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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262화 (262/287)

< [63화-1] 영혼의 전장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32

[63화] 영혼의 전장

학명: 워페레스(말벌 여황)

서식지: 벌집

특징: 출산에 전념 중일지도….

위험도: 9종 소형

비고: 이동하지 않습니다.

***

엘퍼러 ‘한무일’은 죽었다!

세계 멸망까지 이틀을 앞두고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그럴까?

“여긴…. 영혼석 안이군.”

무일은 주위를 한 번 쓱 훑자마자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필살기 마기나로크를 쓴 직후, 하늘에서부터 쏘아진 암기에 당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놀랍게도 죽음!

단 한 번도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던 영혼석 안에 끌려 들어온 게 그 증거다.

외모는 딱 ‘카르 4세’였던 시절.

어른이라고 부르기 힘든…. 치기 어린 소년으로 돌아갔다. 아마,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시기가 영혼으로 반영된 게 아닐까?

그렇게 추측하고 있을 때였다.

“으흐흐…. 이게 누구야~.”

“환각은 아니겠지?”

“아니다! 마침내 복수의 기회가 온 거다!”

“으하하! 이날을 얼마나 학수고대했던가!”

주위에서 사내들 목소리가 들렸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울프남』

엘퍼러나 그의 추종자의 손에 죽은 수천의 늑대인간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서 이 ‘요정의 황제’에게 유감없는 자가 있을까?

바득바득 이를 갈며, 이 영겁의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왔다.

여긴 미로.

교도소장 ‘에필로드 프롤로드’가 젖가슴 없는 수컷들을, 수감자의 약 90%를 무더기로 처박아둔 초대형 감옥이다. 그래서 이곳은 그야말로 무법지대.

유일한 규칙이라면?

『조용히 할 것!』

이 안에서 시끄럽게 할 수 있는 건 오직 암컷뿐이다. 암컷이 하나도 없긴 하지만...

차별이라고 따지거나 반항하는 즉시, 빛과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독방에 가둬버리니 감히 반항할 수 없다.

이 영혼석 안에서 ‘에필로드 프롤로드’는 절대신.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상황이 썩 좋진 않군.’

그 절대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있다!

엘퍼러는 점점 좁혀지는 포위망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검 한 자루조차 없는 맨몸.

그에 반해, 상대해야 할 적들의 숫자는 끝도 보이지 않았다.

성인 넷이 나란히 설 수 있는 정도의 복도 형식의 미로가 아니었다면 좀 더 위험천만한 상황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무일의 표정은 담담했다.

비록 맨몸이지만, 그에게는 오랜 실전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와라. 한꺼번에.”

“건방진!”

“여긴 우리 구역이다!”

“아직도 지가 살아있는 줄 알아!”

우르르 몰려드는 건장한 사내들을 향해, 소년이 된 무일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겉모습은 이렇지만, 영혼이 외형과 비례할 이유는 없으니!

물론, 그 강함이 압도적인 건 아니다. 그래도 너희와 똑같은 수준이나 격은 아니란 걸 보여줄 만큼은 됐다.

어디 그뿐이랴?

비록, 육체를 잃은 영혼뿐이라서 [예감]을 쓸 수 없지만, 그동안 ‘위기’가 없어서 먹통이었던 [예감] 없이 숱하게 싸워왔다.

이젠 진짜 ‘감’으로 기적을 부르는 경지!

그런 것치고는 맥없이 죽고 말았지만, 영혼이기에 더욱 그 내면의 진가가 드러나고 있었다.

어떻게?

[반격!]

원래는 [예감]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기술이다.

하지만 무일은 그러한 보조 없이 울프남 무더기를 쓰러트리고 있었다. 너무나 간단히. 공격을 피하고 주먹이나 발을 몸통에 먹여준다!

“크아아악~!”

“컥?!”

“말도 안-, 으악!”

있을 수 없는 일이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

현실의 패배는 그러려니 할 수 있다. 압도적인 육체적 전력 차이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여긴?

조금 번거롭긴 해도 엘퍼러가 그렇게 막막한 상대는 절대 아니다.

그런데 보라!

현실이나 영혼이나 걸리는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과는 같았다. 영혼이라서 죽거나 다치진 않지만, 정신적이 충격은 그 이상으로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이건 악몽이야!’

‘어째서! 이럴 순 없어!’

‘또! 또! 진다니!’

‘영원한 패배자란 말인가…!’

망연자실한 얼굴을 한 놈들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전부가 그런 건 아니다.

이곳에서 가만히 허송세월만 보낸 놈들만 있었을 리 없잖은가? 자신을 연마하며 기약 없는 미래를 준비해온 영혼들도 있었다.

그들은 신중했다.

무턱대고 덤벼든 녀석들과 달리, 영혼의 강함이 이곳에서 얼마나 크게 반영되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은 멀리서 관찰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엘퍼러는 여기서도 강했다.

“과연…. 무턱대고 덤비지 않길 잘했군.”

“그나저나 확실한 정보인가?”

“황제를 쓰러트리면 이곳에서 석방해주겠다는 약속이라면 확실해.”

이 ‘영겁의 감옥’의 지배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것도 방금!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지.”

“모든 건 자유를 위해.”

현재는 전부 똑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생전(生前)에는 종족, 민족, 차원, 국가 등이 모두 달랐다.

그런 그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영혼 상태에서는 다 똑같다는 동질감!

이 또한 나름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의 전환은 ‘영혼의 강함’으로 반영됐다.

그렇기에 혼자서 상대해선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저 늑대무리처럼 주먹구구식으로 덤비면 패배만 기다리고 있을 뿐!

이곳의 규칙은 간단하다.

『마음의 강함』

달리 표현하면 ‘영혼의 힘’이다.

이 교도소 지배자가 자신들에게 ‘승리’를 주문한 것도 그러한 까닭이다. 저 패배를 모르는 남자에게 충격을 주기 위하여.

저기, 실의에 빠진 늑대들처럼 정신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현재로 봐서는 그게 쉽지 않아 보였다. 그는 ‘패배’를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자신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쉽진 않겠어.”

“하지만 그래도 해야지.”

“암! 그렇고말고!”

이곳 미로는 좋은 전장이 아니다. 사방에서 덮치기에는 지형적으로 매우 협소한 까닭.

그 요구가 받아들여진 걸까?

빠져나갈 출구가 없기로 악명 높은 미로였는데, 엘퍼러는 몇 걸음 걷지 않고 곧바로 출구를 발견해냈다.

절대로 우연일 리 없다.

그 증거로, 그들도 다른 길을 통해 미로 밖으로 빠져나왔으니까.

교도소장이 없던 출구를 뚫은 게 분명하다. 이 세계는 그녀의 마음대로 얼마든지 재창조될 수 있으니….

배경은 불타는 전장.

사방에 온갖 무기가 널브러져 있다.

“...나를 주시하고 있던 시선은 너희였나.”

무일은 지긋지긋하다는 얼굴로 주위를 쓱 훑었다.

전방위에서 공격받기 좋도록 뻥 뚫린 지형은 대단히 불리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여전히 코빼기를 안 내비치는 가더발트….

현실 상황이 얼마나 개판일지는 모르나, 여기도 만만치 않았다.

포위된 절체절명의 위기!

분명, 이들은 방금까지 상대했던 녀석들과 질이 달랐다.

체력의 한계가 없는 이곳에서는 양보다 질의 우위가 상대적으로 훨씬 상대하기 까다로울 건 자명한 일.

게다가 주먹 한 방에 ‘패배’를 인정할 것 같지도 않다.

“설욕전이랄까….”

전직 기사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대충 ‘땅에 꽂혀 있는 검’ 중에서 하나를 뽑아들었다.

한눈에 봐도 대단한 명검(名劍)!

“우리가 싸우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전직 괴수가 피식 웃으며 되받아쳤다.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 ‘대충 굴러다니는 창’을 주워들었다.

어디 하나 모자란 부분 없는 명창(名槍)!

“죽어버린 황제여! 한판 어울려봅시다!”

호기롭게 달려드는 그들을 상대로, 엘퍼러는 주위에 넘쳐나는 무기를 뽑지 않았다. 보나 마나 싸구려일 게 뻔하니까!

저들처럼 좋은 무기가 나올 거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아마, 한 번 충돌하는 순간에 뚝 부러지면서 큰 낭패를 볼 게 뻔하다.

그러니 이번에도 맨손, 맨다리.

“준비를 많이 했군.”

저들만을 칭하는 게 아니다. 과거의 애정과 충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에필로드 프롤로드’도 포함된다.

아주 신랄한 배신!

참으로 괴수다운 태도였다.

뒤에서 호박씨 까는 것보다는 낫지만, 유쾌하다고는 말 못 한다.

후방에서 찌르기가 매섭게 들어온다. 전혀 눈치 못 챌 만큼 은밀한 건 아니었지만, 피할 방위를 찾을 수 없었다.

맨손으로 막는다는 건 더욱 무리.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지!’

넓은 공터를 봤을 때부터 말이다.

무일은 피하긴커녕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 갑작스러운 이상행동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그들은 침착하게 대응했다.

본인이 무덤을 파겠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변수 따위는 없다.

푹!

역시나, 예리한 창이 무일의 허리에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때부터가 악몽의 시작이었다!

그 창을 꼬나쥔 남자는 엘퍼러의 허리를 양단하진 못했다.

왜냐하면...

“컥-!”

그대로 목이 움켜쥐어진 채 땅 위로 들린 그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을 막는 방패가 되어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다.

기존의 ‘완벽한 회피 후 반격’을 추구하던 무일과는 전혀 다른 방식.

하지만 그 판단은 제법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다.

“우선은 하나.”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여기서 이렇게 노닥거릴 틈이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현실로…!

선지혜를 포함한 여자들의 인내심이 그리 강하지 않음을 무일은 잘 안다. 아직 영혼석이 파괴되지 않은 걸로 보아선 지구 멸망까진 안 간 모양이지만.

그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리라.

이건 [예감] 없이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털썩…!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남자가 쓰러졌다.

물론, 그들은 한 번에 쓰러지지 않고 몇 번이나 덤비고 또 덤볐다. 하지만 ‘완벽한 반격’을 포기한 무일의 적극적인 공세에 맥없이 무너졌다.

기세를 몰아서(?) 계속 패배하기만 했다고 할까!

여긴 영혼의 세계.

얼마나 마음을 굳건하게 먹느냐에 달렸다.

그런 면에서, 늘 최상의 [예감]을 유지하기 위해 정신수양 해온 무일이 유리했다. 저들이 좀 더 이곳에 오래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길어봐야 2, 3개월 차이 아닌가?

이것도 무시 못 할 시간이고 경력인 건 맞다. 하지만 무일은 오랫동안 이 ‘영혼석 내부세계’를 관찰해왔다. 그것도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히히히! 폐하. 이렇게 뵙게 되니 또 묘하네요. 히히!”

그리고 마침내 들려온 주동자의 목소리.

무일이 알던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말투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늘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지금은, 소년의 작은 키로 밑에서 장신의 여인을 올려다보게 됐다는 정도.

“에필로드 프롤로드….”

“소란을 듣고 왔더니 이게 다 무슨 일이래~.”

“......”

“폐하. 지구는 잊고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 게 어떠신지요? 젖가슴 큰 여자들과 호화찬란한 궁전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거야! 히히!”

눈을 가늘게 뜬 무일은 물끄러미 여인의 언행을 살폈다.

그 진지한 표정을 내적 갈등으로 받아들인 에필로드 프롤로드는 잠자코 ‘옛 주인’이 답하길 기다렸다.

무일은 시선을 살짝 틀었다.

홍길동, 서세진, 엘빈, 신철호, 코란 돌 인펠리아….

생전에 이름 좀 날렸던 사내들이 호위하듯 그녀 뒤편에 서 있다.

“취향이 남성으로 바뀐 건가, 가더발트?”

“그 비루한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 약해빠진 카르 4세!”

“오랜만에 들으니 감회가 새로운걸.”

위태롭긴 했어도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그때가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억지로 욱여넣으며 무일은 도약했다.

우선은….

이 ‘거짓된 세계’부터 해결해야 없던 길도 보일 것 같았다.

< [63화-1] 영혼의 전장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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