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263화 (263/287)

< [63화-2] 영혼의 전장 >

‘주도권을 얻어야 해.’

이 영혼의 세계는 무일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하지만 억압받지도 못한다.

그 증거가 가더발트의 대응.

이렇게 번거로운 싸움을 굳이 할 이유가 없다. 다른 수감자들처럼 쇠고랑을 채우고 독방에 가둬버리면 간단히 끝날 문제다.

그렇지 않은 건?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다.

“당신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중검(重劍)을 쥔 홍길동이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희망이라?

물론, 현재는 길이 안 보인다. 이미 그는 죽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뚜렷한 계획이나 방법은 일절 없다.

이대로 영혼석 안에서 세계 멸망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이다.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그렇다고 해서,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놔두고 포기하는 건 한무일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본다.

그 뒤에 실망해도 늦지 않다. 아니, 실망만 하고 다시 방법을 찾아볼 것이다. 이 목숨이 완전히 다할 때까지….

아! 이미 죽었나?

그렇다면 영원한 안식에 들기 전까지.

“네놈!”

“타하앗!”

“죽어!”

긴말 없이 덤벼든 자들은 슈퍼월드의 초능력자.

그들의 움직임은 군더더기가 많았다. 어린애에게 흉흉한 무기를 쥐여준 것처럼 위태롭고 어설펐다.

그야 생전에는 쭉 초능력으로 모든 걸 해결해왔으니 이건 어쩔 수 없으리라.

하지만 홍길동보다 이들이 더 매서웠다.

기술이나 기교 없이 막 휘두르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위력이 살아있었다.

『슈퍼월드 대표』

국가원수는 아니지만, 서세진을 포함한 그들은 슈퍼월드의 주축인 ‘공격대’의 리더 혹은 간부들이었다.

그들의 책임감이 얕을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망연자실해 하는 자들도 물론 있었지만, 대부분은 ‘가진 것’이 아까워서라도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그중에서도 이들 셋은 유독 그런 마음이 강했다.

서세진, 엘빈, 신철호.

사랑하는 여자가 버젓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남자들은 강했다. 엘퍼러의 노예로 전락했음을 깨닫고 절망하긴 했지만,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것이 영혼인가!’

말은 안 했지만, 무일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움직임이 어설픈 그들은 그에게 무작정 덤벼들었다. 당연히 얻어맞고 나뒹굴었으며, 심할 경우에는 눈이 뒤집히며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달랐다.

다시 일어서지 못했던 다른 영혼들과 달리, 그들은 좀비처럼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재차 그에게 달려들었다.

『죽지 않는 자』

무일은 괴수보다 상대하기 버겁다고 느꼈다.

심지어 ‘피로’마저….

‘가더발트의 노림수가 바로 이거겠지.’

다시 살아나서 사랑하는 여자 곁에 서고 싶다는 남자의 마음.

절절히 느껴졌다.

쓰러트리기 미안해질 정도로 그들은 처절했다.

“크악!”“컥-!”“비, 빌어먹을...”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무일은 홍길동을 상대하면서 틈틈이 이 초능력자들을 무자비하게 때려눕혔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무일도 여기서 죽어줄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살기 위해서는 이곳의 지배자이자 변절자인 ‘에필로드 프롤로드’부터 쓰러트려야 했다.

현실과 이어진 유일한 통로니까.

“큭!”

그러나 쉽지 않았다.

늘 얻어맞는 게 일인 탱커답게, 고통에도 빠르게 익숙해진 서세진과 신철호가 잘 다루지 못하는 무기를 버리고 맨손으로 달려들기 시작한 탓이다.

그들은 주먹을 쓰지 않았다.

절대로 죽지 않는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활용하여, 온몸을 내던져서 무일의 팔이나 다리를 붙잡는 데 혈안이 됐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있을까!

한 번 붙잡히면 쉽게 때어낼 수 없을 것 같다.

“히히! 폐하. 고생하지 말고 그냥 쉬어.”

“사양하지.”

멀리서 히죽 웃으며 권하는 ‘에필로드 프롤로드’에게, 무일이 해줄 말은 그뿐이었다.

이곳에서 해방해준다고? 자유를 선사한다고?

절대로 그럴 리 없다.

남자에게 관심 없는 그녀지만, 영혼석이 강해지려면 이 남자들도 꼭 필요하다. 그러니 석방이나 부활은 번지르르한 말뿐일 확률이 99.9%.

하지만 무일은 그 부분을 저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미, 본인들도 은연중에 깨다고 있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처절하게 발버둥 치는 것이다.

‘방법을 바꿔야 해.’

이대로는 절대 ‘에필로드 프롤로드’에게 닿질 못한다.

여기서 그녀를 놓치면?

이 영혼의 세계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가더발트가 작정하고 숨어버리면 무일로서는 찾을 방법이 없다.

어찌어찌 찾더라도 세계가 멸망한 후이리라!

“드디어 잡았다!”

“절대로 놓치지 마!”

“홍길동 씨! 지금이오!”

열심히 피한다고 피했지만, 아무리 때리고 눕혀도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나서 덤벼드는 두 인간을 영원히 따돌릴 순 없었다.

거머리처럼 매달린 두 사람의 무게를 감당하며 싸우기란 힘들었다.

결국, 홍길동과 엘빈, ‘코란 돌 인펠리아’의 공격을 허용한 무일은 휘청, 무릎이 살짝 꺾이면서 힘의 균형이 단번에 무너졌다.

“이거나 먹어라!”

“끝이다!”

이곳에서는 그 어떤 치명적인 상처도 단번에 회복된다. 그렇기에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가두는 것뿐!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잡고 늘어지는 두 탱커의 뒤를 따라, 나머지 세 사람도 무일의 남은 팔다리와 허리를 붙잡았다.

어디 그뿐이랴?

정신을 수습하고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자들까지 합세했다.

그것으로….

무일은 꼼짝달싹 못 하게 됐다. 건장한 사내 여럿이 샌드위치 토핑처럼 겹겹이 위에서 내리누르는데 어쩌겠는가?

상황은 그걸로 끝났다.

“히히히! 폐하. 그러게 내 말을 들었-, 어…?”

극적인 승리에 도취해 있던 교도소장 ‘에필로드 프롤로드’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정확히는, 등 뒤에서 파고들어 가슴골 사이로 뚫고 나온 팔을 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누가 이 세계에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단 말인가!

“하찮은 네년의 비위를 맞추는 것도 이젠 끝이다.”

“쿨럭! 라그나뢰크…? 어떻게…?”

그랬다.

엘퍼러의 마기나로크에 죽은 최악의 마신 라그나뢰크.

기사들에게 얻어맞을 정도로 약해빠진 모습만 보여줬던 그는, 애걸복걸해서 간신히 턱걸이로 이번 계획에 가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못 미더운 모습만 보여준 탓에 뒷전으로 밀려났다. 아니, 마신에게 유감이 무척 많은 ‘전(前) 인펠리아 황제’의 견제로 손가락만 빠는 처지였다.

그런데 웬걸?

영혼석 안에서만큼은 전지전능(全知全能)인 절대신을 기습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그녀의 가슴을 정확히 꿰뚫었다.

“신을 우습게 보지 마라. 하등생물.”

“아아…!”

“이 몸의 ‘영혼의 그릇’은 네년과 격이 다르다. 물론, 그 그릇이 텅텅 비어있어서 쭉 문제였지만, 이걸로 조건은 충족됐다.”

라그나뢰크가 가더발트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찼다.

그 즉시, 이 세계에서 쭉 절대신으로 군림해온 여인이 볼썽사납게 앞으로 고꾸라졌다. 너무나 허망하게.

제압된 무일을 제외한 모두가 경악했다.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변화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마신의 오른손 손목을 까닥이자, 땅에서 솟아난 커다란 망치가 교도소장 ‘에필로드 프롤로드’의 가녀린 몸을 짓뭉갰다.

한 번, 두 번, 열 번, 백 번….

처음에는 어떻게든 빠져나오고자 발버둥 치던 그녀의 움직임이 언제부턴가 멈췄다. 그럼에도 망치는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그녀를 죽이고 또 죽였다.

계속!

마신이 멈추라고 하기 전까지 저 고통은 영원히 계속되리라!

이 세계의 관리자가 바뀌었다는 걸 모두가 깨달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크악?!”

“어어?!”

“떠, 떨어진다!”

무일을 찍어 누르고 있던 모두가 비명을 내질렀다.

갑자기 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유감과 함께 한없이 밑으로 떨어진 그들은 반기는 건 펄펄 끓는 용암의 대지! 죽지는 않지만, 고문이나 다름없는 고통에 그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이 고통에서 해방되고 싶다!』

그런 마음뿐이 들지 않았다.

그때, 최악의 마신이 비웃는 어조로 말했다.

“자! 게임을 시작한다.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 싸워라! 죽여라! 저주해라! 증오해라! 그리고 울어라! 하하하!”

용암뿐인 대지로 영혼석 내의 모든 영혼이 던져졌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도 빠짐없이.

그들은 온몸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허우적거리면서도 열심히 용암을 휘저으며 한 곳으로 향했다.

『작은 섬』

사람 한 명이 간신히 쭈그리고 앉을 수 있을 만큼 비좁은 안전지대.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수천에 달하는 영혼이 서로를 밀치고 욕하며 몰려들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가 없었다.

풍덩!

방금까지 ‘관리자’였던 여자의 육체가 그 치열한 용암에 쓰레기처럼 버려졌다.

그리고 그 대열에 합류했다.

미녀의 젖가슴을 좋아하던 절대신 ‘에필로드 프롤로드’라는 인격체는 사라지고, 그저 영혼석 내의 무수히 많은 영혼 중 하나로 전락했다.

그 과정과 광경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마신 라그나뢰크는,

“다시 만났군. 괴물.”

아비규환인 용암지대의 전경이 잘 보이는 언덕 위의 옥좌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강철로 된 고문기구에 매달린 소년이 있었다.

자신을 죽인 흡혈귀.

마신 라그나뢰크는 이 한을 어떻게 풀어야 좋을지 고민 중이었다. 저 밑에서 허우적거리며 울고불고 중인 하등생물과 똑같이 대접할 순 없잖은가?

분노는 최대치였다.

죽음이야 ‘내가 미흡해서 죽었다.’라고 넘어갈 수 있지만, 몸뚱이가 마신 위그드라실의 꼭두각시로 이용되는 굴욕을 당했다.

그것만은 도무지 용서가 안 됐다.

“대단한 악취미군. 마신.”

영혼석에 수용된 영혼을 함부로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규칙이 있다.

하지만 그런 게 없더라도 ‘프롤로그 에필로그’는 영혼들을 저렇게 모질게 대할 심성(心性)은 아니었다.

...심성보다는 무의미하기에 안 한다고 할까?

그런데 이 마신은 단순히 타인의 고통을 보기 위해 이런 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영혼석의 관리자가 지켜야 하는 규칙도, 마신 라그나뢰크가 언급한 그 ‘영혼의 그릇’이란 걸로 무시해버린 게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악취미라…. 일단은 그 건방진 눈알부터 뽑고 다시 얘기하지.”

옥좌에 권태롭게 턱을 기대고 앉은 마신이 말했다.

그 말을 실행할 시종은 없었지만, 세계가 그 의지에 반응했다.

그런데 어째서…?

마신 라그나뢰크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자신의 두 눈을 양손으로 부여잡으며 허우적거리다가 옥좌에서 굴러떨어졌다.

무언가 이상했다.

지난 패배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은 또다시 저 ‘괴물’에게 쓰러져야 한단 말인가!

“이유가 뭐냐! 왜! 관리자는 나일 터인데!”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닌가.”

“당연하다고?”

“삼투압( 滲透壓) 현상이라고 들어봤으려나…. 내 그릇이 더 크단 뜻이다.”

< [63화-2] 영혼의 전장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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