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3] 영혼의 전장 >
무일도 자세히는 모른다.
그저, 마신 라그나뢰크가 ‘그릇’이란 표현을 썼기에 따라 했을 뿐. 그는 뜬구름 잡는 단어보다는 ‘주도권’이란, 좀 더 쉬운 뜻을 선호한다.
엄밀히 따지면 이것도 맞는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혼의 세계를 이끌 역량을 겨룬다는 점에서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말도 안 돼! 하등생물이 어찌…!
“그 하등생물이 너를 쓰러트렸다는 걸 잊지 마라.”
“빌어먹을! 나는 처음부터 지고 있던 건가!”
라그나뢰크는 깨달았다.
어째서 자신이 이리도 간단히 관리자 권한을 빼앗겼는지를.
이전 관리자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한무일을 쓰러트리기 위해 번거로운 방식을 택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나를 쓰러트린 존재!’
한 번 패배자는 영원한 패배자란 말이 있다.
그건 대단히 불합리하게 들리겠지만, 패배를 만회할 기회가 없다면 꼭 틀린 얘기도 아니다. 그리고 이미 죽은 후라면?
이길 가능성을 영영 박탈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더발트』
이 장착형 괴수는 평양에서 ‘카르 4세’에게 패배했다.
그때하고는 상황이나 형태가 많이 변했지만, 그렇다고 ‘가더발트’란 본질마저 달라진 건 아니다.
즉, 그녀는 영원한 패배자!
영혼에 각인된 그 사실을 알기에 ‘에필로드 프롤로드’는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까딱 잘못하면 단숨에 먹혀버릴 테니까.
그런데 엉뚱하게도, 한무일이 아닌 라그나뢰크에게 당했다!
『마신(魔神)』
몬스터월드에 제법 많은 ‘살아있는 속옷’보다는 ‘최악의 신’이 모든 방면에서 더 우위에 있다는 건 딱히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진즉 빼앗았으면 되지 않았느냐?
영혼석에 흡수된 라그나뢰크의 영혼이 겪은 온갖 수모는 전부 연극이고 포석이었을까?
이건 또 그렇지 않다.
여태까지는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건들지 못했던 것뿐이다.
영혼석을 그녀가 관리한 건 똑같지만, 엘퍼러의 휘하(麾下)에 있음으로써 그 후광의 보호를 받았으니까.
그 보호가 사라지고 모든 시선이 ‘한무일’에게 쏠려 있을 때가 절호의 기회!
여기까진 마신의 계획대로 됐다.
다만,
“내 앞에 나서지 말았어야 했다.”
“만용이었단 말인가….”
하등생물의 영혼보다 자신이, 마신이 당연히 월등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치명적인 오판이었다.
자존심을 세운다고 해서, 패배했다는 사실이 지워지는 건 아니니까. 정말로 만회하고 싶었다면 정정당당한 승부수를 띄웠어야 했다.
싸움에 무슨 정정당당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패배의 기록을 덮으려면 그 정도 노력과 조건은 필수. 영혼에서부터 ‘나는 이젠 패배자가 아닌 승리자다.’라고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슬슬 정리하도록 하지.”
무일은 ‘쓰러트린 적’에게 일일이 설명해주는 취미가 없다.
라그나뢰크가 방심하지 않더라도 결과는 같았으리라.
그는 영원히 모르겠지만, 무일은 이 영혼의 세계에 처음 발을 내디뎠을 때부터 쭉 ‘마법’을 쓸 수 있었다.
이곳의 관리자는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맞지만, 그녀가 사장이라면 한무일은 주식투자자. 영혼석에 간섭할 수 있는 특수한 위치였다.
하지만 끝까지 숨겼다.
사내들의 육탄공세에 붙잡히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가더발트를 속이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 않고 처음부터 실력 행세에 들어갔다면 아마 영원히 그녀를 찾지 못했으리라!
아무튼, 끝났다.
영혼석의 모든 권한이 한무일에게 귀속됐다.
‘일단은 저 지옥부터.’
방금까지 영혼들을 태워죽일 기세로 부글부글 끓던 용암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고저(高低) 차는커녕 조약돌조차 없는 순백의 대지가 자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한무일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세계가 재구축됐다.
그렇다고 완전한 창조는 아니다. 그는 예술가가 아니니까!
그 대신이랄까?
한무일은 융통성을 발휘할 줄 알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이제, 산 건가?”
“여기는 또 어딜까요?”
무성의하게 창조된 ‘기름진 토양’ 위에 듬성듬성 저층아파트가 심어져(?) 있다.
한무일의 상상력은 딱 여기까지.
아파트 밖에 쌓여있는 목재와 석재, 철재 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친절하게 톱과 망치 등을 놔둔 것만 봐도….
『너희가 알아서 만들어서 써!』
그렇게 말하는 것이리라.
만약,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 이상의 복지도 신경 써줬겠지만, 현재로써는 이게 최선이었다. 그래도 최소한의 치안은 확보해두기로 했다.
경찰 같은 걸 두는 건 아니고….
남자와 여자를 분리해서 수용하는 것이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교도소장은 어떻게 된 거야?”
“다 시끄럽고! 오늘부터 여긴 내 구역이다!”
“얼씨구? 용암에서 허우적거리던 놈이.”
남자들은 벌써 아파트를 놓고 땅따먹기에 들어갔다. 그들은 한무일이 기껏 준비한 목재를 각목으로, 철재는 쇠파이프 대용으로 썼다.
그야말로 동네 양아치!
하느님처럼 위에서 그 광경을 본 무일은 그저 기가 막혔다. 시간만 충분했다면 정신머리를 뜯어고쳤을 텐데!
일단은 참기로 했다.
저들이 여자들을 좀 본받으면 좋으련만….
“이걸 어떻게 다루지?”
“톱질 같은 건 남자들이 하는 일인데.”
“마법이라도 쓸 수 있었더라면….”
내숭을 집어 던진 여자들의 생활력은 무시무시했다.
용암에서 고통받은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태반이었지만, 하나둘 몸을 추스른 후에 최소한의 가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가구라고 해도….
이런 걸 제작해본 경험이 전혀 없고 재료도 단순해서 무척 엉성했다. 하지만 그 재료를 사람 패는 용도로 쓰는 사내들에 비한다면 모범표창 감이었다.
‘나중에 차별을 둬야겠군.’
무일은 마음을 굳혔다.
여자를 편애하거나 우대할 마음은 없었지만,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주면 조금이라도 더 잘해주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 아닌가?
이걸로 영혼석 내부정리는 끝났다.
배신과 통수의 난세(亂世)가 짧은 시간에 종결되고 평화가 찾아왔다!
물론, 모두에게 찾아온 건 아니었다.
“자, 잠깐-!”
“일단은 좀 맞자. 변명은 그 뒤에.”
“우리를 가지고 놀았겠다!
차별하지 않고 ‘남성 구역’에 던져진 ‘최악의 마신’ 라그나뢰크의 처지는 ‘최악’이란 표현으로도 부족했다.
그가 잠깐이나마 관리자였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들어서 알고 있다.
용암에서 허우적거리는 자신들을 한껏 비웃던 기분 나쁜 목소리! 잊으려고 해도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경험이 쉽게 잊힐 리 없다.
하물며 1시간도 안 된 방금!
분노로 말할 것 같으면 최고조인 상태였다.
“어디까지나 실험-, 아니, 연극이었다! 나와 함께 영광을 누릴 강력한 영혼을 뽑기 위한 시련을 주기 위해-, 크억!”
“죽어라!”
“밟아! 때려! 안 죽으니 인정사정 봐주지 말자!”
유치한 땅따먹기 중이던 사내들도 이 순간만큼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마신 라그나뢰크를 처단했다.
남자들에게 ‘공동의 적’이란 공감대를 끌어내어 결속시켰다는 점에서, 이 마신에게 후한 점수를 줘도 괜찮을지도…?
그렇다면 ‘최초의 관리자’는 어떻게 됐을까?
천상(天上)에서 지하(地下)로 추락한 ‘에필로드 프롤로드’도 차츰 제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예쁜 여자의 젖가슴을 노리는….
하지만 과거하고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꺅?! 어딜 만져!”
조건반사처럼 날아온 싸대기에 볼기짝을 허용한 여인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다가 쓰러졌다.
얼마나 강하게 후려쳤는지 뇌가 울릴 지경!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젖가슴을 노려보지만, 역시나 ‘찰싹!’이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실패로 돌아갔다.
삶의 낙을 상실한 그녀는 망연자실해 했다.
‘쌤통이다.’
‘흥! 앞으로는 어림도 없지!’
‘하지만 무일 님이 달라고 하시면…. 어머!’
영혼석은 그렇게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 결과를 만들어낸 한무일은 영혼석 밖의 현실과 대화할 방법을 모색 중이었다.
하지만 처음 생각처럼 그 일은 쉽지 않았다.
촉매(觸媒)로 쓰일 영혼은 넘쳐났지만, 촉매로 발현될 마법을 점화(點火)해줄 매개체가 없었던 탓!
그 매개체란 마법사를 뜻한다.
그러나 영혼석은 ‘한무일의 육체’에 들러붙어 있긴 해도 이전처럼 귀속되어 있진 않았다.
이게 문제였다.
‘능력이 한정된 이상, 일단은 밖의 상황부터 알아보는 게 급선무겠지.’
무일은 영혼석을 통해 현실의 일면을 보았다.
그 시야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지만, 지구멸망이 시작된다면 이곳에서부터 시작될 테니 굳이 ‘지구 전체’를 볼 필요는 없다.
한유일의 이마.
이곳보다 더 상황을 파악하기 좋은 ‘사령탑’도 없으리라.
하지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모르는 편이 나을 때도 있는데, 어쩌면 지금이 그 순간일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한창 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흡혈귀 왕. 그대에게 새로운 삶을 약속합니다.)
(...그 조건은?)
(이마의 보석을 넘기십시오. 그것만으로 당신은 부귀영화를 누리게 될 겁니다. 지구를 떠나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지요.)
(새로운 세계라….)
(지구인들이 슈퍼월드라고 지칭한 세계에서, 당신을 막을 수 있는 초능력자는 없습니다. 모든 걸 뜻대로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유일이 대화를 나누는 상대는 놀랍게도 인간이 아니었다.
조그만 벌레.
개구리가 좋아하는 ‘살아있는 벌레’는 아니었다. 그리고 한두 푼의 싸구려 몸값은 더욱 아니었는데,
『모짜리나 바글버글』
그 안에 탑재된 초소형 스피커를 통해 말하고 있었다.
무일은 그 존재를 어렵지 않게 추측해냈다.
【판타이탄 / 7종 특수】
하지만 인류에게 우호적이었던 ‘엑시리얼 온드미온’은 아니었다. 유키나 미나미의 수호자가 한무일의 완전한 죽음을 바랄 리 없기 때문이다.
이 영혼석이 사라지면?
이번에야말로 완벽한 죽음에 이를 것이다.
(믿기 힘든데….)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 기억해 주시길. 우리가 아쉬워서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절대 아니란 사실을.)
(......)
(현명한 판단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흡혈귀 왕이여.)
한유일은 생각에 잠겼다.
그런 그를, 판타이탄은 보채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더는 ‘용사의 검’ 계약자도 아닌 흡혈귀 따위를 경계할 필요는 없지만, 마신 위그드라실은 완벽한 승리를 원했다.
흡혈귀 왕을 소멸시킬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문팽이의 영토에서 암살은 무리.
그러니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보내버리자는 계획을 짰다.
(혼자 있게 해다오.)
(알겠습니다. 다만, 흡혈귀 왕이여. 오래 기다려줄 수 없다는 걸 기억해두십시오. 그리고 왕께서 무슨 생각을 품든 결과는 같습니다.)
(...혼자 있게 해줬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판타이탄이 조종하는 ‘모짜리나 바글버글’은 신속하게 멀어졌다.
한유일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하지만 난감한 걸로 따지면 한무일도 만만치 않았다.
“이거 큰일이군.”
잠깐이라도 효과적으로, 현실에 반영할 수 있는 마법은 없다시피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길 몇 차례.
한무일이 방법을 찾아내기에 앞서, 한유일이 선택을 마쳤다.
영혼석을 포기하던가!
지구와 사이좋게 끝장나던가!
“이리로.”
“네. 주인님.”
역시! ‘하렘의 왕’을 추구하는 자답다고 할까?
한유일은 쉬지 않고 흡혈하고 또 흡혈했다. 선지혜 등이 ‘저것이 미쳤나?’라는 시선으로 노려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피를 마셨다.
< [63화-3] 영혼의 전장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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