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4] 영혼의 전장 >
(잠깐! 저런 짓을 하면!)
막장으로 치달고 있는 현실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관망하던 무일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발작적으로 소리 지른 건 그만큼 무모하기 때문이다.
뱀페스트는 무작정 흡혈하면 안 된다.
계약자란 안전장치가 있긴 하지만, 무일은 이 파트너가 그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계약’을 깼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의도는 뻔했다.
【백혈구울 / 6종 특수】
이건 죽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명백한 자살행위!
그럼에도 한유일은 멈추지 않았다. 가장 먼저 흡혈 당한 ‘최은설’이 빈혈로 쓰러지고, 그 뒤를 이어 ‘아이밍 리’와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한유일의 기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과거에는 초능력자였고, 현재는 ‘초능력자 감독관’으로 일하는 ‘장미래’를 포함한 슈퍼월드 노예들의 목덜미를 차례차례 깨물었다.
‘몸이…. 나른해지는군.’
인간들이 술을 마셨을 때의 기분이 이런 걸까?
머리도 아프고 정신도 산만해지는 것 같지만, 싫지 않다. 흡혈귀가 흡혈하길 좋아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 이상의 끌리는 무언가가 있다.
이게 중독현상이란 걸까?
계약자 없이 과도한 흡혈은 한유일의 사고를 마비시켰다.
좀 더! 더 많은 미녀의 피를…!
이러한 자신이 꼴불견이란 정도는 이미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절제할 수 있다.
그는 ‘왕’이니까.
어중이떠중이와 같아서야 어찌 왕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흡혈귀 왕이여! 당장 멈추십시오! 이 이상의 흡혈은 당신에게 위험합니다!)
(안다.)
(그럼 어째서!)
(슈퍼월드에서 멍청한 괴물이 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보는데?)
(그 문제라면 저희 기술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잘도 해주겠다.)
판타이탄이 조종하는 ‘모짜리나 바글버글’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준 한유일은 이어서 추종자들에게 연락했다.
부산에서 사냥꾼처럼 활동 중인 뱀페스트.
그들은 날개를 활짝 펼치고는 남쪽으로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제주도. 정확히는 그곳에 거주 중인 수십의 하이엘프가 그들이 목적이었다.
근위대는 귀가 뾰족한 절세미녀를 한 명씩 안아 들고 다시 북쪽으로, 부산이 아닌 목포로 이동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왕에게.
인도된 하이엘프들은 차분히 상의를 젖히고 주인에게 목을 내밀었다.
“유일…. 저 바보가…!”
무일은 파트너 녀석이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저건 어리석다. 위험하다.
영혼석 내에서도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특히 시끄러운 건 하이엘프의 남편이자 판타지월드의 지배자였던 레인.
그는 ‘내 마누라에게 손대지 마!’를 외쳐대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주위에서 곧바로 레인을 관리처분(?)에 들어갔다.
“관리자에게 대들다니?!”
“완전히 미쳤네!”
“죽으려면 혼자 죽던가!”
딱하게 되긴 했지만, 재갈이 물린 레인은 아파트 안으로 끌려갔다. 늑대인간 하나도 감당 못 하는 거 보면 어지간히 약한 영혼이 아닌 모양.
아무튼, 현실에서는 흡혈이 계속됐다.
나른하긴 해도 ‘나는 주량이 세!’라고 말하는 술고래처럼 버티던 한유일이 처음으로 발을 헛디디며 휘청거렸다.
하이엘프의 피는 확실히 강렬했다.
인간은 아니지만 유사한 종족인 그녀들은 ‘영매(靈媒)’로서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탓!
(어리석은 흡혈귀 같으니!)
(네 왕에게 전해라. 네놈의 말을 믿느니 수컷들을 믿겠다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다. 앞으로도 쭉! 내 숙주도 그렇지만, 나도 후회하는 성격이 아니니까! 으하하하!)
평소의 한유일이 아니었다.
하이엘프 중에서 최초로 흡혈 당했던 ‘세르네스 사우스엘븐’을 마지막으로, 엘프의 피마저 전부 흡수한 그의 상태는 이상했다.
그렇게 많은 피를 빨고도 몸이 부풀진 않았다. 그렇지만, 터지지 않도록 조심히 압축해놓은 풍선처럼 위태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내부적으로는 변화가 시작됐다.
‘아아! 뇌가 타들어 간다. 사라져 간다. 지워진다.’
이렇게 백치가 돼버리는 걸까?
한유일은 점점 희미해져 가는 의식으로 간신히 그런 의문을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그렇다.’라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영혼.
육신이 없음에도 감정이 있고 생각을 한다.
그러니 이대로 죽어버린 빈껍데기는 되지 않을 거란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덤으로 믿는 구석도 있었다.
뒤늦게 ‘한무일의 여자들’도 이변을 깨달았다.
(어떻게 된 거야! 선배의 몸이!)
(거머리가 이상해졌어!)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녀들은 이 나흘 동안 한유일을 전혀 보지 않고 있었다. 볼 때마다 죽은 한무일이 떠올라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까닭.
그렇다고 무관심한 건 아니었다.
저 몸을 움직이는 거머리는 정말 죽이고 싶을 만큼 싫지만, 육체만은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 맞았으니까.
그래서 고문하긴커녕 건들지 않고 놔뒀었다. 흡혈도 마음껏 하게 놔뒀는데…. 그건 ‘계약자’가 있어서 안전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각인으로 통제받고 있는 최은설이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 계약은 진즉 해제되어 있었다.
『파멸』
이젠 시간문제였다.
초조해진 선지혜는 괴수대응연맹에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 백혈구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기관이니까.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세계를, 무능한 인류를 멸망시킨 후에,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관속에 들어간다는 계획을 세운 그녀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무일의 육신’을 지켜야만 했다.
그마저도 안 된다면….
이미 미쳐버리긴 했지만,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저희도 잘….)
괴수대응연맹은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맹주 ‘아몬 헤이젤’은 역으로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랑하는 남자가 죽었다고 세계를 멸망시킨다니! 미친 거 아니냐!’
내일이면 멸망할 세계라면?
아몬 헤이젤은 응어리진 모든 걸 토해낼까, 라는 짙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입술을 벌리고 말하기 직전에 다른 문제에 휩싸였다.
그건 대한민국 부산이 아닌 괴수대응본부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놈이 탈출했다! 기형 백혈구울이 사라졌다!)
(큰일 났습니다! 미츠코 사스키 양이 황진천에게 물린 것 같습니다!)
(미츠코 사스키 양의 수호자 ‘위치봉’이 폭주했습니다!)
(대피! 대피하라! 위치봉이 있는 구역을 폐쇄하고 전원 대피!)
아몬 헤이젤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철저히 감시받고 있던 ‘황진천’이 무슨 수로 감옥을 빠져나왔단 말인가?
외부의 조력이 있었다고 해도 불가능하다. 엘퍼러의 ‘뼈 있는 경고’를 무시하지 않고 최고의 경비와 보안을 유지해왔다.
방심?
몇몇은 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실수로 인하여 부상자는 당연하고 사상자도 꽤 많이 발생했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전부 외부의 소행이었다.
아주 기괴하고 고통스러운 몇 가지 실험을 제외하고, 황진천은 꽤 성실하게 대부분의 연구에 협조하는 편이었다.
(미츠코 사스키 양은?)
(마취 후에 포박했습니다. 하지만 빈혈 상태에서 마취총에 너무 많이 맞아서 생사가 불투명한 상태입니다.)
(...황진천은?)
(찾았습니다. 몸에 심어둔 추적장치가 아직 살아있는-, 이, 이 무슨?! 놈은 혼자가 아닙니다! 맹주님! 9종입니다! 여왕벌이 움직였습니다!)
(워페레스…? 갑자기 왜…?)
아몬 헤이젤은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황진천이 ‘말벌 괴수’들과 함께 있는 이유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흡혈귀와 말벌의 조합이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혼란에 빼진 괴수대응연맹 상황은 선지혜에게도 전해졌다.
【워페레스 / 9종 소형】
유라시아에서 활동하는 괴수다.
엄밀히 말하면, 여전히 그 존재가 불분명한 ‘여왕벌’을 뜻하는 호칭이다. 잘 훈련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걸 보고 내린 미확인 괴수.
현재는 ‘말벌 무리’ 전체를 ‘워페레스’라고 묶어서 부르고 있다.
서식지가 다른 탓에 문팽이와 충돌할 일은 전혀 없었지만, 빠르게 영토를 확장 중인 문팽이와 인접…. 내년에는 충돌하리라 예상하기는 했다.
(이젠 어떡해…. 응?)
한무일의 육체를 지킬 길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한탄하려던 선지혜는, 수호자 ‘까루나 막찌몬쓰’의 긴급보고에 눈을 크게 떴다.
이 지상에, 지구에.
문팽이를 다급하게 할 생명체는 없다.
엘퍼러가 죽은 이상, 이 왕에게 대적할 괴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종 배틀씹이나 올란드가 성가신 축에 속하긴 하지만….
다급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우주는?
바다보다 압도적으로 광활한 이 무주공간이라면?
(언니! 창밖을 보세요!)
(올란드의 흙벽이 무너지고 있어요!)
(저건! 괴수예요! 우주형 괴수!)
고대의 종교건물 벽화에는 유난히 ‘구름 속의 미녀’가 많이 등장한다.
그 구름은 주로 ‘천국’ 혹은 ‘무릉도원’ 같은 이상향으로 묘사됐고, 미녀는 그곳에 사는 ‘천사’나 ‘선녀’란 설정이다.
그 실체!
현대에서는 ‘구름 속의 미녀’가 초현실적인 공간과 존재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고대의 무지한 인간들이 신화(神話)로 착각한 그것은,
【갤럭쉽 / 7종 특수】
괴수다. 우주에 사는 괴수.
주로 수성과 화성 궤도 사이를 돌아다니면 이따금 지구에서 관측되는 우주형 괴수다. 인류가 자랑하던 화성기지와 우주정거장을 소멸시키며 유명세(?)를 탔다.
게다가 놈들은 무리를 지어 활동한다.
워페레스와 마찬가지로 ‘여왕’이 있으리라 짐작되는 환상의 괴수.
“마신들이…. 아주 작정했군.”
영혼석 안에서 이 모든 전황을 지켜본 무일은 의외로 침착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기 때문에.
『7종 특수, 갤럭쉽 - 솜사탕: 천국이란?』
『9종 소형, 워페레스 - 여왕벌: 무한 생산』
『9종 대형, 문팽이 - 불도저: 도시 치워!』
지구에 괴수가 등장하기 시작한 100년 전부터 현재까지 쭉 ‘3대 재앙’으로 불렸던 세 괴수가 전부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팽이 하나만으로도 세계 멸망을 논하던 참인데….
나머지 둘마저?
이게 우연일 리 없다.
한유일은 ‘위그드라실’을 의심했지만, 한무일은 다르게 생각했다. 위그드라실의 계략은 ‘라그나뢰크 클론’으로 끝났다.
이건 자신의 엉덩이에 주삿바늘을 꽂은 자의 소행…. 아니면 또 다른 마신.
『최초의 마신 - 생명의 나무, 위그드라실』
『최강의 마신 - 마법의 정점, 크로마티온』
『최고의 마신 - 세계의 자궁, 프로메시아』
『최악의 마신 - 마녀의 공적, 라그나뢰크』
마신마다 특징이 있다.
원시적인 전투를 지향하는 라그나뢰크, 생명체를 조종하는 위그드라실, 마법의 시초라고도 불리는 크로마티온, 최첨단기술로 무장한 프로메시아.
영혼석에 처박힌 라그나뢰크는 논외.
마신의 클론으로 덤볐다가 필살기를 맞고 주춤한 위그드라실도….
‘남은 마신은 둘. 크로마티온 아니면 프로메시아.’
한무일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마법으로 자신을 이 지경까지 몰리게 할 수 있을까? 신약의 효과를 무효화해서 죽음에 이르도록.
대답은 ‘아니오’였다.
설사 가능할지라도, 영혼석과 에쏘드로 막강한 ‘특수능력 내성’을 가진 엘퍼러를 한 방에 고꾸라트리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게 가능했으면?
이렇게 구차한 방법을 동원할 것도 없이 그 ‘한계를 모르는 마법위력’으로 지구를 소멸시켜버리면 그만.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프로메시아. 아마도 이쪽이겠군.”
한무일은 시야가 일그러짐을 느꼈다.
결국, 시작된 것이다.
뱀페스트가 인간 형태를 포기하고 ‘새로운 종’으로, 한 차원 진화 혹은 퇴보한 백혈구울이 된 것이다.
뇌를 비롯하여 모든 장기가 퇴화하며 사라지고 기형적인 근육으로 채워진다.
여태까지 흡혈한 ‘여성의 피’를 전부 흡수했다. 신체에 유익한 조직은 흡수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배제하는 변태과정.
그 대상에는 이마에 박힌 ‘영혼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미청년이었던 살덩이는 밀가루 반죽처럼 섞이고 뭉치길 반복한 끝에,
“고치…?”
“알?”
상아색 구체가 됐다.
목포 한복판에 거미줄 비슷한 실타래를 치고 그 한가운데 고정된 그것은 일반적인 백혈구울의 탄생과정하고는 달랐다.
그 증거로, 뱀페스트 근위대가 더는 ‘동족’이라고 할 수 없는 ‘기형적인 존재’를 지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광경을 느긋하게 감상할 상황이 아니었다.
마침내 뚫렸기 때문이다.
목포를 감싸고 있던 올란드의 흙벽 일부가 우르르 무너졌다.
< [63화-4] 영혼의 전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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