, 돌팔매질 이상의 발전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계약자가 영영 안 나올 테니까!

그때였다.

“맹주님. 사스키 양이 할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발작하는 것 아닌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얌전합니다.”

“음…. 좋네. 재갈을 풀게.”

“네!”

팔다리를 꽁꽁 묶고 짐짝처럼 남자들에게 업혀왔던 미츠코 사스키.

괴수대응연맹 내의 고문 역할을 하던, 일본 출신의 엘리트 여인은 입에 강제로 물린 재갈이 풀리자마자 답답했던 숨부터 토해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강간범에게 납치된 가련한 미녀….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황진천의 지배를 받는 그녀가 기습적으로 던진 생화학가스에, 엘리트 연구원 스무 명이 끔찍한 고통 속에서 핏덩이로 변해버렸으니까.

“주인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황진천이?”

“지금부터 제 몸을 빌려서 말씀하실 겁니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들어줄 시간이 없다.”

“들으면 살 수도 있는데? 맹주.”

말투가 변했다. 사무적인 음성이었던 ‘미츠코 사스키’에게서 남자의 장난기 어린 표정과 대사가 흘러나왔다.

아몬 헤이젤은 눈을 가늘게 떴다.

끔찍한 ‘3대 재앙’의 도움을 받아서 탈출한 이 살육자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일단은 들어보기로 했다.

“말해라.”

“현재 자리에서 가만히 있어. 소리도 죽이고.”

“무슨….”

“쉿. 말벌들이 35초 뒤에 대규모 도청을 계시할 거다. 그리고 그때 들킨 생명체는 초음파로 다진 고기가 될 거야. 아! 5초 남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5초가 덧없이 흘러갔다.

사방에서 듣기 싫은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고요가 찾아왔다.

“...방금 그건?”“말벌들의 계획 일부를 엿들었다고 할까? 이제 안전하다. 말벌들은 연맹기지를 전멸시켰다고 판단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거든.”

정말이었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와봤더니 온통 시체뿐이었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워페레스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아몬 헤이젤은 혼란스러웠다.

녀석이 자신들을 구해준 이유가 전혀 짐작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질문했다.

“어째서 우리를 도와준 거지? 아니, 살려둔 거지?”

“아주 좋은 질문이야, 맹주.”

히죽 웃은 미츠코 사스키-, 아니, 황진천이 이어서 말했다.

그건 대단히 충격적인 설명이었다.

“몬스터월드의 마신에 대해서는 들어봤겠지? 현재, 그곳의 마신 둘이 각각 최강의 괴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다.”

“그게 3대 재앙인가?”

“맞아. 좀 더 명확히 말하면, 워페레스는 위그드라실이 창조한 딸. 갤럭쉽은 프로메시아가 지구에 심어둔 눈이지.”

“...문팽이는?”“돌연변이 달팽이.”

“......”

“마신과 무관한 우량아 중에도 우량아.”

살짝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지려는 얘기가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몬 헤이젤은 ‘어째서 다 가르쳐주는데?’ 같은 소모적인 질문은 안 했다. 그 대신에, 가장 중요한 걸 물었다.

이미 알고는 있지만 확인하기 위해서.

“녀석들의 목적은?”

“마신을 살해한 위험분자의 완벽한 죽음.”

위험분자란, 라그나뢰크를 처치한 엘퍼러를 뜻하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맹주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요정의 황제는 죽었다.”

“죽었지. 하지만 완벽한 죽음은 아니야. 맹주도 알 텐데? 사요나락. 죽은 자를 되살리는 괴수. 그리고 만능인 마법도 있고. 살릴 방법은 많아.”

“황비가 포기했다.”

“선지혜? 제법 똑똑하긴 하지만, 마신만큼은 아니지. 그리고 한무일을 과소평가한 거야. 그 자식은 죽여도 죽질 않아.”

예쁜 여인의 얼굴이 진절머리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아저씨 같은 표정은…. 평소의 미츠코 사스키를 잘 아는 맹주로서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아몬 헤이젤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래서 놈들이 지구를 공격한 건가?”“반은 정답. 위험해진 돼지를 도축하려는 거지. 원래는 좀 더 살찌운 후에 잡아먹을 생각이었지만.”

“...그래서 네 녀석은 어디에 있지?”

“영국. 아! 참고로, 자네의 전(前) 장모와 마누라, 딸, 손녀들은 안전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어째서 ‘왕족 여성’만 안전한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했다.

패전국의 영애들이 무슨 꼴을 당하는지….

고대인들이나 할 법한 야만적인 사고방식으로 어떻게든 이해하고자 애썼다. 지금은 비상사태니까.

게다가 황진천의 구구절절한 설명은 도움이 됐다.

사실 여부는 판명되지 않았지만, 이 불확실한 정보라도 아직 멀쩡한 나라들에 보낼 의무가 있었고 여겼기 때문이다.

“황진천. 너는 무슨 목적이지?”

“생존. 조금 더 욕심을 부리자면 신분세탁 정도겠군.”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가?”

“가능해. 한무일이라면 실망과 통수만 치는 너희보다 나를 더 높이 평가할 테니. 어라? 이거, 완전 사망 플래그인데? 푸하하하!”

남사스럽게 웃는 ‘미츠코 사스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억지로 인내하며 좀 더 대화를 나눈 끝에, 아몬 헤이젤은 위그드라실과 프로메시아가 동맹이 아니란 것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일시적인 무언의 협력관계.

거기다 두 마신의 목적도 미세하게 달랐다.

위그드라실은 ‘한무일의 육신’을 갖길 원했고, 프로메시아는 ‘한무일의 소멸’을 강력히 바라고 있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목적.

그 때문에 ‘3대 재앙’이 곧 뒤엉켜서 싸우게 될 거라고 한다.

“뭐가 됐든 지구는 멸망하겠군.”

“하하하! 그럼, 또 좋은 정보가 있으면 전해주지. 아! 그리고 이 여자, 맹주를 자기 목숨보다 사랑하는 것 같던데?”

“...레이디의 마음을 들여다보다니 손버-, 아무튼 나쁘군.”

“큭큭! 행운을 빌지.”

그 말을 끝으로 황진천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건….

새빨개진 얼굴의 미츠코 사스키. 빙의된 게 아닌 그녀 본인이 확실했다. 이게 황진천의 연기라면 그냥 자살하고 말리라.

아몬 헤이젤은 무안함을 불식시키기 위해 헛기침을 했다.

생물은 위기상황일수록 종족보존을 위해 성욕이 왕성해진다고 했던가? 다 죽게 생겼는데 사랑이라?

모를 일이다.

“앞으로 3일입니다. 저 고치가 스스로 껍질을 깨기까지.”

백만마녀 ‘슬라리스’가 단언했다.

저 멀리 서쪽 대륙이 워페레스의 공격으로 전멸하는 동안,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 대륙도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유럽이 ‘전설의 요정’과의 전쟁이었다면?

여긴 ‘신(神)의 사자’와의 전쟁이란 표현이 어울리리라!

우주에서 내려온 천사와 선녀들이 구름 위를 노닐며 끊임없이, 정말 쉬지 않고 불덩이와 얼음덩이를 지구로 떨어트리고 있었다.

“저 고치가 뭔데?”

내일 인류를 멸족시키겠다던 선지혜는 계획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우주인(갤럭쉽)이 쳐들어와서 그런 건 아니다.

단순히 ‘저 고치에 혹시?’라는 막연한 희망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릅니다. 무엇이 튀어나올지는.”

눈물을 머금고 3일을 기다렸는데 저 안에서 ‘쿠에에에!’ 같은 괴성을 지르는 백혈구울이 튀어나온다면 정말 자살하고 싶으리라.

그전에 솔직히 말해서, 이 3일은 버틸 수 있을지부터 의문이었다.

‘우주의 괴수라니! 진짜 반칙인걸!’

거의 일방적인 폭력이나 다름없다.

물론, 문팽이에게는 소나기처럼 간지러운 수준이었지만, 목포는 그렇지 않다. 초고온 혹은 초저온 덩어리가 대기권 밖에서 자유낙하!

저 고치가 얼마나 튼튼한지는 알 수 없지만, 갤럭쉽의 폭격이 도시에 한 방이라도 떨어지면 그대로 휩쓸릴 건 자명하다.

게다가 이미 피해는 빠르게 누적되고 있었다.

“꺅!”“아흣!”

웨딩풍을 터전 삼아 하늘을 날아다니던 ‘2종 여성형 괴수’ 윈드걸스가 가장 먼저 갤럭쉽의 폭거에 휩쓸렸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은밀한 습격!

수백에 달하던 윈드걸스가 몰살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순한 폭격만으로는 올란드의 방어선을 뚫기 어렵다고 판단한 ‘마신 프로메시아’는 갤럭쉽 군단에 무모한 접근전을 강요했다.

『3일』

어떻게든 그 안에 끝장내겠다는 의지가 다분했다.

그 덕분이라고 할까? 뚜렷한 적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피하거나 막는 것밖에 달리 도리가 없던 지상도 분주해졌다.

엘퍼러의 추종자였던 ‘야생괴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동안의 정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생존이 최우선!

왕인지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목숨 바칠 의리는 없는 것이다. 아니, 설사 왕일지라도 희생을 강요하면 저항하리라.

물론, 마음은 그런데 탈출은 무리였다.

문팽이와 추종자들이 목포 주위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이다.

“버틸 수 있을까요?”

“버틴다고 해도 어떨지는….”

목포는 그야말로 밤낮없는 아수라장이었다.

그건 서울과 중국도 마찬가지.

이쪽도 치열했다. 주전장이 아닌 탓에 규모 면에서는 초라했지만, 주어진 미약한(?) 전력으로 강대한 적에 맞선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천만했다.

하지만 절망만 있던 건 아니었다.

< [64화-2] 멸망 교향곡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