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4] 세계의 나무 >
몬스터월드에서는 ‘미친 정령 왕’으로 통했던 8종 괴수 올란드.
대지의 식물을 지배하는 마신 위그드라실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고, 영토확장 하려는 나라들과 충돌도 대단히 빈번했던 정령이다.
아름답고 고귀한 마녀 여럿을 생매장시킨 이야기는 이미 전설이고, 바다를 주 무대로 삼는 문팽이와 미묘한 동맹관계로 또 유명하다.
말은 동맹인데….
마신과 싸울 때만 협력할 뿐이다.
그래도 ‘전부 아니면 전무’를 지향하는 괴수치고는 눈부신 사고전환이랄까?
【올란드 / 8종 특수】
일단은 ‘8종’으로 되어있다.
배틀씹과 마찬가지로 100년 전에 잠깐 활동한 걸 제외하고는 잠잠했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태평양 한복판 ‘하와이 열도’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대지의 정령’은 활화산, 휴화산 할 것 없이 전부 찰흙처럼 주물렀다.
현재는 열도가 아닌 거대한 하나의 섬.
그 전체 면적은 대한민국의 5배쯤 한다.
그런 기행을 보이긴 했지만, 태평양 한가운데의 문제를 논하기에는 지구인들의 처지가 썩 넉넉하지 못했다.
도시 코앞도 못 나가는 상황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올란드는 ‘잘 모르는 8종’으로 쭉 남았다. 끽해야 인공위성으로 조금씩 정보를 모아온 정도.
“...대지의 왕자여! 어째서 이곳에 온 건가? 여긴 나의 영토다!”
문팽이의 통역을 맡은 ‘판판 소’가 일갈했다.
저렇게 감정주입까지 해서 명연기 할 필요는 없는데….
이 긴박한 상황에서 그런 사소한 문제를 걸고 넘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연기가 무척 뛰어나기도 했고.
판판 소를 문팽이의 화신으로 착각할 만큼.
“앞만 보는 악우여. 바다 위는 전부 내 땅이란 사고방식은 저기서나 여기서나 똑같구나!”
“...짐의 이름은, 까루나 막찌몬쓰. 더 무얼 말하리!”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이 달팽이를 위한 것일까?
계약자 선지혜와 마음이 통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멈췄다.
앞에 산이 막든 도시가 있든, 가던 길을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는 왕 ‘까루나 막찌몬쓰’는, 마음에 드는 계약자를 위해 고집을 굽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안 하던 짓을 하려니 답답할 수밖에!
“닷새 뒤에는 말리지 않겠다.”
“...뭐라?”
“나의 보석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다. 질긴 악우 ‘까루나 막찌몬쓰’여. 그 뒤에는 네 마음대로 하라. 관여하지 않을 테니.”
사실, 지리적으로 한국은 ‘대지의 정령’에게 불리했다.
삼면(三面)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니까.
서울, 인천, 파주, 개성, 부산, 목포 등의 도시가 있는 땅은 장식인 줄 아느냐고 따질지도 모르지만….
그게 땅인가?
인간의 관점에서는 한국도 무시 못 할 면적이지만, 문팽이 같은 ‘괴수 중의 괴수’들에게는 식후 간식거리도 안 되는 코딱지.
여긴 문팽이의 영역이었다.
흙은 다루는 올란드에게는 대단히 불리하다.
다만,
“진짜-!”
인질이 있었다.
선지혜가 분통을 터트리며 신경질을 냈지만, 달리 도리가 없었다.
목포가 통째로 올란드에게 점령당했으니까!
배틀씹이 일본 해안 가까이 접근하면서, 일본인들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하긴 했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대치가 계속될 것 같았다.
‘큰일이네! 야! 무일!’
‘......’
‘있으면 말해라! 다 죽게 생겼다!’
‘......’
‘진짜 죽은 거냐?’
‘......’
역시나 반응이 없다.
일단, 모든 문제의 발단이자 원흉인 한유일은 격리조치 됐다.
다시 [혼돈]을 먹여보자는 얘기도 잠깐 나왔지만, 그런다고 죽은 영혼이 되살아나진 않는다는 아쿠버스의 반론에 파묻혔다.
이 소식을 접한 괴수대응연맹.
당연히 초비상이 걸렸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연맹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나라의 정상들이 느끼는 마음이 같았다.
『다 끝났다!』
...라고. 누군가 농담 아닌 농담으로 말했다.
인류멸망까지 5일 남았다고.
설상가상으로 어디서 정보가 새나갔는지 민간인들에게까지 전파됐다. 매우 상세하게. 당연하게도 도시와 나라가 공황에 빠졌다.
앞으로 내가 살 날이 닷새뿐이라면?
사람들이 보일 반응은 크게 3가지로 나뉘게 된다.
『폭주』
평소에 할 수 없었던 일을 전부 하기.
예를 들어, 남자들은 나라의 무서운 법을 무시하고 여자들에게 돌진했다. 속된 말로, 예쁜 여자나 따먹고 죽겠다는 의도!
도시 곳곳에서 강간범이 등장했다.
그걸 막아야 하는 헌병대마저 흔들리면서 도시의 혼란이 가속화됐다. 이대로라면 닷새도 못 버티고 자멸할 것 같았다.
『발악』
어떻게든 혼자라도 살아보겠다는 심보들도 있었다.
주로, 수렵활동에 자신 있는 사냥꾼들이 여기에 해당했다.
그들은, 다리를 활짝 벌리며 살려달라는 미녀들 몇몇을 품에 안고, 지옥으로 변할 닷새 뒤를 대비하기 시작했다.
도시를 지켜야 할 사냥꾼들이 자기 살길을 도모하기 시작했으니….
닷새는커녕 하루도 안 지나서 도시의 치안이 마비됐다.
『포기』
마지막 반응은 그냥 넋 놓고 있는 부류였다. 혹은, 무릎 꿇고 ‘미지의 존재’를 향해 구해달라고 기도하거나.
가장 대책 없고 무력한 모습이지만, 현재로써는 가장 도움이 됐다.
적어도 인류 멸망을 부추기진 않으니까.
물론, 모두가 절망에만 휩싸이며 남은 닷새를 새고 있는 건 아니었다.
“이 캡틴세븐이 시민 여러분들을 지켜드리겠습니다!”
“오오!”
“캡틴세븐! 사랑해요!”
“캡틴! 캡틴! 캡틴!”
구국의 스타로 떠오른 미국의 에쏘스트 ‘캡틴세븐’이 그 대표적인 예.
그는 ‘엘퍼러의 유지(維持)를 잇는다.’는 명패를 내걸고 발 빠르게 국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우며 혼란을 최소화했다.
호응은 대단히 좋았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찾는 건 누구나 같은 마음이니까.
하지만….
국민들에게 ‘괜찮습니다. 제가 있습니다.’라고 말한 캡틴세븐. 그는 누구에게 기댄단 말인가?
조국의 대통령 ‘조지 휴스턴’의 간곡한 부탁대로 국민을 선동하긴 했다.
그러나,
‘답이 안 보여.’
엄밀히 따지면 캡틴세븐의 능력은 ‘7급 사냥꾼’이다.
대다수 에쏘스트가 여전히 ‘6급’에 머물고 있는 것에 비한다면, 엇나간 ‘다윙 밀리언’ 다음으로 최고의 인재라 할 수 있지만….
엘퍼러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도 불렸던 까닭이다.
『10급 사냥꾼』
여전히 ‘8급 사냥꾼’도 미개척영역으로 남아있는데, 혼자 저 멀리! 안드로메다(이계)까지 우주정복 중이던 인간.
캡틴세븐에게 있어서, 엘퍼러는 인간이 아닌 신(神)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보다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신을 죽일 수 있는 적』
지구에 희망은 없다.
이미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막연한 ‘미지의 적’에 대한 두려움이나 환상도 아니다. 이미 몬스터월드에 ‘마신’이란 진짜 괴물이 있음을 보고받았으니까.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이런 마음은 캡틴세븐만 겪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얼떨결에 다시, 다시 남아메리카의 영웅으로 부상한 ‘인디오 후예’ 가휜.
엘퍼러의 추종자였던 8종 괴수 ‘사요나락’의 도움으로 부활하여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프로사냥꾼도 비슷한 처지였다.
“가휜! 연설할 시간이오!”
“...나에게 보챌 여력을 대책 마련에 쏟아부어라.”
“이게 대책 마련이오!”
“헛소리! 당신이 수상(首相)이란 것이 조국 브라헨티나의 불행이다! 대한민국 문제 이전에, 반란군 사령관 ‘그레이트 아마존’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
“그, 그 사안은 그대에게 위임한 걸로 아는….”
“이런 한심한!”
가휜이 생각하기에, 이 남아메리카 대륙에는 똥오줌 못 가리는 남녀가 하나씩 있다. 그 지위가 낮지 않다는 게 더욱더 이 대륙의 불운이고.
브라헨티나 국무총리, 코펠 브라질리아.
브라헨티나 계약자 대표, 그레이트 아마존.
부모를 잘 둔 덕에 탄탄대로를 걸어 브라헨티나의 최고권력을 거머쥔 남자나, 마찬가지로 잘난 부모의 유전자 덕분에 고위계약자가 된 여자나….
자질에 문제가 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데, 이들은 허영심만 쌓인 것 같았다.
‘내가 남아메리카의 희망이라니?’
가휜은 기가 막혔다. 자화자찬이나 과대망상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이 그랬다.
자신은 지구의 인류를 향해 ‘무한한 박애주의’로 똘똘 뭉친 엘퍼러처럼 그렇게 대단한 인간이나 그릇이 못 된다.
인디오 민족의 미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자신이 대륙의 희망?
정말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다.
억지로 내몰려서 어울리지 않는 연설도 하고 있지만, 이 지구에 도망칠 곳이 있다면 진즉 떠났을 것이다.
물경 백(百)에 달하는 처와 자식들을 이끌고.
자신의 시신으로 장난친 조국 때문에 본의 아니게 ‘하렘의 길’을 걷게 된 ‘인디오 영웅’ 가휜은 카메라를 쳐다보며 외쳤다.
“이 인디오 후예, 가휜이 물리치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같은 시간.
유럽에서도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이 대륙에서는 ‘거짓 된 희망’으로 국민을 안심시키는 방법조차 안 통했다. 국민의식이 전혀 다르다고 할까?
국민을 보호하는 영웅의 신용이 그만큼 낮았다.
『나폴레옹 환생, 루이스 보나파르트』
『베를린 성검, 그람』
그 대표적인 인물로 이 두 사람을 들 수 있다.
각각 프랑스와 독일 에쏘스트.
고대부터 역사적으로 친하지 않았던 프랑스와 독일. 이 두 나라의 ‘현대 영웅’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좋지 않을 때의 만남이군.”
“흠. 영국 왕은 안 오는 건가?”
“모임에 참석할 정신이 아니지. 왕태자였을 때와 달리, 지금은 우리처럼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 거다.”
“그것도 그렇군.”
문란하다.
언제부터인가 ‘15살 성인식 이전에 동정을 뗀 사내’가 되는 것이 자랑으로, 문화로 자리매김해버린 유럽의 기준으로는 평균이랄까?
하지만 에쏘드 용사로서는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남자가 이렇게 ‘밀회’를 하는 이유?
『정기회의』
루이스 보나파르트와 그람의 뒤편에는 반라의 미녀가 한 명씩 서 있었다.
이 만남의 목적은 2가지.
하나는 자신이 수집한 최고의 여자를 자랑하는 자리다. 에쏘스트의 뱀페스트 성향이 묻어난 행동…. 변명이고! 원래 그런 인간들.
또 하나는 ‘나폴레옹 환생 vs 베를린 성검’의 대결을 그럴싸하게 그려내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뒤에서 경쟁국과 손발을 맞추는 사기극!
여기에 영국의 신왕(新王) 겸 에쏘드 계약자인 ‘카이서스 하이로드’가 더해지면 ‘유럽 3강의 삼자회담’이 완성된다.
그들의 인기비결.
문란한 생활태도에도 불구하고 늘 좋은 성과를 내올 수 있었던 이유다. 짜고 싸우는데 그 어떤 감동적인 상황을 못 만들까!
셋이라서 더욱 좋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패턴을 안 만들어도 되니까.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긴 한데….”
“괜한 걱정이군.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우리는 살 수 있다. 예쁜 년들도 많으니 심심하진 않을 터.”
그들은 에쏘스트.
복지가 불안해지면 점차 미모가 퇴색되어 사그라질 계약자와 달리, 세상이 괴수 천국으로 변해도 살아남을 능력이 있었다.
무한한 체력! 무한한 생명!
여기에 더해, 여자들을 마음껏 희롱할 수 있는 지배력마저 겸비했다. 그들에게 하렘이란 머나먼 얘기가 아니라 일상.
미녀들에게 둘러싸인 엘퍼러를 부러워하지 않는 몇 안 되는 인간이다.
역으로 동정한달까?
인생 참 고달프게 산다고.
“하지만 수도와 전기가 끊기는 건 좀 싫은데….”
“좋게 생각하자고. 주변 눈치 안 보고 계집들을 마음껏 굴릴 수 있으니.”
“아! 그건 생각 못 했네.”
...세상은 그렇게 점점 막장으로 치달았다.
단 한 사람의 죽음으로.
너무나 많은 걸 짊어졌던 남자의 공백은 그만큼 컸다.
< [62화-4] 세계의 나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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